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곁에 없는 그들.(먼저 세상을 떠난 선수들...)
글쓴이 김유석(roby10) 조회수 1860
작성일 2003-08-03 추천수 42 추천
반대수 1 반대
딴지일보 스뽀오츠 코너에 [추모: 무대 뒤로 사라진 스타들]이라는
컬럼을 몇일 전에 읽었습니다. 도우넛 기자님께서 쓰신 컬럼인데
현역 시절 때 세상을 떠난 스포츠 스타들을 추억하는 글이었어요.
참 좋은 내용의 컬럼이더군요.
그 컬럼에 올라있는 선수들은 배구의 김은석, 유도의 정세훈, 아마
츄어 레슬링의 송성일. 해외 선수로는 축구의 에스코바르(콜롬비아),
육상의 그리피스 조이너, 그리고 얼마 전 게임 도중 심장마비로
숨진 축구의 비비엥 푀(카메룬)등이었습니다.
도우넛 기자님 컬럼을 읽고난 뒤 저도 한 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들 선수들 이외에 어떤 선수들이 세상을 먼저 등졌나 하구요.
그랬더니 역시 몇몇 선수가 생각 나더군요.
도우넛 기자님 컬럼에 실려져 있는 선수들 외에 제가 몇 선수 더 추가
해 보려고 합니다. (현역 때 세상을 떠난 선수들을 추억해 볼께요.)
- 김득구(프로 복싱) -
사망 원인: KO패 후 사망.
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이가스 시져스 펠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붐붐 맨시니와 1회전부터
13회전까지 서로의 간격을 50cm 이상을 두지않고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습니다. 정말 무섭고, 눈물겨운 난타전이었어요.
그런 걸 보고 바로 '사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시져스 펠리스에 운집한 관중들은 물론 일요일 오전 위성 중계를
시청하던 우리 국민들 모두 '열광의 도가니' 에 휩싸였습니다.
김득구는 13회전까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강펀치의 소유자인 맨시
니와 주먹을 교환했습니다. 그러나 점수에서는 김득구가 조금 뒤져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상태로 가면(판정으로 가면) 솔직히
승산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장소가 맨시니의 홈링이었기 때문에......
김득구 본인도 그렇게 생각을 한 듯 14회전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마자 김득구는 링 중앙으로 튀어나와 맨시니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순간
맨시니의 짧은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안면에 허용합니다. 이 펀치를 맞은
김득구는 뒤로 주춤하더니 다시 맨시니의 좌우 연타를 안면에 허용한 후
결국 다운이 되고 맙니다.(다운 되면서 머리를 링바닥에 부딪치기도 하
지요. 그러나 이것이 사망 원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김득구는 가까스로(비틀거리며)로프를 잡고 일어서려 해 보지
만(이미 카운트 아웃이 된 상태입니다.) 눈이 풀려 있었고 도저히
몸을 가누질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링에 쓰러졌습니다.
김득구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는데 그 날 저녁 김득구가 뇌사 상태
에 빠져있다는 소식이 테레비 뉴스를 통해 국내에 전해진 것입니다.
김득구는 미국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지만 결과가 매우 안좋았어요.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미주 한인 한의사들에게 침과 한방 요법 치료까지
받아 보는등 치료에 총력을 기울여 봤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3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득구의 죽음은 당시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
적으로도 큰 사건이었어요.
김득구는 맨시니와의 일전을 치루러 미국에 가기 전, 인터뷰에서
'만일 맨시니에게 지면 링에서 살아 내려오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
었습니다.
세상 살아 나가는데 있어서 '약속'이라는 건 반드시 지켜야 될 도리이자
의무이긴 하지만 이런 약속은 굳이 지킬 필요가 없고, 또한 지켜서도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득구는 '순진하게도' 지켰던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가슴이 또 미어지네요.)
다들 아시겠지만 김득구 사망 이후 프로 복싱 세계 타이틀매치가 15회전
에서 12회전으로 준 것입니다.
