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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여행 30일간의 아름다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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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라파즈의 꿈과 희망
♣ 오늘은 남미 페루에서 11일째인 2017. 3. 23(목)입니다. 지난밤 창문을 크게 두드릴 정도로 비가 내렸지만, 아침은 날씨가 활짝 개었고 티티카카 호수에는 쌍무지개가 떠올라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약 4,000m에 조성된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떠나야 하기에 쌍무지개의 아름다운 전경이 아쉽기 그지없었지만, 숙소인 Hotel Laro Azul에서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절버스에 승차했습니다.
♣ 코파카바나를 떠나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티티카카호수의 아름다운 전경은 절로 아~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의 환상 그 자체였지요. 그런데 라파즈로 가는 길목에는 산 페트로 데 티퀴나(San Pedro de Tiquina)에서 보트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 내의 Strait Tiquina 해협을 건너야만 했는데, 산 페트로 데 티퀴나 선착장에는 어제 태양의 섬에서 본 낯익은 얼굴인 잉카 왕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인 '만코 카팍'(Manco Cápac)의 멋진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이곳의 원주민들과 함께 보트에 승선하여 해협을 건넜습니다.
♣ 보트는 우리일행 16명과 이곳 볼리비아 현지인 5명 그리고 보트 선장 1명 등 총 22명이 승선하여 맞은편에 있는 산 파블로 데 티퀴나 마을로 향했습니다. 산페드로 데 티퀴나 선창장에서 직선거리 850m 맞은 편이 산 파블로 데 티퀴나 마을이기 때문에 해협을 건너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이었습니다. 호수 건너편의 산 파블로 데 티퀴나 마을에는 볼리비아의 해군본보가 있는 탓인지 멋진 흰색의 해군제복을 입고 선착장 주변을 시찰하는 높은 계급장을 단 지휘관과 참모의 모습은 무지 폼나 보였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패함에 따라 바다를 빼앗겼기에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의 호수를 지키는 해군이라 더욱 안타깝고 한편으론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 참고사항
칠레와 페루·볼리비아의 태평양전쟁은 1879년 2월부터 1883년 1월까지 약 4년간 에 걸쳐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이 맞서 싸운 남아메리카의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고 함.
♣ 오전 9시 20분, 티티카카 호수의 Strait of Tiquina 해협을 무사히 건넜고, 우리는 바지선에 실려 온 우리 버스에 승차했습니다. 그리고 라파즈를 向하여 내달렸습니다. 티티카카 호수 주변의 농촌마을을 지나면서 멀리 보이는 넓디 넓은 초원지대는 몇 마리의 소와 양떼가 풀을 뜯고 있었지만 그 넓은 땅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땅이 큰데 비해 쓸모없는 불모지가 많은 것도 문제지만 쓸만한 땅도 일손이 모자라 개간할 엄두도 못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점차 대도시에 가까워지면서 마을단위도 조금씩 컸고, 또한 무슨 날인지는 몰라도? 길거리엔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전경이 참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국가적인 주요 행사가 열리는 날인 것 같았습니다.
♣ 코파카바나를 떠난지 2시간 30분이 지날 쯔음, 우리가 탄 버스는 해발 약 4,000m의 고산지대를 힘겨운 숨소리를 내면서도 잘 올라갔고, 드디어 라파즈의 외곽지를 막 지났는데, 도심 인근지의 건물들은 낡고 허름했고 또 비포장지대가 많아 흙먼지도 휘날렸으나 점차 전통적인 볼리비아 복장차림의 원주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도로변 배수로 공사인지? 도로포장 아스팔트 공사인지? 온통 파헤쳐진 곳이 많았고 건물 신축공사 현장도 많았는데, 이는 마치 우리나라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연상되었지요. 남미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지만, 이제 원주민 출신의 새 대통령을 뽑았기에 꿈과 희망을 품고 오직 경제개발을 통해 잘 살아보자는 의지가 엿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도심으로 들어오면서 거리 중앙에 우뚝서있는 철재로 만든 ‘체게바라((Che Guevara)’ 동상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쿠바의 카스트로와 함께 남미해방을 위해 최전선 밀림에서 싸우다가 비록 타국인 이곳에서 전투 중 사살되었지만, 최고의 지선인 의사출신인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뜻에서 뒤는게나마 여기에 동상을 세웠나봅니다.
♣ 고산지대의 라파즈 외곽도시를 지나자 마자, 곧 우리버스는 가파른 계곡을 내려갔는데, 이는 마치 우리 고향 대관령에서 강릉시내로 내려가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가파른 내리막길의 도로변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체스코 교황님과 볼리비아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이 함께 다정한 모습을 취한 대형 그림판이 게시되어있었고, 그곳에서 내려다 본 라파즈 시내의 전경은 그냥 한마디로 ’칵~!‘ 소리가 날 정도로 너무나 경이적인 전경이었습니다. 언덕 아래 펼쳐진 '라파즈 시내'의 다닥 다닥 붙은 수천 수만가구의 붉은색 벽독집들의 전경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도로변 벽화 역시 예술 그 자체였습니다.
♣ 이른 아침 코파카바나를 떠난지 3시간 40분만인 오전 11시 50분 드디어 라파즈 시내의 우리가 머물 호텔 HOTEL CORDILLERA REAL에 도착했고, 여행가방만 숙소에 넣어두고 곧 점심식사를 위해 라파즈 시내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야식당(Ga Ya)’에서 오랫만에 삽겹살에 진하게 소주도 한잔했습니다. 일품의 김치찌개 맛은 그간 해발 고도 3,500m 이상 고산증을 예방하고 또 적응하려고 빌빌 거렸던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원기소와 같았습니다. 식사중 한바탕 소낙비가 내렸지만, 잠시 후 햇볕이 다시 쨍쨍했습니다. 이곳은 고산지대이므로 오후 2시경이면 따뜻한 상승기류와 찬공기가 만나서 자주 소낙비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당 주변일대에는 고급 아파트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우리나라의 강남구 정도에 해당되는 부촌동네임을 감지할 것 같았습니다.
