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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8구간 제2부
마근담-덕산공소-남명기념관
20250421
1.청정한 마근담계곡과 남명 조식의 산천재 기상
'지리산둘레길' 사이트에서는 8구간을 이렇게 개략한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마을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까지 걷는 지리산둘레길. 운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걷다보면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따라 걷는 길에서 백운동 계곡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 이 길은 나무를 운반하는 운재로였다. 임도 아랫부분에 너른 길이 울창한 참나무 숲속에 남아 있다. 참나무 숲을 걷다보면 너들도 만나고 작은 개울도 지난다. 좁아진 길을 지나 백운계곡을 만나고 백운계곡에서 마근담 가는 길은 솔숲과 참나무 숲을 지난다. 남명 조식선생이 머물렀던 산천재가 있는 사리에서 바라보는 덕천강과 천왕봉은 아름다움과 굳센 기상을 담고 있어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의미있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경유지 : 운리마을 - 백운계곡(5.6km) - 마근담입구(2.1km) - 남명조식기념관(4.8km), 거리 12.5km, 예상시간 약 5시간, 난도 상."
지리산둘레길 8구간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와 백운리, 시천면 사리 지역을 통과하여 남명기념관 성성문(惺惺門) 앞에서 마치게 된다. 운리 지역의 들길과 임도, 웅석봉에서 흘러내리는 백운산 능선과 달뜨기능선(수양산 능선)을 가로지르며 백운계곡과 마근담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구간이다. 8구간 탐방 체험을 2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2부(마근담-남명기념관) : 지리산둘레길 8구간 종점인 남명기념관까지는 4.6km 거리가 남았다. 청로(淸露)농장 입구에서 마근담길을 따라 내려간다. 마근담계곡은 동쪽에 웅석봉에서 내리벋는 달뜨기능선이 용무림산, 벌목봉, 수양산, 시무산으로 이어지고, 그 서쪽에 달뜨기능선에서 갈래친 감투봉-이방산 능선이 이어지는 그 사이의 계곡으로 마금담천이 흘러가고 마근담길이 마근담천과 동행한다.
마근담길은 마근담계곡 깊은 골짜기 높은 언덕 위에서 시작되지만 청로농장을 지나 마근담교에 이르러서는 계곡의 마근담천과 가까이서 동행한다. 마근담계곡은 청정하고 골이 깊어 농사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 감나무 농사가 산비탈과 마근담천 주변 밭에 즐비하다. 그래서 마근담계곡에서는 감과 곶감 생산이 주농산물이며 농장들이 많다.
마근담길을 따라 해바위곶감농원을 지나면 마근담계곡은 들녘을 이루고 마근담천은 바로 옆에서 가까운 친구가 된다. 이방산과 시무산으로 내리벋는 달뜨기능선 서쪽 산자락 들녘은 감나무밭이 펼쳐지고 남쪽 덕천강 건너편에서는 조례산이 손짓한다. 서쪽의 감투봉과 이방산, 동쪽의 벌목봉과 수양산을 어림하며 산청성당 덕산공소 천주교회 앞을 지나면 마근담계곡 입구는 가깝다. 마근담천 서안(西岸)의 쉼터정자와 '천지신궁' 당집을 지나면 지리산 태극능선에 속하는 달뜨기능선의 마지막 산봉 시무산이 동쪽 가까이 솟아 있는 마근담계곡 입구에 도착한다. 마근담길은 이곳에서 끝나고 남명로가 동서로 달린다. 남명로 동쪽에는 지난해 산불이 난 시천면 중태리 지역에 함미봉이 솟아 있고, 남쪽 덕천강 건너편에는 조례산이 가깝다.
남명로 서쪽 방향으로 따라가면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써래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왼쪽 앞에 구곡산의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진다.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생의 말년을 보내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산천재 앞쪽에는 소공원을 조성하여 '남명 선생 영전에 내린 선조대왕 제문 국역비' 등 여러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왼쪽 담장 앞에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 안내판과 상징조형물 벅수가 설치되어 있다. 산천재 공원 맞은편에 남명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는데, 출입문인 성성문 오른쪽 벽에 지리산둘레길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지리산둘레길 8구간 탐방을 마치고, 남명기념관과 산천재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둘러보았다.
남명의 사상적 기반은 敬義사상이며, 그 요체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敬이고,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義라는 뜻이다. 16세기 성리학의 두 거두인 경상 좌도의 퇴계 이황과 경상 우도의 남명 조식이 현재 살아 있다면 현 시국에서 어떤 행동을 할까? 퇴계는 예상할 수 없지만, 실천을 중시한 남명은 분명히 촛불 혁명에 참여하여 義를 실천했을 것이다. 명종 임금에게 1552년에 올린 상소문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와 선조 임금에게 1568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 상소문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늘날 학자와 공직자들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 천왕봉처럼 살고자 했던 남명의 선비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한다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더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3.3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9분
덕산 4.6km 지점, 마근담길을 따라 산청군 시천면 사리 청로(淸露)농장 출입구를 지나 내려간다.
마근담길 동쪽 산비탈에 밀양 박씨 합장묘 2기가 자리하고 있다. 비가 많이 내려도 안전한 곳인 듯.
마근담길에서 마근담계곡을 내려보았다. 마근담계곡에는 농장들이 많다.
마근담계곡 서쪽으로 이방산 능선이 남쪽으로 내리벋는다. 농장 뜰에서 자라는 그윽한 두 그루 나무는 느티나무가 맞을까?
마근담길을 따라 한울타리 농원 앞으로 내려왔다. 한울타리농원에는 그윽한 두 그루 느티나무가 솟아 있다.
덕산 4.0km 지점, 마근담길을 따라 법륜농원 출입구를 지나 내려간다.
한울타리농원 출입구에서 중앙 뒤 해발 716.8m 이방산을 확인한다.
마근담계곡에 마근담천이 흘러내리고, 민가들이 자리한다. 오른쪽 뒤에 이방산이 솟아 있고, 그 능선이 남쪽으로 벋어내린다.
마근담계곡에 마근담농장이 자리하고, 왼쪽에 웅석봉 달뜨기능선이 중앙의 벌목봉으로 벋어내린다.
웅석봉 달뜨기능선이 남쪽으로 벋어내리고, 그 산비탈 자락에 감나무밭이 조성되어 있다.
덕산 3.7km 지점, 달뜨기능선 자락의 마근담길을 따라 마근담농장 출입구를 지나 내려간다.
마근담길을 따라 덕산 3.7km 지점의 마근담농장 출입구로 내려왔다. 중앙 뒤에 해발 768m 감투봉이 가늠된다.
지리산둘레길은 시천면 사리 남명로까지 이어지는 마근담길을 따라 내려간다. 바로 앞에서 마근담교를 건넌다.
마근담길을 따라 마근담천의 마근담교를 건넌다.
왼쪽에 마근담천이 마근담계곡을 흘러내리고, 마근담길을 따라 마근담교를 통해 마근담천을 건넜다.
마근담길을 따라 덕산 3.1km 지점의 지리산이정목을 지나 내려간다.
마근담계곡의 골물이 마근담천으로 흘러내리고, 지리산 태극종주의 한 구간인 달뜨기능선의 해발 743m 벌목봉을 가늠한다.
마근담계곡의 동쪽에 지리산 태극종주의 한 구간인 지리산 웅석봉에서 벋어내리는 달뜨기능선이 이어진다.
마근담길을 따라 교명주(橋名柱)가 없는 마근담천의 다리를 건넌다. 아래쪽에 마근담1교가 있으니 마근담2교라고 불러준다.
넓은 잔디밭에 납골묘가 있다. 사자상 바위와 좌우에 돌기둥이 서 있고 그 앞에 진주강씨 납골묘비가 있다.
마근담길을 따라 마근담1교를 건넌다.
마근담계곡의 마근담길을 따라 마근담1교를 건넜다. 오른쪽에 지리산 달뜨기능선이 이어지며, 오른쪽 뒤 벌목봉을 어림한다.
홍가시나무가 조성되어 있는 마근담길을 따라간다. 오른쪽에는 감투봉-이방산으로 이어지는 마근담계곡 서쪽 능선이 이어진다.
마근담길을 따라간다. 오른쪽은 큰솔밭펜션 출입구, 아래쪽에 문수암 출입구가 있다.
마근담길 서쪽에 문수암차밭이 있고, 담장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덕산 1.9km 지점, 문수암 출입구에 문수암 표지판과 지리산둘레길 이정목, 토종벌 보호구역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 뒤에 지리산 문수암 일주문이 보이며, 오른쪽에 푸른 녹차밭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녹차밭 앞으로 가 본다.
문수암 녹차밭 앞에 오층석탑이 서 있고, 마근담계곡 동쪽에 지리산 달뜨기능선이 남쪽으로 벋어내린다.
지리산 문수암이 이방산 능선 자락에 자리하고 그 앞에 푸른 녹차밭이 펼쳐지며, 그 앞에 오층석탑이 서 있다.
지리산 문수암 출입구 앞 마근담길에서 마근담계곡 동쪽 능선인 지리산 달뜨기능선을 바라보았다. 축대 앞에 '이방산 보암사' 표지판이 서 있다. 마근담계곡 동쪽 능선의 743m 벌목봉 아래쪽에 있는 보암사가 마근담계곡 서쪽 능선의 716.8m 이방산을 받들고 있다.
마근담길에서 중앙 뒤에 보이는, 지리산 달뜨기능선의 해발 743m 벌목봉을 어림하였다.
