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깡패 원조' 박춘금
‘이 땅의 황국신민들' - 일본 제국 중의원(국회의원) 두번 지낸 반민족행위자 |
일제시대에 살다간 조선인 친일파 중에 가장 출세한 사람은 누구였을까하는 생각을 한번쯤 하게된다. 물론 당시 직함만으로 출세했다 안했다를 판단하는 것은 좀 단순한 발상이지만 한정된 지면을 핑계로 한번 논해보도록 하자면 아마도 ‘박춘금’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1932년과 1940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제국의 중의원(衆議院: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에 당선된 그의 이력을 따라갈 조선인이 과연 있을까.
몇 해전 한국계로 미국 의회 의원을 지낸 김모씨를 상기해보자. 그를 대하는 우리나라 언론은 그를 한국 대통령보다 더 강한 파워맨으로 인식하는 듯 했다.
지난 2002년 박춘금의 묘지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있어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 송덕비의 존재를 알고 가장 분개하고 치떨려했던 분이 아마 우리 연구소의 조문기 이사장님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력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정치깡패의 원조라 할 만하다.
189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인 술집에 심부름꾼으로 있으면서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타고난 깡패 기질을 바탕으로 일본에 건너와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한 상애회(相愛會)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관동대지진 이후에는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고 나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충성을 인정받았다. 이것이 그가 중의원까지 오르는 계기로 보인다.
박춘금은 전쟁의 막바지에 대의당(大義黨)이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1945년 7월 24일 오후 6시, 서울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는데 이 대회의 목적은 반일분자로 분류된 조선인 지식인들을 대규모로 전쟁터에 내몰기 위한 기만책의 일환이었다.
바로 이 대회장에 당시 19세 청년 조문기를 비롯한 3인이 연단 아래 시한폭탄을 설치해 대회를 무산시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부민관폭파 의거]이다. 겨우 목숨을 건진 박춘금은 일본 경찰당국이 내건 현상금에 자신의 사재를 더 보태 조문기 등을 잡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곧 해방이 되자 박춘금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일본으로 도망하여 1970년에 그곳에서 죽었으나 그의 묘지는 현재 출생지인 경남 밀양에 있다. 게다가 그와의 각별한 우정(?)을 그리워하는 일본의 어느 단체에서 그의 공덕(한일양국의 협력)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연구소 회원들은 그 비석의 자진 철거를 유족에게 요구한 상태지만 그의 유일한 유족인 딸은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밀양역에서 박춘금 비석의 철거를 요구하는 집회 도중 도로를 지나는 시내버스에는 ‘충절의 고장 밀양’이라는 표어가 써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지역 출신의 항일운동가인 김원봉, 윤세주 선생을 자랑하면서 적어 놓은 구호로 보이지만 왠지 그 구호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 朴春琴, 1891∼?
◆ 1921년 노동상애회 조직. 1932, 1940년 일본 중의원 의원. 1945년 대의당 당수
일제하 친일파는 정치적으로 협력한 자, 군 · 경 관리로서 협력한 자,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등을 비롯하여 경제적 · 문화적 친일파 등 여러 유형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유형과는 좀 특이한 것이 폭력을 밑천으로 일제 권력에 아부 · 협력한 친일파다.
한일'합방' 전후의 일진회 같은 것이 대표적인 폭력 친일조직이지만, 개인으로서 폭력형 극렬 친일파의 대표적인 자는 박춘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제 관헌의 폭력 하수인으로만 날뛴 것이 아니고, 일본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것 같자 반일적 조선인 사상범을 대량 학살할 음모까지 추진하기도 하였다.
결전 테러단체 '대의당' 당수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자, 일본의 영원한 동양제패를 믿은 많은 지도층 인물들이 변절과 타협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원래의 친일파들은 더욱 의기충천하여 세를 과시하며 조선 민중을 전시협력으로 몰아넣는 데 광분하였다. 이어 태평양전쟁기로 들어서면서 이들 친일군상들의 행태는 광기 바로 그것이었다. 1932년과 1940년 두 차례에 걸쳐 이미 일본 중의원(衆議院:국회) 의원에 당선된 바 있는 박춘금의 활동이 이 시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거물급으로 자처, 총독부와 조선군 사령부의 고관들과 접촉하였기 때문에, 조선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실력자로 비쳐지고 있었다. 1944년 1월 17일, 매일신보사 주최로 부민관에서 개최된 '학병격려대연설회'에서 의 그의 연설 '조선에 고한다'는 그가 얼마나 잘 길들여진 일제의 충견이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제야말로 1억 국민이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내지(일본---인용자)나 반도(조선----인용자)를 구별할 것 없이 이 성전을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특별지원병도 이 정신을 이해하고 5천 인이 합심하여 하나 빠지지 않고 나가야 한다.······학도들아 반도를 바르고 밝은 길로 인도하여라. 너의 피를 흘려서 2500만의 전도를 열어 주어라. 우리의 활로는 오직 황민화가 있을 뿐이다.
