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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肖像
仁川 國民學校. 초등학교라고 명칭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부른다. 국민학교는 일제때 일본국왕이 敎育勅語를 내려 우매한 조선사람을 皇國臣民으로 계도하는 학교라는 뜻으로 소학교를 바꿔 부르게 한데서 연유한다. 그만큼 치욕스런 옛 이름을 내가 고집한다 해서 너무 나무라지 않기를 바란다. 내 어린 시절에는 국민학교라 불리웠다. 그래서 그 호칭속에는 내 學童시절의 그리움과 아쉬움이 그대로 베어있는데 반해, 1980년대 중반부터 이 명칭으로 바뀐 초등학교라 부르면 벌써 40여년이나 지난 나의 국민학교 때의 추억은 먼 과거 20여년을 뚝 잘라버리고 불과 십 몇 년 전에 생긴 멀지 않은 과거가 되버리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인천국민학교 동문 한 사람을 우연히 서울에서 만난 일을 계기로 재경인천학교동문회를 1년에 1~2번 나가면서 그때의 學緣을 잇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금년 8.15 광복절 휴일에 모교교정에서 전국각지로 흩어진 모든 동문이 모이는 총동창회가 개최되니 같이 참석하자는 권유가 있었다. 그날 서울의 친구들과 등산 갈 약속을 깨고 응하기로 했다. 44년 꿈에 그리던 그 산골에 가고 싶은 마음도 물론이지만 그때까지 내 마음속에 숨겨둔, 꼭 한번 봤으면 싶은 여자애의 얼굴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재경동문들을 태운 두 대의 전세버스는 신도림역 앞에서 07:00에 출발하였다. 인천국민학교로 갈려면 인천광역시 쪽으로 들어서면 안된다. 영동,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에 가야한다. 버스는 막바지 피서연휴를 가는 차량 행열을 피해 국도와 고속도로를 번갈아 들어가며 길을 찾아갔다. 그러나 장소를 불문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홍수로 인해 운행속도가 자주 방해받게 되자 여행의 지루함을 잊을려고 버스 안에는 작은 여흥이 벌어졌다. 몇 사람이 노래를 부른 후 누군가가 좋은 가수를 초청했다며 나를 불렀다. 평소 청중을 무서워하던 나는 대뜸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미리 마음먹은 노래를 바로 불렀다.
“고향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거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들녘에 바람이 날리니.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노래를 마치고 인사말을 붙였다.
“저는 이 노래를 인천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 후 이 노래를 부를 때나 들을 때나 항상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목이 메었습니다. 인천학교는 떠난지 4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꿈으로만 그리워했습니다. 이제 그 곳에 찾아가니 몹시 흥분됩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미리 한번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인천국민학교 선생님께 배운 게 아니라 동급생이였던 옥순이에게서 배운 노래다. 그러니 나의 맨트는 옥순이한테 배웠다고 해야 옳은데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44년간 내 마음에 화로속의 숯불처럼 간직한 여자아이. 옥순이... 이젠 姓도 잊은, 한 번도 서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음성과 눈빛만은 또렷이 내 가슴에 남아있는 열한살짜리 여자아이다.
인천학교 3학년 때 수동리 골짜기로 소풍 갔었다.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노래를 시키셨다. 호명에 따라 자그만 여자애가 멋쩍게 나오더니 그 노래를 불렀다. 많은 아이들 앞이라 그 애는 수줍게 대강대강 부르고 들어갔지만 그 노래를 처음 듣고는 까닭모를 향수의 감흥을 느낀 내가 그 후 그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면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내 숙달되었다. 그러니 그 애가 가르쳐 주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이다. 그로인해 옥순이에게 호감은 생겼지만 그냥 무심히 지냈었다. 내외가 극심하던 그 산골 풍토에서 이성에 대한 호감을 표현함이 될 법한 일도 아니지만 쬐꼬만 내 나이에 그런 감정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향수의 정을 읊은 이 노래는 그후 당연히 내 산골 추억의 신호음악이 되어 오다가 언젠가부터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산골풍경위에 옥순이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옥순이에 대한 그리움을 사무치게 하는 노래가 되어 버렸다. 그 전환의 계기가 아마 내가 청소년이 되어 그때를 추억하면서 돌맹이에 깃든 옥순이와의 비밀스런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때였을 것이다.
“야! 니 머하노? 와 그리 조용하노?”
