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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신선도는 참 종교이다
배달사상은 세계주의 사상이다
Ⅰ. 신선도의 유래
진정으로 우리민족은 원시적 무속신앙과 외래의 도·불·유(道·佛·儒) 밖에 없는 민족인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 고유철학도 고유종교도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따르면 "한늘(하늘)의 신비한 법도를 보니 사시(四時)의 운행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법도로서 종교를 세우니 천하가 복종하더라"하여 {주역}이 상고시대부터 천도(天道)에 바탕을 둔 종교가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도에 바탕을 둔 심오한 {주역}이 있다는 것 자체가 태고시대부터 종교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또한 신도(神道)·신교(神敎)·신선도·신선교 등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신교가 전승되면서 삼한(고조선)에서는 천신교(天神敎),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발해에서는 진종교(眞倧敎), 요(遼)와 금(金)에서는 배천교(拜天敎),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 등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최남선도 "조선에는 예로부터 고유신앙이 있었고 이 민족교는 유교·불교에 앞서 있었으며, 유교·불교가 들어온 뒤에도 그대로 나란히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김교헌은 단군신교의 일파가 지나로
전포하여 선교(仙敎)라 칭하였다 하고, 신채호 역시 우리민족의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가 지나에 전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상·계율·의식·목적·내세관·숭배의 대상·경전 그리고 발생원리와 발생학적 배경 등 종교적 구성요건에 따라 체계적으로 주장하는 학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본서에서도 그러한 것 모두를 다루기가 너무나 번잡하여 중요한 내용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내용은 본서의 원본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1. 환국시대의 신선도
신선도에 대한 근본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민족의 태고사를 간단히 일별해 보기로 한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태고사는 지금까지 연구의 범위에서 제외되어왔고, 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는 것처럼 학문하는 풍토 역시 바뀌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삼성밀기(三聖密記)}를 전거로 들면서 우리민족의 태고사를 밝혀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파내류산(波柰留山) 아래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여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합하여 한국(桓國)이라 하고 나누면 12개 나라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다" 하였다. 또한 {조대기}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백성은 부유하고 또한 건실했다. 처음에 한인이 천산(天山)에 살면서 도(道)를 터득하여 오래 살고 몸을 닦아 병이 없었다. 한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교화하니 병란이 없고 사람들이 모두 일하기에 힘써 부지런하므로 스스로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었다.혁서한인·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구을리한인·지위리한인에 이르렀는데 혹 단인이라고도 하며 7세를 전하고 역년은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지금부터 약 1만년에서 6천년 어간의 중앙 아시아에 환국이 있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거기에는 반드시 교육이 따르게 마련이며 교육을 좀더 체계화시키고 구체화시킨 것이 종교교육이다. {태백일사}를 보면 "삼신(三神)은 한늘을 생성하고(生天) 만물을 가꾸시며(造物) 한인은 사람을 가르쳐 의(義)를 세우니 이로부터 자손이 서로 의(義)와 교(敎)를 전하고, 현묘한 법도를 깨달아 광명이세(光明理世)하였다. 이에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은 대원일(大圓一)하는 서물(庶物)의 원의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신의 뒤를 환국이라 하고, 환국은 천제가 사는 나라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금부터 약 9천 1백여년 전, 아니면 6만 9천여년 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중심으로 광활한 환국이 있었고, 그 나라에 일곱 분의 득도한 한인천제가 있었으며, 천지인 삼신일체에 바탕을 둔 종교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가 밝혀주고 있는 환국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을 간략히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환국에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었다. 삼신은 신선도의 숭배대상임과 동시에 발생원리이며 사상으로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한다.
2) 한인천제는 신앙의 최정상에서 삼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하였다. 무위이화란 종교적 자연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3) 환국에 오훈(五訓)이 있었다. 오훈은 ? 성신불위(誠信不僞), ? 경근불태(敬勤不怠), ? 효순불위(孝順不違), ? 염의불음(廉義不淫), ? 겸화불투(謙和不鬪)이다.
4) 환국에 오사(五事)가 있었다. 오사는 ? 우가(牛加)의 주곡(主穀), ? 마가(馬加)의 주명(主命), ? 구가(狗加)의 주형(主刑), ? 저가(猪加)의 주병(主病), ? 양가(羊加) 또는 계가(鷄加)의 주선악(主善惡)이다.
5) 매일 조석으로 일출일몰(日出日沒)시에 의식이 있었다.
6) 신선도의 경전으로서 천부경(天符經)이 있었다.