마근담길에서 중앙 뒤에 보이는, 마근담계곡 서쪽 능선의 해발 716.8m 이방산을 가늠하였다.
마근담길을 따라 지리산 달뜨기능선 서쪽 자락에 자리한 해바위곶감농원 마을을 지나간다.
해바위곶감농원 뜰의 텃밭에서 농부가 밭농사에 분주하다.
마근담길의 해바위곶감농원 출입구에 해바위곶감농원 표석이 서 있고, 마근담천에서는 하천 정비공사가 진행 중이다.
마근담길이 마근담천을 따라 동행하며 왼쪽에 지리산 달뜨기능선이 시무산으로 벋어내리고, 중앙 뒤에 조례산이 가늠된다.
마근담길에서 지리산 달뜨기능선의 왼쪽 뒤 해발 502.3m 수양산을 어림한다.
마근담길 들녘에 감나무밭이 넓게 자리한다. 오른쪽 뒤에 해발 324.1m 조례산이 가늠된다.
넓은 감나무밭은 지민곶감농원에서 농사하는 듯. 지리산 달뜨기능선이 수양산에서 시무산으로 이어진다.
감나무밭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뒤에 산청성당 덕산공소 천주교회가 있으며, 중앙 뒤에 해발 324.1m 조례산이 솟아 있다.
마근담길 왼쪽에 산청성당 덕산공소가 자리하고, 오른쪽에는 산청군정보화농업인협회 '둘레길 굼벵이'가 자리한다.
산청성당 덕산공소 출입구 전신주 옆에 '지리산 8둘레길 황토민박 감익는 풍경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달빛 품은 마당에 하룻밤 머무시며 근심 한 대 내려놓고 편안한 말 챙겨가시길. 곶감할메"
산청성당 덕산공소 출입구에 '천주교마산교구 산청성당 덕산공소' 표지판이 서 있다.
천주교마산교구 산청성당 덕산공소가 자리하고 왼쪽 뒤 마을에 '감익는 풍경' 민박이 있는 것 같다.
산청성당 덕산공소 맞은편 서쪽에 산청군정보화농업인협회 '둘레길 굼벵이'가 자리한다.
마근담길을 따라 엑기스 전문 지리산흑염소 출입구를 지나 내려간다.
마근담길 옆 마근담천 서안(西岸)에 쉼터정자가 설치되어 있다.
마근담길을 따라 산청성당 덕산공소와 둘레길 굼벵이, 지리산흑염소 앞을 지나 쉼터정자 앞으로 내려왔다. 지리산 달뜨기능선의 바로 앞 수양산과 맨 뒤의 벌목봉을 어림한다.
마근담길 쉼터정자 맞은편에 당집이 있으며, 뒤쪽에 보이는 산은 해발 961m 구곡산(九谷山)일 것이다.
당집 천지신궁은 신녀 해명보살과 불사대신 작두장군이 운영한다. 깃대 왼쪽 뒤에 달뜨기능선의 수양산이 보인다.
마실정 왼쪽 뒤에 지리산 태극종주 달뜨기능선의 마지막 산봉 해발 402.7m 시무산이 솟아 있다.
마근담길을 따라 천지신궁 당집과 마실정을 지나왔다. 지리산 달뜨기능선의 벌목봉이 중앙 맨 뒤에, 수양산이 오른쪽에 보인다.
안마근담에서 시작된 마근담길이 앞에서 남명로와 만나며 끝난다. 중앙에 해발 324.1m 조례산이 솟아 있다.
남명로가 마근담천의 덕산교를 건너 동남쪽으로 이어가고, 중앙 뒤의 해발 520.8m 함미봉이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와 단성면 자양리,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걸쳐 있다.
남명로를 따라 남명기념관 방향으로 올라간다. 맨 왼쪽에 구곡산,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이 보인다.
남명로를 따라 덕산꽃다육식물과 청수당한약방을 지나 남명기념관 앞으로 이어간다.
남명로 320호 민가 벽에 정치적 신념이 적힌 알림판이 붙어 있다. 건물에 당호나 현판은 붙어 있지 않다.
○우리 민중 민족 자유 평등 연구 ○孝悌忠信의 수신, 여민 겸선천하지가 ○성취적 지위가 존경받고, 약한 사람이 조금 더 인간답게 사는 참된 세상 ○높고 어렵고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일상 생활 속에서 밝고 올바른 마음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고 어른을 받들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신실하고 미더우며, 굳세고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라 ○오직 민중만이 천하의 주인이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교통 ○순수재야 혁명투사 ○아름다운 우리 조국 역사 산천은 바로 눈앞에 생생 하건만 왜 이다지도 이토록 눈물겨워 하는가. 민중이 주인 되어 정의롭고 진정한 민중·민족 정권 창출하여, 인간답게 사는 참된 세상을 위해.
남명로 왼쪽에 산천재, 그 맞은편에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정면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이 보인다.
산천재 소공원 왼쪽 담장 앞에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 안내판과 상징조형물 벅수가 설치되어 있고, 소공원 뜰에 '남명 선생 영전에 내린 선조대왕 제문 국역비'가 서 있으며, 중앙 뒤에 구곡산이 보인다.
남명기념관 주차장이 넓다. 왼쪽에 산청 조식 유적(山清 曹植 遺蹟)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뒷산에 남명 묘소가 있다.
남명기념관 주차장에서 지리산 달뜨기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시무산을 바라보았다.
남명기념관 성성문 왼쪽에 산청 조식 유적 안내판, 성성문 오른쪽 벽에 지리산둘레길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산청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의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사적지이다. 남명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 아버지 조언형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0세가 되어 처가인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고, 48세부터는 고향인 합천 삼가에 뇌룡정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여 그 명성이 더더욱 높아졌는데, 특히 명종 10년(1555)에 내려진 단성현감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산동(현재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72세에 생을 마감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리에는 산천재(山天齋)와 선생의 묘소, 신도비, 여재실(如在室)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정구, 김우옹, 곽재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이곳은 남명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기념관 우측에는 덕천서원과 별도로 문중에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그 뒷산에 묘소가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고종 7년(1870)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20년대에 복원하였다. 서원 안에는 강당인 경의당(敬義堂)과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서원 남쪽 강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추증(追船) : 관리의 사후에 품게나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는 일 **신도비(神道碑) : 임금이나 이품 이상 벼슬을 한 고위관료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하여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비석
남명기념관 성성문(惺惺門) 오른쪽 벽에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남명은 성성자(惺惺子) 방울을 옷깃에 달고, 자신을 늘 경계하고 경의(敬義)를 실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명기념관 뜰 출입문을 성성문(惺惺門)이라 명명한 듯.
지리산둘레길 8구간 탐방을 마치고 남은 시간에 남명기념관과 산천재를 관람한다. 도보여행팀 안내버스는 시천면 사리 원리교 앞에서 오후 3시 50분 출발 예정이다.
남명기념관 뜰 왼쪽에 남명 선생 신도비와 신도비문 국역비, 중앙에 남명 선생의 상(像), 오른쪽에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 국역비와 무진봉사(戊辰封事) 국역비가 있으며, 중앙 맨 뒤에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이 보인다.
왼쪽의 南冥先生神道碑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으며, 오른쪽에 김충렬 교수가 국역한 남명선생 신도비문 국역비가 서 있다.
남명 先生께서 돌아가시자 선비들은 다시 구차해지고 풍속 또한 피폐해지니 뜻았는 이들은 선생을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아직도 義를 귀하게 여기고 利를 천하게 여기며 조용히 물러가는 것을 숭상하고 탐욕을 부끄러워할 줄 아니 선생이 끼친 功德이 실로 크다. 선생은 천품이 絶倫하였다. 아홉 살 때 큰 병을 앓아 모부인께서 근심하시자 도리어 소자가 사나이로 태어난 것은 하늘이 반드시 할 일을 맡기기 위해서일 것이니 어찌 요절할 리 있겠습니까 라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成童이 되어 己卯士禍의 참상을 목격한 후로는 과거에 대한 뜻을 접었다. 다만 부모님 명을 좆아 한두 번 나갔을 뿐이다. 글은 左柳文을 숭상하였다. 하루는 周濂溪가 말한 伊尹의 뜻을 뜻으로 하고 顔淵의 學을 학으로 한다는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山寺로부터 諸生들과 작별하고 돌아와 四書 六經 및 宋代 諸賢들의 책을 읽으며 밤낮으로 깊이 궁구하고 힘써 실천하였다. 손수 先聖과 周程朱 三子의 像을 모사해 모셔 놓고 늘 敬慕의 성의를 표했다. 圭菴 宋先生과 東皐 李相國이 大學과 心經 등을 보내오자 이 책을 받고서부터 두렵기가 큰 산을 짊어진 것 같았다 라고 발문을 쓰고 더욱 實質 공부에 정진하였다. 그 때에 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여 大小尹이 서로 선비들을 모아서 乙巳士禍를 일으키니 선생은 더욱 벼슬에 나갈 뜻이 없어졌다. 이에 科業을 포기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집을 지어 편액을 山川齋라 하고 오로지 進德修業에만 정진하니 경지가 더욱 높고 밝았다. 일찍이 晦齋 선생께서 齋郞으로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뒷날 晦齋가 본 도의 관찰사로 왔을 때 만나기를 청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明宗3년에 특명으로 品階를 뛰어 넘어 두 번이나 主簿에 제수되어 조정에 있던 退溪 李선생이 글을 보내 나오기를 권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丹城현감을 제수하자 사양하는 글을 올렸다.