♣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오후 2시, 식당 門을 나와 대절한 버스에 승차해 다음 코스인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으로 향했습니다. 마치 중국의 토림과 같이 흙으로 쌓은 듯한 산(山)과 계곡은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수만년천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퇴적층이 형성 되었기에 이곳 라파스에는 도심 내에 이런 '달의 계곡'이란 신기한 별천지가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의 계곡은 바위산도 아니고 흙은 분명한데 마치 시멘트를 쌓아 놓은 곳이 비에 흘러내린 것 같은 특이한 형태였습니다. 화산의 영향인가? 아님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인한 바다가 육지로 변화하면서 생긴 융기현상인가? 짧은 지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곳 달의 계곡일대를 한 바퀴 도는데 소요되는 시각은 약 1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걸었다면 2시간 정도가 적절했을 것입니다만, 우리 일행은 오늘 이곳 외에도 라파즈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는 Mirador Kili Kili 전망대를 비롯하여 라파즈의 중심가 "무리요 광장"을 비롯한 가장 하이라이트인 '공중 케이블카'를 타고 산 꼭떼기 달동네까지 구경해야 하고 또 야간 마녀시장 등 시내관광 스케줄까지 잡혀있는 터라 발길을 서둘렀습니다. 정말 많이 아쉬웠지요.
2017. 3. 23(목) 오후의 이야기
■ 오늘 볼리비아의 실질적인 수도라고 하는 라파즈에 도착하고 보니, 우선 볼리비아에 대한 역사와 지리, 정치와 경제, 인구현황, 문화와 종교, 자연환경,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의 관계 등 일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았습니다.
■ 특히 앞으로도 사흘간 볼리비아에 머물며 오늘 오후 이곳 라파즈 시내에서 견학할 예정인 Mirador Kili Kili 전망대를 비롯해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무리요 광장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해발 4,100의 고산지대까지 연결한 세계적인 명물이 된 케이블카 탑승, 산 프란체스코 성당, 마녀시장 등의 라파즈 야경관광도 있습니다만...
■ 내일인 3월 24일(금)은 비행기로 이동, 소금사막인 Uyuni 일몰투어를 해야하고, 3월 25일(토)은 Sanjuan의 소금호텔 투숙, 또 찦차로 하루 온종일 3월 26일(일)의 볼리비아와 칠레 국경지역의 LAGUNA COLORADA 국립공원 탐방 등을 하며 머물러야 하기에 사전 볼리비아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 같아 이왕 筆을 든 김에 먼저 인터넷으로 조회한 볼리비아를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볼리비아(Bolivia)
■ 이 자료는 인터넷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에서 찾아 이를 참고하였습니다.
■ 볼리비아(스페인어 : Bolivia볼리비아)는 남아메리카 중부에 있는 내륙국으로, 행정 수도는 라파스이며, 사법 수도는 수크레입니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볼리비아는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와 인접해 있으며, 아마존 강 상류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존 정식 명칭은 볼리비아 공화국(스페인어 : República del Bolivia)이었지만 2009년 2월 헌법 개정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정식 국명으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정된 헌법에도 '수크레(Sucre)'를 수도(capital)로 명시하고 있고, ‘라 파스(Las Paz)'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은 없습니다. 헌법상 수도인 '수크레'에는 사법부인 최고법원이 있으나, 라파스에는 대통령 관저를 비롯한 행정부처들 그리고 입법부인 의회가 자리 잡고 있어 사실상의 수도는 라파즈(Las Paz)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광이 있는 '포토시'(Potosi) 근처에 있는 '수크레'는 독립 초기부터 수도의 역할을 해 왔으나 은광이 사양화되면서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던 '수크레'를 대신해 19세기말인 1898년 ‘라 파스(Las Paz)'로 수도를 이전한 것입니다.
■ 유럽 식민 지배 이전에 볼리비아 영토는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잉카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그 당시는 페루와 볼리비아가 같은 한나라였던 것이지요. 즉 16세기에 스페인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는데, 스페인 식민 시대에 볼리비아 지역은 "상부 페루" 혹은 "차르카스(Charcas)"로 불렸으며,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포괄하는 페루 부왕령의 통치를 받았던 것입니다. 1809년에 독립을 선언한 후 1825년 8월 6일 공화국을 세우기까지 16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볼리비아라는 나라의 이름은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 1783년~1830년)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라파즈 시내 중심가에 세워진 볼리바르의 동상
※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는 크레올료로 불리는 즉, 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으로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 출신으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루, 페루, 볼리비아 등 다섯나라를 스페인 식민통치하에서 남미를 해방시킨 독립의 영웅입니다.
■ 현재 볼리비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9개의 주(州, departamento)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나라의 지리는 서쪽에 있는 안데스 지역에서 아마존 분지에 있는 동부 저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볼리비아는 개발도상국으로 인간개발지수에서 중간 점수를 보이며, 빈곤율은 약 60%이고, 주요 경제 활동은 농업, 임업, 어업, 광업, 그리고 직물, 의류, 금속 제련, 석유 정제 산업입니다. 볼리비아의 인구는1,060만명에 이르며 아메리카 토착민,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들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스페인어가 주로 쓰이며, 아이마라어와 케추아어, 과라니어도 널리 쓴다고 합니다. 어떻든 볼리비아의 다양한 문화는 예술, 음식, 문학, 음악에서 폭넓은 다양성을 보이는데, 여행기행문을 쓰면서 간간히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2018년 3월 23일(목) 오후의 이야기
■ 오늘 아침 대절한 버스로 코파카바나를 떠난지 약 4시간만인 낮 12시 40분경 목적지인 라파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시내에 위치한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야식당’에서 한식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그리고 삼겹살을 안주삼아 간만에 소주도 한잔했기에 그간 고산지대에서 겪은 고산증에서 잠시 벗어나 원기를 회복 할 수 있었습니다.
■ 점심식사 후에는 시내 외곽지에 위치한 달의 계곡을 둘러 본 후 Pm 3시 10분, 버스에 승차하였고, 달의 계곡에 있는 암석으로 된 자연 터널을 뚫고 나와 다음 코스인 라파즈를 한눈에 조망하는 Mirador Kili Kili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오후 한낮 소낙비가 내린 후 곧 활짝 개인 날씨였기에 안도할 수 있었습니만, 그래도 하늘엔 간간히 먹구름이 끼어 전망대에서 과연 라파즈 시내를 잘 조망할 수 있을까? 하며 약간은 걱정을 했습니다. 차창 밖의 라파즈 변두리의 전경은 바위산 or 흙도 아닌 석회석으로 쌓아 놓은 듯한 이상한 토질 위에 무계획적 무질서한 낡은 건축물들이 많아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도심으로 진입하면서부터는 놀라울 정도의 고급 고층빌딩도 많아 빈부격차가 심한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승차한 대절버스는 코파카바나에서부터 타고 왔던 중고 버스였기에 전망대 언덕길을 오를 때는 무척 힘이 겨운지 크르륵~ 크르륵~ 거리면서 심한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달의 계곡을 떠난지 30여분이 지난 Pm 3시 45분경, 해발 3,800m의 전망대 앞에 도착했습니다.
