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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만일 당신이 우리 사회에 소속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게임을 해야한다. ㅡ 다시 간단히 말해서 만일 우리가 일관성이 있으려면, 우리는 일관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이 전제를 대신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인간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가변적이이서 일관성을 유지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할 만하다. 어린이들은 행동패턴들로부터 계속 이탈하기 때문에 우리를 그들을 제어하려고 노력하고 또 바로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의 관습들은 힘에 의해 유지된다.
41. 한 정신과 의사가 한 선사에게 신경증 환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물었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그들을 덫에 가둔다!” “어떻게 덫으로 가두지요?” “나는 그들이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는 곳에 몰아넣지!”
54. 선불교의 용어가 의미하듯이 해탈을 이룬 사람은 “무심”無心이 되어 자신이 어떤 주제자나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과 합일을 이루어 진실을 아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걷고, 잠자고, 숨 쉬고, 또 말하고, 토하고, 잡고, 눈을 뜨고 감는데 있어서 그는 단지 그의 감각만이 감각의 대상에 몰두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2. 도둑을 잡기 위해 도둑을 풀어놓는다. 해탈을 이룬 두 사람이 서로 알아보는 얘기를 선불교 경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두 도둑이 만나면 인사가 필요 없다. 그들은 서로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본다.
72. 스승은 자신을 받아들인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자신의 행위 패턴 이외 어떤 무엇, 행위 패턴을 수행하는 어떤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아는 사회적 조건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그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설득한다.
72. 옛적에 일본에 있는 어떤 해변 어촌에 파도가 밀려와 큰 위협이 닥쳤는데, 그 어촌 언덕 위 논에서 혼자 일하던 농부가 멀리 수평선 위에 파도가 오는 것을 먼저 보았다. 그는 즉시 들에 불을 질렀고 그래서 그 어촌 사람들이 곡식을 구해내려고 무리 지어 올라와 홍수의 피해를 면했다. 그의 방화죄는 스승이나 의사 또는 정신치료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잘못된 전제를 계속적으로 문제시하도록 설득해서 그들의 허구의 문제를 풀도록 하는 책략과 같다.
74. 우리는 마치 유도경기 같은 어떤 것을 발견한다. 고단수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공격해 오기를 기다려서 제자가 문제를 제시하도록 한다. 그래서 공격해오면 스승은 대항하지 않는다. 그는 그 공격으로부터 슬쩍 물러나 그 공격이 스스로 무너지게 한다. 이렇게 하여 제자가 제시한 문제, 즉 그릇된 사회적 전제가 무너지는 것이다.
76. 가령 [제자가] 세상의 희극이나 연극에서 어떤 역할을 맡기를 거부할 수 없더라도, 그는 적어도 그것이 모두 게임이란 것을 이해한다. … 그들은 그로 하여금 그의 마음의 작용과 몸이 드러내는 신체적 활동을 … 끊임없이 지켜보도록 가르친다. 그 제자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 자신인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하는데 성공해야 한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수의 타자(他者)들인 것이다.
80. 유도 선생이 생도에게 그가 선생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납득시키는 유도의 기술이고, 그래서 불교에서는 해탈이 바로 사회적 최면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깨어남이라 부른다.
84. 이것을 알면 나는 세계와 공명共鳴한다. 개별적 자아라는 사회적 제도를 달관하고 나의 가상적 독립성이 사회적 인습의 산물임을 알고 나며 나는 더욱 사회와 하나로 느낀다. 세계를 통일된 장法界 dharmadhatu으로 보는 궁극적 견해와 일치하여, 불교에서는 완전히 해탈한 사람을 우주와 사회적 게임에 완전히 자유롭게 동참하는 사람, 즉 보살Bodhisattva로 본다. 보살이 이 세계에 살면서 세계에 속하지 않고, 집착 없이 모든 세상의 활동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살이 그의 사회적 활동과 그의 동일성을 혼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는 자신의 역할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역할을 한다. 그는 카드 놀이할 때 어떤 패라도 던질 수 있는 “무모한” 도박꾼이거나 조카Joker다.