21년에 判官으로 승진시켜 두 번이나 부르고 이어 약재와 음식을 내리니 사은하는 예로 비로서 소명에 응하였다. 王이 引見하면서 治道를 묻자 선생은 그 길은 책 속에 소상히 밝혀져 있으니 臣의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군신간의 情義가 서로 부합된 뒤라야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백성들의 곤궁한 慘狀을 極陳하였다. 왕이 또 학문하는 길을 묻자 반드시 心得한 바가 있어야 하며 한갓 남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또 제갈공명에 대해 묻자 공명과 漢昭烈이 함께 10년이나 경영을 하였음에도 끝내 한나라를 부흥시키지 못했으니 신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다음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宣祖 초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면서 時弊 열 가지를 진언하였다. 2년에 또 부름을 받자 글을 올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임금 스스로가 먼저 善에 밝고 身心을 誠正하게 하여야 하는데 그 공부는 반드시 敬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라고 하고 이어 胥吏의 적폐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胥吏亡國論을 極言하였다. 宗親府 典籤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해에 큰 기근이 들어 왕은 곡식을 보내 위로하였다. 이에 사은소를 올리면서 여러 번 獻策하였으나 아직도 실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채근하니 그 말이 直截하고 강개하였다. 선생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왕이 御醫를 보내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시니 隆慶 壬申(1572) 2월 8일이다. 지난 겨울 木稼(겨울 나무가 서리나 비에 젖었다가 혹한이 몰아오자 하얗게 얼어붙는 특이한 현상으로 이는 현인이 죽을 때 나타나는 현상)의 이변이 있었고 중국의 星官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小微星이 빛을 잃었으니 너희 나라의 高人이 머지않아 세상을 뜰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슬프다 哲人의 태어남과 죽음이 어이 우연하다 하겠는가. 4월 6일 山川齋 뒷산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氣宇가 岐嶷淸秀하고 氣像이 嚴毅正大하였다. 莊敬한 마음을 항상 그 속에 품고 태만한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깊숙한 방에 홀로 있을 때도 등어깨를 곧게 세우고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고 묵묵히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하니 방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학문은 오로지 敬義로써 요체를 삼고 좌우 집기에 銘을 새겨 警省하였다. 이렇게 주위에 접하는 모든 것을 수양공부의 성찰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神氣가 峻潔하고 용모가 俊偉하며, 그 극기 공부는 一刀兩段하듯 명쾌하였다. 그러나 處事에 신중하여 마치 만 길 벼랑에 서서 깊은 연못을 굽어보듯 조심하면서, 결코 주저하거나 구차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집안 사람들은 감히 쓸데없이 떠들거나 시시덕거림이 없어 집 안팎이 언제나 숙연하였다.
선생은 孝順과 友愛가 돈독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공손하고 조심하며 禮로써 봉양하여 늘 마음을 편하고 기쁘게 해드렸다. 喪을 당함에 피눈물로 애통해하고 모두 侍墓를 살았으며, 노복들에게 사소한 일로 와서 고하지 말라 경계시키고, 조문객을 맞이하면서 다만 엎드려 곡하며 答拜할 뿐 앉아서 말하지 않았다. 아우 桓과의 우애가 지극해서, 늘 肢體는 헤어질 수 없다 하여, 같은 담장 안에 함께 살면서 같은 문으로 출입했다. 비록 산림에 물러나 살지만 시운을 슬퍼하고 나라를 걱정함이 至誠에서 우러나와, 매양 깊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픈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니, 이를 아는 이가 없었다. 벗을 사귐에 반드시 살피어 그 사람됨이 뜻에 맞지 않으면 비록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오물 대하듯 물러섰다. 가장 깊이 사귄 이로는 成聽松·大谷·東州·李黃江·金三足堂 등 여러 군자들이 있었는데, 그 서로 좋아함이 마치 金石같이 굳고 芝蘭처럼 향기로웠다. 퇴계 선생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일찍이 퇴계에게 글을 보내 태산북두처럼 우러렀다 라고 하였고, 퇴계는 선생을 군자 出處의 義를 온전히 지킨 분이다 라고 평하였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칠 때 그 재질에 따랐고, 질문이 있으면 微言을 정밀히 분석하고 大義를 소상히 밝혀, 듣는 이가 확연히 깨달아야 그쳤다. 일찍이 오늘의 폐단은 높고 먼 데로 달려가기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살피지 않는 것이 병이다. 성현의 학문은 그 端初가 日用事物의 사이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혹여 이를 버리고 차례를 뛰어 넘어 곧바로 性理의 깊은 곳을 기웃거리니, 이는 盡性至命을 孝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어려운 말과 깊은 뜻은 先儒들이 이미 서로 계승해가며 밝혀 놓았으니, 책을 읽는 자는 알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爲己之實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책을 읽다가 긴요한 대목에 이르면 반드시 두세 번 반복 음미해서 밝게 깨우쳐야 그쳤고, 이를 두 책으로 엮어 學記 라고 이름하였다. 그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한다.
왕이 祭文과 賻粟을 내리고 大司諫으로 贈職하였다가 뒤에 領議政에 더하고 諡號를 文貞이라 하였다. 晉州 三嘉 金海 등 여러 읍의 儒林들이 모두 사당을 짓고 제향을 올렸다. 선생의 성은 曺씨요 휘는 植이요 자는 楗仲이며 본관은 昌寧이다. 시조 휘 瑞는 고려 태조의 외손이니 그로부터 사대부가 끊이지 않았다. 小監公 휘 大莊은 선생의 6대조이고, 고조 휘 殷은 中郎將이요, 증조 휘 安習은 생원이요, 조 휘 永은 벼슬하지 않았다. 考 휘 彦亨은 과거에 올라 내외 요직을 거치면서 맑은 이름을 떨쳤다. 妣는 仁川 李씨 忠順衛 휘 菊의 따님이다. 弘治 辛酉(1501) 6월 26일 선생은 三嘉 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夫人은 曺씨요 父는 琇이니 南平人이다. 아들 次山을 나았으나 요절했고, 딸은 萬戶 金行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난 아들 次石, 次磨는 현감이고 次矴은 護軍이다. 金行의 두 딸은 參判 金宇顒과 監司 郭再祐에게 시집갔다. 次石의 아들 晉明은 察訪이고, 次磨의 아들은 敬明, 益明, 復明이고, 딸은 參奉 鄭興禮에게 시집갔다. 次叮의 아들은 浚明(生員),克明이고, 딸은 鄭頠에게 시집갔다. 晉明은 설을 낳고, 敬明은 曗, 晼, 暾, 晤를 낳고, 益明은 晬, 장을 낳고, 復明은 ?, ?를 낳고, 浚明은 진, 昪, 暑를 낳고, 克明은 景․晏을 낳았다. 진, 昪, 晏 등은 모두 생원이다. 내외 曾玄孫 약간 명이 있다.
나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에 태어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한 때의 어진 이들의 定論을 듣고 상상해서 헤아리건대, 천길 벼랑에 우뚝 서서 해와 달과 빛을 다투던 기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凜然히 畏敬케 하며, 그 綱常을 붙들어 세우고 風敎를 떨치던 여운은 아직도 퇴폐한 풍속과 악습을 물리치고 사람이 정도를 찾아가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임종하는 순간에도 오히려 敬義로써 제자들에게 부탁하니, 이는 이른바 숨이 붙어 있는 한 조금도 해이함을 용납하지 않는다(一息尙存, 不容少懈)는 강인한 생명 정신이 아니던가. 맹자는 성인은 百世의 스승이니, 伯夷와 柳下惠가 그런 분이다 라고 하였고, 朱夫子는 이 말을 인용하여 東溪 高公을 일컬었다. 만일 夫子가 다시 일어난다면, 지금 선생에게도 이 말을 쓰지않았겠는가. 뒷날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에 銘을 적는다.
하늘이 주신 고결한 성품, 가슴에는 한 점 티끌도 없이 쇄쇄락락하였어라./ 옛 것을 신봉하고 義를 숭상하여, 名節로 스스로를 갈아 橫流를 막는 砥柱되어 우뚝 섰네./ 山間에 물러나 집을 짓고, 唐虞를 노래하며 天地를 俯仰하니, 이것이 군자의 樂道가 아니던가/ 오직 敬과 義만이 聖師의 가르침이라 하여 크게 窓壁에 써 걸고 行道의 지표로 삼았다./ 늘 마음을 경건히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하늘의 上帝 모시듯 아침저녁 늘 삼가고 또 부지런했다./ 왕이 옆자리에 두고자 했지만 비연히 일어나 산림으로 돌아와 初志一貫 聖學에 복응하였다./ 敬義夾持, 克己工夫에서 기른 毅勇은 용과 범을 포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學德과 聲名이 드높아지자 사림은 北星을 環拱하듯 景仰하고 傾倒하였다./ 山頹와 木稼의 災異가 일어나고, 少微星이 빛을 잃는 징조가 있었으니, 哲人의 隱顯이 어찌 우연하다 하겠는가/ 높은 산은 이미 무너지고 나라의 典型이 없어졌으니, 선비들은 矜式할 바를 잃었도다./ 오직 그 風聲은 남아 頑惡한 이를 청렴케 하고 懦弱한 이를 일으켜 세우니 나라의 명맥이 힘입어 영원하다./ 頭流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德山江은 大地를 가르고 흘러, 선생의 道學은 땅처럼 두텁고 바다처럼 깊도다./ 천만 년 역사는 가도 인물은 이어져 올 것이니, 선생의 이름은 더불어 하염없으리!