라파즈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는 Mirador Kili Kili 전망대
■ Mirador Kili Kili 전망대는 해발 3,800m로서 산 언덕 위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지만, 라파즈 시내를 한눈에 충분히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망대 중앙에는 수량 100년 정도는 되었을 것 같은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우리의 인솔자인 유대장의 말(言)에 의하면 볼리비아에만 있는 ‘깨누아’라고 했는데, 이는 마치 우리나라 시골마을의 정자 옆에 늘 서있는 큰 은행나무와 비슷했습니다. 아무튼 이틀전 티티카카호수의 태양의 섬에서 거대한 나무들을 본 이래 처음 보는 나무라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망대 위의 더 높은 가파른 언덕에도 수백 수천의 허름한 가옥들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정말 신기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망대에서 놀란 것은 인구 100만명 이상이 엄청난 세계최고 높이의 고산지대 최대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쟀거나 볼리비아의 실질적인 수도인 라파즈는 1548년 알티플라노고원 약 3,600m의 고지에 건설된 역사가 있는 도시로, 오늘날 볼리비아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티티카카호에서 흘러내리는 라파스강(江) 연변에 전개된 분지에 시가지로 잘 발달 되었으며, 높은 단구(段丘)의 위와 하류부의 낮은 곳에는 원주민의 주택이 있고, 그 중간에 백인지구가 있으며 순수한 인디오가 주민의 반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 어떻든 종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수천수만 가구가 모래언덕에 달동네를 형성하고 있었을 때 크게 놀란바 있는데, 이곳 볼리비아의 라파즈에 비할 때 페루의 리마는 쨉도 되지도 않았습니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빈국으로 불리우는 볼리비아의 수도에는 해발 4,000m에도 달동네가 형성되어 있었고, 또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산꼭떼기 달동네에서 산 아래 도심지로 내려오는데는 종전 통상 도보로는 2~3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차량으로도 30분 이상이 걸린다는데, 산꼭대기에 거주하는 수천 수만명의 가난한 달동네 서민들을 위해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2006년도 취임)이 외자를 도입해 서민들의 교통란을 해결하기 위해 2014년(3개 노선의 설치완료 / 1일 2만명 이상 이용) 케이블카를 설치했기에 이제는 불과 산꼭대기 달동네에서 도심까지 케이블카로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전망대에서 만난 현지 볼리비아의 젊은 여대생들 몇명은 한국의 K-pop를 사랑한다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어 기분좋게 함께 단체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 이곳 전망대에서보다는 곧 다음 코스인 대통령궁과 국회의사장 등이 있는 무리요 광장을 견학한 후, 직접 케이블카로 산꼭대기 달동네에서 라파즈 시내를 조망한다면 아마도 더 멋진 전경을 볼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안데스 산맥의 최고봉 해발 6,000m 이상의 눈쌓인 설산들도 케이블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 라파즈는 볼리비아의 최대의 도시로 해발 3,250~4,100m 사이에 조성되어있는 세계에서 가장 공기가 희박한 도시입니다. 그런 관계로 우리는 해발 3,800m 전망대의 계단을 오를 때에도 숨이 턱에 헉~헉~ 차올라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일행은 20여분 정도 전망대에 머물다가 다음 코스인 무리요 광장으로 향하기 위해 전망대의 계단을 내려와 Pm 4시 10분, 도로에 대기중이던 대절 버스에 올라 대통령궁과 의사당이 있는 라파즈의 중심지인 ‘무리요 광장’으로 向했습니다.
볼리비아의 역사·행정의 중심지
‘무리요 광장(Plaza Murillo)’
■ 라파즈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라이카코타 언덕에 위치한 Mirador Kili Kili 전망대에서 라파즈(Las Paz) 市의 중심부인 무리요 광장(Plaza Murillo)까지는 차량으로 불과 5분이면 도착하는 지근거리였습니다. 티플라노 고원 내에 위치한 라파즈는 초케야푸 江으로도 불리는 라파스 江에 의해 형성된 깊고 넓은 협곡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 최고도인 해발 약 4,000m에 조성된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1548년 정벌대장 알론소 데 멘도사가 잉카의 촌락이 있던 자리에 누에스 트라세뇨라 데라파스('평화의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운 뒤, 1825년 라파스데 아야쿠초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1898년 정부가 이곳으로 주요기관을 옮겼지요. 라이카코타 언덕 아래의 무리요 광장은 라파스의 메인 광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고풍스러운 유럽풍의 대성당과 대통령궁, 국회의사당이 광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오후 늦은 시각이고 또 하늘에는 약간 먹구름이 낀 궂은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웬~ 비둘기들이 그리도 많은지? 광장 시멘트 바닥에는 먹이를 쪼는 비둘기들이 새까맣게 몰려있었습니다.
