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 국조인물고
[姜燦 ]
원본글 출처 | 강찬의 묘명(墓銘) |
---|---|
저자 | 신흠(申欽) |
대표관직 | 관찰사(觀察使) |
이명 | 자 : 덕휘(德輝)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 |
나 신흠이 약관의 나이에 벼슬하여 뭇 대부(大夫)들의 뒤를 따르면서 그들의 행실을 살펴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관찰사(觀察使) 강공(姜公)같은 분은 대개 보기 힘들었다. 분명하고 활달하고 강직하며 바르고, 깨끗하여 오염되지 않고, 온량(溫良)하며 지키는 것이 있었다. 애석한 것은 수명이 짧아 다 써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이 죽은 지 20년이 되었는데 공의 아들 강석기(姜碩期)씨가 문학(文學)으로 벼슬을 하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아! 후세에 전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세월과 함께 가버리더라도 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역시 공의 행적은 인멸시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사계가 지은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찬(燦)이요 자(字)는 덕휘(德輝)이며, 선대의 계통은 금천(衿川)에서 나왔는데, 신라 때 여청(餘淸)이 공의 먼 조상이며, 고려에 이르러 휘 궁진(弓珍)은 태조(太祖)를 섬겨 벽상 공신(壁上功臣)이 되었고, 휘 감찬(邯贊)은 현종(顯宗)을 섬겨 공훈이 현저하여 문하 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인헌(仁憲)이란 시호를 받았으니, 이로부터 벼슬이 계속 이어졌다. 조선에 들어와 휘 양(揚)은 검교(檢校)ㆍ한성윤(漢城尹)을 지냈는데, 이 분이 공의 6대조이다. 고조(高祖)는 강희(姜曦)인데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증조(曾祖)인 강숙돌(姜叔突)은 연산조(燕山朝)에 사간(司諫)으로 국사(國事)를 말하다가 귀양 갔다가 중종 반정(中宗反正)으로 판교(判校)를 역임하고 청백(淸白)하다 하여 벼슬이 승진되었다. 조부 강뇌(姜)는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지냈는데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고, 부친 강유경(姜惟慶)은 삼등 현령(三登縣令)을 지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으니, 2대가 추은(推恩)된 것은 공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판서공은 처음 죽산 안씨(竹山安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전첨(典籤) 안종전(安從)의 딸로서 일찍 죽어 후사가 없고, 뒤에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관(判官) 권집(權諿)의 딸로 가정(嘉靖) 정사년(丁巳年, 1557년 명종 12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냈는데, 조금 자라서는 경전(經典)을 펼쳐놓고 뜻을 분변하였으며, 참판 김계휘(金繼輝)에게 수학하여 문사(文詞)를 민첩하게 만들매 왕왕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 두 번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계미년(癸未年)에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로 경연(經筵)에 출입하였는데, 선조께서 그 단아(端雅)한 모습을 보고 사는 곳을 묻기까지 하였다.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선임되었고, 다음 해 사국(史局)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을 때 당시 풍속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동료 신진(新進)들이 복식을 아름답게 꾸미고 다녔으나 공만은 유독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들은 너무 소박하다고 비웃었다. 얼마 뒤에 선조께서 복색(服色)이 법도에 어긋난 신하들을 담당 관아에 명하여 조사해 죄를 다스리게 했는데, 공만이 홀로 면하여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했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전보되었다. 선조께서 일찍이 경연의 자리에서 이야기가 진 백사(陳白沙, 명나라 때 학자 진헌장(陳獻章))의 학술에 이르게 되어 인용한 그의 시문(詩文)이 수천 자나 되었는데, 공은 진씨의 글을 전에 본 적이 없었지만 귀로 들으면서 손으로 기록하여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었다. 선조께서 병환으로 침을 맞게 되었을 때에 입시한 대신 등 여러 관리가 평상시와 같이 부복(仆伏)했으나 공은 앉아 있고 엎드리지 않았었는데, 물러나와서 사람들이 묻자, 공이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침을 맞는데 어찌 일개 의원의 손에 맡겨둔 채 입시 한 신하로서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공은 마땅히 관례대로 승진해야 했지만 자격에 국한되어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제수되었는데, 선조께서 그가 한직에 있게 된 것을 의아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묻기까지 하였다. 