서기 2006년 5월 일. 恩津 宋時烈 撰(지음), 延慶 金忠烈 譯(번역), 12대손 曺玉煥 竪(세움).
왼쪽에 남명 선생이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사직하며 명종께 올린 상소문인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 국역비, 오른쪽에 남명 선생이 선조대왕께 올린 상소문인 '무진봉사(戊辰封事)' 국역비가 서 있다.
선무랑宣務郞으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臣 조식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 참봉에 제수하셨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후 주부主簿에 두 번씩이나 제수하셨습니다. 이번에 다시 현감에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감히 대궐에 나아가 전하의 은혜에 사례 드리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장인匠人이 재목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깊은 산과 큰 못 어느 곳이든 재목이 될 만한 나무는 버리지 않고 취하여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대장大匠이 나무를 구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쓰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하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책무 때문이지만 신은 맡은 일을 감당치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이 때문에 감히 큰 은혜를 사사로이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전하의 측석測席 아래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지금 신이 나이가 육십에 가깝지만 학술이 성글고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의 병과(丙科)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과거에 급제하려고 노력한 십여 년 동안 세 번이나 낙방하고 물러났으니 애초부터 과거를 일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질이 급하고 마음이 좁은 평범한 백성에 불과할 뿐이니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는 아닙니다. 사람의 선악은 결코 과거를 구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보잘것 없는 신이 분수에 넘치는 헛된 명성을 얻어 추천관원에게 잘못 알려졌고 추천관원은 신의 헛된 명성만 듣고 전하에게 신을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하여 반드시 도(道)가 있는 것은 아니며 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신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만 신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재상들도 신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모르고 등용했다가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으로 출세하는 것보다는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국사는 이미 그릇되었습니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고 인심도 이미 멀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큰 나무를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라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나운 회오리 비바람이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고 지내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조정에 충성스럽고 뜻있는 신하가 없는 것은 아니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나라 일에 힘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사방을 둘러 보아도 손쓸 곳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뇌물로 재물만 불리면서 물고기의 배가 썩어가는 근본 병통을 아무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들은 연못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들은 벌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있을 데가 없다는 이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은 생각을 하면서 가슴을 억누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밤이면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며 지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은 깊으시나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나이 어리시여 선왕의 고사(孤嗣)일 뿐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강물이 마르고 곡식이 비오듯 내렸으니 이 무슨 조짐입니까. 음악소리는 슬프고 옷은 소복이니 형상에 이미 흉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아무리 주공(主公)과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한 자가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초개와 같이 보잘것 없는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분의 일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털끝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을 사고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둘째 이유입니다. 신이 보건대 요즘 변방에 왜구의 변란이 생겨 여러 대신들이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20년 전에 터질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지 하루저녁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민심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장수다운 장수가 없고 성에는 군졸다운 군졸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구에 대한 제대로 된 대비책도 없어 적들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 것이니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도 대마도의 왜구가 몰래 향도(向導)와 결탁하여 만고에 끝없는 치욕을 끼쳤는데도 왕의 신령한 위엄을 떨치치 못해서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듯이 성(城)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는 조정에서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은 주(周)나라 예법보다도 엄하면서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宋)나라보다도 더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쪽 오랑캐를 평정하신 일을 보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장과 복부에 생긴 병은 아닙니다.
심장과 복부의 병은 걸리고 막히여 위아래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대부(卿大夫)들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분주하게 수고하지만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질 뿐입니다.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고 국사를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사나 형벌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말이 땀을 흘리듯 노심초사하여 만 마리의 소가 갈 만한 넓은 땅에서 공(功)을 거두는 것도 그 기틀은 진실로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국가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 날 크게 깨닫고 분발해서 학문에 힘써 홀연히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교화시켜 삶을 향상되게 하는 신민(新民)의 도리를 얻게 된다면 그 속에 모든 선(善)이 갖추어 있고 모든 덕화도 연이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실행하신다면 나라를 고르게 다스릴 수 있고 백성을 화합하게 할 수 있으며 위기도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요체를 보존하면 모든 사물을 거울처럼 정확하게 볼 수 있고 저울처럼 공평하게 헤아릴 수 있어 사특한 생각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한 진정(眞定)이란 것도 이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을 뿐이니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불교는 인사(人事)를 행하는 데 발을 붙일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 유가에서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도를 좋아하시니 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는 우리 유가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렸을 때에 잃어버렸던 집을 찾아와서 부모와 친척 그리고 형제와 친구를 만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는 것이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자신의 몸을 닦는 것으로 하신다면 조정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소신과 같은 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겉만 보고 취한다면 잠잘 때 이외는 모두 속이고 배신하는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이 경우에도 옹졸하고 보잘 것 없는 신 같은 자가 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훗날 전하의 덕화가 왕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신다면 신도 마부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어찌 전하를 섬길 날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심(正心)으로써 신민(新民)의 요체로 삼으시고 수신(修身)으로써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를 밝게 살펴주소서. 신 조식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명종실록 十九권 명종 十년(一五五五 을묘) 十一월 十九일. 선조실록 六권 선조 五년(一五七二 임신) 二월 八일. 국역비 건립추진위원장 덕천서원 위원장 이현재李賢宰. 번역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원장 이성무李成茂. 건립 남명학연구원 이사 十二대손 조옥환曹玉煥. 2009년 10월 9일
남명선생이 선조대왕께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 국역비를 옮긴다. 봉사(封事)는 왕에게 밀봉하여 올리는 의견서를 이른다.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曹植은 진실로 황공하여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주상 전하께 상소하나이다. 엎으려 생각하건대 소신은 노쇠한 병이 점점 더해서 입은 음식 맛이 없고 몸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르시는 명을 거듭 내리시니 길 떠날 거마를 기다렸다가 떠나는 것도 오히려 임금을 뒤로 하는 것이어서 신의 마음은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 같아 길을 바라보기만 할 뿐 나아가기가 어 렵습니다. 실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성은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알기에 감히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말을 다해 주상 전하께 올립니다. 엎드려 보건대 주상께서는 높은 지혜의 자질을 타고 나셔서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시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백성과 社稷의 복입니다. 그런데 백성을 잘 다스리는 도는 다른 데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요점은 임금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이른바 선을 밝힌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함을 이름이요 몸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몸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천성 안에는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니 仁義禮智가 그 본체이고 모든 善이 다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마음은 이치가 나오는 주체이고 몸은 이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함은 장차 쓰려는 것이요 그 몸을 닦음은 장차 도를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하는 바탕이 되는 것은 글을 읽으면서 의리를 강명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그 옮고 그름을 찾는 것입니다. 몸을 닦는 요체가 되는 것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안으로 본심을 보존하고 마음속에 이미 발한 혼자만 알고 있는 생각을 악으로 흐르지 않도록 신중히 하는 것이 天德이고 밖으로 일을 살펴서 그 행동에 힘쓰는 것이 王道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으며 가슴속에 본심을 간직하고 밖으로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가장 큰 공부는 곧 반드시 敬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이른바 경이란 것은 정제하고 엄숙히 하여 항상 마음을 깨우쳐서 어둡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의 주인이 되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안은 곧고 밖은 방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이른바 敬으로써 몸을 닦는다 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敬을 주로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없고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 없으며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면 사물의 변화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에서 시작해서 가정 국가 천하에 미치는 것은 다만 선과 악의 나뉨을 밝혀 자신이 성실해지는 데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고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는 것이 또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곧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에게 돌이켜 보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만 많은 것은 곧 귀에 발린 학문입니다.