■ 무리요(Plaza Murillo) 광장의 중심부에는 볼리비아의 독립을 위해 싸운 무리요 장군의 동상이 위엄있게 서 있었는데 그곳에도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떼들이 동상의 머리부터 발 아래 그리고 그 제단까지 모두 점령하고 있었지요. 이 광장도 남미의 각나라 수도에 있는 대부분 큰 광장들의 이름들이 한결같이 아르마스(Armas)광장(스페인어로 큰 광장이라는 뜻)이라고 하듯 ‘무리요 광장’도 아르마스 광장이라고 불렀으나, 볼리비아 독립운동에 큰 공정을 남긴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Pedro Domingo Murillo, 1757~1810)가 지금의 볼리비아를 일컫는 ‘Alto Peru'의 독립을 위해 봉기(1809년 7월 16일 독립투쟁 선언)했으나 실패해 이 '무리요 광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투쟁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의 투쟁은 스페인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의 불씨의 발화점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남미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더욱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결국 1825년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와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에 의해 스페인으로부터 결국 해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립된 볼리비아 정부는 이 아르마스 광장의 이름을 ‘무리요 광장(Plaza Murillo)’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 무리요(Plaza Murillo) 광장의 중심부에는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Pedro Domingo Murillo, 1757~1810) 장군의 동상이 위엄있게 서 있었는데, 그 동상의 4면에는 PAZ(PEACE 평화), UNION(UNION 결속), Gloria(Glory 영광), Fuerza(Force 힘)라는 구호와 함께 그의 정신을 계승 발전할 것을 알리는 문장이 기술되어 있고, 동상의 밑부분 조각에는 그 중앙에 모국을 상징하는 여인像, 왼쪽에는 ‘해방자 군인’ 인물像이, 그리고 오른쪽은 용맹과 승리를 상징하는 사자像이 있습니다. 이 조각像들은 모두 이태리에서 제작해 배로 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외 조각품의 일부는 항구에서 배가 침몰하는 관계로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아마 분실하지만 않았다면 더 화려하고 위엄있는 무리요 광장이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그곳에도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떼들이 동상의 머리부터 발 아래 그리고 그 제단까지 모두 점령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불현듯 무리요 광장의 실제적 주인은 어쩌면 평화를 상징하는 이 비둘기 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높은 동상 위에서 무리요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볼리비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곳에서 처형된 ‘무리요 장군’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도 당부했껀만, 정작 그의 후손들은 칠레와의 전쟁에서 태평양 연안을 삐앗겨 내륙국으로 전락했고, 또 차코전쟁(Chaco War, 1932-1935)에서 파라과이에 패해 ‘그란 차코(Gran Chaco)' 지역을 빼앗끼고 또 브라질에게는 고무의 산지인 ‘아크레(Acre)’ 지역을 양도하는 등 볼리비아 집권층들의 무능으로 독립 당시 영토의 절반 정도를 상실하는 것을 보면서 무리요 장군 동상의 4면에 새겨놓은 PEACE 평화, UNION 결속, Glory 영광, Force 힘이란 당부의 구호가 무색하게 된 것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 볼리비아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은 되었으나 광산주와 대지주, 군인, 상인 등 소수 특권층을 위한 나라였습니다. 독립된 1825년부터 문민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1982년까지 157년간 무려 189회의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 탓인지?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볼리비아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무리요(Plaza Murillo)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를 비롯하여 국회의사당 등 행정부 그리고 대성당과 박물관이 위치해 있는데, 특히 대통령 관저와 행정부가 있는 '팔라시오 케마도'(Palacio Quemado : ‘Quemado’는 스페인어로 불탄‘이라는 뜻)'는 1875년 폭동 때 화재로 거의 전소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으나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수십회 쿠데타 등의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파괴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팔라시오 케마도' 정면에 게양되어 있는 깃발 중, 가운데는 볼리비아 국기이고 왼쪽은 안데스의 원주민을 상징하는 '위팔라'(Wiphala)旗입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위팔라'는 가로 세로 각각 7칸씩 49개의 네모 모양의 줄무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빨강 주황 노랑 하양 초록 파랑 보라의 7가지 색은 안데스의 각 지역을 상징합니다. 2009년 개정된 헌법에는 '위팔라'를 국기와 동등한 국가의 상징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팔라시오 케마도' 정문에서 근위병들의 교대식이 거행하고 있는 전경인데, 근위병들은 칠레에게 빼앗긴 태평양 연안지역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태평양 전쟁(Guerra del Pacífico, 1879-1883)' 당시 볼리비아軍이 입었던 붉은색 군복과 당시의 차림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쩐지 근위병들의 복장은 옛날 구시대의 복장으로 마치 호두까끼 인형극에 등장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만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는줄 몰랐지요. 관광객들은 근위병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진도 찍는 것으로 보아, 철통보안통제를 하는 경계병이라기 보다 이제는 하나의 관광 상품화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건립된 대성당의 웅장함에 압도 당하다.
■ 라파즈 시내의 중심지인 무리요 광장에는 무리요 장군 동상을 비롯한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도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가톨릭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우리를 압도했습니다. 며칠전에 보았던 페루의 리마와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에서 거대한 유럽식의 대성당이 그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곳 볼리비아에서도 역시 대성당의 웅장한 자태에 우리는 그저 부러움과 더불어 압도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스페인 침약자들은 식민통치를 하는데 있어 종교적으로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무리요 광장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대성당도 식민지 시절에 건립된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자인 유대장의 말에 의하면 무리요 광장에 우뚝세원진 높은 종탑을 지닌 이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은 바로크적 요소가 가미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대성당은 1835년 착공되어 90년만인 1925년 처음 공개됐으나 아직도 미완성 상태라고 합니다. 유럽의 대성당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성당의 종탑이나 창문 그리고 조각품 등은 예술 그 자체였습니다.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성당에서 꼭 미사라도 참례하고 싶었는데, 그냥 둘러보기만하고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이 무지 아쉽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광장에 제일 먼저 건립된 것이 식민지시절의 대성당이었고, 무리요 장군 동상과 대통령궁 그리고 국회의사당과 박물관 등은 1825년 독립된 이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볼리비아에는 국교가 없으나, 볼리비아인 대다수는 로마 가톨릭신자이며, 개신교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인구의 80% 이상이 로마 가톨릭이며, 16%는 개신교, 3%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를 제외한 교회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아시아 이민 후손 중에 이슬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으며, 유대인 공동체도 있는데, 거의 대부분 아슈케나짐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 그룹)출신입니다. 산타 크루스 주에는 개신교 교회인 메노나이트(Mennonites : 기독교에서, 종교 개혁 시기에 등장한 개신교 교단으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운동이라고 하는 ANABAPTIST에 속함)신자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믿음에서 콜롬부스 이전의 남미 원주민들의 얼이 담긴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혼합하고 있습니다. 침략자인 스페인이 통치수단으로 들여온 종교인 로마 가톨릭교회가 남미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그저 아이러니칼(ironical) 하기만 합니다.
■ 무리요 광장의 국회의사당이고 하는 의회는 유럽식 건물에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건물 중앙에 있는 대형의 원형시계는 인솔팀장의 말대로 정말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숫자도 반대로 새겨져 있고 바늘도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었는데, 이는 남반구는 북반구와 다르다는 의미라는데...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았지만 나의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회 바로 옆의 건물은 아주 낡고 보잘 것 없은 폐가와 같은 것이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유리창도 깨져있고 건물도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요. 라파스의 가장 중심이되는 대통령궁에서 불과 100m 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이런 건물이 있다니... 수도의 중심부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이런 건물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라면 외국관광객들에게 흉꺼리가 될까 싶어 당장 재개발을 했을 터인데...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나름대로 역사보존 차원에서 그냥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볼리비아는 다민족 국가라고 하는데, 인종 구성을 보자면, 전체에서 30%는 케추아語를 쓰고 25%는 아이마라語를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입니다. 케추아족은 250만, 아이마라족은 200만이며 치키타노족은 18만, 과라니족은 12.5만입니다. 그래서 총 원주민 인구는 전체 55%이며, 나머지 30%는 메스티소(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계 백인과 인디오와의 혼혈 인종.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함), 15%는 백인이라고 합니다. 메스티소 가운데, 전통적인 의상을 입는 여성은 초리타로 불립니다.
