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증을 일게 하는 시간의 야속함.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린 쓸쓸함. 옷깃을 스며들어 목덜미를 휘감는 차가운 공기의 섬뜩한 촉감. 차도를 이리저리 나뒹구는 도심 속의 낙엽….
해마다 늦가을이면 부닥치는 이런 저런 상념과 잿빛풍경에 지칠 즈음, 사람들은 단풍을 핑계 삼아 길을 나선다. 푸른 비단 위에 수(繡)를 놓듯 번져가는 단풍 물결이 왠지 휑한 마음을 채워 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말이다.
대구를 떠난 지 1시간30여분. 가을 추억여행의 목적지인 청송군 경계선을 넘자 마음자락은 어느 새 노랗고 붉은 물감을 점묘법으로 찍어내듯 물들어가는 단풍에 촉촉이 적셔진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다. 들녘엔 막바지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화폭에 담은 이 땅의 절경들
진보면 신촌리 군립청송야송미술관. 폐교를 리모델링한 이 곳은 50년을 오로지 산수화만을 그려 온 야송(野松) 이원좌(70) 화백이 2004년 고향에 내려오면서 설립한 청송의 문화명소. 때마침 올 연말까지 기획된 ‘야송화업 70년전’이 열리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 산천을 스케치한 후 전통수묵화 기법을 이용, 진경산수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는 이 화백의 작품은 시원하면서 통쾌하다. 특히 전시작품 중 가장 큰 그림인 길이 12m, 폭 2.4m의 ‘주왕운수도’는 주왕산 기암과 절봉들을 화폭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관념산수도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게 한다.
마치 무비카메라를 돌리듯 시선을 옮겨가며 그린 ‘시점이동산수화’기법은 이 화백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눈에 보이기 이전에 내재한 자연의 불변하는 실체를 화폭에 옮기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전시된 250여점의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이 땅에 실재하는 절경들을 옮겨놓아 그림을 모두 둘러보고 나면 전국을 여행하고 온 느낌이다. 관람료는 없다.
#배릿한 약수의 맛에 취하고…
미술관 가는 길인 34번국도변에 있는 신촌약수탕은 100년이 넘게 솟아나고 있는 청송의 명소. 달기약수와 흡사한 맛인 신촌약수는 각종 미네랄이 풍부해 빈혈·위장병·피부병·부인병에 효험을 갖고 있다. 국도변 원탕약수슈퍼 앞마당에 있는 약수터가 원탕으로 다른 곳은 땅을 파 인위적으로 약수가 솟게 했거나 호스로 당겨 만든 곳. 하지만 약수의 효능엔 차이가 없다. 특히 철분함량이 많아 약수를 마신 뒤 배릿한 뒷맛이 감돈다.
#석쇠에 구운 닭불고기
청송 닭불고기는 떡갈비에 가깝다. 뼈를 발라낸 닭가슴살을 다져 고추장과 간장 등 10여가지 양념에 버무린 다음 하루정도 숙성시켜 부침개처럼 넓게 펴서 석쇠에 구워낸다. 기름이 쏙 빠진 닭불고기 한 점을 떼어 거친 배추 잎에 마늘과 고추를 얹고 쌈 싸먹으면 맵싸하면서 토속적인 불고기 맛이 일품. 신촌약수로 끓여낸 닭백숙도 육질이 연해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다. 신촌 약수탕 일대 30여 곳의 음식점에서 맛을 볼 수 있다. 닭불백숙 1인분 1만원, 닭불고기 8천원, 닭백숙 9천원.
#전설과 비경의 산, 주왕산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주왕산은 기암(奇岩)으로 유명하다. 주왕산 초입에 있는 대전사 마당.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이 파란 가을하늘과 보색대비를 이루고 대웅전 뒤로는 부처의 머리(佛頭)를 닮은 거대한 바위가 솟은 절경은 한 순간 넋을 잃게 한다. 오후의 햇살은 또 어찌 그리 따사로운지. 주중임에도 단풍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로 주왕산 등산로는 만원이다.
대전사 마당을 지나 장군봉 가는 길. 주왕산의 상징인 기암(旗岩)아래 노란 국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저 멀리 주왕산 자락엔 붉은 단풍이 밀려오고 있다. 단풍에 밀린 산바람이 계곡을 훑고 지나가자 진하디 진한 국화향이 코를 찌른다.
능히 서리마저 업신여긴 국화는 유유자적 세속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 다만 그 꽃밭에 든 사람들만이 어린 아이들 마냥 야단법석이다. 이미 바람과 비에 시달렸음에도, 국화는 담담할 뿐이다. 그 무심(無心)함에 이끌린 길손은 제 갈 길을 잠시 접어둔다.