전시하 박춘금의 친일 활동은 승전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회에서 열변을 토하거나, 학도병 출정권유 강연을 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양심적 인사들을 위협하는가 하면, 관권을 업고 여러 이권사업에 개입하는 등 가히 안하무인의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의 패전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자 반전(反戰) 조선인에 대한 폭력 제재를 목적으로 하는 테러 조직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해 당수가 되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일본의 패전이 목전에 이른 것으로 비쳤다. '본토결전'이 강조되면서 일제는 미군의 일본 · 조선 상륙에 대비한 결전태세를 부르짖었다. 이러한 급박한 시국은, 일제의 승리를 철석같이 믿고 온갖 충성을 다하던 친일파들에게는 큰 불안과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박춘금은 이성근(李聖根), 이광수*, 손영목(孫永穆), 김동환*, 박흥식* 등 당시의 일급 친일파들과 공모하여, 황국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충군애국의 대의를 다한다는 '대의당'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8 · 15 해방을 불과 한 달 2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 서울 부민관에서 결성된 이 대의당에는 당수 박춘금을 비롯하여, 위원으로는 이성근, 이광수, 김동환, 손영목, 박흥식, 이재갑, 주요한*, 고원훈*, 이원보, 김신석, 김동진, 김민식, 정연기, 이승우*, 김사연, 신태악*, 조병상 등 당대의 지도급 각계 친일파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면 대의당은 어떤 성격의 조직인가.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제정된 1948년, 반민자들의 친일죄상을 조사 · 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은, 대의당을 '항일 반전 조선 민중 30만 명을 학살코자 직접적 행동을 취한 살인단체'라고 규정하고, 일제 군 · 관 당국과의 모의로 조직된 것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대의당이 반일 조선인 학살 대상을 과연 30만 명이라는 엄청난 규모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대의당이 보통의 정당이나 단체가 아닌, 반전적 조선인에 대한 테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란 것은 공식 발표된 대의당 강령에도 그대로 비치고 있다.
전국은 바야흐로 황국의 흥폐를 결정할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이 위기를 신기(神機)로 돌리는 데는 국민의 결사적인 결의와 분투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들 반도 2600만 동포는 황국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몸과 가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소의를 던지고 오직 충군애국이라는 대의에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취지로 결성된 대의당의 강령 5개항 중 제5항은 이렇다.
오등(吾等)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
여기서 말하는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 · 반일적인 요인을 가리키는 것이며,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한다'는 것은 요시찰 인물이나 비협력 분자를 응징 · 말살하여 최후의 승리를 기할 태세를 갖춘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총독부 경무국은 전세가 급박해진 1945년 4월 초, 조선이 머지 않아 전장화할 것에 대비하여 '요시찰인에 대한 조치계획'을 세워 전국 175개 경찰서장에게 극비친전(極秘親展)으로 시달했다. 그 내용은 소련군 또는 미 · 영군이 조선으로 진격 · 상륙해 오는 경우,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해 후방으로 옮기되, 시간적 여유가 없는 때는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 ·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당시 경찰간부였던 조선인들의 증언으로 1970년대에 밝혀졌다.
이에 따라 소련군이 참전한 1945년 8월 8일부터 전국에서 요시찰 인물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는데, 일본이 예상 밖으로 빨리 항복함에 따라 학살사태로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당시 보호관찰소장이었던 나가사키(長崎佑三) 검사가 1952년 4월 증언한 것에 따르면, 1945년 7월 7일 이후 해방될 때까지 요시찰인 중 약 3000명이 구금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총살처분이 논의되었으나 좀 두고 보자는 주장이 나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요컨대 당시 일제 당국의 사상범에 대한 이러한 가공할 음모에 비추어 볼 때, 친일 폭력배로 신임받아 두 번이나 중의원 의원을 지낸 박춘금이, 군경의 사주하에 조선인 사상범들을 비롯한 반전인사들을 박멸하기 위해 살인적 테러 집단인 대의당을 결성한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친일 노동단체 '상애회'로 친일 행각 출발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가계나 집안사정 등은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인 술집에 심부름꾼으로 있으면서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판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타고난 완력과 간교한 성격으로 곧 두각을 나타냈다. 3 · 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경에는 이기동(李起東) 등과 더불어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 소규모 노동자 합숙소를 설치하고 실비 진료체계도 갖추었다.