■ 그리고 보니, 지금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훤칠한 키에 유럽인처럼 생긴 현지 가이드인 ‘꼴레티보’가 전형적인 ‘메스티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든 백인 인구는 대부분 크리올로 초기 스페인 식민자들의 후손은 상대적으로 순수한 스페인계 혈통인데, 이들은 독립 이래로 이 나라의 지도층이었습니다. 백인 중에는 독일, 이탈리아, 미국, 바스크, 크로아티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 출신도 있으며, 대다수는 이미 수 세대 동안 볼리비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한편 브라질로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포토시 광산의 개발 노동자로 투입되기 위해 서쪽 볼리비아로 이주하면서 생긴 아프리카~볼리비아 집단은 전체의 0.5% 정도인데, 이들은 대개 라파스 주의 융가스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1900년대에 일본인 이주자가 북부의 라리베라르타나 트리니다드에 이주했으며, 1954년부터는 주로 오키나와현이나 규슈에서 이주자가 산타크루스 주로 이주하여 이들은 이 지역에 주로 분포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 이주자도 있으며, 장사로 성공한 중동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민족 국가인 볼리비아는 남아메리카에서 빈국에 속하며 인구의 2/3 중 상당수는 농사로 근근히 먹고 살며, 빈곤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도심지였지만 라파즈 시내에서도 남루한 복장의 사람들을 통해 경제수준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하늘의 지하철이라고 불리우는
미 텔레페리코(Mi Teleférico)
■ 약 20여분간 무리요 광장의 견학을 마치고, Pm 4시 25분경 대기하고 있는 전세버스에 승차하여 다음 코스인 라파즈의 최고의 자랑꺼리라고 하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시내 중심부를 지나 10분만에 케이블카 역에 도착했습니다. 날씨가 잔뜩 흐려 도심내에서도 고도 차이가 무려 700m나 되는 해발 4,100m 이상을 오르는 케이블카로 가파른 공중도시에서 라파즈 시내를 조망할 수 있을까? 다소 걱정되었으나 그런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서서히 햇볕이 보이기 시작해 째지는 기분이었습니다.
■ 라 파즈의 새로운 교통시스템인 '미 텔레페리코'(Mi Teleférico)‘은 하늘의 지하철이라고 불리울만 합니다. 현재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에서 운영중인 공중 케이블카인 ‘미 텔레페리코'는 현재 3개 노선이 개통 중이며, 요금은 3 볼리비아노(500원)로서 해발 4,100m에 거주하는 달동네의 서민들이 시내에 불과 10여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교통수단입니다. 이 작품은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대통령(2006년)이 된 뒤에 만든 작품입니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와 인근 도시 엘 알코를 오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 케이블카는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 지형 특성상 불리비아에서 국민들의 대중교통수단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오가는 버스로는 30분 이상이 소요되지만, 이 케이블카를 이용 시는 10분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 볼리비아 국민들의 최고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지요.
■ 볼리비아 에보 모랄스 대통령 정부는 2억3천4백만달러(환화 2,593억8,900만 원) 예산을 들여 오스트리아 회사 'Doppelmayr'사에 의뢰해 지난 2014년 5월 30일 첫 번째 레드라인이 완공했다고 합니다. 레드라인은 총 길이 2.4 km로 10분만에 도착할 수 있으며 옐로우라인은 3.9 km로 13.5분이 소요된다. 현재 세 번째 라인(3.7 km)이 건설 중이라고 합니다. 각 케이블카는 10명이 탑승할 수 있으며 1인당 가격은 3볼리비아노(미화 45센트, 한화 약 500원)이며 하루 1만 8천 명이 이용하고 있다. 그간 200만명 이상 이용하던 안데스산맥 고산지대의 도로에서는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몰살을 알았는데, 케이블카가 설치된 이후로 평균 이용자가 500만 명이 넘어도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 국내외 관광객들에게는 관광명소로 유명해져 부가 수입까지 일석이조라고 합니다. 우리 일행은 무리요 광장에서 대절 버스로 10분만인 Pm 4시 45분 미 탤레페리코'(Mi Teleférico)역의 레드라인에 도착하여 곧 바로 승차권을 끊고 케이블카에 탑승했습니다.
■ Pm 4시 38분에 케이블카에 승선하여 Pm 4시 52분에 정상의 전망대에 도착했으니까, 불과 14분이 소요된 것입니다. 시내의 평지에서 까마득한 산꼭대기 가파른 전망대까지 순식간에 오른 것입니다. 오래전 용평 스키장과 대명 스키장에서 탔던 그 케이블카와 아주 흡사했으나, 더 초고속이었고 쾌적하기 이를데 없었지요. 케이블카 투명 유리창으로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라파즈의 시내전경도 일품이었지만, 특히 이 레드라인의 케이블카에서는 볼리비아 라파즈의 귀족이랄까? 부유층의 빌딩형태의 으리 으리한 시설의 납골묘지는 놀라웠습니다. 잘사는 부르지아계층의 묘지는 빈부격차를 잘 대변해 주는 좋은 예였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공원으로 조성된 고급의 묘지의 형태는 큰 교회와 학교 시설처럼 보였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4,000m 고도의 도시인 라파즈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운영되는 것은 지역의 특성과 고산의 산악지대라는 지리적 여건을 고려한 최상의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라파즈 시내의 전경은 한시간 전 ‘라이카코타 언덕의 Mirador Kili Kili 전망대에서 라파즈(Las Paz) 市의 조망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라파스 주위를 들러싸고 있는 일리마니(lllimani)산과 절벽같은 계곡, 분지 중간을 가로 지르며 연결하는 아슬 아슬한 다리까지 그 절경에 나도 모르게 신음과 같은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멀리 보이는 알티플라노 고원과 하얀 눈이 보이는 해발 6,000m 이상의 설산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 남미의 모든 나라들이 그렇지만 특히 볼리비아는 안테스 산맥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덕에 자연 경관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안데스(Andes)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지구에서 가장 긴 산맥입니다. 총길이가 7,000km에 이르며 해발 6,000m가 넘는 고봉들이 50여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아콩카과다인데, 해발 고도가 6,960m이며 일년내내 만년설로 덮여있어 신비로운 느낌을 안겨 줍니다. 라파즈 시내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꼭데기 공중도시에서 바라본 설산의 전경은 경이롭기만 했습니다. 계곡과 계곡 사이까지에도 마치 성냥갑과 같은 다닥 다닥 붙어있는 수많은 집들의 모습도 신기했습니다. 고산지대의 달동네일꺼라고 생각했던 것도 오산이었습니다. 라파즈는 평지에는 부자들이 산꼭대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고 했기에 관념적으로 못사는 달동네일꺼라고만 생각했는데, 미 텔레페리코를 타고 올라가 본 고지대 산동네의 모습은 예상과는 달리 집들이 벽돌로 지어졌고 도로와 놀이터들도 잘 정비되어 있어 과거 우리나라 달동네 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가파른 언덕 길에 설치된 계단들을 아름답게 색칠한 것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산동네에 사는 가난한 원주민들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래면서 시내로 출퇴근을 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에보 모랄레스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서민들의 아픔을 가장 먼저 알고 이를 실천했다는 것이 정말 존경스럽고 위대해 보였습니다.
