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선을 함께한 초의 선사
초의 선사는(1786~1866) 조선시대 후기의 대선사이자 우리나라에 다도(茶道)를 바로 세운 스님으로 무슨 일이든 잘 할 수 있는 인간이 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부터 차 마시기가 생활화되어 있었는데 차(茶)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이 바로 초의 선사입니다.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 10년(1786)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스님을 잉태할 때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5살 되던 해 강가에서 놀다가 깊은 물에 빠졌는데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마침 건져주었다고 합니다. 죽을 뻔한 스님은 그 일이 인연이 돼 16세 때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에 계시던 민성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대흥사에서 민호대사에게 구족계(비구승이 되기위해 받아 지니는 계)를 받았으며 이때 초의(草衣)라는 호도 받았습니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유명한 스님을 찾아다니면서 계율과 참선 그리고 교리를 두루 배워 크게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스님은 당시 유학과 도교 등에도 통달하였습니다. 스님의 학문과 수행이 얼마나 높았던지 불교를 배척하던 당시에 승려와 가까이 지내면 출세에 지장이 있었음에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홍현주 등과도 잘 알고 지내면서 서로 글을 지어보내기도 했습니다.
초의스님은 두륜산 산마루에 일지암이란 암자를 세우고 홀로 앉아 40여년을 고집스럽게 수행하면서도 참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참선과 교리를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며 제자들에게 참다운 진리를 전수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인간이 될 것을 주장하면서『동다송』을지어 다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 범패음악과 원예, 서예에도 능했으며 꽃가꾸기, 장 담그는 법은 물론 단청(그림)도 잘하여 현재 대흥사의 조사 스님들을 모신 대광면전과 보연각을 짓고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이 50세때 조선시대 말 대화가로 유명한 소치(허련)선생이 찾아와 스님의 제자가 되어 시와 서예, 그림, 다도 등을 3년 동안 배우기도 했습니다.
55세때에는 헌종 임금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종사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대흥사의 제13대 대종사입니다.
스님은 존경하는 불교인으로 진묵대사를 꼽아 본받고자 했으며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참선을 고집하거나 교리만을 고집하지 않고 참선과 교리가 모두 중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스님의 중요한 사상은 바로 이런 선교가 둘다 중요하다는 선사상과 함께 차와 선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입니다. 스님은 때묻지 않은 깨끗한 차의 성품이 우리들의 본래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은《일지암문집》,《초의선과》,《선문사변만어》,《동다송》,《다신전》,《진묵조사유적고》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중《선문사변만어》는 그 당시 유명한 대선사 백파 스님이 《선문수경》을 지어 오직 참선만을 닦을 것을 주장하자 그것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밝혀 우리나라의 선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저서입니다.
일생동안 일지암에서 참선과 다도의 생활을 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스님은 81세(법랍65세)되던 해 홀연히 서쪽을 향해서 가부좌를 하고 열반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