참고: 김득구 이외에 현역 시절 KO패를 당한 후 숨을 거둔 선수들이
몇 명 더 있습니다. 멕시코의 강타자 루페 핀토르에게 KO패한 후 세상을
떠난 조니 오웬. 그리고 우리 신희섭 선수에게 KO패하고 난 뒤 눈을 감은
필리핀의 엔디 바라바등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선수들에 관해서는
한국 프로 복싱 매니아의 '지존 중의 지존' 이동하(paisa)님 께서 정리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김정수(야구) -
사망 원인: 교통 사고
82년 서울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한국은 7회까지 일본에게
0 대 2 로 뒤지고 있었습니다. (몸이 제대로 풀리기 전에 2점을 허용한
에이스 선동렬은 그 후부터 제페이스를 찾으며 안정된 피칭을 선보였지요.)
그 때까지 한국은 일본의 우완 투수인 스즈키에게 단 2안타만을 치며
내내 고전을 하고 있었어요. 솔직히 거의 패색이 짙어 보였습니다.
그런 한국에게 8회말 절호의 찬스가 옵니다.
첫 타자인 8번 심재원이 깨끗한 안타를 치며 노아웃에 주자 1루 상황을
만듭니다. 이 때 대표팀 어우홍 감독은 9번 타자인 정구선(2루수)을 빼고
대학 야구 최고의 슬러거인 고려대학 4번 타자 김정수를 대타로 기용합
니다. 김정수는 정교함은 없으나 큰 거 한방을 터뜨려줄 수 있는 강타
자였기때문에 김정수의 대타 기용은 예상된(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었지요.(저는 당시에 김정수에게 홈런을 기대 했었어요.)
백넘버 31번의 김정수는 볼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투볼 상황(제 기억으로
그렇습니다.)에서 일본 투수의 빠른 직구를 그대로 받아쳤습니다.(빳다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김정수가 친 볼은 잠실 구장 펜스 가운데 쪽으로
쭉쭉 뻗어 나갔는데 당시 MBC 중계를 맡았던 김용 아나운서는
홈런이냐? 홈런이냐?를 외쳤고, KBS의 이장우 아나운서는
센타 뒤~뒤~뒤~~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중계를 했습니다.
이 타구는 펜스 가운데 쪽 상단 부분을 맞고 튀어 나왔습니다. 통쾌한
2루타였던 것입니다. 다른 구장이었으면 100% 홈런이었지요.
1점을 따라붙은 한국은 이어 나온 1번 타자 조성옥이 예상대로 보내기
번트를 시도해 김정수를 3루에 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단 동점을 만
들고 보자는 게 어우홍 감독의 작전이었던 것 같습니다.(일본도 투수를
바꾸면서 한국 타선에 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다음 타자는 2번 타자 '여우' 김재박.(준결승까지 김재박이 1번을 치
다가 결승전인 이 날 2번 타자로 나온 것입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어우홍 감독이 김재박에게 어떤 싸인을 낼 지 정말
귀추가 주목 됐습니다. 노련한 김재박에게 그냥 맡길지? 아니면 번트
싸인을 낼지?
그런 와중에 일본 포수가 우리 측 싸인을 간파 했는지 벌떡 일어나
면서 투수에게 볼을 바깥쪽으로 빼라고 지시하며 홈플레이트 옆으로
비켜 섰습니다. 그러자 일본 투수가 포수의 지시대로 높게 볼을 던졌는
데 재박이 형님이 그 볼을 개구리 점프를 하면서 번트를 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번트였어요. 그 볼에 번트를 댈지 어느 누구도 생각치
못했거든요.(김재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번트된 볼은 3루쪽 라인을 타고 갔는데 놀란(?) 3루 주자 김정수는 엉겹
결에 홈으로 뛰어들었고 일본 3루수가 볼을 잡아서 1루로 송구 했지만
이미 재박이 형님은 1루 베이스를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김재박의
이 신기에 가까운 번트는 지금도 한국 야구사의 '전설의 번트' 로 불
리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불리울 것이 분명합니다.)
