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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모래의 시간/ 이순원
이상한 일이었다. 요 근래 알 수 없는 일이 세 번째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해 일어나고 있었다. 작업실에 걸어둔 박제 거북이가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는 거기에 대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작업실엔 거북이 말고도 거북의 등판만큼 크고 길쭉한 벽시계가 그 벽과 모서리를 맞댄 벽에 걸려 있었다.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아 이따금 그가 손을 댔던 것도 거북이 아니라 벽시계였다. 그러나 시계 역시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바늘이 느리게 가거나 멈춰서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틈틈이 시계에 손을 댔던 것은 아래에 매달려 있는 진자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늘처럼 전지의 수명이 다했을 때도 멈춰서고 균형이 맞지 않을 때도 언제인지 모르게 멈춰서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곤 했다. 지난해 작업실의 구조를 바꾸었을 때 그의 형이 선물로 가져온 시계였다. 몸통에 달려 있는 액세서리가 모두 그때의 것이고, 구입할 때 형이 받았다는 보증서가 진짜라면 그것은 1846년 이탈리아의 어느 시계공이 만든 그야말로 예술품 같은 진자시계였다. 시계 위로 오랜 세월이 지나갔음을 느끼게 하는 겉틀의 목공 솜씨도 여간 아니었지만, 주석 합금을 불로 녹여 만든 숫자판도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늘의 시간을 여는 천사의 모습을 양쪽에 돋움으로 새기고, 그 천사들이 펼친 시간의 궁륭 위에 다시 끌과 망치로 하나하나 숫자를 파나간 솜씨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조작품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형이 시계를 가져왔을 때 그는 그것이 진짜 그 시대의 물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와 국적을 달리하는 모조품이라 하더라도 요즘엔 흔히 볼 수 없는 태엽을 감아 가는 진자시계가 아닐까 기대했다. 숫자판 아랫부분에 태엽을 감는 구멍이 그대로 뚫려 있었고, 몸통 오른쪽에 놋쇠로 만든 태엽감기가 카우보이의 권총처럼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그는 그것이 어릴 때 집에 있던 시계의 태엽감기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관만 그랬지 시계 뒤의 몸통을 열어보면 단 한순간의 허망함처럼 거기엔 바늘과 바로 연결된 전동장치 하나만 달랑 숫자판 뒤에 매달려 있었다. 진자도 애초의 물건에 쇠를 덧대 전동장치의 홈에 걸도록 만들어놓았다. 모양은 다르지만 형도 예전에 집에 있던 시계를 생각해 사온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기억하는 시계는 그의 할아버지가 난리 중에 집앞을 지나는 피난민에게 쌀 두 말을 주고 산 물건이었다. 그의 집에 온 것으로만 따져도 형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그보다는 열네 살이나 더 나이 먹은 물건이었다. 형은 자주 집을 비우던 아버지 대신 일찍 태엽을 감기도 했지만, 그는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서툴게라도 태엽을 감을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그 시계는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전지시계에 밀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그의 집에서 사라져버렸다. 그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형은 요즘 다 좋은 거지? 하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우도 잘 지낸다. 전화나 자주 해줘라. 그는 형수에게도 고맙다고 말했다. 형은 시계를 걸면 좋을 자리까지 손으로 짚어주고 돌아갔다. 옆에 있는 거북이와의 사이도 좋았다. 그 말은 사진을 찍는 그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물끼리거나 배경과의 어울림에 대해 혼잣말처럼 쓰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연못을 가득 덮고 있는 가시연잎과 그 위를 가마솥처럼 달구며 시간의 바퀴를 굴려가는 햇빛의 사이를 따지고, 강둑에 하얗게 부서지는 억새와 그 곁을 거의 움직임이 없는 바람처럼 느리게 지나가는 만장 행렬의 사이를 따졌다. 이따금 좌우의 균형이 흐트러져 다시 수평을 잡아 줄 때 말고는 시계도 잘 가고, 진자도 잘 움직였다. 아이도 형 집에서 제 사촌과 잘 지내며 자랐다. 그런 중에 벽에 걸린 거북이가 어느 날 몸을 움직인 것이 조금 특별한 일이긴 해도 그것이 이번이 처음인 일도 아니었다. 형이 시계를 가져오기 전엔 거북이만 한쪽 벽에 걸어놓았다. 그때에도 거북이가 그 앞에서 한번 크게 몸을 움직였다. 