■ 케이블카로 산꼭대기 공중도시인 '엘 알토'(El Alto)에 있는 케이블카의 종점인 '시우다드 사텔리테'(Ciudad Satélite)역까지 올라갔는데, 산 꼭대기에도 이런 넓은 평지가 있고, 또다른 형태의 멋진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도 케이블카가 다시 연결되어 있어 다시금 볼리비아 미래의 꿈과 희망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고산지대에 맞은 케이블카 대중교통수단은 볼리비아를 더욱 업그레이드 시킬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 종착역에 내려서 시간관계상 공중도시의 시장만 구경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공중지하철이라고 불리는 케이블카 공사가 완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아직 정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느껴졌는데, 케이블카 노선도를 비롯하여 곳곳마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3선에 성공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을 바꾸어서라도 4선에 도전하려는 그의 정치적 야심을 시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권력욕은 마치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했던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이 연상되었습니다.
■ 케이블카로 산꼭데기 공중도시에 도착했을 때, 케이블카 정거장 광장 앞에는 변화 발전하는 볼리비아 경제건설을 나타내는 대형의 홍보물이 눈에 띄어 잠시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 라파즈의 케이블카인 미 탤레페리코'(Mi Teleférico)는 라파즈 시내의 교통대란을 해결해 주었을 뿐만아니라 고산지대의 서민들의 생활 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質 높은 삶이 이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는 4개 노선이 운영되고 있지만, 점차 더 확대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케이블카의 색깔은 볼리비아 국기의 3색을 나타내고 있는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의 케이블카입니다. 그중 Yellow Line(Línea amarilla)과 Green Line(Línea verde) 간의 환승이 가능한 '리베르타도르'(Libertador)역은 신시가지로 개발되고 있는 ‘이르파비'(Irpavi) 역까지 운행하고 있는데 ‘이르파비' 지역은 우리나라의 서울로 말하자면 가장 번화한 강남역에 해당됩니다. 곳곳에 설치된 케이블카의 노선도 광고판은 마치 우리나라 지하철 노선도와 비슷했지만 은근슬쩍 ’에보 몰랄레스 대통령‘의 공적을 알리는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였습니다.
‘모랄레스(Evo Morales)'는 누구인가?
■ 볼리비아는 원주민의 비율이 전체 인구에서 55%로 중남미에서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왜 가난할까? 원주민의 비율이 높아서? 원주민들이 게을러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볼리비아의 슬픈 역사는 스페인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휴유증을 아직도 앓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볼리비아人들의 왕방울만 한 눈을 보면, 마치 이 나라의 들판에 뛰노는 야마(lama)와 알파카(alpaca)의 청순한 그 눈망울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볼리비아는 세계최대의 은광을 비롯해 지하자원의 보고였지만, 그 땅에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에게는 그것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스페인 식민지시대부터 은광 등 광산에서 노예처럼 착취를 당하거나 대농장주들 밑에서 농노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 그런 볼리비아의 원주민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밖에 안되었지요. 즉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대통령이 된 2006년부터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1825년 독립이 됐지만 원주민들의 생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못지않은 인종차별이 행해졌습니다. '남아공'에서 법적으로 흑인들을 차별했다면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들을 제도적으로 차별 당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농사지을 마땅한 땅도 변변한 직업도 없었고, 광산의 자원이 바닥나면서 광산에서도 쫓겨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산지대에서 코카를 재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코카가 코카인이 원료가 된다는 미국의 압력에 코카 재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산속에서 자작농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볼리비아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은 되었으나 광산주와 대지주, 군인, 상인 등 소수 특권층을 위한 나라였습니다. 독립된 1825년부터 문민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1982년까지 157년간 무려 189회의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 탓인지?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포토시'(Potisi)에 있는 세계최대 규모의 은광산이 스페인으로부터 수탈당했고, 독립 후에도 불운은 계속됩니다. 즉 ‘태평양전쟁'(Guerra del Pacífico, 1879-1883)에서 패해 칠레에 초석 산지인 태평양 연안을 빼앗기고 내륙국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후 이 지역에 있는 '추키카마타'(Chuquicamata)에서는 세계 최대의 동광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차코 전쟁'(Chaco War, 1932-1935)에서 패하여 파라과이에 '그란 차코'(Gran Chaco) 지역을 빼앗겼고, 브라질에게는 고무의 산지인 '아크레'(Acre) 지역을 양도하게 됩니다. 이렇듯 볼리비아는 집권층들의 무능으로 독립 당시 영토의 절반 정도를 상실하게 됩니다.
■ 그러나 볼리비아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즉 ‘무리요 동상'의 밑에 있는 46대 대통령(1943-1946)을 지낸 '갈베르토 비야로엘'(Gualberto Villarroel)의 동상이 있는데 그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Juan Perón)에 비견되는 개혁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노동조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연금제를 실시하고 무료 의무노역제를 폐지 하는 등 혁신을 일으켰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란에 의해 ’무리요 광장'에서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재 볼리비아 국민들에 의해 순교자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요. 또한 1952년 대통령이 된 '에스텐쏘로'(Paz Estenssoro)가 보통선거 실시와 토지개혁, 광산 국유화의 개혁조치를 취하지만, 미국 CIA가 사주한 군사쿠데타가 1964년 발생해 개혁은 좌절되고 맙니다. 이는 1960년대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은 볼리비아 군사독재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경제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하는데, 친미 '바리엔토스(Barrientos)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볼리비아에 들어갔던 '체 게바라'가 사살되기도 했지요.