버스가 안동 임하댐을 지나고 영양읍에 들어서니 산세가 제법 웅장해지고 계곡을 따라 깨끗한 시내물이 흘렀다. 영덕군의 風光과 비슷한 모습이다. 나는 잔잔히 창밖의 산천풍경들을 내다보며 옥순이와의 사연을 조용히 회상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나를 보고 한마디 던졌다.
“한잔 무그라. 와? 옛 애인 생각이라도 나나?”
그 친구는 억지로 종이컵을 들이밀며 한잔 술을 강권했다. 버스 뒷좌석을 차지한 술이 좋은 또래들은 벌써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시끄럽게 잡담중이였다. 최소한 명절마다 이 고향땅을 찾는 그들에겐 차창 밖의 풍경과 감회가 나와 같을 리는 없겠지.
“고현 놈. 국민학교 땐데 무슨 애인이라.”
나는 공연히 속이 뜨금해서 마음을 감추듯 얼른 소주 한잔을 받아 마시고는 짐짖 딴청을 했다. 나는 앉았던 자리를 슬그머니 옮겨 운전수 옆 안내양 자리에 가 앉았다. 그가 내 회상에 잠긴 내용을 알 리는 없지만 추억을 방해받기 싫고 추억에 좀 더 가까히 다가가기 위해서다. 꿈결 속에 그리던 추억은 실재하는 산천으로 내 눈앞 정면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머릿속에는 이노크 아든의 ‘귀향’ 이야기 같은 드라마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산수문제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애들에게 교실밖에 나가 공기돌같은 돌멩이를 여러개 주워오라고 하셨다. 나는 문제를 풀 수 있었기에 돌멩이 주우려 나가지 않았다. 애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고 선생님이 설명을 시작할 때 두 손을 우연히 뒤로 모으니 내 꽁무니부근 걸상위에 돌멩이가 여러개 잡히는 것이였다. 이게 웬 돌이냐?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야 돌을 줍을 수 있는데 나는 교실에 앉아 주을 수 있다니! 나는 그 돌을 집어 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손을 한 번 더 뒤로하니 거기에는 또 돌멩이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거 웬 귀신의 도움인가? 어떻게 연거푸 이런 마술같은 행운이 내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쁨에 들떠 그 돌을 거두어 선생님의 지시대로 학습자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돌멩이는 내가 생각하던 데로 귀신의 조화로 거기 놓여 질 리는 없었다. 그것은 내 바로 뒤 책상을 사용하는 옥순이가 자기 것의 일부를 넌지시 둔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돌려 그 돌을 집을 때 힐끗 스친 옥순이의 눈빛에 엷은 미소가 잔잔히 넘치고 있었음을 십여년이 흐른 후에 생생히 기억해 냈다. 그 미소는 내 의식 깊은 곳에 잠겨 있다가 해면 위로 달이 솟듯 불쑥 올라와 가슴속 한 귀퉁이에 내내 떠있었던 것이였다. 옥순이는 누가 눈치챌까봐 돌멩이를 쥔 손을 책상 밑으로 뻗어 제 손이 닿는 내 걸상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아! 그 돌멩이 한 개 한 개... 그 속에는 옥순이의 수줍은 정성이 올올히 담겼겠지! 그 의미를 알고나자 나의 어리석음과 무심함이 몹시 후회되었다. 그때 빨리 눈치채고 옥순이에게 최소한 고마웠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나이가 더할수록 그 후회와 미안함이 그리움으로 변하고 戀慕의 정으로 깊어져 갔다. 내가 그 시골에서 살았던 기간은 단지 초등학교 2년남짖 뿐이였다. 그렇지만 나의 깊은 향수는 그곳이 항상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처럼 여겨지고 돌맹이의 의미를 알았을 때쯤에는 옥순이는 나와 은밀한 첫사랑을 나눈 여인으로 여겨졌다. 이 길을 가는 지금은 옥순이는 비록 남의 아내가 되었을지라도 필경 나와의 옛정을 남몰래 간직하고 나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비약되었다. 옥순이는 자그만 체구에 순한 얼굴, 얌전한 성격의 여자애였다. 이번 동창회에서 그를 만나 그때 못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때늦게 옛 우정을 이을 수 있겠지.