天花가 어지러이 떨어지니 修身을 할 필요가 만무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과연 경으로써 몸을 닦으면서 하늘의 덕에 통하고 왕도를 행하여 지극한 선에 이른 뒤에 그곳 에 머무신다면 선을 밝히는 일과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일이 모두 진전이 있어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일이 아울러 극진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정사와 교화에 베푸는 것은 바람이 일어나자 구름이 몰려가는 것 같으니 아래 백성이 본받는 것이 반드시 이보다 더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王者의 학문이 간혹 儒者와 다른 것은 행동하고 처신하는 것이 九經을 더욱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주역이란 책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時宜를 따른다는 뜻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시대로 말하자면 왕의 신령스러움이 시행되지 않고 정치는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일이 많습니다. 명령이 나오면 오직 거꾸로 행하여 기강이 서지 않은 지가 여러 대나 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임금의 위엄을 떨치지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임금의 위엄을 떨치지 않으면 죽처럼 온통 흩어져 버린 형세를 모을 수가 없으며 큰 장마비로 적셔주지 않으면 칠 년 가뭄에 시든 풀을 살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운세를 걸머질 뛰어난 보좌를 얻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한마음으로 공경하고 협력하기를 한 배를 탄 사람과 같이 한 다음이라야 무너지고 타들어가고 목마른 듯한 형세를 조금이나마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취하는 것은 솜씨로 하지 않고 반드시 몸으로 해야 합니다. 몸이 닦이지 않으면 저울이나 거울처럼 공평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기의 견해가 없어서 선악을 분별치 못하니 사람을 등용하거나 버리는 데 실수하게 됩니 다. 또 옳은 인물이 쓰이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도를 다스리는 일을 이룩하겠습니까. 옛날에 남의 나라 염탐을 잘하던 사람은 그 나라 국세의 강약을 보지 않고 사람을 얼마나 잘 쓰고 못 쓰는가를 보았습니다. 이것으로써 천하의 일이 비록 극도로 어지럽고 극도로 잘 다스려지더라도 모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다른 데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닦는 것이 다스림을 펴는 근본이며 어진 이를 쓰는 것이 다스림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몸을 닦는 것은 또 사람을 쓰는 근본이 되기도 합니다. 성현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어찌 자신을 닦고 사람을 쓰는 것 밖에 있겠습니까. 옳은 인재를 쓰지 않으면 군자는 초야에 있고 소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권신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고 戚里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으며 부인과 환관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胥吏가 나라 일을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정권이 대부에게 있어도 오히려 옳지 못한데 하물며 서리에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당당한 제후의 국가로써 조종의 이백 년의 업적에 힘입어 공경대부가 가지런히 앞뒤에서 서로 따르는데 천한 서리에게 정권을 돌려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쇠귀에 경을 읽듯이 가벼이 흘려버릴 말이 아닙니다. 軍民에 대한 모든 정사와 국가의 기밀이 모두 서리의 손에서 나오므로 포목과 곡식을 관청에 바치는 데에도 뒷길로 웃돈을 바치지 않으면 통하지 아니합니다. 안으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은 밖으로 흩어져 열 명 가운데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고을을 자기 물건처럼 생각하여 문서를 만들어서 교활하게 자기의 자손대대로 전합니다. 지방에서 바치는 것을 일체 가로막고 물리쳐서 한 물건도 상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물을 가지고 바치러 갔던 자가 그 온가족의 가산을 다 팔아 바쳐도 그것이 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개인에게로 돌아갑니다. 백 곱절이 아니면 받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해마다 그처럼 계속 바칠 수가 없어 도주하는 자들이 잇달아 생깁니다. 창건이래로 고을의 백성이 바치는 것을 문득 생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 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온 나라의 부를 누리셔야 하는데 도리어 천한 서리들이 대신 바치는 물자에 의지하리라고 생각이나 했습니까. 王莽과 董卓 같은 간악한 자들도 이런 적은 없었으며 비록 망해가는 나라에서도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임금의 內帑庫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어 나라에는 저축된 것이 없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고 도적이 도성에 가득합니다. 나라는 한갓 빈 그릇만 끌어안고 있어 다 썩어서 뼈만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서 있습니다. 조정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땅히 목욕재계하고 이들을 함께 토벌해야 할 것입니다. 혹 힘이 모자라면 사방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잠자고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히 임금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그런 좀도적이 있으면 장수에게 명을 내려 죽이고 사로잡도록 하고 하루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서리가 도둑이 되고 온갖 관리가 한 무리가 되어 심장부를 차지하고 앉아 國脈을 모두 결단내고 있으니 그 죄가 하늘과 땅의 神에게 제사지낼 희생을 훔쳐내는 것보다 더한 죄인데도 법관이 감히 묻지도 못하고 형벌을 맡은 司寇도 감히 따지지 못합니다. 혹 한낱 司員이 조금 규찰코자 하면 그 사원의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어 여러 벼슬아치들은 속수무책으로 겨우 녹봉만 타먹고 예 예 하며 물러납니다. 저들이 믿는 바가 없으면서 어떻게 이처럼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날뛸 수 있습니까. 초나라 왕이 이른바 도둑을 총애하여 권세가 있으면 쫓아낼 수 없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교활한 토끼들과 같이 세 굴을 가져서 저마다 은신처를 마련하여 냇가의 조개처럼 딱딱한 껍질로 방패막이를 하고 있습니다.
남몰래 전갈의 독을 품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 온갖 방법으로 꾸미니 사람이 다스릴 수 없고 법으로도 형벌을 더할 수 없으며 城과 社稷의 쥐가 되어 있어서 이미 불을 때거나 물을 부어 쫓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 굴이 되어 주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며 딱딱한 껍질이 되어 주는 자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어찌하여 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크게 성을 내시어 하늘의 기강을 한 번 떨치시고 재상과 얼굴을 맞대고 그 까닭을 추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결단하시기를 순임금이 四凶을 제거하던 것과 공자가 少正卯를 베던 것과 같이 하시면 능히 지극히 악을 미워하는 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크게 두려워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言官이 논박하여 마지못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 부득이 구차하게 따라간다면 善惡의 소재와 是非의 분별을 알지 못해서 임금의 도리를 잃게 됩니다. 어찌 임금이 그 도리를 잃고서 능히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나의 밝은 덕이 이미 밝으면 마음이 거울과 같이 밝아져 비치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덕과 위엄이 베풀어지면 초목도 모두 쏠리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 신하가 두려워 다리를 떨면서 달려와서 왕명을 받들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한 치인들 간사한 흉계를 품을 수 있겠습니까. 정사를 어지럽힌 대부에게도 오히려 일정한 형벌이 있어서 저 尹元衡의 세도도 조정이 바로 잡았는데 하물며 이따위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허리와 목을 베는 데 형벌기구인 齊斧에 기름칠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레가 치면서 소낙비가 한번 쏟아지면 천지가 해갈되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위에서 몸이 닦여지면 아래로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조정에 포진해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구인들 세상을 잘 이끌어갈 보좌관이 아니겠으며 누구인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나라 일에 힘쓰는 어진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간신들이 자기와 어긋난 신하는 제거하면서 나라를 좀먹는 간악한 서리들은 용납하고 있으니 이는 자신은 위하되 나라는 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명철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처신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걱정스러운 세상을 즐거운 듯 살아갑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일을 힘써 노력하지 않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명한 바가 있는데 사람들이 능히 그것 을 이겨내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이 홀로 깊은 산중에 살면서 굽어 민정을 살피고 우러러 천상을 보며 탄식하고 울먹이다가 잇달 아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자주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 조금도 임금과 신하로서의 긴밀한 의를 맺은 적이 없는데 무슨 은택에 감격해서 탄식하 며 눈물 흘리기를 그치지 못했겠습니까. 교분은 얕은데 말은 심각하여 실로 죄가 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 땅의 곡식을 먹어온 지 여러 대째 된 백성이고 더구나 세 조정의 徵士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은 부질없이 나라 걱정을 하는 주나라 때 베짜는 과부에 비유될 수 있으니 소명이 내려진 오늘 어찌 한 말도 올리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일에 위급한 것을 구제해야 한다고 아뢴 일은 아직도 전하께서 급하게 여겨 불에 타는 것을 구원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는 것과 같이 하신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응당 늙은 선비가 자신의 곧음을 드러내는 말이라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기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물며 이번에 말씀드린 임금의 덕에 관한 이야기는 옛사람이 이미 이야기한 途轍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도철로 말미암지 않으면 갈만한 길이 다시 없습니다.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고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것은 배 없이 바다를 건너는 것 같아 다만 저절로 빠져 죽을 뿐입니다. 이번에 아뢴 것은 전일에 말씀드린 것보다도 더욱 급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저의 말을 버리시지 않고 너그럽게 용납하신다면 제가 비록 천리 밖에 있더라도 전하의 机筵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누추한 늙은이의 얼굴을 대하신 후에야 신을 등용했다고 하겠습니까. 또는 듣건대 임금을 섬기는 자는 임금을 헤아려 본 뒤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정말 전하는 어떠한 임금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저의 말을 좋아하지 않으시면서 한갓 저를 보려고만 하실 뿐이라면 섭공葉公이 용을 좋아하던 일이 될까 두렵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밝게 보셨는가 아둡게 보셨는가에 따라 앞으로의 다스림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점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이 점을 살피소서. 삼가 소를 올리나이다.
선조가 답하기를 전일의 아뢴 뜻을 내가 항상 자리에 두고 살펴보고 있노라. 이 격언을 볼 때마다 더욱 재주와 덕이 높은 것을 알겠도다. 내 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응당 유념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알라 하셨다.
선조실록 2권 선조1년(1568) 무진년 5월 26일. 국역비 건립추진위원장 덕천서원 원장 이현재李賢宰. 번역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전 원장김충렬金忠烈. 건립 남명학연구원 부이사장 十二대손 조옥환曺玉煥. 2010년 8월 3일
남명기념관 앞 뜰 왼쪽의 남명 선생의 입상과 신도비 등을 살피고 남명기념관으로 들어간다.
남명기념관은 2001년 남명 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선생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4년 8월에 개관하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이 있으며, 외부 공간에는 신도비, 남명석상, 여재실 등이 있다. - 산청군청 문화관광
전시실은 세 곳이 있고, 제1전시실 입구 복도 벽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座右銘(좌우명), 신명사도(神明舍圖), 남명학맥도 등이 게시되어 있다.
1.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진실함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움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庸信庸謹(용신용근) 閑邪存誠(한사존성) 岳立淵冲(악립연충) 燁燁春榮(엽엽춘영) - 남명 선생의 좌우명
2.신명사도(神明舍圖)는 남명 선생이 마음(神明)을 잘 다스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치를 도표로 구성한 것이다. 도표 양쪽에 적혀 있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는 남명 사상의 요체로,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敬이고,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義라는 뜻이다.
