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딴지일보에서 펌 ---
2003년 4월 7일.
오늘은 만화 상에서 아톰이 태어난 날이다.
몇달전 부터 일본에선 아톰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많다고 하던데~
만화 내용에 따르자면 이미 세상은 날아다니는 자가용과 일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인간형 로봇들이 도처에 돌아다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나마 21세기적이라고 생각되는 기계는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폰밖에 없는 바로 지금 이 2003년 4월 7일에, 나는 내 유년시절의 적지 않은 부분을 흔들어 놓았던 아톰의 기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였던가? 당시의 나를 저녁 5시 30분만 되면 칼같이 테레비 앞으로 불러 앉히곤 했던 '아톰' 만화 시리즈(국내에는 <돌아온 아톰>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되었던 칼라판 방영분) 중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코주부 강박사와 아톰
아톰과 코주부 강박사(일본명 오차노미즈 박사)가 살고 있는 메트로폴리스에서 언젠가부터 로봇들과 기계들이 파괴되는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생한다. 이에 우리의 아톰, 범인을 잡기 위해 불철주야 날아댕기는데...
결국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평범한 중년 아저씨였다. 그리고 그는 얼마전까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던 성실 가장이었다. 하지만 싼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장에서는 로봇들을 생산 라인에 투입하고 노동자들은 모조리 해고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혹시라도 로봇들이 계속해서 부서지고 망가지면 공장들이 로봇들에게 일 시키는 것을 꺼리게 되어서 결국 자기의 일자리를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절규하는 것이었다.
그 중년 실업자의 절규, 그 위에 깔리던 단조의 구슬픈 배경음악, 그리고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어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아톰의 모습은 초등학교 5학년짜리의 머리 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미래'라는 주제는, 기억하다시피 초등학교 수업시간을 통해 꽤나 자주 다뤄지고 언급되는 이야기였다. 국어시간에는 '미래의 우리 생활'이라는 제목의 글짓기를 시켰고, 미술시간에는 '미래의 내 모습'이라는 주제로 상상화를 그리게 했었다.
그러나 말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당시 또래들이 생각해 낸 것들과 선생님들이 원하는 아이들의 미래상은 다 거기서 거기였고, 거개가 획일적인 내용들이었다. 차들은 날아다니고, 밥대신 알약만 먹어도 되고, 해저에 도시가 생기고, 영원히 늙지 않고, 로봇들이 시중들어주고, 얼굴 보면서 전화할 수 있고...등등의 알빈 토플러적 낙관론만이 지배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아톰과 우란 남매
그렇듯 미래에 대해 막연하고도 낮은 수준의 상상화만을 그릴 수 있었던 한 초등학생에게 아톰의 저 에피소드는 어떤 인식의 전환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날아다니는 차를 타고, 밥대신 알약을 먹으면서 로봇의 시중을 받기 위해서는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이미 하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을 내어야 한다는 생각, 돈을 내지 못하면 그와 같은 문명의 혜택은 십원어치도 받을 수 없다는 깨달음까지 이어졌다.
아무생각없이 빈둥거리기만 해도 21세기만 되면 에브리바디가 해피하게 날아댕기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게 있어 미래란 상당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를 이야기하고(<블레이드 러너>),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을 몰살시키는(<터미네이터>) 등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봐 왔지만 그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아톰 이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접한 기억은 없다.
사실 유년시절의 나에게 아톰이라는 착해빠진 로봇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매일 저녁 테레비 출근부에 확실히 도장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아톰에 등장했던 또다른 캐릭터에 완전히 매료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아톰 일생일대의 라이벌 '아틀라스'였다.
아틀라스
아톰은 사실 코주부 강박사가 만든 로봇이 아니었다. 과학청 장관이었던 텐마(한국 이름 생각 안남) 박사가 교통사고로 잃은 아들을 대신해서 만든 로봇이었는데, 로봇이라고 학교에서 왕따당하기나 하고 성장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서커스단에 팔아 버린다. 그런 아톰을 델꼬 와서 착한 마음을 이식하고 키워준 사람이 코주부 강박사였다.
아톰을 내쫓은 이후, 텐마 박사는 아톰과 똑같은 능력과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성장하는 로봇을 만드는데 성공하게 되는데 그 로봇의 이름이 바로 아틀라스였던 것이다. 이후 아틀라스는 아톰을 '인간의 편에 선 기계의 적'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며 시리즈 내내 아톰의 영원한 라이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톰의 생일을 기해 일본 현지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새 아톰 시리즈에서도 이같은 설정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보면 그냥 나쁜 놈일 수도 있는 이 아틀라스라는 캐릭터가 어린 시절의 나를 그토록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압축되는 것 같다. 첫째, 그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둘째, 라이벌이라고 명확히 규정하기 힘들만큼 선/악을 넘나드는 캐릭터였으며, 셋째, 무엇보다 그는 로맨티스트였던 것이다.