이상은 태고시대의 환국과 그 종교교육(신앙)에 대한 기록을 약술한 것이다. 이는 서구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원시시대의 신앙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을 것이며, 긍정하는 학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타당한 근거없이 기록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은 과학적 사고와 판단을 결여한 맹목적 신앙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무조건 부정하면 이 역시 서구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비과학적 비주체적 사고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우주에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년중에 춘하추동(春夏秋冬)과 하루에도 조주석야(朝晝夕夜)가 있어 돌아가듯, 인류의 문화에도 생성소멸(生成消滅)이 있어 그것이 돌아간다는 자연법칙을 이해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현재나 과거나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에 고도로 발전된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미개한 원시사회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개인에 천재가 있고 조숙한 사람이 있듯, 민족에도 천재적 민족이 있고 조숙한 민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의 개념을 모든 민족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킴은 부당한 억지라 아니할 수 없고, 환국사회에 어느 정도 개화된 문명이 있었다고 할 때, 이를 무조건 부정함은 논리상 모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山)및 아바칸(Abakan) 산맥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말라이아뉘아 구석기 유물로 알려진 이 자료는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도 있어서 종래의 서양학자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인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바칸 산맥은 중앙 아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한인왕조가 7대 3301년 간 통치할 때의 중심지로 알려져왔는데, 아바칸 산맥의 계곡에서 발견된 유물이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고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그 때보다도 몇만년 이후인 환국시대의 문화는 상당히 더 발전됐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한인의 환국시대가 비록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선사시대(원시시대)라 할 수 없고 그 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2. 한웅천황의 개천입교(開天立敎)와 개천절
다음은 배달국과 그 종교교육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기에 의하면 한웅천황은 한인의 서자로서 한늘에서 풍백·우사·운사 등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인간의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신화같이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민족의 상대비사(上代秘史)이며 신선도의 비기(秘記)로서 한웅천황이 중앙 아시아의 천산(天山)에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으로 이동하여 득도하고 배달국을 세워 홍익인간 재세이화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배달은 한웅이 정한 호니 그가 도읍한 곳은 신시요, 뒤에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겨 18세를 전하고 역년은 1565년이었다 하고, 이어서 18세 한웅의 명호와 재위기간 및 생존한 년세를 하나 하나 모두 밝혀주고 있다. 또한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환국의 말에 안파견(安巴堅)이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 보고 모두가 홍익인간할 만하므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가첨이 말하기를 서자부(庶子部)에 한웅(桓雄)이 있는데 용기에 겸하여 어질고 지혜가 있습니다. 일찍이 홍익인간으로 세상을 개혁할 뜻이 있으므로 태백산에 보내어 다스리게 함이 좋을 듯 합니다 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삼종(三種)을 주고 조칙(詔勅)하여 이르기를 '이제 군(君)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교도 3천을 이끌고 가서 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세우고 재세이화하여 만세홍범이 되게 하라'하였다.‥‥이에 한웅이 3천의 교도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황이라 하였다.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하고 무릇 인간의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재세이화하고 홍익인간 하였다. 이 때에 일웅(一熊)과 일호(一虎)가 이웃에 함께 살았는데 일찍이 신단수에 빌어 신계(神戒)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므로 한웅이 주술(呪術)로서 신이 되어 깨우친 다음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주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그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웅호이족(熊虎二族)은 그것을 받아먹고, 삼칠일(三七日) 동안 웅은 능히 배고품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키어 의용을 얻었으나, 호는 방만하여 선업(善業)을 얻지 못하였다.‥‥한웅천황이 천도를 크게 깨치어 교화를 베풀 때, 천경을 연(演)하고 신고를 강(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때에 구환(九桓)이 모두 하나같이 삼신을 조상으로 하였다. 소도를 주관하고 관경을 주관하여 무리와 의론하여 하나로 화백(和白)하고 아울러 지(智)와 생(生)을 모두 닦아 천궁(天宮)에서 살았다".
위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웅천황의 원주지는 중앙아시아 천산(天山) 환국(桓國) 서자부(庶子部)였다.
2) 한웅천황이 태백산에 이르러 "천도를 깨치어 삼신으로 종교를 세우고(開天以三神立敎)" 권선징악하는 법을 세웠다.
3) 한웅천황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설하였다.
4) 한웅천황이 소도를 주관하고 무리와 의론하여 하나로 화백하였다.
5) 한웅천황이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 등 5사와 그밖에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였다.