3.신명사도(神明舍圖)란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도덕의 주체인 인간 자신을 善性의 본체로 위치시키고 그런 다음 밖에서 유입되는 惡으로부터 그 선성을 보호하며, 나아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미리 잘라내고, 아울러 악을 극복함으로써 선성을 인간의 생명 활동과 도덕 실천의 광장으로 확충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는 도덕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다툼을 전쟁에 견주어서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산천재가 완성되자, 남명은 신명사도를 자리 옆에 걸어 두고 자주 보면서 마음을 수양하였다. 또한 신명사명(神明舍銘)을 지어 신명사도(神明舍圖)의 심오한 뜻을 밝혔는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이 마음 수양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 나무사랑 티스토리
4.‘신명사도(神明舍圖)’는 ‘마음(신명)의 집(사)’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은 성(城) 모양으로, 내 마음 지키기를, 죽음을 각오한 임금이 외적에게서 도성(都城) 지키듯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城)을 둘러싸고 이(耳)·목(目)·구(口) 세 관문이 그려져 있다. 유혹의 통로가 귀, 눈, 입이기 때문이다. 남명 선생은 강렬한 위기의식을 갖고 마음을 잘 지키기 위한 기초로서 정좌 수련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심식상고(心息相顧)’라 하여 정좌 수련 중에서도 수식관 곧 호흡 명상을 중요시했다. - 손병욱 교수.
5.신명사도(神明舍圖)는 마음을 다스리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방법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성벽의 안쪽, 관문, 바깥 그리고 설명글인 신명사명(神明舍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비유하여 보여주고 있다. '신명사도' 요지는 마음이 발현하기 전에는 경(敬)을 통한 존양(存養), 마음이 발현하는 때에는 의(義)를 척도로 하는 성찰(省察), 사욕의 기미가 발견되면 즉석에서 물리치는 극치(克治), 이렇게 삼단계 수양론을 통해 지선(至善)에 이르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성곽내는 인간의 신체를 의미하는데, 주재자인 태일군이 머무는 집이 신명사이다. 그의 정사는 천덕과 왕도이며, 사직과 운명을 함께 하기 때문에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 5자를 표기하였다. 성곽내는 조정의 일로 총재가 관장하는데, 경을 통한 존양이 근본이므로 그 이름을 ‘경(敬)’이라 했다. 성곽외는 신체 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 마음이 발현될때에는 마음의 기미를 잘 살펴야 하는데, 입·귀·눈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관문으로 표기하여 성찰을 강조했다. 그 담당자가 백규(百揆)이기 때문에 그 옆에 ‘치찰(致察)’이라 하였다. 세 관문에는 대장기(大壯旂)가 펄럭이며 ‘심기(審幾)’라 표기해 놓았는데, 기미를 엄정하게 살피는 것을 말한다. 그 옆에 병기한 ‘극치(克治)’는 사욕의 기미가 발견되면 즉시 극복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대사구(大司寇)다. 경을 통해 존양하고, 의를 척도로 성찰하고, 사욕을 극복해 물리치고 나면 지선의 경지에 이르러 머문다는 뜻이다. - 네이버블로그 산청군문화관광 해설 산해모
제1전시실 정면에 한눈에 보는 남명의 삶과 남명 사상의 기틀, 남명 선생의 초상화가 전시된다. "제1전시실은 남명 선생이 실천하는 학문으로의 전환점이 된 서적들과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 등 남명의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깨달음으로 얻은 정진의 방향 :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던 남명은 원나라 학자 노재魯齋 허형許銜의 "이윤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연의 학문을 배워서, 벼슬에 나가면 유익한 일을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할 것이니, 벼슬에 나아가서는 하는 일이 없고, 산림에 처해서는 지키는 바가 없으면, 뜻한 것과 배운 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라는 대목을 읽고, 관직을 얻어 입신양명하기 위한 과거공부보다 더 원대한 공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육경과 사서 및 송시대의 대학자들이 남긴 글들을 공부하였다. ●남명사상의 기틀 : 16세기 조선 성리학계에는 이기론理氣論 등 관념적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가 시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남명은 성현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인격 완성이 학문의 근본 목적임을 깨닫고 가르친 남명은 정신 내면을 단련하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공부에 정진하였다. 공자·주렴계·정명도·주자 4성현을 모범으로 삼고자 한 남명은 이들의 초상화를 병풍에 그려 감실에 모셔놓고 아침마다 우러러 절하였다.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극진한 정성을 기울였다.
남명의 자취에는 산천재를 짓고 지은 시(徳山卜居)와 칼자루에 써서 장원한 조원에게 주다(書劍柄贈超壯元瑗)가 영상과 함께 전시되며 오른쪽 경의사상 게시판 아래에는 남명집과 성성사 방울, 경의검이 전시된다.
●산천재를 짓고 지은 시「徳山卜居덕산복거」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有餘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 다만 천왕봉이 상제의 거처에 가까움을 사랑하였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거나,/ 은하수같이 맑은 물 십리이니 마시고도 남으리. ●칼자루에 써서 장원한 조원에게 주다「書劍柄贈超壯元瑗 서검병증조장원원」离宮抽太白/ 霜拍廣寒流/ 牛斗恢恢地/ 神游刃不游 불 속에서 예리한 칼 뽑아내니/ 서리 광채 월궁까지 뻗쳐 흐른다/ 견우 북두 사이의 넓디넓은 자리에/ 정신만 놀게 하고 칼날은 놀지 않게 하게나. ●경의敬義 사상 : 경(敬)을 통한 내적 성찰, 의(義)에 준한 외적 극기 - 경敬과 의義를 해와 달처럼 소중하게 여긴 남명은 경의의 실천을 생활철학으로 삼았다. 경敬과 의義가 남명 사상의 정수이다. '경敬'은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순수한 정신을 찾아가는 수양 방법이다. 몸가짐을 가지런하고 엄숙하게 하며 마음을 한결같이 함으로써 사사롭거나 사악한 마음 [私心·邪心]이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공부가 경敬이다.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고 나와 남의 불의함을 제거하는 공부가 의義이다. 의로운 언행에 집중하여 사심을 없애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므로, 경敬과 의義는 둘로 분리되지 않는다. 남명은 경의敬義의 공부를 위해 성성자라는 방울과 경의검이라는 칼을 찼다. ●패검명(佩劍銘) : 內明者敬(내명자경)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外斷者義(외단자의)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 혁대명(革帶銘) : 舌者泄(설자설) 혀는 새는 것이요, 革者結(혁자결) 가죽은 묶는 것이니, 縛生龍(박생룡) 살아있는 용을 묶어서, 藏漠沖(장막층) 깊은 곳에 감추어 두라.
성성자(惺惺子) : 선생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이름을 '성성자(惺惺子)'로 명명했다. '성(惺)'은 '깨달음'이니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선생은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경의검(敬義劍) : 선생은 한 개의 장도(粧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지닌 장도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고, '외단자의(外斷者義)-밖으로 올바름을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제1전시실을 살피고 제2전시실로 들어왔다. "제2전시실은 남명의 가르침을 따랐던 제자들을 주제로 한 전시실로 제자들의 유물과 미니어처 연출,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의 업적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문장에 담긴 큰 뜻, 남명의 위대한 사상과 이념은 시, 상소문, 편지 등과 후일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저서 <남명집>과 <학기유편>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남명집南冥集 : 남명의 시와 문을 모은 문집이다. 남명은 별다른 수식이나 화려한 장식 없이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문장을 선호하였다. 말보다는 실천에, 외양보다는 진심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의 정신은 문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남명은 몸과 마음을 바꾸는 수양과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학문함의 본령이라고 강조하였다. ●학기유편學記類編 : 남명은 평소 글을 읽을 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구절들을 수시로 기록하여 두었다. 이것을 책자로 만든 것이 <학기學記>인데 일종의 비망록이다. 남명은 번거로운 주석이나 논쟁보다는 선현들의 언행 가운데 요점만을 집약하여 실천에 대비하였다. 이 <학기>를 <근사록近思錄>의 체제에 맞추어 후인들이 편집한 책이 <학기유편>이다. <남명선생학기유편>이라고도 불린다.
◆의로움의 실천, 임진왜란 때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그 빛을 발하다 : 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난 남명은 의義를 중시하고 실천을 강조하였다. 기상은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노장老莊, 천문天文, 병법兵法 등 백가百家의 학문에 통달하였다. 학습을 통해 얻은 실질적인 요점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하게 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의병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등인데 모두 50여 명에 이른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 데다, 벼슬하기보다는 백성이 근본임을 일깨우고, 이론적인 탐구보다는 경의를 실천하는 남명의 학문 정신이 세상에 알려지자, 정구·정인홍·김우옹·정탁 등 한 시대를 빛낸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또한 안동에서 태어나 경상도의 사상계와 교육계를 양분했던 퇴계 이황과는 서신을 왕래하여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16세기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었던 남명 조식(1501~1572)과 퇴계 이황(1501~1570), 두 거유巨儒는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나서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고,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 퇴계는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섰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존경하며 서신으로 깊이 교유하였다.