공이 주서에서 체직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선조께서 그 재주를 생각하고 일찍이 말하기를, “주서 임무에 능한 것을 나는 강 아무개에게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에 미치지 못한다.”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배되어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을 마치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기성(騎省, 병조(兵曹))에서 공을 천거하여 낭청(郎廳)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한 낭관(郎官)의 시기하는 바가 되어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되어 다시 호조에 제배되었다. 그 얼마 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배되었다가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체직되어 사과(司果)에 제수되었다. 종묘(宗廟)에 도둑이 드는 변고가 있자 조정에서 장관(長官)을 선택해 뽑아야 한다는 의론이 있어 공을 종묘서령 겸 지제교(宗廟署令兼知製敎)를 삼았다. 예조 정랑(禮曹正郞)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배되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고 그 여파가 사대부에게 미치게 되어 의정(議政) 정언신(鄭彦信)이 옥에 갇힘을 당하여 장차 고문을 받게 되자, 공이 말하기를, “형벌은 대부에게 가하지 않는 것이다. 정언신은 상신(相臣)이거늘, 비록 죄가 있어도 신문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하였다. 남언경(南彦經)의 시어(詩語)가 요망하다는 데 연좌되어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죄를 의론함에는 마땅히 그 정황을 따져야 한다.”하고, 다만 삭탈 관직할 것만을 논했다.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배되었다가 이듬해 신묘년(辛卯年)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직강(直講)과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먼저 선조께서 상소문을 올린 호남의 유생(儒生)을 국문하려 할 때 공이 사헌부에 있으면서 이를 간쟁하다가 이로 인해 파직당하였다. 당시 재상이 유언비어를 허위로 꾸며 사류(士類)들에게 화를 돌려 거의 다 쫓겨났는데, 공도 역시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좌천되었다. 공은 관리로서 직책에 마음을 다하고 아울러 병무(兵武)의 강습을 일삼아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상금을 걸어 활쏘기를 권장하니, 온 군(郡)이 호응하였다. 다음 해에 왜구(倭寇)가 경성을 함락시키고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蒙塵)했을 때 왕자가 병화를 피하여 단천군을 지나가다가 그 관아의 접대가 소홀한 것에 화를 내며 공을 불러 책망하니, 공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군부가 몽진하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눈물을 삼키며 땅바닥에서 자야하므로 감히 풍요롭고 사치스럽게 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왕자가 참회(懺悔)하며 공의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공과 같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하였다. 공은 왜구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밖에 나가 거처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고 격문을 돌려 적을 토벌하였다. 그때 난민(亂民)들이 왕자와 대신들을 협박해 붙잡아다가 왜적에게 넘겨주어 북도의 각 고을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지만 유독 단천의 백성들은 배반할 뜻이 없었다. 공은 문약(文弱)하여 말을 잘 타지 못했으나 싸움에 임하면 문득 몸소 앞장서서 병사들을 인도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서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대적하여 여러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적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단천의 병사는 무섭다.”하였다. 결사대를 모집하여 지름길로 행재소(行在所)에 달려 보내어 문안드리고 또 적의 머리를 바치니, 사람들이 그를 당 현종(唐玄宗) 때의 안진경(顔眞卿)에게 비유하였다. 전쟁에 이겨 논공할 때 모든 공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돌리고 공은 거기에 끼지 않았다. 항상 병사가 적어 적을 소탕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는데, 적들이 달아나 돌아갈 때 군대를 나누어 길을 막고 기다리다가 적을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적들이 물러간 뒤에는 백성들이 농사 짓는 것을 위로하였는데, 친히 논밭에 출입하며 술과 음식을 대접하니 백성들은 모두 감격해 분발하여 힘써 농사를 지었으므로 가을에 이르러 크게 수확을 하게 되어 시골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게 되었다. 