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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내미재 | ||||
서부터미널 ⇒복수백암리(32번) |
07:3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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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막차) |
40분 간격 |
복수백암리⇒서부터미널 |
06:2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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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막차) | |
서부터미널에서 승차 | ||||
답적골에서 하차 |
태봉재(509번) | ||||
자운동 ⇒마전(509번) |
06:1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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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막차) |
18분 간격 |
마전⇒자운동 |
06:0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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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막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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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재에서 승차 |
태봉재(501번) | ||||
와동 ⇒마전(501번) |
05:55(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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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5(막차) |
17분 간격 |
마전⇒와동 |
05:5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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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5(막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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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재에서 승차 |
태봉재(50번) | ||||
대전대 ⇒마전(50번) |
07:4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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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막차) |
180분 간격 |
마전⇒대전대 |
06:00(첫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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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5(막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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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재에서 승차 |
오랫동안 미루어 오던 금산둘레밟기를 오늘 마무리를 하려고 시간을 내었다.
느내미재 방향의 버스를 타려고 산성동 굴다리 부근에서 32번 버스를 타려고 아침일찍 나섯으나 11:20분경이 되어서야 차가 도착을 하였다.
버스안에서 천비산을 가려한다고 아주머니들에게 물어보니 어남교에서 내려서 가는 것이 쉽다고 한다. 어남교에 도착하니 11:43분이 되었다. 내려서 길을 찾는데 한사람이 같이 내려서 물어보니 자기도 천비산 중암사를 가는 중이란다. 그 사람과 같이 가는데 먼저번에 내가 왔던 길과 다른데 한 고개를 넘으니 먼저번에 내가 걸어갔던 도로가 나타났다.
이 분은 사진촬영과 역사를 찾아다니는데 인터넷에 기사를 올리기도 한다는데 중암사의 부도등에 대해서도 한번 올려 반응이 좋았단다. 이름을 적어놓지 못하여 아쉽게 되었다. 내가 태봉재까지 간다고 하니 같이가자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사진촬영등에 너무 시간이 걸려 내가 먼저 출발을 하였다. 능선에 올라서니 벌써 밤버섯이 올라와 있어 채취를 하여 배낭에 넣었다. 올라올 때가 아닌데 어찌된것인지 모르겠다.
섬바우 정상에 도착하니 14:00가 되었다. 섬바우의 높이는 440미터라고 대충산사에서 안내판을 걸어놓았다. 능선을 따라 가는데 중간에 야생동물을 잡으려고 올개미를 놓은 것이 있어 걷어치우면서 가는데 느내미재쪽에서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려 사냥꾼이 있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느내미재에 도착하니 고개를 낮추고 확장하는 공사를 하느랴고 바위를 폭파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려가니 작업을 하던 사람이 깜짝놀라서는 다른 사람도 있는가 하고 묻는다. 다른 사람은 없고 나만 있다고 하니 마침 잘내려왔다고 하고는 폭파범위 밖으로 나가서 있으라면서 같이 대피해 있는데 나무로 만든 덮개로 폭파할 지점을 덮고는 폭파를 하니 바위 더미가 날리지 않아서 안전한것 같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그래도 날려서 200미터까지 날아가 사고가 발생하는 수도 있단다. 폭파가 끝나고 다시 산행을 하는데 날씨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한다. 먹티재에 와서 간식을 먹는데 가랑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만인산에 도착하니 16:50분이 되어 안개가 끼어 주위의 시야를 가려 보이질 않는다.
태봉재의 태실에 도착하니 17:18분이 되어 산행을 마치는데 전 구간에서 등산객은 한사람도 만나질 못했다. 평소에 만인산에는 사람도 많았는데 날씨 때문인지 아무도 없다. 오늘로서 금산둘레를 한바퀴 모두 밟아 보게 되었다. 이 산길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는 일이 또 생기게 되었다.
천비산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 중암사 부도
한월당(漢月堂),
추월당(秋月堂),
천봉당대사태원(天峯堂大師泰元),
홍파당(泓波堂),
영월당(永月堂),
월영당(月影堂) : 맨 좌측 탑비, 앞면에 선교양종 대선사 월영당대찰지탑(禪敎兩宗 大禪師 月影堂代察之塔)이라고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숭정삼갑진사월립(崇禎三甲辰四月立)이라 새겨져 있어 정조 8년(178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규대사의 순의비(殉義碑),
공은 지금 공주 계룡면 월암리(月岩里)에서 출생하고 소년시절 호랑이를 잡았다는 용맹이 과인한자였다. 중도에 대전 중구 정생동 천비산 중암사에서도 공부를 했다. 그러기에 금산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정생동 중암사에서 치료를 받다가 갑사(甲寺)에 옮기던 도중 경천 불당골에서 절명했다.
중암사에는 대사가 쓰던 투구며 갑옷, 칼, 북 등이 1932년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이해 화재로 유품은 불타고 영규(靈圭), 서산(西山), 사명대사(泗溟大師)의 영정은 1945년 광복이후까지 영각(影閣)에 봉안되었다가 지금은 存立(존립)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