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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9화 ― 적매서고의 검은 관
댕!
지하 전체를 울린 경보종의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붉은 등잔이 일제히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발걸음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무혁은 귀검을 뽑은 채 붉은 문 앞을 지켰다.
남궁소연은 통로의 폭과 적들의 기척을 헤아렸다.
“삼십 명이 넘습니다.”
백리운이 은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발소리가 일정합니다. 상단의 일반 무인이 아닙니다.”
당소혜는 기관 상자의 작은 등잔을 켰다.
희미한 빛이 문 안쪽을 비추었다.
“무영객일 거예요.”
붉은 문 안의 수척한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문을 다시 닫아야 하오.”
무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이름을 밝히시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내 이름과 아버지의 심법을 아는 사람을 믿고 등을 보일 수는 없소.”
남자의 시선이 무혁에게서 백리운으로 옮겨갔다.
백리운의 손에 들린 은침이 작은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남자는 오랫동안 그 침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백연호요.”
백리운의 손끝이 굳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천맥신옹 백무진의 아들이며, 네게 그 은침을 남긴 사람이다.”
백리운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만으로 믿으라는 겁니까?”
“일곱 번째 은침의 손잡이 안에는 금사로 네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있습니다.”
“첫 번째 침에는 두 줄기의 물, 두 번째에는 산봉우리, 세 번째에는 구름이 새겨져 있지.”
백연호는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마지막 침의 금사는 내가 직접 넣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구름이 되라’는 뜻으로 네 이름을 리운이라 지었다.”
백리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무진에게 들었던 이름의 뜻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감정에 앞서 의원의 냉정함을 붙잡았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말 몇 마디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다.”
백연호는 쓰게 웃었다.
“스물네 해를 비워 놓고 아버지라 불러 달라고 할 생각도 없다. 다만 지금은 살아서 이곳을 나가는 것이 먼저다.”
통로 끝에서 붉은 불빛이 나타났다.
무영객들이 횃불을 들고 몰려오고 있었다.
무혁이 말했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시오.”
남궁소연과 백리운이 먼저 붉은 문을 넘었다.
당소혜가 기관판에서 열쇠를 뽑았다.
무혁은 마지막까지 통로를 지키다가 붉은 문 안으로 물러났다.
백연호가 안쪽의 손잡이를 당기자 거대한 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쿵!
붉은 문이 닫히며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막혔다.
당소혜가 문에 귀를 댔다.
“밖에서 기관을 풀고 있어요.”
“얼마나 버틸 수 있소?”
무혁이 물었다.
“제가 열었으니 저쪽에서도 열 수 있어요.”
“얼마나 걸리지?”
“제가 열면 반 시진.”
“저들이 열면?”
당소혜가 잠시 계산했다.
“실력에 따라 사흘에서 평생이요.”
백리운이 말했다.
“그렇다면 답이 되지 않는군.”
“적어도 백 의원이 여는 것보다는 오래 걸려요.”
“나는 의원이지 기관사가 아닐세.”
“그래서 비교한 거예요.”
긴장 속에서도 백연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네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구나.”
백리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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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매서고는 지하에 숨겨진 서고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했다.
높은 천장을 받치는 돌기둥마다 붉은 매화가 새겨져 있었다.
양쪽에는 수백 개의 서가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서 있었다.
서책의 등에는 사람의 이름과 문파가 적혀 있었다.
소림.
무당.
하북팽가.
남궁세가.
태허문.
이름난 문파뿐 아니라 강호에서 사라진 작은 문파들의 기록도 있었다.
백리운이 가장 가까운 장부를 펼쳤다.
첫 장에는 무인의 이름과 나이, 소속 문파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빼앗긴 내공의 양과 부서진 경맥, 사용한 약재와 치료 결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백리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이곳은 의방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백연호가 대답했다.
“사람을 살린 기록이 아니라 다시 이용하기 위해 고친 기록이오.”
무영객들은 만류탈원공으로 다른 무인의 내공을 빼앗았다.
그 과정에서 경맥이 상하면 홍매상단이 공급한 약재로 치료했다.
회복한 뒤에는 다시 사람을 습격했다.
적매서고는 그 모든 죄를 기록한 곳이었다.
남궁소연이 장부들을 빠르게 살폈다.
“홍매상단이 무영객에게 자금과 약재를 공급한 기록이 모두 남아 있습니다.”
“상단의 비밀 거래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들었소.”