드디어 동점을 만든 한국은 3번 타자 이해창이 나와 주장 답게 깨끗한
안타를 쳤고 발빠른 김재박은 어느 틈에 3루까지 가 있었습니다.
다음 타자는 한국이 자랑하는 '타격의 달인' 4번 타자 장효조!
잠실 구장에 모인 3만여 관중들과 TV로 중계를 보는 팬들은 열광을 안
할래야 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찬스에서 장효조가 반드시
뭔가 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그러나 장효조가 친볼은 바운드 되면서 일본 2루수(유격수 쪽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가고 맙니다. 완벽한 더블 플레이 코스!
그러나 일본 2루수는 정신이 없었는지 더블 플레이를 시키지 않고 홈
으로 송구를 합니다. 김재박은 홈에서 태그 아웃!
이제 상황은 투아웃에 주자 1, 2루.
과연 여기서 한국이 역전을 할 것인가? 아니면 동점을 만든 거에 만족해
야 할 것 인가? 기로에 놓여진 순간이었습니다.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5번 타자 한대화.
당시 동국대 4학년 생인 한대화는 이 대회 들어서 우리 팀 타자 중에 가장
타격 감각이 좋았습니다.(제 기억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승전에서 클린업 트리오에 들어간 것이지요.
결국 한대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일본 투수의 인코너 높은 볼을
완벽하게 받아쳐 왼 쪽 폴대를 맞추었습니다. 쓰리런 홈런이었습니다.
한대화의 이 홈런으로 인해 일본은 완전히 주저 앉게 됐지요.
한국은 8회 대거 6점을 뽑아내면서 숙적 일본을 누르고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세계 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이 대회 MVP는 선동렬)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당시에 한국이 역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니뭐니 해도 김정수의 통쾌한 2루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재박의 '신기의 번트' 도 훌륭했고 한대화의 마무리 쓰리런 홈런도
감격적이었지만 만일 대타로 나온 김정수의 통쾌한 2루타가 없었다면
과연 한국 타선에 불이 붙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수가 친
그 타구가 2루타가 아닌 홈런이었다면 한국 공격의 맥이 거기서 끝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그 게임은
너무도 극적이고 재미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정수는 고려대 졸업 후 기대를 모으며 MBC청룡에 입단(83년)을 해서
좌익수겸 6번(혹은 7번)을 쳤습니다. 백넘버는 44번을 달았구요.(행크
아론을 존경해서 44번을 단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후에 백넘버를
47번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팬이 '김정수 선수가 계속
44번을 달면 MBC청룡은 절대 우승을 못한다!' 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47번으로 바꾼 거라고 하더군요.
김정수는 프로에 들어와서는 아마 때 만큼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
습니다. 간간히 투수로도 기용이 된 적도 있었어요.
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은 김정수는
86년인가 안언학, 김경표등의 선수들과 신체 검사를 받고 나오다 그만
교통 사고를 당했는데 그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다른
선수들은 크게 다쳤어요.(안언학, 김경표등)
저는 당시에 김정수 사망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정신이 멍한 상태로 다녔을 정도였으니까요.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박종훈과 김정수의 열렬한 팬이
었거든요.
역대 국내 운동 선수 가운데 가장 말(인터뷰)을 잘했던 선수 중의
한 명이 바로 김정수입니다. 또한 김정수는 유우머 감각이 대단했었어요.
인터뷰를 할 때 '안녕하세요, 여러분! 정수입니다....' 라고 할 정도로
팬들에게 친금감을 주었지요.
MBC청룡 소속 당시 어느 게임에서 홈런을 치고 난 뒤 3루 쪽에서
김동엽 감독이 꼭 끼어 안아주며 격려를 해주자 홈으로 들어올 때는
과감하게 '이주일 춤'을 추면서 홈베이스를 밟았던 선수가 김정수였습
니다. 김정수는 신일고 시절부터 투수겸 강타자로 명성을 날렸던 선수
예요.
시합 전에 손톱을 일부러 안깎는다던가? 수염을 안자른다던가?하는
징크스는 없냐?라고 묻자, '저는 그런 거 없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잘라요!' 라고 말했던 김정수 선수가 지금도 몹시 그립습니다.