그 무렵 사보 편집대행사에 근무하며 사진을 빌려 쓰는 일로 가끔 작업실을 방문하던 여자가 있었다. 오가며 한번도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여자가 그에게 그곳이 아주 깊은 바다 같다고 말했다. 거북이가 걸려 있는 벽면을 코발트색으로 처리해놓아 더욱 그러기도 했겠지만, 꼭 그것만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아 그는 짐짓 여자에게 거북이가 헤엄치는 바다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뇨. 그런 거라면 제가 더 말할 게 없겠지요. 여자가 대답했다. 선반마다 사진이 푸른 모래처럼 쌓여 있는 시간의 바다요. 그것은 좀 뜻밖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코발트색 벽을 바다로 여겼고, 여자는 그것을 푸른 모래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도 오랜만에 말을 늘여 일을 하다보면 사진이 곧 시간이며, 때론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고 견뎌내는 일이기도 한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꼭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저 푸른 모래 위의 거북이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나요? 그때까지 많은 사람이 방문했어도 그렇게 말하거나 물었던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가 알지 못할 거북이의 나이에 대해서 물었고, 그걸 어디에서 구해 작업실에 걸어두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도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거북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딱 한번 거북이가 그의 눈앞에서 마치 천정을 향해 푸른 모래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라도 하듯 꿈틀 몸을 움직였다. 그는 그것을 방금 전 여자와 나눈 말들에서 온 착시라고 생각했다. 이후 여자는 다시 그의 작업실에 오지 않았다. 아니, 왔어도 한두 번 더 오고 그 다음엔 여자의 후임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시계가 걸리기보다 먼저인 지난해 봄의 일이었다. 여자도, 그때 그 일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거북이가 다시 그때처럼 몸을 움직인 것이었다.
그가 그 거북이를 만난 것은 6년 전 경주에서였다. 경주는 그가 열여덟 살 때 집을 나와 처음 사진 일을 배운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의 기억으로 경주에 갔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세 번째 기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는 문득 어떤 주술적인 힘에 끌리듯 경주에 가고 싶어졌다. 열여덟 살 때 좁은 세상이 답답해 몰래 집을 나와 숨어들 듯 찾아갔던 경주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슬픔을 다스려주던 절이 있고, 그 절로 가는 몇 개의 아는 길이 있는 그런 오래된 마을 경주를 찾아가보고 싶었다.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삶의 기저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이제까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세상사의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도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새로 알게 해주었다. 아내가 죽던 날, 그는 충남 금산에서 충북 영동 쪽으로 나가는 698번 지방도 위에 있었다. 어쩌면 이미 충남에서 충북의 도계를 넘어선 598번 지방도였는지도 모른다. 거리와 관계없이 기점과 종점지의 구분만으로 하나의 번호를 갖는 국도와는 달리 지방도는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도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 도로의 앞자리 숫자가 그 지방마다의 고유번호로 바뀌었다. 같은 길도 도계를 넘어 충북 쪽이면 598번 도로가 되고, 충남 쪽이면 698번 도로가 되었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때 나는 어느 길 위에 있었는지 지도를 짚어보다 그가 새로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러기 전 시간차를 둔 우연의 일치처럼 그에게 국도의 번호 구분법에 대해서 말해준 사람도 바로 그의 아내였다. 