조정에서 듣고 가상히 여겨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발탁하였다가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옮겨 단천군의 일을 아울러 맡도록 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통정 대부의 품계가 가자(加資)되고 얼마 후에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예전대로 잉임(仍任)할 것을 명했으니, 공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강원도 관찰사에 제배되어 부임하기 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군을 다스린 실적이 제일 낫다고 하여 표리(表裏) 1습을 하사받고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당시 적이 남쪽 변두리에 웅거하고 있어 완산(完山)이 울타리가 되므로 조정에서는 완산 부윤(完山府尹)을 뽑는 데 적임자 때문에 곤란해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하교하기를, “강 아무개는 몸소 싸움에서 적을 토벌하고 공을 세웠으니 지략이 출중하고 용맹도 필시 다른 이보다 뛰어날 것이어서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는데, 여러 의론이 일치되었으나 끝내 신병 때문에 임명되지는 못했으나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당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겨울에 부친 판서공이 병환 중에 있어 휴가를 받아 문안을 가게 되었는데, 선조께서 특별히 약물(藥物)을 내리고 위로하면서 보내었다. 이어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일이 많은 때였기 때문에 서류가 구름처럼 밀려들었으나, 공은 이를 결재하는데 정밀하고 민첩하여 일이 지체되는 적이 없었으며, 사형의 죄를 범한 자가 이름을 바꾸어 문장(文狀)을 올렸는데, 공이 한 번 보고서 그 정상을 알아차리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이윽고 부친상을 당했는데,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변방의 경계가 더욱 위급해지자 선조께서 특별히 기복1)(起復)을 명하여 해주 목사ㆍ경상도 관찰사ㆍ황해도 절도사ㆍ병조 참의에 연달아 제수하고,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봄에 또 함경남도 절도사를 제수하는 등 무릇 부르는 명을 일곱 번이나 내렸으나, 공이 힘써 사양하여서 끝내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복을 마치고 다시 황해도 절도사에 제배되어 중국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수행하고 영남(嶺南)으로 갔다. 가을에 중전(中殿)이 서쪽으로 행차할 때 공이 호종(扈從)하게 되었는데, 뒷바라지를 빈틈없이 하니 뭇 사람들이 다 좋아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군대를 인솔하고 다시 영남으로 갔다가 조정에 돌아와 퇴임할 것을 청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배되어 고을에 부임한 지 겨우 열흘 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백성들이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했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병조 참지ㆍ병조 참의ㆍ첨지중추부사ㆍ좌승지에 제배되었고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이조 참의로서 공도(公道)를 힘써 넓혀 혼탁한 무리를 물리치고 청백한 자를 끌어올릴 제, 동료가 어떤 사람을 이끌어다가 전조(銓曹)의 낭관(郎官)으로 삼으려 하자 공이 응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훗날 언관(言官)이 되었을 때 과연 성 우계(成牛溪, 성혼(成渾))를 모함하여 지극히 나쁜 짓을 하였다. 공은 항상 기자헌(奇自獻)의 사람됨을 비천하게 여기고 힘써 그를 배격했는데, 기자헌이 정권을 잡자 공을 헐뜯으려 별 짓을 다하므로, 공이 사직하자 이조에서 체직하여 좌승지를 제수하였으나 고하여 면직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외직으로 나가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으나 조정이 안정되지 않는 것을 보고 관직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며 벼슬을 버리고 해서(海西)로 돌아와 연안(延安)에 우거하다가 병으로 졸(卒)하니 계사년(癸巳年, 1603년 선조 36년) 6월이었으며, 향년 47세였다. 선조께서 관리를 파견해 치제(致祭)하고 조상하는 부의를 보냈다. 8월 임인일(壬寅日)에 금천(衿川)의 관아 남쪽 아방리(鵝房里)의 동쪽 산록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 장사지내니, 부인과 같은 묘역이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왜적을 토벌한 데 대한 논공을 할 때 선무종훈(宣武從勳)에 추록(追錄)되고 가선 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제학 세자 좌부빈객(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이 추증되었다.
