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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드러밍의 세계
데이브 롬바르도(Dave Lombardo) - Srayer
정용욱 - Crash
혜승 - Pia
음악을 듣는 것과 악기를 듣는 것은 다른 형태의 청취다. 음악을 듣는 것이 총체적이고 종합적으로 ‘감상’하는 청취라면 악기를 듣는 것은 선별적이고 개별적으로 ‘음미’하는 청취다. 헤비한 록 트랙을 들을 때, 감상의 일부로서 쉽게 용해되어 달려드는 반면 감상의 테두리를 한 치 벗어나면 이내 거북해지는 것이 있다. 드럼이다. 멜로디가 부재하는 소리다. 이때 우리는 음악을 듣는 데서 나아가 악기를 들어야 한다. 헤비 록에서 드럼은 기타와 베이스와 떨어져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음악에 부여하는 다층적 구조성은 음미하면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두껍고 차가운 라이드 심벌과 뜨거운 탑 심벌, 소스라치는 차이나 심벌이 교차하며 층층에 뿌리는 색채감. 스네어의 면과 킥 드럼, 하이햇 심벌 한쌍의 접합점이 각각 생겼다 사라졌다 만들어내는 형형색색의 구조들.
헤비록 분야에선 누구나 인정하는 불체출의 드러머 한 명, 비교적 최근 새 앨범을 내놓은 한국 드러머 두 사람의 연주를 따라 헤비 드러밍의 세계를 음미해 본다.
시간의 구조를 난타해 얻은 드러밍의 존엄함 Dave Lombardo - Srayer
음악을 듣는 일은 시간의 질감을 짚어보는 행위다. 손가락의 압(壓)에서 나오는 현의 떨림, 살과 뼈의 운동으로 면을 가격해 만드는 타악의 파동. 이것들이 조립되어 울려서 사운드화 하면, 그것은 저만의 시간적 구조를 갖춘다. 리듬은 마디와 마디를 끊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인트로부터 엔딩까지 러닝타임 만큼 시간을 가둔다. 멜로디나 화음은 시간의 넓이와 깊이, 폭을 재배치 해 구체적 밀도를 보존한다. 갇히고 보존된 그것들이 음악의 본질이고, 그것을 재생해보며 우리는 시간을 되감아 그 질감을 매번 다시 맛 본다. 그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 잡히지 않는 추상이 아니라 고정된 채 흐르는 모순된 양상을 띄며 무한반복 한다. 거기서 시간의 구조는 제 모습의 구체적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Slayer의 전례없는 스래쉬 사운드의 핵심이었던 데이브 롬바르도(Dave Lombardo)는 음악이 담고있는 시간의 구조를 철저히 분쇄해 나가는 드러머다. 두 팔과 두 다리, 두 쌍의 신체기관이 맡아야 할 몫의 총량을 꾸준히 갱신해왔던 그는, Slayer 특유의 부글거리는 스래쉬 리프를 완전히 장악해 밴드의 사운드를 찢고, 자르고, 붙이고, 뭉치며 나아갔다.
1965년 쿠바에서 태어난 롬바르도는, 가족들을 모아 끼리끼리 쿠바음악을 연주하게 했던 부모님의 배려로 일찍부터 다수의 퍼커션과 복잡한 패턴이 교차하는 리듬을 익혔다. 다종의 타악기가 음악적 공간을 동시다발적으로 헤집는 쿠바 전통 리듬 덕택인지, 롬바르도의 드러밍을 관통하는 줄기는 물러서지 않는 비트의 분절과 미분이다. 롬바르도가 Slayer에 참여한 마지막 정규앨범 [Seasons In The Abyss]는, 그 낱낱한 결과다. 이 앨범은 스래쉬 메틀 역사에 남은 희대의 명반이기도 하지만, ‘드러밍에 초토화하는 스래쉬 사운드’라는 이색적인 경향을 보였다. 중음역대를 중심으로 오밀조밀하게 들어 찬 트윈 기타가 세워 나가는 곡의 뼈대는, 롬바르도의 플로어 탐과 빡빡한 스네어 세례에 부서져 자잘히 분해된다. 심벌 사운드가 짓는 비트의 윤곽을 벗어나지도 않으며 그것들은 아우성 치며 터져 나온다. 그런 형세는 앨범 전반에 걸쳐 폐부에 닿을 듯한 뜨거움을 낳고, 거기서 롬바르도의 드러밍은 화염에 쏟아지는 기름과 같은 막대한 비트를 붓는다.