아틀라스의 카리스마는 80년대에 방영되었던 아톰 컬러판 시리즈에서 성장한 모습으로 부활하는 데서 정점을 이루었다. 망토를 두르고 백마를 타고 다니는 청년 아틀라스는 고독한 베가본드의 이미지를 이빠이 풍기면서 등장했는데, 주목할 것은 이때부터 아톰과 아틀라스의 관계가 사안별로 연대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서 '라이벌'이라고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상황으로 빠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일본만화를 보다 보면 샤아 아즈나블(건담), 서태웅(슬램덩크), 하지메 사이토(바람의 검심)와 같이 주인공과는 라이벌이지만 가끔씩 도와주기도 하는 후까형 캐릭터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가 있다. 모르긴 해도, 그 원조는 아마 요 아틀라스가 아닐까 싶다.
아틀라스의 연인 리비안
그리고, 아톰의 곁에 '우란'이 있었듯이 아틀라스의 곁에는 '리비안'이라는 여성형 로봇이 있었는데 단순한 남매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던 아톰 - 우란과는 달리 아틀라스와 리비안은 서로에게 아가페적인 연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시리즈 1부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애수의 헌신 플레이는 당시의 내 눈물샘을 완전히 휘저어 놓고 말았는데, 동력이 떨어져 최후를 앞둔 리비안을 살리기 위해 아틀라스는 스스로도 동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남은 전원 모두를 리비안에게 넘겨주고 자폭하며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후에 아틀라스는 스스로 몸체를 다시 구성하고 청년 로봇의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지만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저 어린 아틀라스의 최후는, 김청기 감독의 국산 만화영화 <날아라 거북선>에서 위기상황에 난데없이 등장했던 태권V가 안겨준 환희, <마징가 Z>의 마지막회에서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며 유유히 등장했던 그레이트 마징가의 감격과 함께 내 유년시절 만화영화의 3대 카타르시스 반열에 올라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지만, 그때는 '저런게 바로 사랑이야'라며 끄덕거렸던거 같다. 그리고 그같은 확신은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도 꽤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같다.
2003년형 아톰과 아틀라스 (아틀라스의 카리스마가 예전같지 않다는 아쉬움이 든다)
작년 초, 뜻하지 않게 일본에 다녀올 기회를 얻은 적이 있었다. 약 1주일간의 여정동안 이땅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문화적 충격을 많이 받았으나,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귀국을 위해 수속을 밟던 현지 국제공항 벽면에 붙어 있던 한 장의 포스터였다.
거기에 써 있는 문안은 정말 우리나라 지하철역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내용에 불과했다 "총포, 마약으로부터 일본을 지킨다!" 는 정도의 의미였는데, 우리나라의 이와 같은 공익광고 포스터라면 주사기 정도의 이미지가 실려 있었겠지만 일본의 바로 그 공익광고 포스터에는 이따시만한 아톰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장하게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포스터의 유려함 앞에서, 본 기자는 얼렁 하나 떼갖구 가야겠다는 견물생심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알 수 없는 시기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만화 내용상의 생일뿐만이 아니라 아톰이 실제로 이 세상의 빛을 본 날 역시 4월 7일이다. 1951년 4월 7일,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츠카 오사무가 월간지 <소년>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아톰의 기나긴 전설은 그 첫단추를 꿰게 된 것이다. 전후 복구에 열중이었던 당시 일본에서 아톰의 탄생에 열광했던 세대들은 어느덧 정년퇴직하고 손주 재롱 감상에 전념할 나이가 되었다.
이건 무슨 말인가? 일본에서 아톰은 어느덧 모든 세대들이 아련한 그 무엇으로 떠올리며 공유할 수 있는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거다. 보통 공익 광고나 포스터에서 만화 캐릭터를 사용한다면 특정 계층 - 그 중에서도 젊고 어린 연령대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제공항 벽면에 붙어 있던 마약근절 아톰 포스터는 분명 만화를 즐겨보는 유소년 세대부터, 아톰에 강한 향수를 품고 있는 장년, 심지어 노년 세대에 이르기까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이미지였다.
이렇듯 모든 세대가 공유할 수 있다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느덧 30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윗대와도 우리의 후대와도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내가 일본 국제공항에서 느꼈던 시기심, 바로 그것의 정체였던 것이다.
아톰 탄생의 해에 발맞추어 일본에서는 새로운 아톰 테레비 시리즈를 제작, 방영에 들어간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손주까지 모두 같은 연령대로 돌아가 테레비 앞에서 환호작약할 그 모습에 나는 또 한번의 부러움에 몸을 떨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3년전인가 TV에서 일본HONDA社에서 아시모라는 인체형 로봇을 선보였을때
아~ 우린졌다...라는 한숨이 나왔고...현재 이라크 전쟁을 마지막으로
다음 전쟁엔 인간끼리의 전쟁이 아닌 터미네이터를 만들어
무차별 적인 전쟁이 올거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