그때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 막히는 차 안에서 아내는 교통지도를 펴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홀수 번호의 국도는 모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짝수 번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목포에서 서울과 개성을 지나 신의주까지 가는 길이 1번국도라는 것은 그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목포에서 동쪽으로 부산의 낙동강 하구둑까지 나가는 길이 2번국도라는 것은 그때 아내의 말을 듣고 알았다. “3번국도는?” “경상남도 남해에서 문경과 의정부를 거쳐 평안북도 초산까지 올라가는 길이야.” “초산이 어딘데?” “나도 가보지 않아 몰라. 그렇지만 이 지도 말고 학교 지도를 펴놓고 보면 강남산맥 너머 압록강가에 그런 데가 있어.” “그럼 4번국도는?” “그건 충청남도 장항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경주를 지나 감포 바다까지 나가는 길이고.” “희한하군. 자기가 운전하는 길도 잘 모르는 사람이 그건 어떻게 아는데?” 무릎 위에 지도를 펴놓긴 했지만, 금방 지도를 보고 안 것 같지 않아 다시 그가 물었다. “누가 가르쳐줬어.” “누가?” “나 학구적이라고 학교 다닐 때 선배가.” 그 말을 하며 아내는 막히는 길 위에서도 짜증 하나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날 남쪽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이 나라의 1번고속도로는 참으로 많이 막혔다. 아내는 그에게 우리나라의 많고 많은 길 가운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길은 어느 길이냐고 물었다. 그가 장난처럼 막히지 않는 길이라고 하자 아내는 현실적으로 말고 상징적으로 말이야, 하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산에서 그의 고향 영덕과 양양, 금강산을 지나 함경북도 어디까지인지 모르게 이어진 7번국도라고 대답했다. “왜?” “그 길로 가면 이쪽은 산이고 저쪽은 바다여서 그냥 그 사이를 지나가기만 해도 누가 가슴에 과산화수소를 발라주는 것 같거든.” “어, 당신도 그렇게 표현할 줄 알아?” “그게 왜?” “그렇게 말하니까 길보다 그 말이 더 과산화수소 같잖아.” 그러나 그날 아내의 웃음이야말로 정말 운동회날 과산화수소 같았다. 그리고 딱 한 계절 더 나아간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그는 698번 지방도 위에서 언젠가 그 길을 가며 무심코 보았던 방앗간 하나를 찾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기 작업실과는 거리가 먼 드라마 외주업체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회사에서 새로 찍기로 한 드라마에 70년대 분위기가 나는 시골 방앗간이 여러 장면 나온다고 했다. 감독은 자기가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몇 군데 방앗간의 그림을 담아오라고 했다. 그 중엔 감독이 알려준 곳도 있고, 그가 예전에 봐두었던 곳도 있었다. 길을 지나며 틀림없이 그 옆에 살림집 하나 곁들일 만한 방앗간을 보았던 것 같은데,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의 농협창고를 방앗간으로 착각했던 것인지 다시 찾아갔을 때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속도를 줄이고 영동에서 금산 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조금은 난감하고도 황당한 기분으로 금산에서 영동 쪽으로 되짚어 오던 길에 가슴 앞에 걸고 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그가 얼른 플립을 열고 기척을 하자 저쪽에서 굵고도 사무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한여름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으로 아내의 이름을 대며 보호자를 찾았다. “예. 제가 신미은의 보호자입니다.” 상대는 거듭 보호자라면 신미은씨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그는 길가에 자동차를 세우고 남편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참....... 그러면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여기는 병원이고, 저는 경찰입니다. 오늘 낮에 자유로에서 자동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 “그 사고로 신미은씨가 사망했습니다.” 순간 놀라기도 했겠지만, 그의 정신은 오히려 이것이 바로 명료함이지 싶을 만큼 맑아지며 차분해졌다. “아내가 사고를 낸 겁니까?” 그럴 리 없겠다 싶으면서도 확인 차 그가 물었다. “아닙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따로 있는데 그 사람도 사망했습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그는 다시 또박또박 말을 끊어 물었다. “일산 ㅂ병원입니다. 병원 응급실에 오시면 거기에서 안내를 해줄 겁니다.” “일산이요?” “예.” 일련의 명료함 속에 그 말이 왜 낯설게 들렸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곳이 어딘지 모르지 않지만 그의 집은 서울에서도 그 반대쪽인 길동이었다. 