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 받아들인
우리나라 암암리에 대처식육 승려
늘어 전통불교 근간
뒤흔들었지만 용인하는 풍조 크게
확대돼
19세기 말 이후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조선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고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이면서 한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불교 근대화와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내세운 승려의 결혼과 육식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문명개화론, 사회진화론의 유입과 함께
승려의 결혼과 교단의 확대를 인구 증식, 생산력 제고와 연결시킨
근대화 지상주의가 풍미하였고 대처 허용론의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 강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위해 신도 국교화를 시행하였다. 이와 함께 불교에 대한
폐불훼석(廢佛毁釋) 조치를 단행하고 1872년 승려의
‘육식과
대처’를 각자 임의에 맡긴다는
허가령을 내려서 불교의 전통적 성역을 해체하였다. 이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통한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정책방향과 일맥상통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승려는 출세간의
성직자가 아닌 속성을 가진 국민의 하나가 되었고 사회적 직업으로서 승려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본은 정토진종처럼
재가불교의 전통을 가진 종파도 있었고 또 국가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조치여서 불교중흥을 위한 계율 부흥 운동 외에는 극심한 저항이나 반발이
없었다.
이후 일본 국가주의 불교의 주창자인 일련종의
다나카 치카쿠는 부부를 기초단위로 하여 불교의 개혁방향을 모색한 <불교부부론>(1887)을
저술하였다. 그는 부부는
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근본이자
사회조직과 활동의 기초이며 불교도 그에 근저를 두고 있으므로 이제는 장례불교가 아닌 혼례불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나카는 불교의 확산을
위해서는 남녀와 부부에서 출발해야 하며 원래 불교 교리에서도 남녀가 동등하며 남녀라는 이원적 원리를 매개로 해서 근원인 일심에서 만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청을
의식하면서 부부를 매개로 한 불교의 생활화, 사회화, 세속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는 또한 승려의 육식대처를
찬동하는 내용의 <불교승려육처론>(1891)을
발표하여, 육식대처가 반드시 계율에
위배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하였고 승려가 재가보살로서 지역과 밀착하여 호법과 호국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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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용성이 승려의 대처식육 금지를 일제
당국에 요청했던 건백서(1926). 백용성은 그와 뜻을 함께하는 승려 126명의 동의를 얻어 승려의 대처가 불교 모순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불교
발전을 위한 대안을 촉구했다. 사진=〈한국불교100년〉 |
이러한 일본불교의 근대적 변혁 과정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만해 한용운은 1910년
4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
달라는 건의서를 당국에 올려 대처가 불교의 교세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자본주의 근대화를 위해
인구의 증대와 식산흥업을 장려하고 근대의 종교경쟁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승려의 대처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는 불교에서 결혼을 금지한
것은 근기가 낮은 승려를 위한 방편일 뿐이며 시대에 맞게 계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승려도 사회적
인간이며, 인권의 차원에서 결혼할
권리를 가진다고 설명하였다. 한용운은 식민지가 된 직후인
9월에도 총독부에 건백서를 올려
불교발전과 포교를 위해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1911년에 시행된 사찰령과
1912년에 반포된 본말사법에는
대처(帶妻)와 식육(食肉)에 대해 제한적인 규정을 두었다. 즉 본말사법
제60조에서 비구계의 요건에 대해
“득도 후 나이
20세 이상이 된 자는 비구계를
수지할 수 있다. 다만 대처식육하는 승려는
비구계 수지를 불허하며 비구계를 구족하지 않으면 보살계를 수지할 수 없다”고
정하였다. 취처와 육식 등 세속화 경향
자체를 법적으로 금한 것은 아니지만 대처승에게 비구계를 허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찰령에서는 본말사 주지가
되는데 필요한 요건으로 비구계 수지를 전제조건으로 하였기에, 결국 대처승이 주지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셈이었다. 또 징계에 대해 규정한
본말사법 제87조에서는
“사찰 안에 처자를 머물게
하거나 여인을 재우는 경우 근신의 징계에 처한다”고 하여 사찰에 처자식을 두는
것을 처벌하였다. 그럼에도 승려의 대처는
암암리에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고 대체로 묵인되는 상황이었다.
전통 계율에 위반되는 승려의 결혼과 세속화는
첨예한 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문제였지만, 1910년대에는 대처식육이나
계율 관련 문제가 크게 주목되지는 않았다.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불교를
비교한 <백교회통>(1912)을 쓴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1918)에서 세계의
종교를 ‘다처, 일처, 무처’의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 그는 다처교로는 유교와
이슬람교, 일처교는
기독교, 불교와 천주교는 무처교와
일처교를 겸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불교는 출세간의 출가자와
세간의 재가신도가 함께 모여 있기에 양자가 공존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승려도 재가자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는 추세가 늘어나면서 세태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30본사의 하나인 화성
용주사의 주지 강대련은 1919년 한국의 승려도
일본처럼 결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의 ‘조선불교기관확장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사법의 개정을
청원하기도 했다.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해로서
총독부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방향을 전환하여 지식인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회유와 포섭을 시도하였다. 반면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된 불교계 혁신세력은 교단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기득권층인 본사 주지들과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대처식육 문제 또한
1920년대 중반에 수면 위로
급부상하면서 불교는 세속화의 격류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불교는 일본불교가 걸었던
‘근대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정치적
통제 속에서 세속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대표
사례가 바로 전통불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승려의 대처식육 문제였다.