“War Ensemble", "Hallowed Point", "Temptation", "Born Of Fire"와 같은 트랙들은 롬바르도의 드러밍이 템포에 맞서는 현장을 보여주는 곡들이고, 거기서 드러밍은 어떠한 스래쉬메틀 밴드도 따르지 않았던 거북하도록 급박한 라이드감을 쫓아 달린다. 차곡차곡, 스피디하게 짚어지는 기타리프는 롬바르도의 감각적인 스네어 필인에 초점없이 흩어진다. 롬바르도는 그루브를 역행하는 이상한 리듬 섹션으로 곡의 템포 자체를, 저 트랙들에서 산산히 허물어 갔다. 트윈 킥드럼과 다종의 심벌로 끝 없이 분절하고 미분해가는 롬바르도의 터치 아래서 박자는 뒤로 뛰었다 급속히 전진하며 역순환 해, 현기증 나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롬바르도의 난타 속에서 그렇게 악곡은, 따라야할 템포도 박자도 놓아버린 채 그저 기승전결의 꼭지점을 향해 계산없이 몰려간다. 어디가 전주고 어디가 간주며 후렴구는 어디임을 숫제 인식치 못하도록 하는 그 사운드야말로 곡의 형식, 시간의 구조 사이의 경계가 철저히 분쇄되는 현장인 것이다. 곡이 담고 있는 시간적 구조를 그렇게 모두 해체하고, 들끓는 사운드와 스피드만 남겨버리는 드러밍이 롬바르도의 주력인 것이다.
롬바르도가 난타하는 시간적 구조라는 것은 음악내적 맥락에서 악곡의 형식미를 담고 있는 것이어서 Slayer의 사운드에는 뚜렷한 형식미가 보이지 않는다. 롬바르도의 드러밍 그 스스로가 형식이고, 그것이 Slayer 의 사운드가 갖는 유일한 시간적 구조기 때문이다. 그래서 롬바르도는 자기 드러밍의 형식미를 구축하기 위해 저만의 심벌 사운드를 운용한다. 자신의 형식미가 밴드의 형식미인 것이다. 거기서 롬바르도는 눈 부시게 뿌리는 심벌 사운드로 형식미를 조직해 갔다. "Blood Red“, ”Seasons In The Abyss“에서 들리는 심벌 터치는 ‘방법론’이라고까지 하는 기존의 규격화된 비트를 거부하는 대신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헤비록의 전반적 사운드에서 기타리프가 하는 역할을 하이햇으로 수렴한 그의 드러밍은, 4타점을 8타점으로, 16타점을 4타점으로 하이햇 비트를 되바꾸어가며 하나의 완결된 형식과 구조를 구축한 것이다.
그렇게 악곡의 시간적 구조를 철저히 해체한 뒤, 드러밍의 구조를 밴드 전체의 구조로 대체해 나간 연주는 데이브 롬바르도 (Dave Lombardo)가 보여준, 드러밍의 존엄함을 끌어가는 절절한 여정인 것이다.
관절에 필링을 올려놓은 테크니션 정용욱 - Crash
인간이 근육을 움직여 하는 일 가운데 전적으로 힘을 쓰는 일은 없다. 힘을 쓰지만 물리력을 주도하는 것은 근육이 아니라 관절이다. 곡괭이로 흙을 팔 때, 팔뚝과 어깨로 파지 않는다.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 뼈의 원활한 움직임이 힘을 뺀 팔뚝과 어깨에 체중만큼의 중력을 싣고, 그 중력이 흙을 판다. 드럼을 배우는 이들에게 “어깨로 치는 군”, “팔로 치는 군”이라 말하면 그들은 크게 당황한다. 드러머의 관절은 드러밍 그 자체다. 손목과 발꿈치는 드러머가 북 면을 때릴 때 강약과 각도를 조절하는 제어장치며, 소위 테크닉이라는 것의 물리적 근원이다.
크래쉬(Crash)의 드러머 정용욱은 테크니션이다. 테크니션은 풍부한 기술을 보유한 자가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 유수의 록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수재 정용욱은, 그때 벌써 상당한 기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것은 크래쉬(Crash)의 데뷔 앨범 [Endless Supply Of Pain]이 고스란히 담고있다. 그렇지만 외국인 프로듀서는 그에게 파워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의 기술은 중심이 없었다. 기술은 풍부하되 그것을 어떻게 배치하는지 몰랐다. 여기서 품었다 저기다 풀어놓는 통찰과 자신의 필링을 음악적으로 재배열하는 법이 없었다. 박자는 트윈기타 배킹에 가려 실종됐고 화려한 필인은 안흥찬의 샤우팅 사이로 줄줄 샜다. 그러나 목하 정용욱은 테크니션이다. 크래쉬의 다섯 번째 정규앨범 [The Massive Crush]가 그것을 말한다.
