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판을 바꾸는 기술 — 선호순위투표제(STV·RCV)라는 도구
곽노현 강연 + AI Claude Sonnet 5.0 요약
## 起 — 다시, 전태일기념관
2026년 4월 24일, 청계천 곁 전태일기념관 교육실. 20명 남짓의 시민이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의 두 시간짜리 강연을 듣고 있었다. 제목은 「국회의 헌법·선거법 셀프입법 특권,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강의의 구호는 단순했다. "대리운전 권력을 주인이 되찾자."
그날 강연을 취재하며 필자가 던졌던 질문 하나를 다시 꺼내 본다. 게임의 룰은 선수가 정하는가, 주인이 정하는가. 곽노현의 답은 명료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선수, 즉 국회의원이 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는 '셀프 입법 특권'이라는, 학계 논문에서도 찾기 힘든 조어로 명명했다.
## 承 — 지독한 백성, 낡은 불판
한국 유권자는 지독한 사람들이다. 지난 40년 동안 대통령을 5년마다 갈아치웠고, 국회의원 물갈이율은 3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직접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낸 나라다. 그런데도 정치판은 바뀌지 않았다. 노회찬의 비유대로, 낡은 불판 위에 고기 종류만 계속 바꿔 올린 셈이다. 고기는 늘 새로웠지만 불판이 그대로니 맛은 매번 질겼다.
곽노현의 진단은 이렇다. 국회의원의 권리·의무, 정당의 권리·의무, 국회의 권한, 심지어 헌법 개정 절차까지 — 이 모든 것을 국회의원 자신이 정한다. 대리인이 자기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을 스스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대리 금지의 원칙'이 입법 영역에서만 통째로 무너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권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 선거법이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당선" — 라는 하나의 룰에 세대를 거쳐 길들여진 유권자들은, 2018년 서울시의회 100석 중 97석 싹쓸이나 2022년의 정반대 싹쓸이 같은 극단적 결과를 반복해서 목격해 왔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견제 없는 승자독식"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이 대목에서 곽노현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강연의 후반부를 채운 순위투표제(RCV)와 단기이양식 투표제(STV)였다. 다만 이 두 제도를 정확히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강연 내용을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완해 보려 한다.
## 轉 — 선호순위투표제란 정확히 무엇인가
**하나의 원리, 두 개의 얼굴**
선호순위투표제의 원리는 단순하다. 유권자는 후보에게 1순위, 2순위, 3순위 식으로 순위를 매긴다. 그런데 이 원리가 적용되는 방식은 정원이 몇 명이냐에 따라 완전히 갈라진다.
- **정원이 1명일 때 → RCV(즉석결선투표, IRV)**. 과반수를 얻은 후보가 없으면 최하위 후보를 탈락시키고 그 표를 차순위 후보에게 넘기는 과정을 반복해, 결국 50%+1표를 넘는 후보를 가려낸다. 시장, 대통령처럼 한 자리를 놓고 다투는 선거에 쓴다.
- **정원이 여러 명일 때 → STV(단기이양식 투표)**. 당선 확정선(쿼터)은 "득표수 ÷ (정원+1) + 1"이라는 드룹 쿼터(Droop Quota) 공식으로 정해진다. 4인 선거구라면 20%+1표, 5인 선거구라면 약 16.7%+1표다. 쿼터를 넘긴 후보의 잉여표는 비례 이양되고, 최하위 탈락자의 표는 전량 이양된다. 이 과정을 정원이 채워질 때까지 반복하면, 결과는 거의 정확한 비례대표제에 수렴한다. 다만 유권자는 정당 명부가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기표하므로 '투표의 손맛'이 살아 있다.
즉 RCV는 IRV의 다른 이름이고, STV는 그것을 다인 선거구로 확장한 버전이다. "정원 1명일 때의 STV = IRV(RCV)"라는 수학적 관계로 이해하면 정확하다. 하나는 **과반수의 정당성**을 겨냥하고, 다른 하나는 **의회 전체의 비례성**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같은 투표용지 기술이지만 목적이 다른 두 제도인 셈이다.