- 심재원(야구) -
사망 원인: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심재원 선수는 은퇴 후에 돌아가신 분이지만 제가 워낙 좋아했던
선수라 조금만 추억해 보겠습니다.
심재원은 70년 대 중반~ 80년 대 초까지 한국 대표팀 부동의 포수였습
니다. 당시 심재원은 세계적 포수로서도 명성을 날렸던 선수입니다.
투수 리드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았었지요.(대신
타격은 '섭섭한' 수준이었어요.)백넘버는 22번이었구요.
심재원은 어깨가 약한게 큰 흠이었으나 탁월한 센스로 커버해 나갔
습니다. 당시 대표팀 투수들은 심재원이 볼을 받아주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답니다.
선동렬이 은퇴할 무렵에 어느 다큐멘타리 프로에 나와서 '제가 고려대
시절 때는 볼은 빨랐지만 컨트롤이 그다지 좋질 않았습니다. 그 컨트롤
안좋은 걸 고쳐주신 분이 바로 돌아가신 심재원 형님이셨어요. 재원이
형님 덕분에 컨트롤이 좋아진 겁니다!'라고 말을 하더군요.
선동렬이 계속해서 심재원 선수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 해 주었는데 선동
렬이 대표팀 초년병 시절 연습 시에 대선배인 심재원이 볼을 받아주었
답니다. 그 때 선동렬이 던진 볼이 자기의 가슴 안쪽 즉 스트라이크존으
로 정확히 들어오는 것만 받아주고 나머지 옆으로 빠지는 볼이라던가
높게 들어오는 볼은 받아주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볼은 그대로 뒤로
흐르게 놔두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 선동렬이 그 볼을 주으러 죽어라고
뛰어갔답니다.
선동렬이 그 볼을 집어 가지고 오면 심재원은 그 볼을 움켜잡고 선동렬
머리를 새게 쥐어 박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선배에 대한 추억을 멋지게 얘기해주는(비록 말주변은 없지만....^^)
선동렬이 정말 멋졌습니다. 역시'나고야 SUN' 이었습니다.
구레나룻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던 심재원은 손이 무척 이뻤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에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 실업
야구를 보러갔다가 한국 화장품(당시 김재박과 같은 소속이었습니다.)에
서 활약하는 심재원 선수에게 싸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보니까
손이 참 이쁘더라구요. 손가락이 무척 길면서 여자 손처럼 곱기까지 하
더군요. 심재원 선수 싸인은 지금도 고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심재원 선수가 무슨 병에 걸리셔서 돌아가신 줄 모릅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리플 달아주십시오.
- 하이만(여자 배구. 미국) -
사망 원인: 경기 도중 심장마비인 듯함.(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이만은 80년 대 초반 ~ 중반 여자 배구 '세계 최고의 거포'였습니다.
신장 196cm의 장신인 하이만은 마치 남자 선수들을 방불케하는 높은
점프력과 호쾌한 스파이크로 전세계 배구팬들을 열광시킨 흑인 선수이
지요.
70년 대 랑핑(중공), 80년 대 후반 카브리엘라(페루), 90년 대 루이
스(쿠바)보다는 제가 봤을 때 하이만의 공격력이 더 높고 강하고 또
화끈했던 것 같습니다. 오픈 공격, 시간차 공격, 그리고 백어택에 이르
기까지 하이만의 공격력은 완벽했거든요.
당시 미국 여자 배구 팀에는 리타 크로켓이라는 또 한명의 세계적 선수
가 있었는데 하이만과 크로켓을 앞세워 세계 최강 중국의 아성을 무너
뜨린 것입니다.
하이만은 미국에서 뛰다가 나중에 일본 리그에 진출했는데 제가 알기
로는 일본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
으나 경기장에서 벤취에 앉아 있다가 숨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마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대신에 정확한 건 아니니 아시는
분이 계시면 리플 달아주십시오. 오용진 님과 정동준 님이시라면 깔끔한
답변 해주실 걸로 기대 됩니다.
