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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28) 2023. 6. 18
다시 일어서는 신앙
삼하 12:15b-25
<하나님의 징계>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다윗의 범죄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다윗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합니다.
어느 마을에 양과 소를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와 암양 한 마리를 마치 외동딸처럼 키워오던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가 자기의 양을 잡질 않고,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다는 겁니다.
사실 이 비유는 다윗의 죄를 드러내려는 우화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여기고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12:5). 그러고 가난한 사람에게 4배를 갚아 주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공정과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나 측근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는 권력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바로 그 ‘죽어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나단 선지자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다윗의 마비된 양심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그의 죄를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임할 세 가지 재앙(징계)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다윗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10절).
다윗 당대뿐 아니라 다윗의 후손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 사건에 휘말려들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근친상간(암논과 다말), 알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롬의 반란 등...
둘째,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겁탈했듯이, 다윗의 아내들도 대낮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11절). 놀랍게도 그 일은 그의 아들 압살롬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압살롬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일을 벌였습니다(삼하16:22).
다윗은 그 자리에 엎드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단순히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다윗이 회개하자,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의 회개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용서하셔서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실,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 교사 죄’는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레20:10, 24:17). 왕이라 할지라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합니다. 말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장 다윗을 사형에 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특별한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하7:14~16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 언약의 말씀은 단지 다윗 왕조를 든든히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넘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포기하지(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때려서라도 그를 돌이키시고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를 완성해 가야 했던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사울과는 다른 관계). 이것은 천륜으로 엮였다는 뜻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만일 ‘아들’이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그 관계는 변치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역할이 있습니다. 아들을 징계해서라도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범죄는 그냥 없던 일처럼 되는 것입니까? 다윗은 그냥 사는 것입니까? 충성스러운 부하의 부인과 ‘간음’하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하고, 심지어 그를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내몬 ‘살인교사죄’가 그냥 묻히는 것입니까? 다윗이야말로 특정범죄 가중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말로만 용서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 번째 징계를 주셨습니다.
셋째,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기가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14절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기독교의 대속(代贖)의 진리를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대속은 핏값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히9:22)고 선언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루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불륜의 열매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라도 생명은 소중합니다. 죽어 마땅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 땅에 마땅히 죽어야 할 생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생명을 빼앗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 ‘대속의 진리’를 예시해 주셨고, 이 ‘대속의 죽음’은 훗날 다윗의 자손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용서해주시는 대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히9장).
벧전3:18a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못을 인정한다고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속의 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회개해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고전7:23)이라고 말씀하셨고,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20:28)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을 믿고, 감사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윗의 회개와 금식>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기가 죽으리라는 말씀은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15절b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은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통곡합니다.
16~17절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어떤 사람의 위로도 거절한 채, 어떤 사람의 권함도 물리친 채, 온전히 회개에만 집중했습니다.
<아이의 죽음>
그러나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18절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아이가 죽자 신하들은 그 소식을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도 힘들어했는데, 죽었다는 것을 알면 왕이 얼마나 상심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참 충성스러운 신하들입니다.
<의외의 다윗의 반응>
그러나 눈치 빠른 다윗은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챘습니다(19). 그런데 아이가 죽은 것은 안 다윗의 행동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뜻밖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차리게 하고 먹은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아이가 병에 걸려 아프면, 곁에서 간호하면서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만약 아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때부터 더욱 서럽게 울고 통곡합니다. 다시 만날 수 없으니,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다윗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마 신하 중에는 “너무 상심이 크셔서, 또한 오랫동안 식음을 폐하셔서 지금 약간 제정신이 아니신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신하들이 이유를 묻자(21)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22~23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아이를 살려주실까 하여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아이를 데려가셨으니 이제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교훈>
지금까지의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영적)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인생의 위기(실패) 앞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기 시작할 때, 다윗과 밧세바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을 것입니다. 어머니인 밧세바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밧세바에게 그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을 왕이 될 가능성이 큰 아이입니다. 밧세바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살려야 할 아이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하다는 의사는 다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아이가 아픈 것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한 행동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시고 혹시나 살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다윗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위한 최선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훗날 다윗의 후손 가운데,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병에 걸렸습니다(왕하20, 사38:1-22).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왕을 찾아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왕이 죽고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유언을 남기라”는 것입니다. 이제 38살, 아직 젊습니다. 깜짝 놀란 히스기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절박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또 임하였습니다. “너는 기도하는 히스기야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응답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그래서 네 생명을 십오 년 더 연장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위기 앞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얍봅강 가의 야곱 –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침 –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 –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기까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창32:13~32).
둘째, 하나님의 최종판결 앞에 미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대목에서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때가 종종, 아니 많이 있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달랐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원망과 불신앙에 빠집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맞냐”는 등...
오늘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다윗의 냉정함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태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비록 내 뜻과 달라도, 비록 나를 아프게 해도, 비록 마음이 상하는 것이더라도, 주의 뜻은 선하고 옳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즉, 하나님의 최종판결 앞에 미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요셉’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보디발의 집에서든(창39:9), 감옥에서든(창39:23), 그의 처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해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할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어떤 결과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으로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주 안에서 평온함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 주시는 결과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23절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더 이상 자신이 죽은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새로운 출발이 쉬워집니다.
우리의 한계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속히 인정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특별히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는 깨끗이 단념하고 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그분에게 맡겨 두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 하나님이 징계(용서)하셨으면, 이제 고개를 들고 당당하여지기 바랍니다.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다윗은 그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음으로 몸을 추스르고, 그간 돌보지 못한 국정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일상을 회복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가능해졌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순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히10:17~18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하여 주십니다.
론 리 데이비스(Ron Lee Davis)라는 사람이 쓴 ‘용서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A Forgiving God in an Unforgiving Worl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은 받고 있었지만, 신학교 시절에 큰 죄를 저질러서 그 비밀스러운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필리핀의 한 신부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자신의 죄를 다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지만, 마음에 영 평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비밀스러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확신이 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목회하는 교구에 한 여신도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신비한 환상을 자주 보여준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이 소문을 듣고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이것이 사실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부탁했습니다. "다음번에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면, 이 질문을 꼭 물어 봐주세요. '우리 신부님이 신학교 다닐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예수님 알고 계세요?'" 이 여자 성도는 그렇게 하마하고 약속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신부님은 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상 속에서 만났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래, 내가 신학교 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주님이 알고 계십디까?" "신부님, 제가 여쭈어보았더니 예수님께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어요."
예수님도 다 잊어버리신 죄들을 우리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오늘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잊음” 그리고 “새 출발”입니다.
그런데, 오늘 꼭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용서받은 우리만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하나님도 새 출발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24~25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다윗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사를 다시 시작하십니다.
새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솔로몬’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단을 보내 이름도 지어 주셨습니다(여디디아 -‘여호와께 사랑을 입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자녀는 시므아, 소밥, 나단 그리고 솔로몬으로 솔로몬은 넷째입니다(삼하5:14, 대상3:5). 하지만 본문에는 솔로몬이 마치 죽은 아이 다음에 태어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특히 사랑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 장차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통해 다윗 왕가를 이으시고, 솔로몬의 혈통을 따라 장차 메시아가 나오게 하신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맺는 말씀 - 다시 일어나는 신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을, 혹시 여전히 붙들고 죄책감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오늘로 끝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신 죄를 다시 묻지 않으십니다. 모든 무거웠던 과거의 짐들과 족쇄들을 다 풀어버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때문에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될 줄로 믿습니다(사 1:18).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십시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같은 죄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이제는 무거운 짐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고, ‘용서받은 죄인’으로, 늘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순간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승리의 삶을 사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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