그러다가 1921년 말에 와서 이를 사회사업단체인 '상애회'(相愛會)로 개편 · 발족시켰는데, 2년 뒤에는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등 여러 곳에 지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던 차에 1923년 9월에 일어난, 간도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은 박춘금이 친일배로 출세하는 결정적인 기회를 던져 주었다.
9월 1일 도쿄 지방 전역과 시즈오카, 야마나시 두 현(縣)을 휩쓴 대지진은 가옥 전파 12만 호, 전소 45만 호의 재산피해와 14만 명의 사망 및 행방불명자를 내는 일대 참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당국은 이로 인한 민심 동요와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려 놓기 위해, 사회주의자와 결탁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고 방화 · 살상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총검,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관헌과 함께 조선인을 체포 ·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해 60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공할 만행이 진정될 무렵, 이미 일선(日鮮) 융화단체 보스로 인정받고 있던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약 300명으로 '노동봉사대'를 편성하여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고 나서 열성적으로 당국에 협력했다.
박춘금 일당의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24년 1월에는 상애회본부 사무실을 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임시 수용했던 혼쇼구(本所區) 육군양말공장 구내로 옮기게까지 되었다. 상애회본부는 뒤에 이 자리에 소학교가 들어섬에 따라 긴시초(錦系町)에 큰 땅을 얻어 내어, 1929년 4월 상애회관을 지어 이전했다.
아무튼 박춘금의 친일적 폭력 노동단체 상애회는 대지진을 계기로 그 세가 비약적으로 확장되어 일본 주요 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게 되었고, 회원수도 2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9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어, 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낸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회장에는 비교적 온순한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 자리를 차지해 실권을 장악했다. 박춘금은 이미 이 시기에 이르러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해 위세를 부렸다.
그는 권총을 항상 휴대하는 등 권력비호를 과시할 뿐만 아니라, 거슬리는 조선 동포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제재를 가했다. 특히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잔인한 테러를 일삼아, 일본인들로부터도 '일본 정부의 앞잡이', '노동자의 착취자'라는 세찬 비난을 받았다.
중의원 의원으로 출세
박춘금이 주도한 상애회는 중일전쟁 후 일본 정부가 일선융화 강화책으로 1938년 11월 '협화회'(協和會)를 발족시키자 이에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 박춘금은 협화회의 주요 간부가 되었는데,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다시 도쿄에 '대화구락부'(大和俱樂部)라는 단체를 따로 만들어 주도하면서 친일행각을 가속화해 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식한 폭력배에 불과한 박춘금이 이보다 훨씬 앞서 일본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실이다. 박춘금은 상애회가 세력을 급속히 늘려가고 있던 1932년 2월의 제18회 총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해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제4구에서 6966표를 얻어 당선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으로 비쳐진 그에 대한 일인들의 지지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최초로 조선인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은 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대정부 질문에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줄 의사가 없는가,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의사가 없는가 등을 질문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한편 그는 1936년의 제19회 총선에서는 낙선했다가 1940년 4월의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의 제21회 총선에서 떨어진 이후 다시 의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는 의원 생활에서 조선인의 참정권 요구와 처우개선 등을 일관되게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정치적 명분이었음은 물론이다.
동아일보 사장 폭행
도쿄에서 상애회를 조직해 일제의 신임을 받은 박춘금이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착취 · 통제하는 한편, 조선에 와서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공갈을 일삼은 예는 한두 건이 아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24년 4월 2일 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사주 김성수에게 가한 폭행사건이다.
박춘금이 이러한 안하무인의 폭력을 자행하게 된 것은, 어떤 연분으로 맺어진 것인지는 모르나 그가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와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 · 1 운동 후 민족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가는 것을 우려한 경무국은, 그간 양성해 온 친일단체의 연합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25일, '각파유지연맹'이라는 것을 결성하였다. 박춘금의 상애회, 송병준*의 소작인상조회, 민원식* 계열의 국민협회 등 11개 친일단체 대표 34명이 그 구성원이었다.
