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
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
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
다(I.W. Burgon, C.H. Van 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 아니라고 하
는 학자들의 이유는, (1) 여기 있는 어떤 낱말들이 요한의 기록한 다른 책들에는 나타
나지 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번역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있
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한다(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제
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
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
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
히 역사적으로 있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 제외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유익을 위
하여 마땅히 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II.
pp. 33-35).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
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심과 가르치심은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8:3,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들
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감행하였다. 죄인은
법정에서 취급되어야 하는데, 법관이 아닌 그들로서 죄인을 끌고 다닐 권리는 어디 있
었는가?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
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뻔하였
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하였다.유대인들은 저렇게 교묘하게 예수
님을 딜레마(Dilemma=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다.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
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
게 될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언하
시는 허물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이 말씀
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저희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
름의 소유자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라고 한다(렘
17:13). 그러나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
는, 그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
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
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나
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
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
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 권위 앞에
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물러갔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
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
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
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
의 빛"이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 창조의 근본을 이룬 첫째 날의 빛을 연상케
한다고 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말미암
아 비로소 질서 있는 우주가 되었다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
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
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
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은, 예
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두움"
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나
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것
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해석되어
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
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 빛" 이라고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면, 생명을 얻음이, 그
리스도의 선물인 빛을 소유함에 달렸다. 폰 슈렝크(Von Schrenk)와 푸리브노우
(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
고,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as Licht fuhrt zum Erkennen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8:13,14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모른 것이
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그 빛된
사실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
하는 높은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나타
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여라.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
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바리새인들
은 남들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
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처지에서 그는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
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
을 가리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8: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두 증인"에 관하여
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사
실을 여기 지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5:37-39).
여기 이 귀절을 보아서도 신약에 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란 말이 법정의 증
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
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한 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 정당성 있다고 간주해야
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 있어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
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증거하
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 말씀하신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
리는 법이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사
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그들
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는 중보자(中保
者)시다(5:38, 14:7, 9; 마 11:27).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
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여자들이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고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
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유
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
게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온
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하나
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후
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귀한 줄 몰랐다. 그들은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희 죄 가운데
서 영원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8: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
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드러냈
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무
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토
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 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
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 때 강퍅한 유
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속하
여 죄악에 젖었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시는 곳(하나님 아버지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
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내가 그
이"란 말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
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영멸하리라"는 뜻이
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
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
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
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
(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
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
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
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
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말
씀이 많아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심과 같다.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말씀하신바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
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
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
리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
는(27절)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근거해서는 믿지 않던 그 이를, 장차 그에
게 일어날 사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
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
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
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
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인간들의 죄악의 장벽을 없애는 능력이
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 매우
강퍅하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않으
시고 외축하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
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
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
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함
께 하여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믿더
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곧, 그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
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예수님을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 포함되었던 일부 불순 분자들일 것이다.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
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
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
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
(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
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
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
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
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여러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
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
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
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
버렸음).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
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
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
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는, 저렇
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
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
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
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
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
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
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
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
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H. Dooyewee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점이
잘못된 것이다.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 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진
다는 뜻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
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배를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잘
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것
이라도 사람을 주장하여 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
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
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
서운 뱀을 하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
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구경을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물었으므로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
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
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
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
하는 자와 같다.
종이 속량되어 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 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
들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8: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누릴자
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된자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구속자
(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
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
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
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집
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다. 그러
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
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
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
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이 되도
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
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
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는
죄에서 건짐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
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
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
있는 여부를 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신 혜택 아래서는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므로 히 3:6 하반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담
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다. 그렇
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영적 소망으로(믿음으로) 담대해야 될까?
딤전 4:8에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한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자는, 곡식이 가득한 창고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
다. 미국 남북 전쟁때에,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한 군인이 찾아 와서 말하기
를, "나를 살리시오, 나를 살리시오!"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묻기를, "왜 그
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없어 그럽니
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하
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
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귀한 소
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
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다. 크로솨이데(Grosheide)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납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계통이 아닌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시야(56절)를 죽이려고 하였다.
=====8:38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
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
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
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8:39,40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
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
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8:41,42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
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
어 죽이려고 하였다.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이것
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
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해야 되며, 자신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인
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
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
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만
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그 말
하는 자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듣는 자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다.
=====8:47,48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사마리아 사
람"이라고 욕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
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다.
=====8:49-51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그 말씀
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극치(極致)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
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
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을 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50절). (3)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는 뜻으로 모욕하였으니, 그들이 극도로 강퍅해진 것이 드러났다.
=====8:52,53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유대인
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
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다
죽지 않았는가?"한다.
=====8:54-57
예수님은, 그들의 난제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여 주셨다. 곧, (1) 그의 말씀은 절
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
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주
장, 곧, 그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
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
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
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54-55상
반). (2) 그가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예수님을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보다 낮게 보
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 랍비들의 사상에도,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시대가 계시되었다는 신념이 있었
다(C.K.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함이 그의 아
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 내용을 가진 것이
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하
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인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
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가서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아브라함보다
자기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여기 "오십도 못 되었
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곧, 그 때
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이 자연스
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 )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
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가까왔
을 것이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
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거리(2000년동안)
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있
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 )은,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
(* )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 )의 독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
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초자연
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인격이시
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
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 )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있느
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bin ich "bringt er zum Ausdruck, dass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과 마
찬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토록 동일하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
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
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 그 바위의 꼭대기 면적은 비록 좁았으나 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
리 박고 있었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
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있다.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들
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
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