(제가 하이만 친필 싸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직접 받았거
든요. 물론 지금도 보물 처럼아끼고 있는 싸인인데 당시 하이만은 저에
게 참 친절하게 대해줬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크로켓한테도
받았지요. 크로켓의 상냥함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어요.)
- 안드레아 폴투나토(축구. 이태리) -
사망 원인: 백혈병
안드레아 폴투나토(Andrea Fortunato)는 국내 축구팬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는 선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93-94시즌 제노바에서 유벤투스로 이적한 폴투나토는 왼 쪽 사이드 백
으로서 탄탄한 수비는 물론 경이적인 오바래핑 능력까지 갖춘 스피디한
수비수입니다. 당시 폴투나토는 이태리 축구계에서 '카브리니 2세'라고
까지 불러어질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선수입니다.
(카브리니에 대해서는 밑에 가서 말씀 드릴께요.)
폴투나토는 유벤투스에서 트레파토니 감독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사키의 마음까지
사로 잡아 93년 경에 아주리에도 뽑혔었습니다. 후추인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그 무렵(93년)의 이태리 대표팀 수비진은 바레시, 마르
디니, 베나리보, 코스타굴타등이었는데 이 화려한 멤버에 폴투나토가
당당히 들어간 것이지요. 그 때 이미 폴투나토는 마르디니의 라이벌로서
평가를 받기 시작했었어요.
당시 일부에서는 폴투나토가 워낙 스피디한 선수이기 때문에 왼쪽 사이
드 백은 폴투나토에게 맡기고 마르디니는 중앙으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는 이야기도 나왔었다고 합니다. 사키 감독 역시 이 포메이션
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더라구요. 이태리 전문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폴투나토는 '현대적인' 사이드 백이고, 마르디니는 '클래식한' 사이드 백
이라는 말을 했었습니다.(지금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전문가들이 있다고
합니다.)
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둔 상황에서 월드컵에 나갈 아주리 멤버가 발
표가 되었는데 예상을 뒤업고 폴투나토 이름이 명단에서 빠진 것입니
다. 이 소식을 접한 이태리 국민들 모두 어이가 없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유벤투스 팀 닥터에 의해 '폴투나토는 현재 급성 임파성
백혈병에 걸려있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발표 됩니다.
기자 회견장에 모여있던 이태리 축구 기자들은 유벤투스 팀닥터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원 망연자실한 것은 물론 '마비'까지 일으키는 기자들
도 한 두명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당시 유벤투스 측에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폴투나토 치료를 돕겠다!' 고
발표를 했고, 폴투나토 역시 강인한 정신력으로 투병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이 후 골수 이식도 대단히 성공적으로 받으면서 치료가 아주 순조롭게
되가는 듯 해 보였어요. 일시적으로는 회복의 기미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폴투나토는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몸에 바이러스가 침입해
급성 폐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급성 폐렴은 보통 사람이라면 간단히 치
료될 수 있는 병이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폴투나토에게는 치명적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폴투나토는 급성 폐렴에 의한 합병증으로 인해 95년 4월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 폴투나토의 나이는 24세였습니다.
정말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지요.
폴투나토의 장례식은 고향인 사레루느에서 치루어졌는데 많은 동료들과
고향 친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폴투나토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
위에는 조화와 더불어 백넘버 6번의 유벤투스 유니폼이 덥혀져 있었습니다.
(폴투나토가 세상을 떠난 1개월 후 유벤투스는 9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
하는 감격을 맛봤습니다.)
폴투나토는 성격이 약간 내성적이지만 매우 친한 사람에게는 자기
속마음을 다 끄집어 낼 정도로 순수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유벤투스 시절에 로베르토 바지오와도 매우 친했다고 하더군요.
71년 생인 폴투나토는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어릴 적 부터 고생
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라났다고 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태리어로 '폴투나토(Fortunato)' 는 '행운' 이라
는 의미라고 하는데 안드레아 폴투나토는 결코 행운의 선수가 아니었다는 것
입니다.
