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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그들의 관심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예수를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의 목적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당신은 공식적인 종교 체계 밖에 있는 사람인데 왜 성전을 심판하느냐?"
라는 도전이다.
B. 예수의 역질문 (29-30절)
"내가 한 가지 물을 테니 대답하라."
주석
예수는 직접 답하지 않고 먼저 질문을 던지신다.
고대 유대의 토론 방식에서는 상대방의 전제를 드러내기 위해 역질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의 질문: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로부터냐?"
여기서 핵심은 세례 자체가 아니라 요한의 권위의 출처이다.
C. 지도자들의 내부 논의 (31-32절)
첫 번째 가능성
"하늘로부터라 하면..."
주석
"하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여 사용하던 표현이다.
즉,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곧바로
"그렇다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를 메시아로 증언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능성
"사람에게서 왔다."
주석
이 답도 위험했다.
백성들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특별히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겼다"
고 설명한다.
해설
지도자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의 고민은
"무엇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어떤 답이 우리에게 유리한가?" 이다.
따라서 논쟁의 중심은 신학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 된다.
C'. 지도자들의 최종 답변 (33a절)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주석
실제로 몰라서 한 말이 아니다.
이미 두 가지 선택지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자신들에게 불리하므로 답변을 회피한다.
해설
이 말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침묵이다.
그들은 진리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인정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B'. 예수의 답변 거부 (33b절)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아니하리라."
주석
예수께서 답변을 거부하신 이유는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다.
상대방이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해설
예수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이미 답하셨다.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예수의 권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핵심 신학
1. 예수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본문 전체의 중심 주제는 "권위"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권위를 부정하지만, 마가는 오히려 그들의 질문을 통해 예수의 신적 권위를 드러낸다.
2. 믿음 없는 사람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순종하기 싫어서 믿지 않는다
지도자들은 증거가 없어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백성들의 반응도 알고 있었으며,
예수의 사역도 보았다.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완고함이었다.
3. 참된 권위는 제도보다 하나님에게서 온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제도적 권위를 가졌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다.
반대로 예수는 공식 직분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마가는 이를 통해
"종교적 직위 자체가 권위를 보장하지 않는다. 참 권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의 권위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마가복음 11:27-33의 중심은 단순한 문답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영적 완고함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본문: 마가복음 11:27-33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권위와 마주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있고, 학교에서는 교사의 권위가 있으며, 직장에서는 상사의 권위가 있습니다.
국가에는 법의 권위가 있고, 사회에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권위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권위 자체를 싫어하기보다는 "그 권위가 정당한가?"를 묻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왜 내가 이 말을 들어야 해요?"라고 묻는 것도,
직원이 상사의 지시에 마음속으로 반발하는 것도 결국은 권위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직책이나 나이만으로도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왜 그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 사람이 정말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
"그 권위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실 이런 질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진정한 권위를 분별하려는 노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때로 사람들이 권위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기 위해 질문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답을 찾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하기 위해 질문하고,
진리를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상들의 자리를 뒤엎으셨고, 하나님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종교지도자들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자신들의 권위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느냐?"
겉으로 보면 정당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공격할 기회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권위에 대한 논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히는 이야기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둘째, 나는 예수님의 권위를 진심으로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본문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고 한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합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느냐?"
겉으로 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이었고,
그곳에서 큰 행동을 한 사람에게 권위의 출처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 뒤에 숨겨진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배척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것이었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즉시 답하지 않으시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로부터냐?"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서로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내용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논의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선지자였는가?"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혹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계산합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다."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화를 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답이 무엇인지 찾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무엇이 옳은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자기 입장을 지키려는 사람은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를 묻습니다.
본문 속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지식도 풍부했고, 사회적 영향력도 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과 체면을 지키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말씀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말씀을 듣고 있는가?"
때로 우리는 이미 결론을 내려 놓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생각에 동의해 주시기를 기대하며 묻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의 고집을 꺾고,
잘못을 깨달으면 회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아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찾기보다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를 때 말씀을 고치려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고치려 하는가?