무혁이 말했다.
백연호가 고개를 저었다.
“여문탁은 누구도 믿지 않았소. 도백산조차 언젠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서로의 죄를 증명할 장부를 이곳에 보관한 것이오.”
당소혜가 물었다.
“죄를 숨기려는 사람들이 왜 증거를 이렇게 잘 정리해 놓았어요?”
백리운이 말했다.
“사람은 남을 믿지 못할수록 장부를 자세히 쓰는 법이지.”
“백 의원도 장부를 자세히 쓰잖아요.”
“나는 받을 돈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걸세.”
“결국 비슷한 것 아닌가요?”
“전혀 다르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 무혁은 서고 가장 안쪽의 검은 관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는 누가 있소?”
백연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낫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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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관은 철과 묵옥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관의 옆면에는 가느다란 관들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안으로 약물이 천천히 흘렀다.
백리운은 관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냄새부터 맡았다.
“천년설삼, 홍린화, 정맥초.”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의 기혈을 아주 느리게 움직이게 하는 약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남궁소연이 물었다.
“관을 열어 봐야 합니다.”
당소혜가 관의 잠금장치를 살폈다.
복잡한 기관은 아니었다.
그녀가 세 개의 걸쇠를 차례로 풀자 검은 뚜껑이 낮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관 안에는 회색 머리의 중년인이 누워 있었다.
얼굴은 수척했지만 분명 살아 있었다.
무혁의 호흡이 멎는 듯했다.
어린 시절보다 세월의 흔적이 깊어졌고 머리도 희어졌다.
하지만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 오른손 검지에 남은 오래된 굳은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아버지…….”
진백현.
태허문을 멸문시킨 원흉으로 몰린 사람.
금지된 무공으로 수많은 무인의 내공을 빼앗았다는 누명을 쓴 사람.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시신조차 찾지 못했던 무혁의 아버지가 검은 관 안에 살아 있었다.
무혁은 귀검을 내려놓고 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진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아주 느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백리운이 곧장 맥을 짚었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살아 계십니다.”
무혁이 고개를 들었다.
“깨어날 수 있소?”
“단전이 봉해졌고 경맥 대부분이 약물로 잠들어 있네. 당장 깨우면 위험할 수 있어.”
백리운은 관 옆의 약물관을 하나씩 살폈다.
“하지만 몸이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네. 누군가 오랫동안 상태를 유지하며 치료했어.”
모두의 시선이 백연호에게 향했다.
백연호가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아니다.”
서가 너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했습니다.”
흰 의복을 입은 중년 여인이 작은 약상자를 들고 걸어 나왔다.
머리에는 흰빛이 섞였지만 눈빛은 맑고 단정했다.
백리운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인은 그의 눈과 은침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많이 자랐구나.”
백리운이 간신히 물었다.
“윤서령 의녀입니까?”
“그렇다.”
“내 어머니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윤서령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 의원은 확인되지 않은 것을 진실이라 부르면 안 되니까.”
그녀는 약상자에서 낡은 붉은 천을 꺼냈다.
천의 안쪽에는 구름 모양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네가 태어났을 때 감싸 주었던 포대기다. 반대쪽에는 네 아버지가 수놓은 글자가 있다.”
백리운이 천을 뒤집었다.
삐뚤고 서툰 바느질로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利雲.
당소혜가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바느질은 잘 못하셨네요.”
백연호가 헛기침했다.
“검을 들던 손으로 한 것이다.”
“무혁보다 잘했을까요?”
무혁이 진백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를 왜 비교하는 것이오?”
“무혁도 바느질을 못할 것 같아서요.”
“해 본 적이 없소.”
남궁소연이 말했다.
“그러니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
백연호는 잠시 웃다가 다시 백리운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네 부모라는 사실은 천맥곡으로 돌아가 백무진 어르신께 확인받아도 된다. 지금 당장 우리를 부모라 부를 필요는 없다.”
백리운은 붉은 천을 오래 바라보았다.
“두 분이 살아 있었다면 왜 나를 찾지 않았습니까?”
윤서령의 눈빛이 아프게 흔들렸다.
“찾지 않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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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 년 전.
백연호와 윤서령은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무영객에게 쫓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진백현에게 아이를 맡겼다.
진백현은 태허문에 아이를 숨기면 함께 위험해질 것이라 판단해 천검산장 근처의 작은 의방으로 보냈다.