이 앨범에서 정용욱은 스래쉬 드러머로선 특이하게 기민한 톤 감각을 보인다. 또, 섬세한 강약을 잡으며 자기 필링을 앞 세워 간다. 스네어 음정은 낮은 편이고 킥은 상대적으로 높다. 중음을 가운데 축으로, 심벌을 포함해 각 드럼 세트들의 음정이 다이아몬드 형태로 분포되어 있다. 이런 튜닝 구도는 드러밍에 집중해 음미하다보면 색다른 사운드 꼴을 느끼게끔 한다. 중음을 축으로 킥과 스네어가 리듬을 찍어나가고, 이리저리 터지는 필인과 산발적으로 엄습하는 심벌 사운드 아래, 그 다이아몬드 꼴이 가로로 벌어졌다 새로로 늘어졌다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이 드럼 사운드에서 연상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비아”, "Moss (Dead Water Love)", "Acid Rain"에서 드러나는 정용욱의 터치는 날카로운 액센트를 짚어내 필인에서마저 묘한 그루브를 끌어낸다. 이는 앨범 전반에 걸쳐있는 정용욱의 드러밍이 가진 최대의 미덕이다. 이것은 테크니션의 마지막 종착지라고들 하는 ‘약하게, 살살 치는 법’을 완전히 체화했을 때 가능한 사운드다. 그래서 사운드는 다채롭다. 메인리듬을 새길 때 스네어 비트는 리프 위로 솟아 오르고, 킥사운드는 꾹꾹 짚어져 박자에 누러 붙는다. 템포를 짚어가는 리듬이 아니라 템포를 생성해 가는 리듬인 것이다. “어떤이의 꿈”, “이빨” 등에서 들린다.
정용욱이 완연한 테크니션으로 성장했음을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이미 가진 고도의 기술을 응용해 독특한 그루브를 만들고, 새로운 비트를 배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Whirlwind Struggle"의 간주 리프, ”Psychedelic Storm"의 메인 리듬, “Moss(Dead Water Love)"에서 들려오는, 뚝뚝 끊어져 절룩 절룩거리는 그루브는 스래쉬 메탈 드러머들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다중적인 것이다. 이런 양상을 보며 생각해야 할 점은 드럼 비트가, 특히 스래쉬 장르에서는 전적으로 곡의 전개나 리프아이템에 종속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저런 그루브가 정용욱이 능동적으로 만들어 낸 필연적 산물이 아니라 곡 전개와 리프의 성질에 즉흥적으로 반응한 결과로서 우연적으로 생산된 것임을 말한다. 드러머로서 정용욱의 순발력과, 날렵한 감각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그 순발력이 만들어내는 우연성이라는 것은 내키는데로 하는 임의성이 아니라 음악적 의미에서의 즉흥성을 견지하는 것이며 기술을 넘어서는, 테크니션의 일합인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 테크닉과 필링은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닉적인 음악, 필링이 좋은 음악, 이분하는 것은 어리석다.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와 잇몸같은 관계다. 테크닉이 없으면 필링을 펼칠 수 없고 좋은 기술을 가졌더라도 필링이 없으면 그것은 뛰어난 운동신경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정용욱은 고도의 기술로 독특한 필링을 연금해 나가는 모범적인 테크니션의 모습을 보여준다. 손목에, 발꿈치에 좋은 필링을 올려놓는 것에서 정용욱의 테크닉은 시작한다.
리듬깎는 청년 혜승 - Pia
드럼 세트의 장남이고 리듬 비트의 맏딸인 스네어 드럼은, 드러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셋팅된다. 또 새로로 서 있어 앞뒤 쪽으로 면을 내 보이는 킥 드럼이나, 비스듬한 기울기를 유지한 채 긴장된 상태로 매달려있는 탐 류의 드럼들과 스네어는 다르다. 배를 뒤집어 안정된 평면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자신의 면과 드러머를 직각으로 대치시킨다. 모든 북이 그렇듯 면과 통을 물고있는 테두리를 스네어도 가지고 있다. 테두리를 때리면 테만 울릴 뿐 면은 울리지 않는다. 면과 테를 동시에 때리면, 그 울림은 독특한 뉘앙스를 낳는다. 이것을 이용하면 보다 딱딱한 톤과 높은 음정의 사운드를 얻을 수 있다. 남용하면 스틱은 부서지고 비트는 지저분해진다.