#자연을 닮은 얼음골 사람들
주왕산 삼거리에서 영덕 방향 914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아름다운 청송의 전원 속에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사과의 고향 청송에서 한평생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청송꿀맛사과농장’의 김문노(53, 부동면 부일2리)씨. 2만여평의 과수원에서 자라고 있는 3천500그루의 사과나무엔 새콤달콤하면서 감칠맛이 나기로 유명한 부사 수확이 한창이다. 25년생 나무에 열린 사과는 대략 400~500여개. 제법 굵은 가지들도 사과 무게를 못 이겨 축 늘어져 있다.
가족단위 사과따기체험에 나선 아이들은 신기한 듯 나무사이를 뛰어다니며 가장 큰 사과를 고르고 있다. 4인가족 기준 1만6천원을 내면 4kg의 사과를 따 갈 수 있다.
“껍질 색깔이 붉고 모양이 고르며 크기는 중간정도가 가장 맛있는 사과입니다.” 김씨의 설명에 큼직한 사과를 골랐던 고사리 같은 손이 다른 사과로 옮겨간다. 가을 수확의 기쁨에 과수원 이곳저곳에선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4천평 규모의 국화밭에서 나는 단추만한 감국(황국)을 수확, 수제 국화차를 생산하고 있는 임소정(43, 부동면 내룡리)·수경(31) 자매. 귀농 5년차의 초보 농사꾼이지만 국화차에 대한 열정은 누구 못지않다.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 국화꽃잎을 따서 한약재로 미세한 국화 독을 제거하고 삶거나 쪄서 하루 이틀정도 말린 국화차는 뜨거운 물에 담그면 다시 꽃잎을 활짝 피운다. 들에서 한 번 피었던 국화가 찻잔 속에서 다시 한번 피는 것이다. 연하고 부드러운 향과 맛이 가을을 통째로 마시는 기분이다. 임씨 자매는 ‘청송미인’이란 제품명으로 국화차와 티백제품을 생산, 쇼핑몰인 옥션과 G마켓 및 전국 던킨도너츠매장에 내놓고 있다.
200여개가 넘는 장독대에서 자연 바람을 맞으며 깊은 맛으로 익어가는 청송얼음골황토메주된장을 생산하고 있는 이원식(65, 부동면 항리)씨. 11월 중순 햇콩이 수확되면 그는 정신없이 바빠진다. 지하 210m에서 끌어올린 청정수로 콩을 삶고 찧어 메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작업에 대략 5천여개의 메주를 만든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전통방법 그대로 가마솥에 콩을 삶고 짚으로 메달아 황토방에서 약 60일을 띄운다. 이렇게 만든 메주는 전통 장독에 담가져 오랜 숙성기간을 거치게 된다. "맛보라"며 건네는 지난해 된장은 짭짤하면서도 구수하고 끝맛이 달다. 메주·된장·간장·청국장·청국장가루 등 5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청송 얼음골에 자연을 닮은 사람들이 있어 가을 추억여행 보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태고의 원시성이 녹아있는 주산지
주왕산 국립공원 내의 주산지는 조선 경종원년(1721년)에 만든 농업용 저수지다. 주산지가 명성을 얻은 이유는 못 안에 자생하고 있는 30여 그루의 왕버드나무 때문이다. 특히 동틀 무렵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태고의 원시성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에 반쯤 잠긴 채 껍질을 드러낸 허연 왕버드나무와 조용한 주왕산 계곡의 절경이 어울리면 탄성을 뱉어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 가뭄으로 물이 많이 줄어 신비감이 옅어진 상태. 이곳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이 되면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명소 중 하나가 됐다. 저수지 가장자리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주산지를 더욱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으며 전망대에서는 주산지와 주왕산의 늦가을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가볼만한 곳
◇신촌약수탕과 군립청송야송미술관 가는 길=청송군 소재지에서 31번국도를 따라 진보면까지 간 후 진보면 진안네거리에서 우회전, 영덕방향 34번국도로 20여분 달리면 신촌리 약수탕이 나온다. 군립청송야송미술관은 신촌약수탕에서 5분가량 더 가면 왼쪽에 있다.
◇얼음골 가는 길=주왕산 국립공원을 나와 주왕산 삼거리에서 좌회전, 914번지방도를 타고 고개 하나를 넘으면 꿀맛사과농장이 있고 이곳에서 영덕방향으로 계속 진행, 내룡리 얼음골 인공폭포를 지나면 ‘청송미인’의 산지 국화밭이 나온다.
또 이곳에서 거의 영덕 경계까지 가다보면 왼편 팻말을 따라 산길을 올라가면 ‘청송얼음골황토메주된장’을 만들고 있는 이원식씨를 만날 수 있다.
문의는 청송꿀맛사과농장 김문노씨 011-9500-2369, 청송미인 임씨자매 010-4596-3876, 청송얼음골황토메주된장 이원식씨 011-526-1666.
첫댓글 뭔? 말이 필요하나 "신선이 사는곳 청송" 이 답이제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