그 뒤 백연호와 윤서령은 무영객의 근거지를 찾기 위해 망천봉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도백산과 여문탁이 함께 만류탈원공을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백현도 뒤늦게 두 사람과 합류했다.
그들은 무영객의 명단과 치료 기록을 빼내려 했지만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다.
계획은 실패했다.
백연호와 윤서령은 적매서고에 갇혔다.
진백현은 만류탈원공의 시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진백현의 내공은 빼앗기지 않았다.
태허문의 태허귀원심법은 흩어진 진기를 본래 자리로 되돌리는 무공이었다.
만류탈원공으로 끌어낸 내공이 계속 그의 단전으로 돌아갔다.
도백산은 진백현의 심법을 연구하기 위해 그를 죽이지 않고 검은 관에 가두었다.
바로 그 심법을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 무혁이 익힌 천맥귀원심법이었다.
무혁이 물었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심법은 도백산이 만든 것이 아니오?”
“아니다.”
백연호가 대답했다.
“도백산은 그것을 훔치려 했을 뿐이다. 천맥귀원심법은 진백현과 백무진 어르신이 함께 연구한 심법이오.”
백무진은 경맥의 흐름을 완성했고, 진백현은 귀검의 일곱 심철과 연결하는 길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무공이 합쳐져 천맥귀원심법이 태어났다.
그러나 완성된 구결은 진백현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내게 심법을 남겼소?”
“태허문이 공격받기 전 잠시 탈출한 적이 있다.”
윤서령이 말했다.
“그때 네게 귀검과 심법을 남기고 다시 우리를 구하러 돌아왔다.”
진백현은 무영객이 태허문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태허문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도백산은 진백현을 다시 붙잡은 뒤, 태허문 멸문의 모든 죄를 그의 이름에 덮어씌웠다.
“아버지가 태허문을 버린 것이 아니었군.”
무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마지막까지 태허문을 지키려 했소.”
백연호가 대답했다.
“그는 단 한 번도 태허문을 배신하지 않았다.”
남궁소연은 모든 증언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렇다면 장부와 세 분의 증언만 있으면 태허문의 누명을 벗길 수 있습니다.”
백연호가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이 더 필요하오.”
“누구입니까?”
“도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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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문 바깥에서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당소혜가 문을 돌아보았다.
“바깥쪽 기관이 풀렸어요.”
무혁은 귀검을 들었다.
“도백산이 직접 왔군.”
백연호의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소?”
“이 문을 그렇게 빨리 열 수 있는 사람은 만든 자뿐이오.”
당소혜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저보다 조금 빠르다고 잘 만든 사람은 아니에요.”
백리운이 물었다.
“지금 그것이 중요하나?”
“기관사의 자존심은 중요해요.”
쿵!
붉은 문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 너머로 붉은 장포를 입은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 앞에는 검은 옷의 노인과 붉은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검은 옷의 노인은 체구가 작고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그러나 양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기이할 만큼 깊었다.
도백산.
무영객의 진짜 수장이자 만류탈원공을 완성한 자였다.
그 옆에는 홍매상단의 단주 여문탁이 서 있었다.
여문탁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적매서고에 들어섰다.
“손님들이 주인의 허락 없이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왔군.”
무혁이 대답했다.
“손님에게 보여 주기 어려운 것이 많았던 모양이오.”
여문탁의 시선이 열린 검은 관으로 향했다.
“여천강이 열쇠를 넘겼군.”
“아들에게 불완전한 무공을 가르쳐 놓고도 아들이 배신했다고 생각합니까?”
남궁소연이 물었다.
여문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상단주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그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백리운이 말했다.
“아들의 경맥이 무너지는 것도 대가입니까?”
“강호에서 힘은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다.”
당소혜가 작게 말했다.
“백 의원은 치료비를 받지만 사람을 망가뜨리지는 않는데요.”
백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 소저가 가끔 옳은 말을 하는군.”
“가끔은 빼 주세요.”
도백산이 무혁의 귀검을 바라보았다.
“천맥귀원심법을 완성했군.”
“그대가 만든 만류탈원공과는 다르오.”
“모든 무공은 강한 자에게 모인다. 약한 자에게 흩어져 있던 내공을 내가 한곳에 모았을 뿐이다.”
무혁은 귀검을 비스듬히 내렸다.
“빼앗은 것을 모았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오.”
도백산이 양손을 펼쳤다.