있지도 않은 자동차를 끌고 나간 것도 아닐 테고, 운전도 잘 할 줄 모르고 게다가 길까지 어두운 아내가 왜 그곳까지 가서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가 절정기라 상하행선 모두 꽉꽉 막혀있는 길을 뚫고 올라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이미 응급실에서 영안실로 옮겨져 있었다. 그가 확인한 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라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모르게 흉측하게 부서져 있는 한 여성 교통사고 사망자의 얼굴이었다. 사고가 난 곳이 일산과 파주 중간쯤 지점으로 서울에서 파주로 나가는 길이 아니라 파주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었다는 것도 그는 병원에 와서야 들었다. 그는 어디에서 사고가 났든 아내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길 반대편에서 다른 자동차가 정면으로 달려와 부딪쳐 양쪽 자동차에 탄 사람 모두 사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어떤 남자의 자동차에 아내가 동승했으며, 급커브 길에서 가드레일을 받고 튕겨져 나가며 두 사람 다 그 자리에서 절명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먼 곳에서 연락받고 늦게 도착했지만, 병원에 일찍 나온 남자 쪽 유족들은 사고수습도 이미 낮에 다 끝내고 남자의 시신을 저녁 때 서울 어느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빠르게 정리되는 것이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경찰도 처음엔 두 사람을 부부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다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 남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고, 그런 거야 이런 사고에 종종 있는 일이라 놀랄 게 없다 해도 다른 남자의 자동차에 동승해 사고가 난 여자의 실제 보호자를 찾아 사고내용을 전달하는 일은 어느 경우에라도 곤혹스러워 여러 번 자신에게 남편이 맞느냐 아니냐를 물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나온 장모가 쇼크를 받아 처남이 다시 모시고 들어갔다는 것도, 그래서 그쪽 집안에서는 더 이상 누가 나와볼 수도 없으며, 아주 외면만도 할 수 없어 이런 자리에 가장 만만한 처형과 처형의 남편이 최소한의 조문대표처럼 병원에 와 있는 정황까지도 그대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도 우선은 그곳에 가 있다고 했다. 그는 형과 형수 모르게 현관 밖으로 처형을 불러내 그 남자를 처형도 잘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처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따가, 라고 말했다. 그가 사고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 교통과에 다녀온 다음 밤이 깊어 형수는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아내의 빈소는 그와 형, 처형과 동서, 네 사람이 지켰다. 아내의 빈소에서 보내는 밤이라는 게 참 적막하기도 하면서 머릿속에 밀려오는 생각까지 낮과 다르고 저녁과 달랐다. 아까 병원에 도착해 남자 쪽에서 빈소를 서울로 옮겨갔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이쪽에서 무슨 행패라도 부릴까봐 피해갔나 싶었는데, 밤이 깊자 그건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싶어졌다. 부부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고, 그래서 같은 병원 장례식장에 나란히 빈소를 차리고, 많은 사람들이든 적은 사람들이든 문상 다녀가는 사람들이 그 일로 수군거리고, 또 어쩔 수 없이 이쪽 빈소의 사람들이 저쪽 빈소의 동태를 살피고, 그러다보면 더러 통로거나 현관 같은 곳에서 어색하게 부딪치기도 할 텐데 그것은 또 얼마나 난감한 일이랴 싶었다. 자정이 넘자 이번엔 처형이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미은이가 참 바보 같았죠. 그 사람 앞에선 늘.” 처형의 말에 따르면 미은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 남자는 군까지 마친 석사과정의 대학원생이었다. 보통 캠퍼스 커플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도 적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학과뿐 아니라 단과대학 내에서도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남자가 박사과정을 마치고 또 미은이 학교를 졸업할 때쯤 모두 언제 결혼하더라도 두 사람이 결혼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시기에 두 사람은 헤어졌고, 어느날 남자는 다른 사람과 식을 올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곳 어느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며 계속 공부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난겨울 다시 국내 어느 대학의 교수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오늘 와서 보니 그렇네요.