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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
파노라마
주제 :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2:12).
요엘 선지자 당시 전대미문의 메뚜기 재앙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발등에 떨어진 문제(問題)만을 보았지만, 선지자는 직면한 재앙 너머로 더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원시(遠視)하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 요엘서입니다.
① 그러므로 요엘서의 핵심적인 낱말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를 파악하는 것이 요엘서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전체가 세 장에 불과한 요엘서에 모두 다섯 번(1:15, 2:1, 11, 31, 3:14)이나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란 어떤 날인가? 요엘서는 짧은 선지서지만 해석상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파처럼 “여호와의 날”이 몇 겹으로 겹쳐져있기 때문입니다.
㉠ 발등에 떨어진 “여호와의 날”은,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1:4) 한 메뚜기 재앙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란 당면한 메뚜기 재앙만을 보고 있는 근시안(近視眼)이 아닙니다.
㉡ “그 너머로, “열국(列國)들로 그들을 관할(管轄)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2:17, 19)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적의 침략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가까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2:13) 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② 그런데 요엘서가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2:31) 한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리라”(눅 21:35) 하신 최후심판의 날입니다.
㉠ 이를 내다보았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3:14) 하고 최후심판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엘서에는 근경(近景), 중경(中景), 원경(遠景)의 세 장면이 겹쳐있습니다.
삼중(三重)적인 적용
③ 이를 내다보는 선지자는,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1:15) 하고 경고합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14) 합니다.
㉠ 2:1절에서도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이 삼중(三重)으로 임하게 되는 것은 요엘 당시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날도 여호와의 날인데,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4) 하고 더 큰 여호와의 날이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요엘서가 시공을 초월하여 선포하고 있는 핵심적인 경고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 지어다”(2:12-13) 하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요엘서의 구조
④ 요엘서의 전체 구조(構造)도 다른 선지서와 마찬가지로 “절망과 소망, 문제와 해답”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 먼저 1:1-2:17절까지는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1:15) 하고 경고합니다.
㉮ 그런 후에 2:18-32절에서는,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2:1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2:28) 하고, 긍휼히 여기심과 은혜의 단비가 부어집니다.
㉡ 그런데 또다시 3:1-16절 상반 절까지는,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 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 지어다”(3:10) 하고 심판의 경고입니다.
㉯ 그러나 요엘서는 심판과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3:16상, 21) 하고 위로와 회복하여 주시겠다는 소망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두 가지 양상으로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구원(救援)과, 멸망”(滅亡)입니다. 노아 당시에 임한 “여호와의 날”, 곧 홍수심판이 불신자들에게는 멸망의 날이었으나,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구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최후로 임할 “여호와의 날”도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으로 임할 것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몸의 구속을 얻게 되는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더욱 넘치는 은혜
⑤ 그러므로 요엘서에는 심판의 경고가 두려운 만큼, 그보다 더욱 축복과, 구원과, 은혜가 풍성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다”(2:21) 하고 말씀합니다.
㉠ 이 “큰 일”이 1차적으로는,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2:23) 하는 말씀입니다.
⑥ 그런데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다”는 말씀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성경 상 하나님이 행해주신 “큰 일”, 그리하여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어다”(2:21) 하는 “큰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 첫째로 행하신 “큰 일”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대속 제물로 내어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32),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온다”(3:18)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도 그의 찬가에서,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다”(눅 1:49) 한 것입니다.
㉡ 둘째로 행해주신 “큰 일”은,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2:28) 하신 성령강림(행 2:11)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베드로는 소리를 높여,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행 2:14-15) 하고 2:28절을 인용하여 이 예언에 대한 성취임을 증거했습니다. 저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이것이 여호와의 큰일입니다.
㉢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하는 말씀을 예사로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체가 됨이니라”(창 6:3)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던 것이 회복될 것임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경우로 제한적(制限的)이었습니다.
㉣ 그런데 “만민”(萬民), 즉 “자녀, 늙은이, 젊은이”들에게 부어주시는 날이 이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2:28-29), 즉 가장 비천한 노예들에게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⑦ 이런 날이 이르게 되면 모든 벽이 무너지고, 아무런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2:32)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느냐 거부하느냐, 즉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별만이 있을 뿐이라 말씀합니다.
㉠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실 구속사역과, “성령 강림”이라는 두 가지 큰일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죽으심)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을 전해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상경 상 이 두 가지 사건보다 큰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해주신 두 가지 큰 일
⑧ 요엘서를 요약하면,
㉠ 1장에 묘사된 광경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일어난 메뚜기 재앙에 대한 묘사입니다.
㉡ 그런데, 2장에 묘사된 광경(1-11)은 계속 메뚜기의 재앙을 다루고 있는지 아니면 외적(外敵)의 침략을 다루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메뚜기 떼가 엄습하는 그림과, 북방으로부터 메뚜기 떼처럼 침략해 오는 군대의 두 그림이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계시의 복합성(複合性)이라고 말합니다.
㉢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재앙이란 그것이 홍수이든지, 불이든지, 메뚜기이든지, 적군이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최후심판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1장의 메뚜기 재앙이, 2장에서는 외적(外敵)의 침입으로, 3장에서는 최후(最後)의 심판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요엘서의 구조(構造)입니다.
⑨ 그러므로 3장에 묘사된 광경들은 종말(終末)에 있을 장면들입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3:14) 하는 말씀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하신 말씀으로 인도해줍니다.
㉠ 우리가 명심해야할 점은 “여호와의 날”이란 다가오고 있는 “한 날”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날(日)들이 모여 달(月)이 되고, 해(年)가 되듯이, 매일 매일이 “여호와의 날”이라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점(點)들이 모여서 선(線)이 되기 때문입니다. 메뚜기의 재앙이 전국을 휩쓸던 날도 “여호와의 날”이었습니다.
㉡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불사르던 날도 분명 여호와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쓰나미가 덮치던 날도 여호와의 날이요, 미국의 국제무역센터가 주저앉던 날도 여호와의 날이요, 성수대교가 붕괴되던 날도 여호와의 날이요, 당신이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도 “여호와의 날”이라는 고백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 다가오고 있는 “크고 심히 두려운 여호와의 한 날”(2:11)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매일 매일이 여호와의 날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
⑩ 요엘 선지자가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2:28) 하고, “그 후”라 한 말씀을, 베드로는 “말세에”(행 2:16) 하고, 재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던 “여호와의 날”이 이미 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세”(末世)란 계시사(啓示史)적인 말세, 즉 마지막 계시가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구약의 계시를 포괄적으로 성취하신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말세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바로 우리는 “말세의 고통 하는 때, 즉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딤후 3:1-4) “고통하는 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요엘서의 중심부는,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 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2:12-13) 하는 말씀입니다.
㉢ 그러므로 요엘서는 현대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이제라도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구원을 얻으려니와 끝내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된다” 하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 받을만한 기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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