배필은 김씨(金氏)로 광산(光山)의 명문가인 첨지(僉知)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인데, 공보다 1년 앞서 출생해 만력(萬曆)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공에게 시집왔다. 아름답고 순종하고 곧고 정숙하여 부도(婦道)를 잘 지켰으며 나이 29세에 졸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강원기(姜遠期)는 일찍 죽었고 차남 강석기(姜碩期)는 대간공(大諫公)이며, 딸은 세마(洗馬) 한신급(韓信及)에게 시집갔다. 측실 출생의 딸이 하나 있는데 김백생(金伯生)에게 시집갔다. 강원기는 진사 이위(李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고, 강석기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식(申湜)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강문성(姜文星)은 생원으로 나의 사위이며, 다음은 강문명(姜文明), 그 다음은 강문두(姜文斗), 그 다음은 강문벽(姜文璧), 그 다음은 강문정(姜文井)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정두제(鄭斗齊)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나머지는 결혼하지 않았다. 한신급은 아들 한기원(韓器遠)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김백생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김벽(金檗)이고 차남은 김설(金卨)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공은 조행(操行)의 곧고 굳음이 이미 출중하였고 더욱 내행이 독실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면서 친척들에게까지 두루 미쳐 각각에게 그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백형(伯兄)이 여러 해 동안 고질병을 앓았는데, 의원을 맞이하고 약시중을 들며 아침 저녁으로 살펴 모시기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생질녀가 가난하게 살자 종 하나를 보내 생활을 도왔으니, 이는 모두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공에게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소시적에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을 좇아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방도를 들었는데, 율곡(栗谷)과 우계 두 선생이 함께 칭찬하고 허여(許與)하였다. 두 선생이 세상에서 배척당하기에 미쳐 공 또한 곤경에 빠졌으나 자신의 뜻과 배치되는 영합을 하려하지 않고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이론을 견지하여 한결같이 정도로 하였다. 벼슬길에 처음 들어서서 두 번 옥당(玉堂)의 물망에 올랐으나 당시 재상에게 저지 당하였고, 일찍이 천거되어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을 때 임금이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리니 공을 미워하는 자들의 논박이 멈추었다. 공은 임진란을 당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 죽기로 마음먹으니, 그 의기가 얼굴에 드러났다. 가족들은 위급한 상황에 임하여 피신할 계책을 물으면 공은 그 때마다 말하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오로지 직분을 다하고 죽을 뿐이다.”하였으므로, 그 뒤로는 감히 다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벼슬한 지 수십 년 동안 집이 없어 남의 집을 빌려 살았는데, 앉거나 누울 때 베개와 방석도 갖추지 못하여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다만 한 조각 대자리만 깔았으며, 안ㆍ독(案犢)과 붓ㆍ벼루 등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냈고 이를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아낌없이 다 주었다. 평생 동안 가산(家産)에 신경을 쓰지 않아 왕왕 쌀독이 비곤 했는데도 오히려 태연하게 말하기를, “나는 다행히 벼슬아치가 되었으니 고금(古今)에 관리가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거할 때에는 정색을 하고 단정히 앉아 누가 범할 수 없을 만큼 엄숙했으나 때때로 벗이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즐겁게 웃으며 세속의 사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서,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하며 재주 있는 사람을 아끼고 선한 사람을 좋아하였으니, 대개 다 천품(天稟)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정에서 장차 청백(淸白)으로 공을 천거하려 했지만 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굳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늘이 선한 사람을 보답할 때는 그 당사자에게 하지 않고 반드시 그 후손에게 하는데, 공에게 다 베풀지 않은 보응이 대간공(大諫公, 강석기(姜碩期))에게 있을진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야위어 옷조차 이기지 못할 듯하나 절벽처럼 곧은 절개 어찌 그리 우뚝하며, 허약해 말에 걸터앉지 못할 듯하나 왜적을 무찌른 공로 어찌 그리 뛰어났던고. 불운하여 끝내 앞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긴 수명조차 주질 않았던가? 그러나 하늘이 정한 것인지라 후손에게 경사가 있을 것일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찬 [姜燦]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첫댓글 인헌공파등 박사공파외의 일가분들께
귀 파에 대한 글이 자주 올라 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귀 파에 대한 족보 발간 이력도 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