85. 마찬가지로, 보살은 아무리 살펴도 알아볼 수 있는 동일성이 없다. “그의 문은 닫혀있고 그래서 현자들도 그를 알아볼 수 없다. 그의 내면 인생은 감추어져 있어서 그는 세간의 덕목 밖을 넘나든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여우들은 여우굴이 있고 새들은 둥지를 가지고 있지만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집 없는 삶, 성 밖에 “숲속에 사는 자”vanaprastha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의 역할이 오로지 연출되기만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배우 없는 연기이고, 그래서 자알를 초월한 성자를 제정신을 잃은 광인에 풍자하기도 한다. 만일 광인을 편집증자paranoid라고 한다면 성인은 이형정신자metanoid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의 영역을 Gerald Heard는 “이형의 희극”meta-comedy이라고 불렀지만, 이 말은 신곡의 은어적인 현대적 표현이다.......... 후자는 인생의 이중 구속의 문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알기 때문에 우습게 여긴다.
87. 그러나,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고
이름을 부치는 한에서는 어디에서 그칠지를 알아야 된다.
어디에서 그칠지를 아는 사람은 불멸을 이룬다.
이 “어디에서 그칠지를 아는 것”은 더욱 일반적으로는 무위라고 무르는데,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행위 또한 무간섭이지만, 더 정확히 이해하면 자연의 길인 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89. 그러므로 무위, 즉 무간섭의 철학은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언뜻 보기에 위험한 권고를 의미한다. 이것이 사람들을 불가능한 이상을 쫓아 힘쓰도록 분열시키는 것보다 사회 질서를 훨씬 덜 어지럽힐 것이다.
이웃에 대해서 인의仁義로 대하라고 하는 이 말이 나를 미치게 한다. 그대여, 세상을 본래의 소박함을 지키게 내버려 두어라. 바람이 불고자 하는 데로 불 듯이, 덕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라. … 백로는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희다. 까마귀는 날마다 색칠을 않아도 검다.
91. 성인은 환상적 나무와 같이 그 열매는 쓰고, 잎은 먹을 수 없으며 가지와 둥지는 너무 뒤틀려서 아무도 건축자재를 만들 수 없어 “소용이 없다”고 했다.
91. 그러므로 치료자가 자신은 내담자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또 치유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이론도 없다는 점에서 마치 도인 같이 “바보스럽고” “수동적”이다. 만일 내담자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면 그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치료를 받으러 오기를 그만둔다. 치료자는, 만일 문제가 진정으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면 내담자는 결국 다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도에서 현인들이 제자지망생에 대해 가지는 태도와 꼭같다. 성공 여부는 치료자가 기계적 기술을 적용하느냐 또는 치료자가 내면적으로 자신이 진정 마음이 편안한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위대한 도가 사라지면 인의仁義가 나오고, 지혜와 현명함이 일어나면 큰 위선僞善이 있게 된다. 가정에 화목이 사라지면 효자와 헌신적인 부모가 나타난다. 한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나타난다.
95. 그러나 이 격심한 “생존경쟁”을 심각하게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 있으며, “정신병 발병”이 감기처럼 흔하게 발병되지 않으려면 불가피하게 경쟁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격이 고매한 자 집에 있으되 마음씀이 없고 걱정 없이 행동한다. … 바보같이 보이며, 길 잃은 사람같이 돌아다닌다. 돈이 풍족하게 있으면서도 이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98. 자아라는 허상에서 해방되었을 때 수반되는 의식상태는 신경정신의학 용어로 쉽사리 알 수 있다. 사회화가 억압을 시킨다는 중요한 신체적 사실 가운데 한가지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 경험들은 신경계통의 상태들이라는 것이다.
101. 정상적으로는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수도생활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숲 속의 은둔”vanaprastha이란 해탈의 단계는 “가사家事”grihastha를 마친 뒤에 시작한다. 가족 봉양과 자신의 직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수행을 기대하지 않았다. 해탈은 사회의 인습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까지도 벗어난다고 생각되었다.
104. 선방禪房생활을 “마친 사람”은 대처승이 되기도 하고 평신도 생활로 돌아가기도 했다.
106. 쿠마라스와미는 “Sahaja는 쾌락의 의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도道의 원리이기며 추구함이 없음의 길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우리 손에 나타난다 ㅡ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따라 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우리를 떠난다”고 말한다.