1925년 유학생 출신 대처승이
본사 주지에 취임하기 위해 본사의 사법개정을 추진하였지만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1월부터 한 달 동안 총독부의
종교과장과 사무촉탁이 승려 대처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 현지의 사찰을 시찰하였다. 그 결과 승려 대처를 허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가운데 하나로 사찰 재산 보호의 필요성을 담은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어 3월에는 대처승에게 본말사 주지
자격을 허용하는 사법 개정요구가 본사 주지를 중심으로 한 교무원 평의원회에서 결의되었다. 그 직후 총독부는 현실적으로
많은 승려들이 결혼한 상태이며 그로 인해 나올 수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사법 개정작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용성은 1926년
5월에 승려
127명의 연명을 받아 대처식육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요지는 승려의 지계
수행은 당연하며 대처식육은 교설에 없는 불가의 대적인데도 일부 무리가 이를 감행하여 사원을 마귀소굴로 만들고 참선, 염불, 간경을 전폐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동아일보> 등 신문 사설에서는
승려의 대처식육에 대해 근대성의 관점에서 찬동하면서, “불교가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목적에 부합해야 함에도 재래의 부당한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불교는
사회사업, 교육사업을 통해 민중에
이익을 주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하며 인간의 생존과 본능, 현대종교의 특성과 관련된
대처식육의 문제를 구태의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진단하였다.
백용성은 1926년
9월에 재차
‘범계생활
금지’에 관한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는 출가불교의 전통을
수호해야 하는 당위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승려의
대처 자체를 엄금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대처승의 비구계를 취소하고 재가대중의 신분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수행승과 연로한
승려들이 사원에서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서 지계승려, 청정승려들에게 몇 개 본산을
할당하여 청정사원을 유지하고 수행을 보장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이는 현실상황을 인정하면서도
대처승려와 청정비구의 구분만큼은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총독부는 결국 1926년
10월에 본말사법의 취처 금지
조항을 삭제, 개정하여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논설에서는 사찰 주지의
선거자격 개정 문제를 언급하면서 인생의 본능을 구속했던 승려의 대처 및 육식 금지가 철폐되었고 이는 시대적 요구에 순응한 종교계의 일대혁명이며
불교계의 비밀스러운 악폐를 일소한 것이라고 자평하였다. 이후 일부 본산에서 대처승도
본사주지에 취임할 수 있도록 사법 제·개정을 신청하였고
1929년에는
80%에 이르는 대다수 본산에서
대처승이 주지가 될 수 있게 사법 내용을 변경하였다. 본말사법의 취처 금지조항이
삭제된 1926년 무렵 비구승 중에 약
반 수 정도가 대처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식화 이후에는 그 수가
더욱 늘어났다. 당시 권력 주도층인 본사주지
상당수가 대처를 한 상황이었고, 일본유학승 출신이 주축이 된
불교계 혁신세력 또한 결혼을 선진적, 근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많은 이들이 실행하였다. 즉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불교발전과 대중화를 위해 승려의 결혼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풍조가 교계에 확산되고 있었다.
반면 대처 유행의 풍조를 ‘대처독’이라 지칭하면서 대처의
일반화로 비승비속의 기형적 생활, 주지직을 둘러싼 권력
갈등, 사원경제의
파멸, 신도수의 감소와 민중신앙의
소실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즉 그로인해 교단이 근저부터
뒤흔들리고 있고 불교에 큰 해악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찍부터 전통선종과 계율의
회복을 주창한 백용성도 선농불교, 역경불교의 독자적 행보를
걸었다. 그는 1925년 활구참선만일결사회를
조직하면서 계율을 강조하고 음주, 식육하는 이의 입회를
금지하는 조항을 두어 대처식육에 대한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당시 언론이나 불교계 주류의 인식을
보면, 대처식육은 승려 개인의
문제이고 불교의 쇠퇴와는 무관한 일이며 보편종교로서의 사회화, 대중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찬성의견이 다수였다. 승려도 인간이므로 인간의
본능을 살리고 인간을 위한 종교를 만들어야 함은 당연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대처식육 찬성론은 불교의
근대화, 사회화, 대중화를 위해 전통불교의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근본적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전통불교는
간경, 참선, 염불만 해왔고 중생을 위한
이타행이 부족하며 사회와 동떨어져 있으므로 계율을 철저히 준수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현실에 맞게 계율을 적용하고 현대인의 신앙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승려만의 불교가 아닌
대중불교를 지향했던 한용운의 불교 유신론도 대처식육 문제에서만큼은 찬성 쪽이었다. 그는 염세주의와 독선주의를
불교계의 폐단으로 본 바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구세주의를 불교가 나가야 할 방향으로 본 것이다.
식민지기 불교 세속화의 상징인 대처식육은 계율과
전통의 수호 및 계승, 시대조류에 따른 혁신적
변화라는 입장의 차이로 갈라졌고, 출세간의 종교와 세속종교
어느 쪽의 길로 불교가 가야 할지를 둘러싼 문제였다.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는
전통의 묵수보다 근대적 변신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이처럼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는 시대적인 요청이자 과제였지만 불교가 정치적으로 종속된 식민지 체제에서 전통은 부정되었고 결국 상식적 차원의 호교마저 달성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대처식육이라고 하는
세속화로의 귀결은 이후 청산되어야 할 식민지 유산으로 크나큰 부채를 남기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