이를 종합해 말하면 한웅천황이 백두산에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치어 도교·불교·유교 삼교일체의 신선도를 설파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였다는 것이다. 즉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 우리민족은 합리적인 종교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래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민족은 그 기념행사를 해마다 치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개천(開天) 1565년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백두산 단목 밑에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구환(九桓)의 추대를 받아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금년은 단기 4330년이다. 따라서 한웅천황이 백두산 천지 신단수 밑에서 개천입교(開天立敎: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세우다)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5894년 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즉, 4330+1565-1=5894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또한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건국한 때는 지금부터 4329년 전 음력 10월 3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민족이 해마다 치르는 개천절 행사는 첫째, 한웅천황이 백두산 천지 신단수 밑에서 천도를 크게 깨치어(開天) 지금부터 5894년 전 음력 10월 3일에 신선도를 베푼데 대한 기념행사이며. 둘째, 단군왕검이 지금부터 4329년 전 음력 10월 3일, 백두산 신시 단목하에서 조선국을 건국한 데에 대한 기념행사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8월 15일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민족이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는 두 가지 뜻을 지니는 것과 같은 격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음력 10월 3일의 개천절 행사는 민족혼의 탄생과 국가의 탄생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기념하는 행사로써 최대 최고의 명절이며 기념행사인 것이다. 그래서 음력 10월은 년중 상달(上달;최고의 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천절이야 말로 한웅천황이 개천입교(開天立敎)하여 신선도를 설파했다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민족혼을 반은 찾은 기분이다. 민족적 주체의식도 되살아나고, 칠흑같은 광야에 먼동이 떠오르듯 민족의 전도가 밝아오는 기분이다.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3. 단군조선 시대의 신선도
다음은 단군조선 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이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왕검(한검단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군 고열가제까지 47세 2096년 간 계속된다. {신단실기} 교화원류편을 보면 단군왕검도 신인으로서 풍백·우사·운사 등 신관을 거느리고, 종교를 세워 주곡·주병·주형·주선악 및 의복·음식·궁실·편발(編髮) 등 인간의 366사로서 흑수(黑水)에서 한남(漢南)에 이르는 구족(九族)을 다스렸다 하고, {단군세기}에는 단군왕검이 삼신에게 제사하고 조선국을 세운 후 신시의 옛 규범을 부활하여 천범팔조(天範八條)를 설했다고 했다. 제11세 단군 도해제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해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고 매우 장려하였다. 천제 한웅유상(桓雄遺像)을 봉안했는데 두상에는 태양처럼 광채가 섬섬하였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단수 아래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그림을 누전에 걸었으니 이를 일러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齋戒)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四海)를 움직이는 듯 했다.‥‥3월에 남산에서 삼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술과 선물을 바치고 나서 치사를 한 후에 술을 따랐다. 이 날밤 술을 특사하여 국인과 더불어 환음하고, 백희(百戱)를 보았다. 누전에 올라 경(經)을 논(論)하고 고(誥)를 연(演)하였다. 오가(五加)에게 이르기를 이후부터는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을 풀어 밥을 먹이고 사형을 없애라고 하였다. 내외의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였다.
이상을 보면 고조선 시대의 신앙은 오늘날 불교사찰의 본당인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고 불교행사를 치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고조선 시대는 신선도가 극히 융성했다고 볼 수 있다.
4. 삼국시대의 신선도
또한 {청학집(靑鶴集)}을 보면 한인은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조종(祖宗)으로서 그 신선사상이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을 거쳐 문박씨(文朴氏)를 매개로 신라의 영랑(永郞)에게 전승되고 있는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보면 한인의 신선사상이 문박씨를 거쳐 을밀(乙密)·영랑(永郞)·안유(晏留)·보덕(普德)·성여(聖女) 등 고구려·백제·신라의 선인들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선도가 신라에 와서도 대행하여 고려 의종 23년 3월 무자일에 내린 신령(新令)을 보면 "선풍을 숭상하라.