지금까지 후추에 폴투나토에 대한 글이 거의 올라온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어설프지만 제가 이야기를 한 번 꺼내본 것입니다.
제가 폴투나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딱 여기까지이니 나머지 부분은 국내
최고의 유럽 축구 전문가이신 후추의 이일호 님께서 보충 설명 해 주시면
깔끔할 것 같습니다.
참고: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카브리니에 대해서 조금 설명 드리겠습니다.
안토니오 카브리니(Antonio Cabrini. 57년 생)는 이태리 대표로서 월드컵
에 3차례(78, 82, 86년)나 참가 했던 세계적인 왼쪽 수비수입니다.
특히 82년 스페인 월드컵 때는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지요.
카브리니는 '전설의 명스위퍼' 시레아 그리고 젠틸레(오른 쪽 사이드 백)
등과 함께 '유벤투스의 벽'으로 불리울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던
선수입니다. 카브리니는 그 시절에 이미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명성을 날렸
는데 특히 강력한 태클과 오바래핑이 초일류급으로 평가를 받았던 선수예요.
카브리니는 유벤투스 황금시대의 마지막 주장이기도 했구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니까 카브리니는 유벤투스 시절
트레파토니 감독의 지휘 아래 리그 우승을 무려 6차례나 경험
했고 또한 코파 이탈리아 및 유럽 3대 컵을 모두 석권했더군요.
카브리니는 은퇴를 볼로냐 소속으로 92년에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한국VS 이태리전에서 차범근과 카브리니가
이태리 진영에서 한 차례 경합을 벌였었는데 차범근이 스피드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카브리니는 백넘버 3번이었습니다.)
유럽 축구에 관심이 많으신 젊은 후추인 여러분들은 카브리니를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꼭이오!
오늘 제가 거론한 선수들 외에도 현역 때 세상을 떠난 선수들이 여러 명
있지요. 국내 선수로는 야구의 김상진. 배구의 김병선(사망 원인: 대동맥
파열), 농구의 한만성(사망 원인: 교통사고), 한기수(농구. 한기범 선수
동생. 사망 원인: 거인병인 걸로 알고 있음.)등.....
외국 선수로는 프로 복서 살바돌 산체스(멕시코. 사망 원인: 교통사고)
F1의 아일튼 세나(브라질. 사망 원인: 경기 도중 사고), 카라데의
앤디 후그(스위스. 사망 원인: 백혈병)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역을 마친 후 지도자로서 한창 꽃을 피울 나이에 돌아가신 분들
이라던가 혹은 은퇴 후 스포츠계를 완전히 떠나 평범한 일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분들도 계십니다.
78년 몬트리올 올림픽 은메달 리스트이자 한국 남자 유도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장은경 감독.
강만수, 장윤창과 더불어 한국 남자 배구를 대표 했던 '거포' 강두태
코치(사망 원인: 대동맥 파열)
소매치기 출신의 세계 챔피언 김성준(사망 원인: 자살).
80년 대 초 김태식과 더불어 국내 복싱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맷집의 화신' 김사왕(사망 원인: 피살).
한국이 자랑했던 '컴퓨터 슛터' 김현준(사망 원인: 교통사고).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골문을 지켰던 오연교 코치등을 떠올릴 수
있겠네요.
해외 선수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한솥 밥을 먹었던
오스트리아가 낳은 세계적 수비수 브르노 페차이(사망 원인: 심장마비)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제가 미쳐 언급 하지 못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후추 가족 여러분들께서
추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오늘 글을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P.S: 딴지일보 도우넛 기자님 컬럼에 배구의 김은석 선수에 대한 추억이
실려져 있는데 김은석 선수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절친한 친구가 김은석 선수
옆병실에 입원을 해 있었어요. 물론 제 친구도 백혈병이었습니다.
당시 제 친구한테 문병을 가면 '야! 오늘 김은석 방에 어느 선수
왔다 갔댄다. 참, 그저께는 아무개가 와서 헌혈하고 갔댄다....' 하면서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는 김은석 선수 보다 몇 개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