적매서고의 공기가 한순간 뒤틀렸다.
서가에 꽂힌 책들이 흔들렸고 등잔불이 도백산 쪽으로 길게 기울었다.
만류탈원공.
주변의 모든 내공을 끌어당기는 힘이 펼쳐졌다.
남궁소연은 검을 바닥에 세워 몸을 고정했다.
백리운은 자신의 혈도에 은침을 꽂아 진기의 흐름을 붙잡았다.
당소혜는 기관 상자에서 네 개의 쇠갈고리를 발사해 돌기둥에 연결했다.
무혁만은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도백산이 말했다.
“네 아버지도 같은 자리에서 내 앞을 막았다.”
“결과는 이번에 다를 것이오.”
“그때보다 네 공력이 깊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오.”
무혁의 대답에 도백산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는 아버지보다 약할 수 있소.”
무혁은 뒤에 선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혼자였고, 나는 혼자가 아니오.”
남궁소연이 검을 들었다.
“오른쪽의 흐름을 끊겠습니다.”
백리운이 은침을 꺼냈다.
“경맥이 뒤틀리면 내가 바로잡겠네.”
당소혜가 기관 상자의 덮개를 완전히 열었다.
“저는 저 할아버지가 도망갈 길부터 막을게요.”
도백산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도망간다는 것이냐?”
“도망가지 않을 사람이 대개 먼저 그렇게 물어요.”
당소혜가 바닥의 기관추를 당겼다.
적매서고의 붉은 문이 다시 올라가며 닫혔다.
이번에는 안에 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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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백산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오른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남궁소연의 검기가 꺾여 끌려갔다.
소연은 미련 없이 검기를 끊었다.
힘을 빼앗길 바에는 처음부터 내주지 않았다.
도백산의 왼손이 백리운을 향했다.
백리운은 은침을 세 방향으로 던졌다.
은침은 도백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발 앞과 양옆에 꽂혀 진기가 흐르는 세 혈도를 막았다.
도백산의 흡인력이 한순간 흔들렸다.
그 틈을 당소혜의 쇠구슬이 파고들었다.
도백산이 손을 휘둘러 쇠구슬을 끌어당겼다.
당소혜가 기다렸다는 듯 줄을 당겼다.
쇠구슬 안에서 붉은 가루가 터졌다.
도백산이 급히 호흡을 멈췄다.
“독이냐?”
백리운이 말했다.
“밀가루일세.”
당소혜가 덧붙였다.
“만두 빚고 남은 거예요.”
도백산의 검은 옷과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긴장하던 홍매상단 무인들조차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무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귀검이 움직였다.
도백산은 양손으로 귀검의 진기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무혁은 힘을 되찾으려 맞서지 않았다.
문을 열 때 깨달았던 것처럼 끌어당기는 흐름을 따라 진기를 흘려보냈다.
도백산의 단전으로 들어간 진기는 그의 것이 되지 않았다.
천맥귀원심법의 흐름을 따라 한 바퀴 돈 뒤 다시 무혁에게 돌아왔다.
한 번.
두 번.
순환할 때마다 도백산의 만류탈원공이 만든 길은 안쪽에서 무너졌다.
도백산의 눈빛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나타났다.
“내 심법 안으로 진기를 보냈다고?”
“그대의 심법이 빼앗는 길이라면.”
무혁의 귀검이 낮게 울렸다.
“내 심법은 돌아오는 길이오.”
낙산유수.
무혁은 도백산의 힘을 정면으로 부수지 않았다.
산처럼 받아 내고, 물처럼 흘린 뒤, 빼앗긴 모든 기운이 제자리로 돌아갈 길을 열었다.
도백산의 몸속에 쌓여 있던 수많은 내공이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소림의 강맹한 기운.
무당의 부드러운 진기.
이름 없는 문파들의 심법.
오랫동안 억지로 한곳에 가둬 두었던 기운들이 도백산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도백산은 더 이상 만류탈원공을 펼치지 못했다.
남궁소연의 검이 그의 오른쪽 손목 앞에 멈췄다.
백리운의 은침이 왼쪽 팔의 혈도를 봉했다.
당소혜의 쇠줄이 두 발목을 묶었다.
마지막으로 무혁의 귀검이 도백산의 목 앞에 멈췄다.
“끝났소.”
도백산이 이를 악물었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는 죽는 것으로 죄를 피할 수 없소.”
