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시묘살이를 결심한 유범수씨를 찾아서
며칠 몇 날을 올빼미 생활을 하며 지친 육신을 늘어뜨린 채 그저 푹 쉬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 있을 때쯤 귀에 솔깃 하는 소식을 안고 무겁고 뻑뻑한 눈에 힘을 주고는 온종일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를 감상할 틈도 없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 옆에서 3년 시묘살이에 들어간 유범수(49세) 씨를 만나러 서산시 성연면 일남리로 향했다.
종합운동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서령주유소가 위치하고 그 맞은편으로는 아파트 공사를 하다 중단된 공터가 보이는데 바로 옆 샛길을 타고 올라가니 저 멀리에 허름한 텐트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잡풀들마저 비에 씻겨 내리고 있는지라 싱그러움이 가득 했고 무서운 느낌보다 왠지 푸근하고 아담하다는 생각이 앞섰으며 막상 텐트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을 때는 차라리 이런 곳에서 수양이나 했으면 싶었다. 질퍽거리는 땅을 한 걸음씩 옮겨 놓자니 '전주유공' 이라 쓰여 있는 비석 뒤편으로 몇 개의 묫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주 유 씨의 선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세요~" 혹시나 외출 중 이라서 안 계시면 어쩌나 하고 조심스레 불렀는데
"예, 누구세요~" 하고 텁텁한 남자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기에 너무도 반가워 텐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텐트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마침 점심을 마치고 간이탁자 앞에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는 중이란다. 턱에 시커먼 수염이 꽤 많이 자라 있었고, 무명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도 깎지 않아 단정하지 않았으나 두건을 쓰고 있어서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모두 먹고살기에 바빠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만 그의 얼굴엔 무언가 말 못 할 수심이 가득 들어 있는 듯같이 얘기를 나누던 2시간 동안 내내 경건하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사연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그의 아버님은 '80년 1월 5일에 술병으로 돌아가셨고 작년 6월 5일에는 속병으로 8개월 입원 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 드시고 돌아가신 어머님! 그 두 분의 사진을 곱게 세워놓고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며 묘를 지키는 것이다. 상식은 끼니때마다 새롭게 지은 밥과 반찬을 정성껏 준비해서 올리는데 살아생전에 못다 해 드린 불효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3남 2녀의 형제 중 셋째인 그가 <시묘살이>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분명히 있었다.
목공일이 전공인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에 나와 일을 하는데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나머지 부모님의 묘를 찾게 되었고 술과 담배를 전혀 못 함에도 아버님이 즐겨 드시던 막걸리를 먹고 쓰러져 잠이 들었단다. 꼬박 묘 앞에서 자고 일어나니 옷은 이슬에 젖어 축축하였지만,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께 사실을 말씀드리니 예상 밖으로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아, 이런 게 부부간의 정이로구나 느끼며 깨닫는 바가 컸다고 한다.
유 씨는 특기를 살려서 건축업을 하던 중 다세대주택 분양이 안 되어 쫄딱 망한 경력이 있고 부모님 또한 예전엔 꽤 잘 살았는데 하룻저녁 만에 주변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가세가 기울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었다.
현재 부인은 인천 부평에서 '한국샤프' 라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고 그의 슬하에는 대학 1학년의 딸 '샛별'이 하나만을 두었다. 딸 역시 효성이 지극하여 유씨가 직접 '효선'이라는 아호를 하나 만들어 줄 정도. 작년 재작년이 유 씨의 결혼 20주년이었는데 효선 양은 여행을 가시라며 그동안 모은 용돈 100만 원을 선뜻 내놓아 두 부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고 회상을 해 본다. 또한, 효선이 에게는 어릴 적부터 커 온 것들을 기록한 일기를 손수 쓰고 계셨는데 20세까지만 써서 성인식 날 선물로 주려고 준비해 놓고 있을 정도로 자식에게는 다정다감한 아버지로, 부모님에게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의 모습이다.
유 씨가 결정적으로 3년 시묘살이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버님이 아프셔서 누워 계실 때 한약 1재를 드시고 싶다고 했지만 기울어지는 가세에 형편이 되지 않아 해드리지 못했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던 거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못내 마음이 걸리는 바람에 어머님께 100만 원을 드려 아버님 살아 실제 병명과 똑같은 한약을 짓게 하고 그걸 가져다 아버님 산소에다 뿌림으로써 못다 한 효도를 하게 되었다. 그날 밤, 어머님께서는 약탕기에서 뻥 소리가 나더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꿈을 꾸셨는데 지극정성의 마음이 울려 퍼졌는지 그 이후론 집안도 일으키게 되었고 자녀들도 모두 시집 장가를 잘 가서 다 앞가림할 정도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리게 되더라고.
항상 출장을 다니면서도 각 고장의 유명특산물을 사 와서도 어머니에게 먼저 갖다 드리고 난 후 다시 배당을 받은 것을 집으로 들고 올 정도로 효성이 대단했기에 남편의 시묘살이 결단에 단 한마디의 반대도 하지 못한 부인도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유 씨가 처음엔 묘 바로 옆 텐트에서 밥을 짓곤 했는데 태풍으로 거센 바람에 견딜 수가 없어 그 아래에 판자때기를 이용하여 간단한 취사를 할 수 있도록 움막집을 지었다. 그곳엔 가스레인지 하나와 두꺼운 밍크 담요, 수저. 젓가락 몇 개, 라면상자와 달걀 1판 등 기초적인 생활 도구가 있고 바닥엔 얇디얇은 장판이 깔렸다.
지금은 괜찮지만 추운 겨울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여쭤보니 가을쯤에 겨우살이 대비를 위해 벽돌을 갖다 놓았다며 보여준다. 시묘살이하는 동안 전기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며(촛불 사용함) 머리도 깎지 아니하고, 부부간에 잠자리는 꿈도 못 꿀 뿐 아니라 목욕도 하지 않은 채 삼백예순 닷새씩 세 번이나 보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가 길이 역사에 빛날 수 있는 것은 우리 후손들이 무궁히 받들고 기린 까닭인 것처럼 부모님도 지금 우리가 모시지 않으면 어찌 우리가 있겠는가."라는 짧은 말 속에 담긴 진리.
작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들어오려 했으나 용인大 룸을 짓다가 작업장 2층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올해 5월 23일에야 들어와 오늘이 53일째 시묘살이를 하는 유범수씨. 아침. 저녁으로 상식 후에는 틈틈이 붓글씨와 한문공부를 하는데 벌써 천자문과 더불어 풀이까지 완전 숙달한 상태로 한자 2만 자 이상을 알고 있는 셈인데 추후 기네스북에 도전할 생각이다.
고향이 예천동으로 3년 시묘살이가 끝나면 원래 그의 꿈이었던 서당을 서산에 차릴 참인데 불우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 가르치는 사업을 구상 중으로 영리를 배제한 예절과 효친 사상을 기리는데 남은 생을 바치기로 작정을 했다고 말한다.
요즘에 부부간의 정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도 자꾸만 신의가 깨지고 허물어지는 마당에 유범수 씨야말로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효도하는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진정 밝은 사회를 이룩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이리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약해져 가는지 소리 없어지고 아래에 마련되어 있는 움막집에서 나란히 앉아 문짝 없는 창틀 너머로 보이는 텐트와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침 유 씨의 친구 가족이라며 위로차 방문을 왔기에 그곳에서 총총걸음으로 내려왔다.
작성일: 200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