이러한 각파유지연맹의 결성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3월 30일자 사설 [소위 각파유지연맹에 대하여]를 통해 이를 공격했다. 그러자 이날 밤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는 평소에도 지면이 있는, 각파유지연맹의 이풍재로부터 '회고담이나 나누고 싶다'는 명목으로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으로 초대를 받았다.
두 사람이 식도원으로 가자 각파유지연맹 대표들 5, 6명이 이미 와 있었다. 이들이 술잔을 나누던 중 {동아일보} 사설을 두고 시비가 벌어졌다. 이 때 옆방에서 박춘금을 비롯한 10여 명이 뛰어들어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놈은 죽여 버린다"고 위협하며 폭행을 가했다. 유도를 하고 일본 깡패식으로 단도를 쓸 줄 안다는 박춘금이 주동적이었다.
이들은 {동아일보}가 공개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사장 송진우가 각파유지연맹에 사과문을 보내고 3000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강박했다.
결국 권총까지 들이대는 박춘금의 협박에 눌려, 송진우는 '사담:주의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을 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줄로 증(證)함'이라는 각서를 써 주었고, 김성수는 3000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끝에 수시간 만에 빠져나왔다.
박춘금은 이 사건이 있기 전인 그해 1월에서 2월에 걸쳐, 박춘금은 일인 노동자들이 입는 하삐 복장에 단도와 몽둥이까지 들고 동아일보사에 나타나, 해외동포 위문금으로 모은 돈을 내놓으라고 7, 8회나 행패를 부린 일이 있었다.
어쨌든 식도원 폭행사건이 보도되자 각 사회단체는 이를 폭력을 통한 총독부의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언론탄압 탄핵 민중대회'를 열려다 경찰에 저지당하는 등 파장이 확대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사는 마루야마 경무국장에게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박춘금 일당의 행패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박춘금의 해방 전후 행적
박춘금이 일제에 대한 최후까지의 충성을 다하기 위해 대의당을 결성한 지 한 달 뒤인 1945년 7월 24일 오후 6시, 서울 부민관에서는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개최되었다.
일본의 승리를 통한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촉구한다는 것이 이 대회의 취지였다. 중국(왕정위 정권) 대표 2명, 만주 대표 1명, 일본 대표 2명이 연사로 참가했는데, 박춘금은 일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아세아 민족의 해방'이라는 연제로 연설을 맡았다.
그러나 대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9시 10분경 무대 입구 쪽에서 두 개의 폭발물이 연속으로 폭발해 대회장이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것은 살아 있는 조선 민족의 의기를 보여 준 통쾌한 일격이었다.
돌연한 폭탄세례의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과 헌병이 혈안이 되었지만 범인은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의거의 주인공은 산업전사란 이름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문기(趙文紀), 강윤국(康潤國), 유만수(柳萬秀) 등 세 애국청년으로, 수색에 있는 군수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빼내 장치했던 것이다.
부민관 폭파사건은 극렬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종언을 예고하는 조종이었다. 그로부터 20여 일 뒤 일제가 항복을 한 것이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가 결성되자 간교한 박춘금은 주(朱)라는 그의 부하를 통해 치안대 경비로 써달라고 20만 원을 보냈다. 그러나 건준 치안대장 장권(張權)은 "이 돈은 받을 수 없다. 또 이 돈은 박씨의 돈도 아니기에,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 거기에 귀속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거절, 돌려보냈다.
며칠 되지 않아 박춘금은 다시 건준 재정부장 이규갑(李奎甲)에게, 40만 원의 돈과, 자기 소유의 금광, 자동차, 의복 등을 건준에 바치겠다고 제의해 왔었다고 한다. 이는 전 KOC 위원 정상윤(丁相允)의 회고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이미 발 부칠 곳이 없게 된 것을 안 박춘금은 언제인지는 모르나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이후 그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거의 묻혀 지내다시피했는데, 1970년대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김대상(대한매일신문 주필)
■ 참고문헌
[조선인 지원병 제도 시행에 관한 청원----제11 제국의회 속기록 발췌], {매일신보}, 1943. 11. 18.
{민족정기의 심판}, 혁신출판사,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