150. 선사들의 기본 입장은 그는 아무것도 가르칠 것이 없고, 아무 교리도 없으며 아무 방법도, 성취한 것도 깨달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부처가 설했다는 말로 하면, “내가 특별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이 ‘특별하고 완전한 깨달음이다’”
151. 그러나 선은 수행이며 더구나 험난한 수행이다. 아무 가르칠 것이 없지만 선사들은 제자를 받아들여 그들의 수련을 위해서 강습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린이를 속이기 위해서 빈주먹을 휘두르고 누런 잎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임제臨濟는 말한다. 그대가 어떻게 가시나무와 마른 가지에서 과일즙을 얻을 수 있는가? 마음[평상심] 밖에서는 그대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마음 안에서도 없다. 그대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도는 수행해서 증득하는 것이라고 도처에서 말하고 있다. 속지 말라! 만일 누군가가 도를 닦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윤회에 빠져 있다. 나아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도가 있고 수행해야 할 방법이 있다고 도처에서 말한다.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고 어떤 길을 따라가는가? 바로 지금 그대가 쓰고 있는 가운데 무엇이 모자라는가? 그대가 지금 있는 거기에 무엇을 더 보탤 것인가? 이 말을 못 알아들으면 무식한 학승이 들여우 우니느 소리를 믿고 사람을 묶어 놓는 괴상한 학설로 그들에게 해탈을 약속하는 것이다”. 당唐 초기의 마조馬祖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말했다.
도道는 수행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만일 수행으로 도가 얻어진다고 말한다면 수행을 마치는 것은 도를 잃는 것이 된다 … 만일 그대가 수행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속인[해탈을 얻지 못한 사람]과 같게 되는 것이다.
156. 그러므로 그는 이제 (자아가 없기 때문에) 행동이 일어나는 데로, 자발적으로 올바르게 자기가 없이 행동을 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행동을 막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증명할 아무것도 없고 패배할 아무것도 없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도전할 수 있게 된다.
156. 이런 식으로 해서 그 게임은 한 단계 한 단계 책략을 써서 마침내 제자는 스승과 똑같은 난공불락의 위치에 다다를 때까지 나아간다. 스승은 승패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결코 게임에서 질 수 없다. 스승은 증명할 문제도 없고 방어할 것도 없다.
164. 마침내 제자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말해 아무리 주의집중하력 노력해도 그것은 “의도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스승은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제자가 이제 포기하고 열자의 말대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ㅡ 왜냐하면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173. 분며히 우리가 바라는 사랑은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자발적으로, 즉 자아가 사랑의 감정에 저항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바란다. 우리는 상대방 개인이 그의 자발적 느낌을 우리에게 대해 즐기도록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의도적 사랑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이라고 말하면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발적이란 것은 스스로 일어나는 거싱며 도에서 말하는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이며 억지 노력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발성은 결코 자아의 활동이 아닌 것이다.
175. 치료 초기부터 환자는 애원하는 사람의 입장이 된다.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혀야 되고, 진료받는 데 대한 진료비를 지불해야 되고, 또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그만들 수 없고, 자기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 굴욕적이 된다. 모든 건전한 치료는 이 시점에서 유도법柔道法이 된다.......... 그 대신, 치료자는 이 증상들에 맞서고 있는 환자의 자아 편에 선다. 환자가 밝힌 문제를 받아들이고, 보통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치료자는 환자가 그 증상들을 제어할 수 없는 그 상태를 허용한다. 치료자에게 병적인 상태를 허용받은 환자는 즉시 안심 받게 되고 치료자의 권위 아래로 들어간다.......... 핵심은 “당신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거나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증상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말 중 어느 거이나 자아의 능력은 새로운, 보다 높은 수준에서 도전 받는 것이 된다.
177.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환자가 더 이상 치료자를 제어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료자는 “나는 당싱이 진정 무어을 원하는지 알아내도록 도와야 합니다”거나 “당신의 무의식에서 무엇이 올라오는지 기다려 봅시다”고 말함으로써 책임지는 것을 피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치료자는 환자로 하여금 관계를 제어하도록 유도하지만 그러나 치료자 자신은 전혀 유도함이 없고 모든 것을 환자 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179. 환자는 실제 치료자의 방침에 응해서 자신의 증상들(역자주:정신병리, 자유연상, 꿈 등등)을 제공해왔기 때문에, 환자는 이 치료적 구속, 즉 치료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기의 증상들에 흥미를 잃고 그 증상을 내놓는 행위를 그만두는 것만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0. 여기까지 도달하면 환자는 가식을 다 벗어버린다. 환자는 “자기가 된다는 것”이 마치 그가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반대로 자기가 아닌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 말은 이제 환자가 사회가 그에게 강요한 자기상인 자기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181. 이것이 치료의 결과일 때는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언제나 해탈解脫;liberation과 같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외부” 세계와 통정을 이룬 것이 되는데, 다시 말해 자시의 임의적이고 자발적인 면과 통합을 이룬 것이다.
김신웅 행복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