영양출신인 작가 이문열이 “젊은 날의 초상”이란 소설에서 겨울 雪景의 아름다움을 극찬한 창수령에 버스가 경쾌하게 올랐다. 옛날에는 엄청 험한 고개였는데 지금은 포장길이 깔끔하다. 고갯마루에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영덕군입니다”라고 쓴 이정표가 반겼다.영덕군! 얼마나 꿈에 그리던 곳인가!고개정상을 지나자마자 산으로 막힌 시야가 탁 트이면서 영덕군으로 향하는 길이 맞은편 험한 산허리를 가로질러 구불꾸불 멀리 자못 장쾌하게 펼쳐졌다.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10세 전후에 얻은 경험이 일생의 情緖를 만든다고 했다. 저 길을 다 내려가 평지로 이어지는 길로부터 내 일생의 정서를 만든 추억의 공간이 시작된다...
내가 영덕군 그 지방으로 간 때는 내 나이 8살 때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39세로 한참 팔팔하던 때 바퀴가 10개 붙었다 해서 십발이로 불리던 GMC트럭을 가지고 산판(야산에서 통나무를 베어 자동차로 싣고나와 파는 업)할러 이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2학년 여름방학 때 부산에 있던 우리 식구-엄니,누나,동생-를 얼굴도 보고 피서도 시키려고 그곳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자 아버지는 산촌에 혼자 떠도는 객고가 힘드셨는지 우리를 거기 그대로 눌러 살도록 하셨다. 그때 나는 부산 봉래국민학교 2학년을 다녔는데 봉래학교로 편지를 보내 전학서류를 인천학교로 보내게 함으로서 인천학교에 전입되었다.그것이 내게 일생동안 못잊는 산촌경험을 안긴 것이다. 그런데 나의 산골학교의 추억은 인천학교에서만 생긴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산판이 이산 저산 옮김에 따라 우리식구들도 같이 따라다니다 보니 학교도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인천학교에서 신리국민학교로 전입가고 다시 인천학교로 왔다가 부산 봉래학교로 되돌아 가 졸업하였다. 신리학교는 인천학교와 같은 창수면에 있고 里만 다르지만 양쪽을 가르는 산이 험준하여 서로 이동하려면 계곡을 따라 난 길로 창수읍까지 남행했다가 내려온 길보다 먼 길을 다른 계곡을 따라 다시 북행하여야 하는 곳에 자리한다. 지금 이 버스는 신리학교쪽 길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영양과 인천학교 쪽을 잇는 길은 아직도 뚫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도 이 길로 영양과 영해을 잇는 버스가 하루 2번 다녔다. 버스가 굽이굽이 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가면서 추억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때 내 머리에 떠오르는 첫 장면은 아버지를 따라가 처음 본 산판의 모습이다. 저 산줄기 너머 깊은 산속 곳곳에는 아직도 선명한 색깔로 찍혀 남아있는 산판의 추억이 간직되어 있다.
...트럭은 좁은 산길을 훠이훠이 돌아 산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갔다. 이윽고 차가 한 눈앞을 막은 언덕길을 넘어서자 산중 분지에 자리잡은 벌목현장이 불쑥 나타났다. 내 눈에 비친 그 현장은 통나무를 일본군삼아 독립군인 벌목꾼과 한판 전투가 진행중인 전쟁터로 보였다. 소나무 피죽을 얼기설기 엮어 야전군 막사같은 숲속의 함바집. 戰士인양 수염 터부룩하고 남루한 복장으로 바삐 움직이는 벌목꾼. 그들이 들고 있는 날선 도끼. 번쩍이는 칼, 긴 톱.. 여기저기 일본군의 시체처럼 널린 통나무. 落木의 위험을 알리는 벌목꾼의 건조한 고함소리... 그 통나무가 산밑으로 굴러 떨어져 바위와 부딕치는 둔탁하고 통쾌한 소리... 목도꾼의 어여차어여차 발맞추는 소리... 재제소의 둥근 톱이 통나무를 켜는 귀 따가운 소리...나는 그 벌목현장이 인상이 깊어 때때로 아버지에게 졸라 트럭을 타고 가서 그 현장에 가서 놀거나 혹은 잠을 자기도 했다. 그때 겪은 풍광이 내 몸을 찢은 생채기같이 뚜렷하다.
아아! 공기 속에 은은히 썩인 생소나무의 송진냄새. 심심산중 이름모를 들꽃.. 숲속에 지천으로 널린 머루 다래.. 상쾌한 수풀냄새.. 맑은 계곡물에서 건져 올린 빨간 가제...