■ 볼리비아는 자원부국입니다. '포토시'에 있는 세계적인 은광이 고갈될 때쯤 그 자리를 주석이 대신했고, 그 밖에도 아연 텅스텐 금 석유가 다량 매장돼 있으며, 천연가스는 남미에서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2위의 매장국입니다. 그러나 그 혜택은 국민과 국가 경제에 돌아가지 않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늘 가난했습니다. 국가의 부는 언제나 외국기업과 그들과 결탁한 소수 기득권층들이 독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카고 대학을 나온 '산체스 데 로사다'(Gonzalo Sánchez de Lozada)가 1993년에 대통령이 되는데,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워 그나마 있던 천연가스와 석유를 민영화하고 통신회사들도 민영화 합니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여 원주민들의 생활수단이었던 코카 재배를 금지시키고 베네수엘라에 이어 남미 2위 규모였던 천연가스도 미국의 '엑슨모빌' 등 외국회사로 넘깁니다. 볼리비아는 천연가스에서 발생하는 이윤 가운데 18%만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볼리비아가 로열티로 받는 금액은 매년 4,700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매년 쌓여가는 무역수지 적자와 재정적자는 IMF와 세계은행의 차관으로 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IMF와 세계은행의 간섭과 미국의 요구에 의해 신자유주의 정책은 더욱 가속화 되는 가운데, 볼리비아 제3의 도시인 '코차밤바'(Cochabamba)에서 상수도를 외국회사에 팔아넘기는 민영화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물값이 3배로 오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물도 제대로 못 마시게 된 시민들이 2000년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 2003년 '라 파스'에서 이른바 '가스전쟁'(La guerra del Gas)이 일어납니다. 천연가스를 헐값에 미국과 멕시코에 수출하려 하자 '라 파스' 시민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봉기한 것입니다. '산체스 데 로사다'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하는 바람에 70여 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합니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되자 '산체스 데 로사다'(Gonzalo Sánchez de Lozada) 대통령은 미국으로 도주합니다.
■ ‘산체스 데 로사다'가 미국으로 도주한 후 치러진 2005년 12월에 치루어진 대통령선거는 볼리비아 역사에서 대전환점을 이루는데, 볼리비아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남미 최초로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남아공에서 1994년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흑인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견 되는 역사적 일이었습니다. '모랄레스'의 당선은 단순히 원주민 출신 대통령의 탄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볼리비아가 독립한 이래 역사적으로 가장 큰 획을 긋는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원주민 인디오가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 다수(전체인구의 70%가 인디오)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객체에 불과했던 원주민들이 정치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지요.
■ ‘모랄레스'(Evo Morales)'는 누구인가? 그는 코카 재배농인 '코칼레로'(Cocalero) 출신입니다. 1959년 오루로의 가난한 코카 재배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벽돌공, 코카 재배, 트럼벳 연주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여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1985년 코카재배 농가의 노조사무국장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마침내 인디오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시티 오브 갓‘ 의 제작사인 영국의 부에나 온디가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하기로 해 또한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순박한 외모와 노타이를 즐기는 소탈한 모습으로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동시에 반대파의 공격도 만만치 않게 받고 있는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체게바라의 혁명을 이루어 가겠다고 공언한 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신뢰를 증명하듯 2009년 치러진 재선에서도 64%의 득표수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 그는 코카 재배를 한 농민이었습니다. 볼리비아를 비롯해 남미의 산악지대에 있는 국가들을 여행을 하여본 여행자들은 쉽게 느끼겠지만, 코카는 이곳 사람들에게 8천년 동안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묻어있는 필수품 이상의 것이지요. 단순히 고산병 완화제에 그치지 않고 진통제와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에 사용하는 일종의 만병통치제로 인식되어 왔고 또한 생활필수품이고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에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미국이 코카인의 원료가 된다는 단순한 이유로 재배 금지를 요구하면서부터 볼리비아와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한 평 없어 고산지대에서 겨우 코카 재배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원주민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기에 ‘모랄레스'는 이런 '코칼레로'를 대신해 정부에 맞서 싸워온 사람이지요. 그가 이끄는 ‘사회주의 운동당'(MAS: Movimiento al Socialismo)은 함께 치러진 2005년 총선 ‘모랄레스'의 개혁을 뒷받침하게 됩니다.
■ ‘모랄레스'는 2006년 1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반신자유주의"를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천연가스 등 광산의 국유화를 비롯해 전기, 통신, 철도 등의 국유화를 추진했습니다. 소수의 대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거대한 토지를원주민 등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했고, 부의 재분배를 통해 빈곤층을 줄이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취임 첫해인 2006년에 천연가스의 국유화를 통한 정부재정 수입 증가로 인해,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재정이 흑자를 기록했지요. ’모랄레스(Evo Morales)'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나는 2009년에 외채를 다 갚고 IMF와 세계은행의 간섭과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두둑해진 정부재정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사회복지와 사회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의 개혁조치에 대한 기득권층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즉 기득권층 세력이 앞장서 벌인 것이 동부주들의 '자치주 운동'입니다. 9개 주(Departamento)로 구성돼 있는 볼리비아는 선거를 하면 우리나라의 영·호남처럼 그들도 동서로 갈린다고 합니다. '라파즈'를 비롯해 주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서쪽의 안데스 고원지역에 있는 주들은 '모랄레스'를 지지하는 반면에 주로 백인들과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메스티소가 거주하는 동부지역의 주들은 '모랄레스'에 반대합니다. ‘산타 크루스'(Santa Cruz)를 비롯해 ‘판도'(Pando), ‘베니'(Beni), ‘타지하'(Tarija) 등 4개 주가 이들입니다. ‘자치주 운동'에는 이 지역의 대농장주와 목장주들을 중심으로 기득권 세력들이 앞장섰습니다. 천연가스 등 광산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주들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토지가 없는 원주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토지개혁과 같은 개혁조치로 인해 대토지를 상실할 위험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2008년에 동부주들에서 천연가스 시설과 정부청사를 장악하고 가스파이프를 폭발하는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자치주를 찬성하는 쪽에서 반대하는 친 모랄레스 지지자들을 공격해 30여 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국제개발처(USAID)'가 ‘자치주 운동'에 45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는 등 반정부 폭동을 사주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볼리비아 정부는 볼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를 추방하기도 했지요.