무혁이 귀검을 거두었다.
“강호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한 일을 증언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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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탁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붉은 문은 닫혀 있었다.
그가 상단 무인들에게 명령했다.
“장부를 모두 불태워라!”
무인들이 서가로 달려가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움직이지 마시오.”
여천강이 붉은 문 옆의 작은 통로에서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홍매상단의 호위대와 상단의 원로들이 서 있었다.
마상록도 함께였다.
여문탁의 얼굴이 굳었다.
“천강.”
“이제 그만하십시오, 아버지.”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
“홍매상단을 살리고 있습니다.”
여천강은 품에서 상단주의 인장을 꺼냈다.
“적매서고의 장부와 도백산의 죄를 무림맹에 공개하겠습니다. 무영객과 관련된 자들은 모두 조사를 받을 것입니다.”
“네가 감히 나를 끌어내리려는 것이냐?”
“아버지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천강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미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마상록이 상단 원로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단주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홍매상단의 무인들이 칼을 거두었다.
여문탁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문탁은 끝내 무공을 펼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의 돈과 물건을 움직이던 손은 강했지만, 모든 진실이 드러난 자리에서는 더 이상 움직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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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끝나자 백리운과 윤서령은 곧바로 진백현의 치료를 시작했다.
검은 관의 약물을 한꺼번에 끊지 않고 조금씩 줄였다.
백연호는 봉해진 혈도를 풀었고, 백리운은 은침으로 느려진 맥을 깨웠다.
윤서령이 약을 조절했다.
세 의원의 손이 처음으로 한 환자 위에서 함께 움직였다.
당소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가장 잘해요?”
남궁소연이 대답했다.
“지금 물을 일은 아닙니다.”
백리운은 은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가장 빠르네.”
백연호가 말했다.
“침을 빠르게 놓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윤서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맥을 오래 살피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구나.”
백리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당소혜가 웃음을 참았다.
“부모님을 만나자마자 수련이 시작됐네요.”
“당 소저는 조용히 있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진백현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무혁은 관 곁에 앉아 그 손을 바라보았다.
진백현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흐릿하던 시선이 무혁의 얼굴에 머물렀다.
“무혁…….”
무혁은 두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예. 저입니다.”
“태허문은…….”
진백현이 힘겹게 물었다.
무혁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다시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사형들과 사저들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도 살아 계십니다.”
진백현의 눈가에 깊은 안도가 스쳤다.
무혁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누명도 곧 벗겨 드리겠습니다.”
진백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누명보다…… 태허문의 이름을 먼저 바로 세워라.”
“둘 다 바로 세우겠습니다.”
진백현은 아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네가 그 일을 할 사람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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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적매서고의 장부는 상자 열두 개에 나누어 담겼다.
남궁소연은 거래 장부와 치료 기록, 무영객의 명단을 항목별로 정리했다.
백연호와 윤서령은 자신들이 아는 사건을 증언서로 남겼다.
진백현도 몸이 회복되는 대로 공개 증언에 서겠다고 했다.
도백산과 여문탁은 홍매상단의 호위대에 의해 별도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여천강은 상단의 원로들 앞에서 임시 단주로 선출되었다.
그가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무영객과 관련된 모든 거래를 중단하고, 피해를 본 문파와 사람들에게 재산을 돌려주는 일이었다.
당소혜가 물었다.
“전부 돌려주면 홍매상단이 가난해지는 것 아닌가요?”
여천강이 대답했다.
“남의 것을 가지고 부유한 상단으로 남는 것보다 낫소.”
백리운이 말했다.
“옳은 판단이네.”
당소혜가 그를 바라보았다.
“백 의원이 돈을 돌려주자는 말에 동의하다니 놀라워요.”
“내 돈이 아니니까.”
“역시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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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검사우는 진백현과 백연호, 윤서령을 모시고 태허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출발을 앞둔 밤, 무혁은 적매서고 입구에 홀로 서 있었다.
남궁소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증언식이 남았기 때문입니까?”
“장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은 아니오. 태허문을 의심했던 문파들이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오.”
“진백현 대협과 백연호 선배, 윤서령 의녀가 증언할 겁니다.”
“도백산과 여문탁도 세워야 하오.”
남궁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과 강호의 주요 문파를 모두 부르겠습니다.”
“남궁세가도 오겠소?”
“당연합니다.”
“남궁진호의 일 때문에 곤란하지 않겠소?”