아직 새댁이던 함바집 아줌마는 끼니때마다 어설프게 지은 야외 식당에 산채나물 반찬뿐인 수십 명분의 식사를 진설해 냈고, 24시간 내내 1급수가 집앞 개울에 흐르는데도 깨끗한 물을 깃는다고 깜깜한 새벽에 물동이를 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함바집 방안에는 담배에 찌든 벌목꾼들의 고린 체취가 코를 찔렀다.하지만 새벽 취침 중에는 산중의 한기를 피하고자 문 다 닺고 코만 내민체 헤진 담요를 뒤집어 써야 했다. 게다가 추운 날이면 함바집은 흔하디흔한 소나무 피죽으로 군불을 심히 때서 온돌은 쩔쩔 끓었으나 진흙을 바른 통나무 벽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와 위풍이 견딜 수 없이 심했다.
벌목꾼들은 나무작업을 하다가도 자동차가 들어오면 목도일꾼으로 바뀌었다. 목도란 두 명 또는 네 명이 통나무를 밧줄에 걸고 그 밧줄에 갸름한 나무를 끼워 서로 어께에 매고 운반하는 작업이다. 그들이 목도를 시작할 때 그중 선임자가 선소리같은 긴 소리를 내어 나머지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일제히 일어나 입과 발을 맞추며 이동했다.
“이에~ 이에~ 어여차....어여차....내 발 보고...니 발 보고...”
긴 소리는 어찌 들으면 그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곡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나란히 발판을 딛고 자동차 적재함에 올라가 통나무를 일본군의 시신을 싣듯 차곡차곡 실었다. 이렇게 해서 통나무를 가득 실은 십발이 GMC트럭은 험한 산길을 요리저리 누볐다. 경사길에서 힘을 쓸 때는 우렁찬 엔진소리를 토하고,소나기에 물이 불어나 격류가 흐르는 개울은 물위에 파도같은 흔적을 남기며 건넜고, 평지서는 경쾌한 소리로 길을 달렸다. 하루 일을 끝내고 와서 집앞에 주차된 자동차를 보노라면 큰일을 무사히 마치고 내일의 과업을 위해 휴식중인 살아있는 생물체 같았다. 그자동차의 번호는 경북 관3614였다. 그러나 그런 트럭을 산판길의 모양과 경사도에 따라 적절히 움직이게 하는 아버지의 운전기술이 더 위대해 보였다. 양손과 양발을 다 이용하여 엔진과 속도를 조절하고 연달아 기야를 변속하며 핸들을 감았다 풀었다하여 자칫하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좁은 산길을 위태위태하게 벗어나는 운전술은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신기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차와 아버지가 一心同體처럼 느껴져서 간혹 차동차를 분해하여 정비할 때면 꼭 아버지 몸을 열고 수술하는 것처럼 보였고 아버지가 몸져 자리에 누웠으면 자동차가 방안에 들어와 누운 모습으로 느껴졌다. 산판에서 목도일꾼들이 상차하는 트럭을 배경으로 부근 나무 그루터기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파란 담배 연기를 허공에 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후 산비탈에 걸터앉은 김좌진 장군의 威容으로 내 가슴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당시 아버지는 군대에서 운전병과 함께 군용차를 빌려 산판에 이용하시기도 했다. 비오는 여름날 운전석의 덮개 없는 군용차를 비에 흠뻑 맞으며 운전하던 윤하사 아저씨의 런닝쌰스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차거운 빗물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젊은 육신이 싱그러웠다. 미끄러운 비탈 길을 조심조심 내려올 때 그는 운전중인 손을 얼른 뻗어 산길에 고개를 쭉 내민 원추리 꽃을 나꿔채서 내게 주었다. 빗물에 젖은 한 송이 싱싱한 원추리꽃!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산촌 추억을 일깨우는 상징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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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창수면 인천리 지역을 잘 아시네요. 저도 창수면 인천리에 최근에 많이 오가면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저는 인천리가 고향은 아닙니다만 다소 아는 편입니다. 작가님이 쓰시는 어린 날의 초상을 끝까지 잘보고 있습니다.
오늘 인천리로 들어가면서 버스 안에서 평소 친한 할아버지 두분과 이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전에 오래전에 이 마을에 산판하던 차씨 라는 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있었지.. 아들이 둘이 형제가 있었지.."
"집이 저~~기 였지.."
"벌써 수십년전 이야기이제 ~~
78살 되시는 할아버지는 당시 어린 날의 두 아들을 회상하시는 듯 하다.
84세 되시는 할아버지도 그 당시를 회상하신다.
"그래.. 아마도 차씨가 고향이 본래 이북이었던 것 같았는데, 이 마을에서 잘 보살펴 주신 분이 계셨지.. 당시에는 산판하는 일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이었어."
하하하.....
그때의 추억을 기억하시는 분이 누굴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