진리를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장에 맞추려고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성경을 많이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2.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종교지도자들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자신을 문제 삼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권위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어떤 학교 출신인지,
어느 랍비의 제자인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가 사람의 권위를 결정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게 인정받은 랍비도 아니셨고,
산헤드린이 임명한 지도자도 아니셨습니다.
대제사장 가문 출신도 아니셨고, 공식적인 종교 직분도 없으셨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묻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을 가르치고,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로부터냐?"
이 질문은 사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증언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크시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만약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선지자라면,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상 자신의 권위의 근원을 밝히신 것입니다.
"내 권위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과 세상 권위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세상의 권위는 위임받은 권위입니다.
대통령의 권위는 국민에게서 오고,
판사의 권위는 법에서 오며,
회사의 대표는 조직이 부여한 권한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도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같이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늘 다른 랍비들의 의견을 인용했습니다.
"어떤 랍비는 이렇게 말한다."
"전통은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권위에 기대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권위의 근원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말씀 속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을 향해 명령하셨고 병이 떠났습니다.
귀신을 향해 명령하셨고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고 폭풍이 잠잠해졌습니다.
죄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심지어 성전마저도 심판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스승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좋은 조언을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수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과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라는 말씀도 좋아하고, 용서하라는 말씀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을 바꾸라는 말씀 앞에서는 머뭇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존경은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종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우리는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히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예수님을 네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의 인정 여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인정하든 거부하든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왕이시며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그 권위 앞에 내가 무릎 꿇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3.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오랫동안 고민합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다."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겉으로 보면 겸손한 대답처럼 보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한 태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말은 진정한 무지의 고백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말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민한 내용 속에 이미 답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정말 몰랐다면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이라는 가정 자체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자신들이 요한을 거부한 것이 잘못이 됩니다.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와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진실 앞에서 도망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된 본성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몰라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믿기 싫어합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싫어서 핑계를 찾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로왕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재앙을 경험했지만 끝까지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면 믿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여 줍니다.
증거가 많아지면 반드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많은 증거가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열려 있으면 작은 말씀 하나에도 회개하고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제는 단순히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잘 몰라서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면 정말 몰라서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알지 못함이 아니라 순종하기 싫음입니다.
용서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고,
내려놓으면 손해 볼 것 같고,
회개하면 부끄러울 것 같고,
순종하면 불편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중함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결단을 미루기 위한 영적인 핑계일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는 말도 결국은 결단을 회피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거짓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책임을 지지 않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중립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결단을 미루는 것도 결국 순종을 미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몰라서 순종하지 않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순종하기 싫은 것은 아닌가?"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서 머뭇거리는가?"
"아니면 이해는 되었지만 순종의 대가가 부담스러운가?"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제 마음이 완고했음을 인정합니다."
"주님, 제가 알면서도 외면했던 부분을 회개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믿음은 모든 의문이 해결된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자리와 체면을 붙들었지만,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참된 믿음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대화로 시작해서 대화로 끝납니다.
그런데 대화의 결론은 매우 씁쓸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지만 결국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싫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배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따지기 위해 나왔고,
순종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공격하기 위해 나왔으며,
진리를 찾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듣지 않는 마음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 바로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분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가장 멀리 있었고,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첫째, 나는 진리를 찾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입장을 지키는 사람인가?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를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겸손히 말씀 앞에 나를 맞추는가, 아니면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려고 하는가?
둘째, 나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존경하는 정도에서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좋은 조언 정도로 듣고 있는가, 아니면 반드시 순종해야 할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셋째, 나는 정말 몰라서 순종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미루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말씀하신 영역은 없는가?
회개해야 할 부분,
용서해야 할 사람,
내려놓아야 할 욕심,
순종해야 할 사명이 있는데도 계속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없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속 종교지도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반면 믿음의 사람은 완벽하게 이해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의문이 해결되어서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씀 앞에서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고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 제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선합니다."
"주님,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그 권위 앞에 내가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종교지도자들처럼 계산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주님, 제 삶을 다스려 주십시오."
"주님, 제가 알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십시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 앞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