문무를 아우른 교육자, 깊이 성찰하여 답을 구하고 직접 실행에 옮기다, 하학상달下學上達 : 남명은 매일 매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학문 연구와 실천의 장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일상에서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몸소 실천해야 하며, 이것에 충분히 익숙해진 이후에 형이상학적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을 하학상달 즉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는 천리天理에 통달하는 공부라고 하는데, 남명은 그 순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당시 학자들이 <소학>의 가르침인 '물 뿌리고 비질하는일'조차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이상학 연구에 몰두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실천을 우선 가르쳤고, 당대의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선하려는 학풍을 조성하였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마을 뇌룡정(雷龍亭)은 남명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1883년경 지역 사림들이 토동 냇가에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뇌룡정은 시내를 넓히면서 2007년 중건한 용암서원 앞쪽으로 옮겨 201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남명 선생은 30세 때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밑의 탄동에서 살다가 어머니 상喪을 마치고, 48세(1548년) 때 2월 합천군 삼가면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사(雷龍舍)를 지었다. 뇌룡(雷龍)은 <장자(莊子)> 재유(在宥)편의 ‘淵默而雷聲(연묵이뇌성) 尸居而龍見(시거이용현)’ 문구로,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뢰처럼 소리치고,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초야에 묻혀 있지만 그 덕화德化는 천둥소리처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용의 신비한 조화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뇌룡사(雷龍舍)는 정유재란 때 소실燒失되었고, 1678년 합천군 봉산면 계산리에 용암서원(龍巖書院) 부속건물인 뇌룡정(雷龍亭)으로 재건되었는데,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사라졌다. 1883년 허유, 정재규 등 합천군 삼가면 유림들이 토동 냇가에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뇌룡정(雷龍亭)은 시내를 넓히면서 2007년 중건한 용암서원(龍巖書院) 앞쪽으로 옮겨 201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문무文武를 함께 중시, 敬과 義 사상을 제자들과 함께 행동으로 실천 : 남명은 관리들의 뇌물 수수, 서리의 횡포 등 정치적 부패를 날카롭게 지적하였고, 왜구의 침탈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중심에는 경의 사상이 있었는데, 자신이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가르쳐 인격 함양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후일 정승을 지내게 되는 제자 약포藥園 정탁鄭琢이 진주향교 교수를 이임하면서 인사차 찾아오자 남명은 뒤뜰에 있던 소를 타고 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성격이 급한 제자를 훈계한 것이니, 그가 추구한 학문의 목적은 타고난 기질을 변화시켜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2전시실에서 3전실로 넘어왔다. "제3전시실은 남명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오늘날의 노력과 이에 대한 실천의지를 표현한 공간으로 사숙 및 문인의 유물과 사적의 전경모형을 볼 수 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 : 남명학을 비롯한 선현들의 실천유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 연구하여 한국선비문화의 위상을 정립하며,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연수와 체험 및 인성교육 등을 한다. 선비대학 : 선비의 고장 산청군의 유구한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남명 조식 선생의 선비정신을 익혀 선비문화의 본고장임을 널리 알리며, 군민의 의식제고와 현대사회의 새로운 정신적 지표 마련에 기여한다. 남명선비문화축제 : 조선시대 실천유학의 대가인 남명 조식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셋째주 금, 토요일)에 열리며, 서사극 공연, 의병 출정식, 선비문화체험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남명학연구원 : 남명 선생과 남명학파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고 정리하여 남명학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학술대회 : 남명학 연구자들이 모여 남명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연구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여, 남명의 삶을 조명하고 기리는 행사이다.
남명정신의 계승, 남명 정신은 한강 정구, 각재 하항 등을 비롯해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17세기 남명학파를 형성하고, 경의를 학습함으로써 강력한 실천 지향적 학풍을 형성하였다.
실학사상의 태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다. 정인홍1535~1623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워 그해 10월 영남 의병 도대장(총사관)에 임명되었다. 대사헌에 승진했다가,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을 역임했으며 영의정에까지 올았다. 김우옹1540~1603 : 이조참판,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주요 저서로는 <동강집, <속자치통감강목>, <경연강의>가 있다. 성주의 청천서원에 배향되었다. 남명의 외손녀 사위이기도 한 그는 독립운동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13대조이다. 남명 정신은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졌다. 곽재우1552~1617 :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최초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도별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서로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일컬었다. 1592년 외부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유별한 진주대첩에 일조하였고,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대구 달성군 예연서원에 배향되었다. 남명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김면1541~1593 : 임진왜란을 당하여 700명을 이끌고 기병하였다. 의병도대장으로 경상도 의병을 총괄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고군분투하던 중 역병에 걸려 운명 직전에 "다만 나라있는 줄만 알았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네"라는 말을 남기고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언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령의 도암서원, 남전서원에 배향되었다. 최영경1529~1590 : 조정에서 학행으로 발탁된 오현사의 한 사람이다.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중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후에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선조임금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남명선생을 위해 덕천서원을 건립하는 등 스승에 대한 추모사업에 진력하여 훗날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종도1537~1597 :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침입하자 서울에서 영남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정유재란 때 왜적이 안의를 공격하자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 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으로 들어가 전사하였다.
덕천서원德川書院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남명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9월 初丁-정일丁日에 향사를 지내며, 양력 10월 셋째 주 토요일 남명제南冥祭를 행하고 있다. 제물은 4변邊 4두豆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선생의 수묘사성현병풍手描四聖賢屛風 외 문집 등이 있다. 광해군 원년(1609)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천시민과 함께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과 합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서도 매년 선생을 기리며 제향하고 있다.
제3전시실을 나오면 남명기념관 영상정보실 출입문 벽에 덕산 소재 남명선생 국가사적지 현황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남명기념관 뜰을 살핀다. 왼쪽에 화장실, 성성문 앞에 홍도화가 붉게 피어 있고, 오른쪽에 배롱나무와 느티나무, 은행나무가 자란다.
남명로를 마주하여 남명기념관 건너편의 산천재 공원에 여러 비석과 안내판들이 서 있고, 중앙 뒤에 구곡산이 보인다.
산천재 공원에 '남명 선생 영전에 내린 선조대왕 제문 국역비'(2007년 8월 18일 건립)가 있고, 그 오른쪽 앞 국역비의 안내비(2014년 음력 2월 8일 세움) 뒷면에는, "남명학의 요체 : 내명자경(內明者敬)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敬이고, 외단자의(外斷者義)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義다."가 적혀 있다.
공公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나 자질이 빼어나고 산천의 맑은 기운을 받아 품성이 고결高潔하였다. 난초밭에 난초가 나듯 선비집에 선비가 나니 학문을 닦음에 무리를 뛰어넘고 육예를 익힘에 경지가 새로웠다. 일찍이 대의大義에 눈을 돌려 널리 그 깊은 뜻을 탐구하여 선비의 처세가 출처出處에 있음을 이윤伊尹과 안자顔子에서 배워 그 경지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다. 하늘이 사문斯文을 버리니 선비들은 나아갈 바를 잃어 진실을 호도하고 순박淳朴을 가장하며 세속에 아부하였지만 공은 뜻을 더욱 굳게 지켜 끝내 지조를 잃지 않았다. 문장을 여사餘事로 하고 수행修行에 정진하여 도달한 경지가 이미 높았으나 세상의 명성을 마다하고 고귀한 옥을 품은 채 연하煙霞 자욱한 심산에 은거하였다. 밤낮으로 경전을 탐구하고 강론하니 그 기상은 태산처럼 높고 아득하였으며 학문은 연못처럼 깊고 바다처럼 넓었다. 높은 지표志標는 서릿발처럼 청원清遠하였고 조용한 덕행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홀로 있을 때의 마음은 가을달처럼 티 없이 맑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상서로운 별이 경운慶雲에 투영되듯 표연飄然하면서도 장중하였다. 초야에 묻혀있다 한들 어찌 세상을 잊으랴. 나라 걱정 백성 근심이 척신威臣들보다도 깊었다. 슬프다 이 마음은 바로 요순시대와 같은 군민君民을 염원해서가 아닌가. 선왕先王 초에 도신盜臣이 권력을 빙자백이伯夷를 탐욕한 자로 도척盜跖을 청렴한 자로 전도顚倒하여 사악邪惡으로 정도正道를 엄폐掩蔽하니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고 인륜 도덕이 무너졌다. 누구를 본받고 무슨 근본을 세워야 극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때를 당하여 선왕께서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고 땅을 굽어보며 탄식하셨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 성심聖心을 도우시어 이에 어진 이를 부를 결심을 굳혀 왕명으로 조서詔書와 옥백玉帛의 예물이 초야에 전해지니 공은 이에 감읍感泣하여 나라에 헌신獻身할 것을 다짐하였다. 산림山林의 언론과 민생의 고초를 기탄忌憚없이 밝혀 진언進言이 간절하고 엄정하였다. 누가 말했던가 이는 봉황의 소리라고. 언론이 발해지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재갈이 벗겨지니 간신들의 간담이 서늘해지고 탐관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위엄威嚴은 종묘와 사직에 떨쳐지고 충분忠憤은 조정과 사림士林을 용동聳動시켰다. 사람들은 공을 위태롭다고 걱정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왕 말년에 성심이 더욱 지엄至嚴해지시어 간사한 무리를 내치고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찾으실 때 공을 으뜸으로 부르시어 역마를 여러 번 보냈다. 공은 마침내 백의로 등대登對하여 군주의 본령本令이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에 있음을 진강進講하니 문답이 산울림 같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서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공은 옛 살던 산림을 그리워하여 양책良策만 남기고 돌아가기를 재촉하니 백구白駒를 빙자한 만류도 어려웠다. 내가 대통을 이은 뒤에도 일찍이 공의 명성을 흠모하고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공은 더욱 멀기만 하니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부끄러웠다. 충정이 담긴 상소문은 남이 감히 못할 말을 직간直諫하고 성인聖人의 지극한 치도治道가 담겨있어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상제上帝 대하는 것을 대신하였다. 공이 오기만 하면 나의 팔과 다리로 삼고자 하였는데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 한 번 병들자 소미성少微星이 빛을 잃을 줄이야. 누구를 의지하여 냇물을 건너며 어디에서 다시 높은 산을 우러르랴. 소자小子는 누구를 의지하고 백성은 누구를 본받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구나. 옛날 은둔한 선비들을 돌아보니 그 시대마다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교훈을 넓혀 요순시대를 순박하게 했고 노중련魯仲連은 진秦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였고 엄광嚴老은 한漢나라의 기강을 세웠다. 한 사람의 절개와 지조로도일세의 혼란을 막았거늘 하물며 공과 같이 학덕이 금옥같이 빛나고 기상이 태산처럼 고고孤高함에랴. 비록 몸은 두어 이랑 논밭에 살았지만 세상의 의리와 성패를 가늠하는 저울대와 거울이 되어 한 시대를 밝혔으니 그 공은 백세에 전하고도 남으리라. 사후에 영예로운 증직을 내렸으나 어찌예를 다했다 하리오. 지난 날 선왕께서 세상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시더니 이제 나 또한 그 말을 절감하게 되었으니 한없이 부끄럽도다. 이제 공의 음성과 용모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한을 어찌하리. 남쪽 히늘을 바라보니 산은 높고 물은 멀구나. 하늘은 유일遺逸을 버리시어 대로大老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니 온 나라가 텅빈 듯 본받을 데 없음을 어이 하리. 사신을 보내어 멀리서 사제賜祭하고 잔을 올리니 그 술잔에는 내 마음의 슬픔도 가득하리라. 정령精靈이시여 나의 정성을 잊지 마시고 흠향하소서. 선조5년 2월 8일.