옛날 신라에 선풍이 대행하여 그로 말미암아 용천(龍天:임금)이 환열하고 민물(民物:백성)이 안녕하였다"고 했는가 하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던 유적으로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통천의 사선봉(四仙峰)과 총석정(叢石亭), 간성의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永郞湖), 금강산의 영랑봉(永郞峰), 장연의 아랑포(阿郞浦)와 강릉의 한송정(寒松亭)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신선사상이 대행하였고, 고려 때에도 왕검교(王儉敎)니 재가승(在家僧)이니 하여 다소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나라 몽고군이 약 백년에 걸쳐 고려를 지배할 때, 그 탄압에 못이겨 신선도는 완전히 불교 속으로 은닉하게 되었다. 또한 근세조선 때에는 송나라의 주자학 일변도 정책으로 다른 사상을 거론하면 그러한 사람을 사문난적(斯門亂賊)이라 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고, 일제시대 또한 식민정책에 의해 고유사상을 근거없는 미신 또는 사이비종교로 취급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신선도는 우리민족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 "삼신상제·삼신제왕·삼신할머니·삼신풀이"니 하는 이름으로 겨우 그 뿌리만이 민속에 남아있을 정도이고, 그 사상이나 계율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 따라서 신선도의 발생원리가 천도(天道)라 하나, 원시시대에 천도란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무시하게 되며, 그 사상이나 계율의 존재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신선도의 모든 것을 외래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에 대한 기록이나 서적을 왜곡하거나 위서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합리적 성립종교인 신선도는 원시적인 무교(巫敎)로, 신선도를 설한 한인·한웅·한검(단군왕검)의 삼성(三聖)은 신화적인 존재로,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찬란하였던 민족문화는 근거없는 것으로,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것도 국수주의자들의 과장된 표현으로 보게 되고, 민족문화의 원류는 중국이나 인도 아니면 시베리아나 서구로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하잘것 없고, 외국문화만을 받아들인 미개민족으로 자학하게 되는가 하면, 신선도를 부활시키고 이를 계승한 대종교·단군교·천도교·수운교·증산도 등 자생적 민족종교의 전통적 고유사상도 이를 부정하여 모두 외래사상을 흡수·종합·재구성한 짬뽕종교(sinclynitism)라고 매도한다. 곧 민족주체사상을 잃어버림으로써 학자들마저 민족혼을 상실하여 제 민족의 사상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의식과 동포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제 민족의 자생종교를 그렇게 매도하고 학대할 수 있단 말인가? 깊이 반성할 문제인 것이다.
5. 신화론자들의 저의와 오류
1) 신화론자들의 저의
이상과 같이 기록사적으로 보거나 실증사학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에게는 환국과 배달국이 있었고, 한인·한웅·한검도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베풀어졌고, 오늘날 우리민족이 해마다 치르는 개천절 행사는 한웅천황이 천도를 깨치어 신선도를 베푼데 대한 기념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민족인 지나족·몽고족·만주족·일본족 및 그 추종자들인 근세조선의 광신적 주자학자들과 일제의 친일사학자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친 서구적 기독교 신자들도 우리민족의 상고사와 개천절을 신화로 취급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대로 인정하면 그것은 이웃 민족이 우리민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민족의 역사는 9193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단기 4330년 현재). 그것은 세계에서 어느 민족의 역사보다도 가장 오래됨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웅천황의 배달국과 신선도 설파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역사는 적어도 5894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지나의 황하문명 이전에 우리민족의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둘째, 지나족과 몽고족과 만주족 그리고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는 북경 이북과 몽고 및 만주대륙 일대와 러시아의 연해주가 원래 그들 민족만의 영토가 아니라 우리민족과 공동소유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셋째, 도교·불교·유교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합리적 성립종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노자의 도교·석가의 불교·공자의 유교 등 동양사상이 모두 우리민족에서 연원함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곧 지나족·인도족·일본족·몽고족·만주족이 모두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밑에서 자란 하찮은 민족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넷째,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한검단군(단군왕검)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선도를 설파한 부처님이며 성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즉 우리민족은 부처님과 성인을 탄생하여 그 교화를 받은 민족이며, 우리나라는 부처님과 성인이 세운 나라로서 원래 군자국이었고 신선지국이었으며 예의지국이었고 천축국(天竺國)이었으며 월지국(月支國)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다섯째, 우리민족은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전에 종교를 설파한 민족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조숙한 민족이며 영리하고 훌륭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여섯째, 우리민족은 종손민족이라는 이론이 성립되고, 이웃 민족인 지나족·몽고족·만주족·일본족은 우리민족을 우러러 받들어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우리민족의 상대역사를 사실대로 인정할 경우,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된다. 그것은 이웃 민족의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는 문제들일 뿐만 아니라, 굴욕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 강대민족은 우리민족의 상대역사를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민족의 상대역사와 개천절을 왜곡하여 신화로 풀이할 경우, 다음과 같이 우리민족에게 불리하고 이웃 민족들에게 유리하게 된다.
첫째, 우리민족의 역사는 극히 짧아지고 상대역사는 신화속에 파묻히게 된다.
둘째, 우리민족의 강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지나족·몽고족·만주족·일본족이 우리민족과 영토분쟁을 하지 않게 된다.
셋째,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한검단군은 신화속의 인물로 추락되어 우리민족의 구심점은 무너지게 된다.