소연은 잠시 침묵했다.
남궁진호가 저지른 죄는 남궁세가의 이름에도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감춘다고 사라질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와야 합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잘못한 사람이 남궁의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진실을 피하면, 저 역시 그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습니다.”
무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당소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만 먼저 나가면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무혁이 돌아보았다.
“나는 적매서고 입구에 그대로 있었소.”
“돌아갈 때 말이에요.”
백리운도 짐을 들고 나타났다.
“이번에는 가족이 세 명이나 늘었으니 길을 잃으면 치료비도 세 배로 받겠네.”
무혁이 물었다.
“길을 잃는 것과 치료비가 무슨 관계요?”
“마음이 답답해지는 병을 치료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백무진 선배의 술병과 같은 병 아니에요?”
당소혜가 묻자 백리운의 표정이 굳었다.
“그분과 비교하지 말게.”
적매서고에 오랜만에 웃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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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뒤.
새로 세운 태허문의 산문 위에 현판이 걸렸다.
태허문.
불길 속에서 사라졌던 세 글자가 다시 햇빛을 받았다.
진태경은 공개 증언회에 보낼 초청장을 펼쳤다.
무림맹.
소림.
무당.
남궁세가.
하북팽가.
용문창가.
천검산장과 교류했던 여러 문파.
그리고 태허문을 원수로 여겨 왔던 사람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감출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진백현은 의방에서 조금씩 기력을 되찾았다.
백연호와 윤서령은 백무진과 마주할 날을 기다렸다.
백무진은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모두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백리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물었다.
“이제도 나를 백 선배라 부를 것이냐?”
백리운이 대답했다.
“증언식이 끝난 뒤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오래 생각하느냐?”
“가족에게 약술값을 더 받는 분을 조부님이라 불러도 되는지 고민 중입니다.”
당소혜가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에는 두 분이 아주 잘 맞아요.”
“어디가 말이냐?”
백무진과 백리운이 동시에 물었다.
당소혜가 남궁소연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남궁소연도 드물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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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식 전날 밤.
무혁은 새로 만든 본전 앞에 섰다.
내일이면 강호의 수많은 인사가 태허문으로 모일 것이다.
진백현이 직접 태허문 멸문의 진실을 밝힌다.
백연호와 윤서령은 무영객을 추적한 지난 이십사 년을 증언한다.
여문탁과 도백산은 적매서고의 장부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남궁진호의 장부와 천라성 생존자들의 증언도 공개된다.
오랫동안 태허문을 짓눌렀던 누명이 마침내 걷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무혁은 새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누명을 벗는 것은 과거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태허문이 앞으로 어떤 문파가 될 것인지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만들어야 했다.
남궁소연이 초청자 명단을 들고 다가왔다.
“한 사람이 더 온다고 합니다.”
“누구요?”
“황실에서 파견한 감찰어사입니다.”
무혁의 눈빛이 달라졌다.
“황실이 강호의 증언식에 왜 사람을 보내오?”
“적매서고의 장부에서 황실로 들어간 약재와 자금의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홍매상단과 무영객의 죄는 강호 안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장부의 마지막 부분에는 황실의 인장과 닮은 표식이 여러 번 나타났다.
누군가 궁 안에서 만류탈원공과 무영객을 이용하고 있었다.
무혁이 물었다.
“그 기록도 내일 공개할 것이오?”
남궁소연이 대답했다.
“태허문의 결백과 직접 관련된 부분까지만 밝히겠습니다.”
“나머지는?”
“증언식이 끝난 뒤 확인해야 합니다.”
무혁은 귀검의 끈을 바로잡았다.
풀어야 할 강호의 원한은 이제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허문을 기다리는 다음 길은 강호보다 더 깊고 복잡했다.
황실.
그리고 황실과 태허문 사이에 감춰진 오래된 약속.
무혁이 새로 세운 산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우선 내일의 일을 끝내겠소.”
모든 강호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태허문의 결백을 밝힌다.
그리고 진무혁은 더 이상 폐허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제자가 아니었다.
돌아온 사문과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태허문의 대제자였다.
머지않아 그에게는 더 무거운 자리가 맡겨질 것이다.
장문인.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태허문의 이름을 더럽힌 거짓을 강호의 역사에서 지우는 일.
새벽의 첫빛이 현판 위로 번졌다.
증언식의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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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 「태허문, 다시 강호에 서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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