국역비 건립추진위원장 덕천서원 원장 이현재李賢宰. 번역 남명학연구원 김충렬金忠烈. 건립 연구원이사 十二대손 조옥환曹玉煥. 二〇〇七년 八월 十八일
남명 선생 영전에 내린 선조대왕 제문 국역비와 안내비 옆에 국가문화재 산천재(山天齋) 안내판이 서 있다.
서북쪽으로 높이 치솟은 지리산 천왕봉(智異山 天王峯). 그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中山)과 삼장(三壯)으로 나누어 흐르다가 양당(兩堂)에서 다시 만나 덕산(德山)을 이룬다. 덕산에 위치한 산천재는 바로 조선 중기의 큰 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제자에게 전수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선생이 표방한 천왕봉 같은 기개와 학문의 실천성은 그 문하생들에 의해 계승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의 명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을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효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선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게 되었다.
남명 선생은 조선유학의 종사(宗師)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과 병칭되기도 하지만 학풍과 출처가 사뭇 달랐다. 선생의 학문은 당시 주자학 일변도였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주자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국방(國防), 음양(陰陽), 도류(道流)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돈이(周敦頤),소옹(邵雍), 장재(張載), 정이(程頤)등의 학문을 두루 연구한 뒤 원시유학으로 돌아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의 고풍(高風)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던 선생의 경의정신(敬義精神)과 실천유학은 우리 지성사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져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사대사화(四大士禍)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대를 살았다. 이같은 시대를 맞아 선생은 흩어진 사림의 원기를 다시 찾으려 하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림의 역할을 통감하면서 직설적 언어로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백성들의 심각한 고충을 외면하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횡포, 조정 대신들의 무능함, 제대로 마음을 닦지 않은 군왕 등 선생의 비판정신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선생이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나 무진봉사(戊辰封事)등은 그 언어가 절실하고 명쾌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림의 원기는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풍(士風)을 크게 진착시킨 선생의 명망과 은연 중에 형성된 재야 세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선생을 벼슬로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면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평가하듯이 선생은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으로 만품(萬品)을 굽어보고,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은 위엄으로 천지간에 우뚝하였다. 선생의 이같은 기상과 위엄, 출처와 학문은 만세에 귀감이 되기에 족하였으며, 그 문도(門徒)들은 이를 스스로가 본받고 또한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서원을 짓고 강학(講學)활동을 벌였다. 국가문화재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산천재 일원은 바로 이같은 일련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현재 사적지 안에는 남명선생이 당시 문도들을 가르치던 산천재, 영면하고 계시는 묘소, 위패를 모신 여재실(如在室),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1km 떨어진 곳에는 강우유림(江右儒林)의 본산으로 선생을 봉향(奉享)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이 서원 안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利)가 있어 봄과 가을로 향사를 올리며, 매년 가을에는 선생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비문화축제의 일환으로 남명제(南冥祭)가 열린다. 또한 경내에는 남명기념관이 새롭게 조성되어 남명 선생의 삶과 사상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국가문화재 산천재 안내판 옆의 산천재 출입로에 남명선생시비(南冥先生詩碑)가 서 있다.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題德山溪亭柱),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이 시는 남명 선생께서 예순한 살 때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붙인 시로서 남명 선생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산천재 출입문 앞에 산천재(山天齋) 설명안내판이 서 있다.
산천재(山天齋) 출입문 앞에 설치되어 있는 산청 조식 유적(山清 曹植 遺蹟) 사적 산천재(山天齋) 설명안내판 내용을 옮긴다.
이곳은 남명 조식(南冥曹植, 1501~1572)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공간이다. 산천(山天)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괘상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국왕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려,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건의하였다. 학문과 인격을 완성하고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던 노학자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아래 두 수의 시는 선생이 이곳에서 지은 작품으로, 그의 큰 뜻과 높은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請看千石鐘 천석들이 큰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爭似頭流山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덕산의 시냇가 정자 기둥에 씀). ◆春山底處無芳草 봄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 천왕봉이 하늘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 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겠는가? 銀河十里喫有餘 십리 흐르는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 德山卜居(덕산복거, 덕산에 터를 잡고서)
산천재(山天齋) 앞에 남명매(南冥梅)가 기품 있게 자라고 그 앞의 남명매비(南冥梅碑)에 오언절구 '우음(偶吟)'이 적혀 있다.
이 매화나무는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년~1572년) 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기품 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남명매라 부른다.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 朱點小梅下(주점소매하)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高聲讀帝堯(고성독제요)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창명성두근)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강활수운요)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산천재(山天齋)의 주련(柱聯)은 남명의 칠언절구 '덕산복거(德山卜居)'로, 덕산에 터를 잡고 그 심정을 쓴 시이며, 마루 왼쪽 천정벽에는 남명이 덕산에 터를 잡은 뒤 덕천강 작은 정자에 내걸었던 오언절구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편액이 붙어 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이 없겠는가마는/ 천왕봉이 상재(上宰) 있는 곳에 가까운 걸 좋아하네/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은하 같은 저 십 리 물 아무리 마셔도 오히려 남으리. - 덕산복거(德山卜居)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청컨대 천 석들이 종을 보시게/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없다네/ 나도 어찌하면 저 두류산(지리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사성현유상봉안四聖賢遺像奉安(孔子, 周濂溪, 程明道, 朱子) 편액이 천정 벽에 붙어 있고, 정면 벽에는 남명 사상의 핵심 義와 敬이 적혀 있고, 義 아래에 구체적 실천 방안 신명사도神明舍圖와 敬 아래에 구체적 실천 방법 경도(敬圖)가 붙어 있다. 경도(敬圖)는 정제엄숙整齊嚴肅 몸가짐을 바르고 엄숙하게 하고, 기심수렴其心收斂 흩어져 있는 마음을 거두어들이며,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항성성법恒惺惺法 항상 맑게 깨어 있을 것이다. 벽문 앞에 사성현유상병풍四聖賢遺像屛風(남명 선생이 직접 그린 孔子, 周濂溪, 程明道, 朱子 등 사성현의 유상)이 전시된다.
산천재 뒤쪽에 남명문집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조식 남명문집 목판(曹植 南冥文集 木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 조식 남명문집 목판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의 시와 문장 등을 수록한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선조 37년(1604)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으나, 원판이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다시 새겼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도 별집*의 내용을 교정하고 보충하였다. 목판이 여러 차례 간행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자 고종 31년(1894)에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으며, 고종 34년(1897)에 연보**를 수정·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남명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남명문집 목판은 남명 조식의 학문 세계뿐만 아니라, 지역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수록되어 있어 남명학 연구는 물론 지역사 연구에 가치있는 자료이다. *별집(別集) : 문집의 원집(原集)이 나온 뒤 따로 시문을 모아 낸 책. **연보(年報) : 사람이 한평생 동안 지낸 일을 연대별로 간략하게 적은 기록.
산천재 뜰의 남명매 옆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산청파크골프장 뒤에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있다.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산천재를 바라보았다. 남명매와 살림집, 그 뒤쪽에 함미봉이 보인다.
남명로를 따라 덕산약초시장 방향으로 가면서 남명선생 묘소 입구를 지난다.
남명로 북쪽에 양당마을 표석이 서 있다. 중산리 방향의 신천(新川)과 대원사 방향의 삼장천이 만나 덕천강(德川江)을 이루는데 두 시냇물이 큰 못(潭)을 이룬다고 하여 이 일대를 양당촌(兩塘村)이라 부른다고 한다. 골목 뒤에 양당마을회관&경로당이 보인다.
남명로를 따라 산청군 시천면 사리 덕산시가지로 가면서 지리산 천왕봉을 다시 바라보았다.
시천면(矢川面)은 살천(薩川)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진주군에 속하였다가 新川面으로, 다시 矢川面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 3월 1일 진주군에서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시천면 사리에 면소재지를 두고 있다. 시천면은 낙동강의 발원지 강 상류로부터 흐르는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 하여 矢川(화살 시,내 천)으로 불리고 있다. 사리(絲里)는 골짜기가 실처럼 길고 가늘다고 하여 실골이라 하다가 그 후 한자로 쓰면서 사리(絲里)가 되었다. - 산청군청 문화관광
중앙 오른쪽 뒤에 구곡산이 솟아 있고, 산청군농협 맞은편 덕산약초시장 입구에 보도여행팀 안내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덕천강의 원리교는 시천면 사리와 원리의 경계를 이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