피아의 2집 [3rd PHASE]는 헤비록 앨범으로서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유려한 멜로디와 질 좋은 사운드 연출, 빈틈없는 악곡의 구성.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훌륭했던 것은 바로 리듬섹션의 견고한 짜임새였다. 아니, 이것들은 서로 동전의 양면인 관계다. 이 앨범의 리듬을 들으며 시종일관 되뇌었던 것은 비트를 조각해 놓은 게 아닐까라는 착각이었다. 청각적 자극이 시각과 촉각의 질감을 양산했던 것이다.
피아의 드러머 혜승은 화려한 테크니션이 아니다. 물론 가볍지 않은 테크닉이 앨범 군데군데서 목격된다. 하지만 리듬을 조직하는 그의 전략, 혹은 음악적 사고의 폭은 간소해 보인다. “소용돌이”, “융단”, “Where I m” 등 이 앨범의 대표 트랙에서처럼 꼼꼼한 스티킹으로 중무장된 필인이 쏟아지고 있지만 곡 전반에 걸쳐 극명해 보이는 것은, 박자를 새기는 그의 메인 비트들이다. 기름기 먹어 윤택한 킥 드럼(베이스 톤과 절묘한 어울림 때문일 것이다)과 스네어의 연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혜승이란 드러머가 만들어내는 스네어 톤이다. 물론 지리한 스튜디오 작업의 성과로 인한 ‘사운드 메이킹’이 상당부분 작용한 점도 있겠지만 여기서 감지되는 것은 사운드 효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운드 그 자체, 즉 소스의 월등함이다.
그가 만드는 스네어 사운드 소스의 구심점은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분석된다. 첫째, 스네어 스티킹이 대단한 고음을 낸다는 것이다. 그의 스네어 톤이 지향하는 것은 테와 면을 동시에 때릴 때 나는 사운드와 같다. 이런 톤은 음량은 적지만 볼륨은 높다. 사운드의 밀도는 낮지만 리듬 안에서의 존재감은 뚜렷해서, 곡 전반적인 차원에서 볼 때 리듬의 구조성을 질서정연하고 흔들림 없이 붙박는다. 둘째, 그 스네어 톤에는 서스테인(Sustain)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드럼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 밴드 형태의 ‘합주’로 나오는 사운드에서 서스테인이 없다는 것은 사운드가 비는 결과를 가져오고, 혜승의 리듬 역시 얼마간 비어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어있는 리듬의 틈은 의미 없는 그저 텅빈 구멍이 아니라 상대적인 공간인 것이고 비워진 그곳으로 인해 리듬의 형태가 완성된다. 음악적으로 안배된 상대적 여백인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고음과 서스테인이 부재하는 스네어 사운드가 리듬의 중심을 이룰 때 비트는 예리하게 각을 세운다. 예를 들어 [Kick Flip]에서처럼 다소 바쁜 템포와 잘게 잘린 16비트가 8비트로 다져진 복잡한 곡에서, 중구난방하는 랩과 멜로디, 중간중간 터지는 계통없는 리듬 섹션을 모두 뿌리치고 곡을 밀고 나가는 것은 드럼비트인 것이다. 비트가 각을 드러내어 사운드의 여백을 만들면 거기서 그루브는 생겨난다. 그렇게 곡의 구조는 뚜렷해지고 리듬은 가속하는 것이다.
헤비 록 장르에서 드러머들의 사고가 거대한 라우드감과 현란한 테크닉의 강박으로부터 쉬이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드러머 자신들이 안다. 그것은 강박이 아니라 장르의 문법이다. 그래서 라우드함을 버리는 대신 비트의 각으로 리듬을 깎아 남다른 톤을 추구하는 피아의 드러머 혜승은 각별하다. 비트의 각을 드러내는 이 리듬 깎는 청년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스네어 톤을 만들어 내고있는 것일까. 답은 그의 스네어와 스틱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초월님이 드럼을 열심히 배우시고 계십니다...
초월님 열심히 연습하시는 모습을 보고 작으나마 먼가 해드리고 싶어서 올립니다...
조만간 멋진연주 기대할께여...
첫댓글 음...중압감을..ㅎㅎㅎ...잘읽고 공부합니다..^^*
초월님..드럼 열씸히 공부하셔요.--;; 드럼 치시는 분들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