**뉴욕시 사례 — 정확히는 STV가 아니라 RCV**
곽노현이 강연에서 소개한 뉴욕시장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의 사례는, 엄밀히는 STV가 아니라 RCV의 성공 사례다. 뉴욕시장은 한 명만 뽑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2025년 뉴욕시 민주당 경선에서 맘다니는 3라운드 만에 앤드루 쿠오모를 56% 대 44%로 꺾고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전 경선에서는 후보 13명이 5순위까지 기표한 표가 8차례 개표를 거쳐 50.6%의 당선자를 가려낸 바 있다. 사표 없이 표가 끝까지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이 순위투표제 전체가 공유하는 매력이다.
**밴쿠버의 91%, 그리고 그 이후**
STV의 진짜 무대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시민의회다. 1996년 선거에서 41% 득표한 BC자유당이 소선거구제의 농간으로 오히려 의석에서 패배하는 불합리를 겪은 뒤, BC주는 남녀·지역·연령을 안배해 무작위 추첨한 160명의 시민 대표로 시민의회를 구성했다. 11개월, 200시간 이상의 학습과 토론 끝에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문가 다수가 예상했던 독일식 혼합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STV였다. 찬성 91%. 곽노현의 말대로 "독재사회가 아닌 이상 90%는 사실상 100%에 가까운 합의"였다.
다만 여기서 강연이 다루지 않은 뒷이야기를 보태고 싶다. 이 91%의 권고안은 곧바로 시행되지 못했다. BC주는 이를 주민투표에 부쳤는데, 2005년 1차 투표에서 57.7%의 찬성을 얻고도 "60% 이상 + 79개 선거구의 60% 이상에서 과반"이라는 이중 문턱을 넘지 못해 부결되었고, 2009년 재투표에서는 찬성률이 39%까지 떨어지며 완전히 무산되었다. 결국 BC주는 지금도 소선거구제를 쓰고 있다.
이 좌절은 곽노현의 삼종 혼합 민주정 구상에 오히려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시민의회의 숙의된 결론(91%)과 일반 유권자의 최종 승인(57.7%, 이후 39%)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시민의회의 권고를 국민투표로 확정 짓는 설계를 할 때, 그 통과선을 단순과반으로 할 것인가 슈퍼머조리티로 할 것인가는 결코 사소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변수라는 것이다.
**이미 STV로 사는 나라들**
아일랜드와 몰타는 하원 전체를 STV로 선출하는 몇 안 되는 나라다. 호주는 상원을 STV로, 하원은 IRV(RCV)로 선출한다 — 한 나라 안에 두 제도가 공존하는 이 사례야말로 앞서 말한 구분을 실증한다. 이들 나라는 대개 독립이나 건국 시점에 이미 이 제도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BC주나 한국처럼 기존 소선거구제를 시민의 힘으로 뒤집으려는 시도와는 출발선이 다르다. 이는 곽노현이 강조한 경로의존성 — "미국·영국·프랑스가 단순다수제를 못 바꾸는 이유는 가장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진단 — 을 거꾸로 뒷받침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 結 — 불판을 통째로 바꾸는 기술
곽노현의 강연이 던진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국회의원을 아무리 갈아치워도, 새로 뽑힌 이들이 게임의 룰을 자기 좋을 대로 정하는 한 판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지난 40년의 그 반복은, 돌이켜 보면 고식지계(姑息之計)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의 심판만 바꾸었을 뿐, 심판이 규칙까지 정하는 구조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선호순위투표제는 그 자체로 만능 열쇠는 아니다. RCV는 과반의 정당성을, STV는 의회의 비례성을 줄 뿐, 이 둘만으로 셀프 입법 특권이라는 근본 구조가 저절로 해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밴쿠버 시민들이 91%의 지지로 확인했듯, 제도를 설계할 권한을 이해당사자가 아닌 '미니 국민'에게 되돌려줄 때 비로소 룰 자체를 논의할 공간이 열린다. 문제는 그 공간을 만드는 일이지, 어떤 투표 방식이 정답이냐가 아니다.
낡은 불판 위에 새 고기를 올리는 정치는 이제 그만해도 될 때가 되었다. 불판 자체를 바꾸는 기술은 이미 세계 여러 나라의 실험대 위에 놓여 있다. 남은 것은, 그 기술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이번에도 선수들에게만 맡겨 둘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ㅡㅡㅡㅡㅡㅡ
원본 기사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