■ 어떻든 서민위주의 정치를 잘한 모랄레스는 2014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도 59.7%의 지지율로 3선에도 성공했습니다. 모랄레스는 선거 뒤, 수도 라파스의 무리요 광장에서 당선 승리 연설을 하면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고 우고 차베스를 비롯해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온 모든 민중들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습니다. 야당인 민주연합(UD)의 사무엘 도리아 메디나 후보는 25.1%를 득표하는 데 그쳐, 결선투표 없이 모랄레스의 승리가 확정된 것입니다. 대학 문턱도 밟아본 적 없는 원주민 운동가에서 남미의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가 된 그의 인생은 단순한 성공 스토리를 넘어, 남미 정계의 큰 흐름이 된 ‘원주민 정치’의 과거와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해발 4,100m에 위치한 산 꼭대기 공중도시의 케이블카 역에서 Pm 5시 21분, 이번에는 초록색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을 시도했습니다. 불과 10여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케이블카 아래에 펼쳐진 환상적인 라파즈 시내의 신세계를 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산 시에 탄 케이블카에는 중남미 콜롬비아에서 여행을 온 청년 2명과 동승하게 되었는데, 날씨가 좀 쌀쌀했는데도 그들은 반바지와 반팔 복장이었습니다. 그런데 20살은 될까 싶은 그 젊은 친구들은 아주 친화력이 대단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을 해가면서 엄청 수다를 떨었는데, 우리가 KOREA라고 하니깐, 대뜸 2002년 월드컵을 이야기하고 또 K-POP을 잘 알기라도 하는 듯 춤추는 모습을 흉내 내는 것으로 보아 아~! 우리나라가 이제 남미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왠지 흐뭇하기만 했습니다. 특히 케이블카에서 하산 길에 내려다 본 라파즈의 천연 잔디로 조성된 축구장은 그 규모가 엄청 컸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계 최고산지대의 산소가 희박한 이 축구장에서 세계최강인 브라질도 결국 볼리비아 국가대표에게 패했다고하는 그 유명한 축구장임을 알 것 같았습니다. 남미 월드컵 축구예선 경기에서 남미의 강호들도 이곳 볼리비아에서는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볼리비아 축구선수들은 타국에서는 패해도 홈그라운드인 자국에서는 고산증에 적응을 하였기에 반드시 승리를 한다는 것이지요.
라파즈 시내의 야경 관광
■ Pm 5시 33분, 케이블카에서 하산 즉시 버스에 승차하였는데, 불과 채 5분도 안되어 라파즈(La Paz)시내의 우리 숙소인 호텔 HOTEL CORDILLERA REAL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짐도 풀지 않고 곧바로 도보로 라파즈 시내관광에 나섰습니다. 내일 아침 이른시각 비행기로 소금 호수로 유명한 우유니로 떠나야 하기에 라파즈 시내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서둘렀던 것입니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Basílica de San Francisco)
■ Pm 5시 40분, 우리 일행중에는 지난 1주일간 페루에서부터 볼리비아의 고산지대까지 이동하는 중 고산증으로 인하여 아직도 심한 몸쌀을 앓고 있는 몇몇 가족들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남자들 위주로 라파즈 시내 관광을 나섰습니다. 숙소에서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 광장까지는 도보로 불과 10여분 거리였습니다.
■ 오후 6시가 되면서 거리는 점차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산 프란체스코 광장에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많은 인파였습니다. 그리고 성당의 광장의 계단에는 젊은이들이 무대공연을 펼치고 있어 보기가 참 좋았습니다. 지난 주 페루의 리오와 쿠스코에서도 길거리 공연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이곳 볼리비아에서도 역시 길거리 공연이 생활화 되어있는 것이 특이 했습니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앞 광장에 우리나라 삼성제품의 대형 모니터의 영상물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와~ 우리나라 삼성제품이 길거리의 광고판으로 나와있는 것이 왠지 가슴 부둣하기만 했지요. 라파스(La Paz)의 도심 가운데 우뚝 선 웅장한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위용은 이곳이 남미가 아니라 마치 유럽의 중심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 라파스(La Paz)의 대표적인 성당인 산 프란시스코 성당(Basílica de San Francisco)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인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건축된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남미 내에서도 손꼽히는 역사 깊은 성당입니다. 외관만으로도 아주 오래된 성당임을 알 수 있는 바로크(baroque) 양식에 메스티소(mestizo) 전통양식이 가미된 하나의 예술품이었습니다. 이 성당의 내부 역시 장엄한 장식의 금빛 제단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평일에는 오전 7시부터 19시까지 미사가 있고, 일요일에는 8시부터 밤 12시까지 미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성당 앞의 산 프란체스코 광장에는 일반 시민들을 비롯해 노점의 상인들, 예술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명동 성당 앞처럼 엄청난 인파들이 붐볐습니다. 성당 앞이지만 이곳에는 워낙 사람들이 붐비기에 쓰리꾼도 많으니 특히 여권을 비롯한 지갑을 조심하라는 인솔자의 충고에 따라 자꾸만 주머니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마녀시장(Mercado de las Brujas)
■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이어 다음 코스는 라파즈(La Paz)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시장인, 마녀시장(Mercado de las Brujas)이었습니다. 마녀시장이란 이름 때문에 뭔가 으스스한 시장일 것이란 선입견을 갖었는데, ‘없는 것이 없다는 뜻의 만물상 같은 시장’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녀시장이란 이름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초, 부정을 막는 부적 등을 원주민들이 이곳에서 팔기 시작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혀졌다고 합니다.
■ 그런데 마녀시장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새끼 라마(야마)의 미라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풍습은 새 집을 지을 때 마당에 새끼 야마 미라를 묻으면 행운이 온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도 가게마다 말린 새끼 라마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판매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각종 주술용품과 부적, 말린 토끼, 벌레 등도 많은데 보는 입장에서는 조금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는 날씨도 잔뜩 흐린 가운데 간간히 보슬비도 내려 더 을씨년스러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광장에서 이곳 마녀시장까지의 거리는 불과 도보로 5분 정도로 마녀시장으로 가는 길목의 화려한 불빛의 도심상가와 결국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마녀시장은 말 그대로 마녀시장답게 조명이 좀 어두웠기에 약간 으스스했지요. 이는 아마도 날씨 탓도 있겠으나, 가랑비가 내리는 저녁 늦은 시각이라 마녀시장의 점포들 일부는 어느덧 문을 닫은 곳도 많았습니다. 꼭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의 다닥 다닥 붙어있는 칸막이 점포와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마녀시장 일대를 한바퀴 둘러보곤 인근의 2층 작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겸하여 맥주와 포도주를 마시곤 숙소로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 한편 상기인은 귀가길 인솔대장을 졸라 길거리의 화려한 불빛의 SONY 카메라 전문상가에서 메모리 카드를 1개 구입했습니다. SONY 정품 Adapter를 US 15$을 주고 구입해서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간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 용량을 생각지 않고 아름다운 전경이라면 무조건 마구 마구 사진을 찍다보니, 결국 용량이 오버해 기록을 남기지 못해 그동안 안절부절하던 차였기 때문이었기에 이를 해결할 수 있어 더욱 기뻤던 것이지요.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SONY 정품이 아니었고, MADE CHINA 였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남은 20여일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길거리 좌판에서 실내용 슬리퍼도 하나 구입했는데,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였지요. 오늘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관광을 했기에 숙소에 도착해서는 그냥 쭉~ 뻗어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비행기로 우유니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