넷째, 우리민족은 고유종교와 고유철학이 없는 하찮은 민족으로 전락된다. 이에 따라 국가기강이 해이되고 민족혼이 흐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웃 강대민족이 우리민족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지나족은 유교와 도교를, 인도족은 불교를 창설한 민족같이 되고, 일본족·몽고족·만주족도 사상적으로 우리민족에게 눌리지 않게 된다.
우리민족의 상대역사와 개천절을 신화로 풀이하는 경우 이상과 같이 이웃 민족들에게 유리하고 우리민족에게 불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상대역사를 신화로 풀이하는 것은 원래 외세인 이웃 민족이 우리민족을 제 민족보다 하위로 떨어뜨리고 지배하기 위한 저의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국서고(國書庫)가 이웃 강대민족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사서(史書)가 모두 멸실됐던 것이며, 상대역사가 이들 민족에 의해 왜곡되었고, 우리민족에게 유리하게 기술된 사서는 모두 위서(僞書)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독·왜독·양독 등 외래사상에 물든 일부 외래종교 신자와 학자들도 이웃 민족들의 그러한 저의를 깨닫지 못하고, 제 민족의 상대역사를 마치 남의 일같이 신화로 해석한다. 참으로 얼빠진 사고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계의 저명한 학자들도 대단히 용기 있고 양심적이며 애국 애족심이 투철한 학자가 아니면 본 학설을 인정하려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 학설을 인정할 경우, 자신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본 연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진행해 온 연구와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2) 본 연구와 관련된 자신의 업적이 지금부터 무효화되어도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3) 지금까지 수행해온 자신의 연구가 솔직하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4) 본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민족을 속이고 명예를 누려왔다는 죄책감을 지니게 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사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본 학설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본 학설을 발표한지 근 10년이 되어도 극소수의 학자를 제외하면 긍정하는 학자도 없고 부정하는 학자도 없다. 대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학자들도 본 학설을 쾌히 수용하려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 학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자기 나라에 이익될 일이 그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반성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민족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나아가서 온 인류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지금은 과거처럼 민족과 국가를 팔아 개인이 호의호식할 수 있는 어리석은 시대가 아니다. 어느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이 무조건 희생당하는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보다도 민족의 이익이나 명예가 더 중요하고, 강대국의 이익이나 명예보다도 온 인류의 이익과 명예가 더 중요하다. 또한 그러한 시대가 올 것이다. 아울러 우리민족도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치욕스런 오명을 벗고, 그 지혜와 능력과 홍익인간 정신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본 학설도 자연히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리라 믿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학자들의 아집과 아만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본 학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애족심과 애국심이 있는 학자라면 그때가 되기 전이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히 본 학설을 비판하고 수용하리라 믿는다. 만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기 때문이다.
2) 신화론자들의 오류
끝으로 신화론자들에게 묻겠다.
첫째, 현재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고 있거나, 과거 자신이 받은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실 우리민족의 절반 이상이 외래종교 신자이므로 외래종교의 교회당이나 법당 ,도관에서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근세조선 시대에는 지나의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등 삼사(三史)와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등을 배우느라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지 못하였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의 식민정책 때문에,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서구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배우느라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다.
여건이 그러하므로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모를 수 밖에 없었고,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모르므로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부정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상대역사의 신화론자들은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하고, 정부당국에서도 깊이 반성하여야 할 문제인 것이다.
둘째, 재판하려면 누구보다도 법을 많이 알고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보고 평가하려면 인생에 대한 갖가지의 경험과 깊은 수양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상고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평가하려면 그에 대한 선행연구가 상당히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얼마나 연구하고 고심하였기에 상대역사를 함부로 부정하고 단군관계 역사를 신화로 매도하려는가? 자신의 연구경력을 반성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상대역사를 확고히 고증하기에 아직도 고고학적 실증사학적 증거가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유적이나 유물 또는 그밖의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보관이나 관리소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여 본 경험이 있는가?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역사학자만이 주인인가?
넷째, 우리민족의 고도로 발전된 상대문화를 서구적 원시개념이나 사회발전론에 근거하여 부정한다면, 서구적 원시개념이나 사회발전론을 우리가 꼭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불변적 진리인가? 그것이 불변적 진리로 대우받아야 할 불변적 근거가 있는가?
다섯째, 한인·한웅·한검은 우리민족의 국조이시고 시조이시다. 그런데 만약 이들을 신화적인 존재로 취급한다면, 우리민족은 어디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그전에는 지구상에 사람이 없었다는 말인가? 과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지구상에 인간이 생존한지 약 250만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