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 사람도 미은이가 착하기만 해서 그랬을 거예요. 와서 다시 부른 것도 그렇고. 미안해요.” “뭐가요?” “우리 미은이......” “......” “어쩌면 지금 말은 못하고 혼자 많이 미안해 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는 처형의 그 말처럼 아내를 잘 표현한 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 안에도 아내는 그랬다. 미안하면 아내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웃기부터 했다. 아이는 이제 두 돌이 막 지났다. 그것 역시 아내가 일찍 자리를 떠나며 말은 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미안해 하고 있을 일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많은 미안함을 뒤로 하고 아내는 다른 남자의 자동차를 타고 자신과 아이의 곁을 떠났다.
열여덟 살 때의 기억으로 경주에 갔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가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황오동의 옛 사진관을 찾아가 보는 일이었다. 그 전에도 몇 번 경주에 간 적이 있지만 늘 다른 일에 쫓겨 예전 어린 나이에 그 도시에 와 처음 일을 배웠던 그 사진관엔 다시 가 보게 되지 않았다. 아직 ‘포토’거나 ‘스튜디오’라는 말을 쓰기 전, 다른 사진관들은 모두 현대사진관, 샛별사진관, 서울사진관, 하는 식의 이름을 쓰던 무렵 ‘서라벌사장’이라는 그보다 더 예스런 이름을 쓰던 사진관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두 달 앞둔 어느 겨울 아침, 그는 갑자기 세상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져 남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런 따분함 속의 출발이라면 당연히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로 갔어야 했다. 애초 표를 끊은 것도 부산까지였다. 중간에 경주에 몸을 내린 것이 그 도시의 어떤 끌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어느 도시로 가든 쉽게 일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여관이나 중화요리집이 아니라 터미널에 내린 다음 하루 종일 이 거리 저 거리를 터벅터벅 걷다가 어느 사진관의 문을 두드린 것은 특별히 그 일에 자신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전에 영덕에서 보아둔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덕 영진사진관엔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사진관에서 일하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었다. 읍내의 다른 사진관과는 달리 영진사진관은 그 아이가 이 학교 저 학교로 작은 수첩 같은 사진첩을 들고 다니며 학교 선생들의 눈을 피해 사진 촬영권을 팔았다. 그냥 사진관에 가서 찍으면 이미 정해진 값에 반명함판 사진 여섯 장만 뽑아주고 말지만, 학교로 찾아온 그에게 먼저 반값을 주고 촬영권을 산 다음 나중에 사진관에 가서 나머지 반값을 더 내면, 반명함판 사진 여섯 장 외에 증명사진 몇 장과 물레방아나 낙엽 그림 속에 자기 얼굴과 ‘못잊어’와 같은 짧은 시 한 소절을 넣어주는, 그 아이의 선전대로라면 먼 곳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펜팔 편지 속에 넣어도 딱 좋고, 또 그냥 앨범에 끼워두어도 학창시절 두고두고 추억에 남을 카드사진 몇 장을 더 뽑아주었다. 특히 그 카드사진은 여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상품이었다. 증명사진이거나 반명함판사진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진 때문에 사진관을 찾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그는 촬영권 얘기를 하지 않고도 서라벌사장에 바로 일자리를 구했다. 봄이 되기까지는 실내와 실외 사진 촬영에서부터 현상과 인화에 대한 기초지식을 배우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이 주일에 한번 꼴로 경주 시내의 각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서라벌사장의 특별 촬영권을 팔았다. 여학교에 가면 광고중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질 때도 많았다. 어떤 날은 불국사역 바로 앞의 경주여상고에 갔다가 다시 시내를 통과해 북천변의 경주여고까지 두 군데 여학교에 나가 촬영권을 팔고 오기도 했다. 사진을 쓸 일은 아무래도 인문계 학교보다 주산 급수시험같이 틈틈이 기능자격 시험을 봐야 하는 실업계 학교가 많은 것 같았다. 또 남학생들보다는 여학생들이 더 자주 그때그때 자기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 했다. “전엔 하지 않던 일이라 별다르긴 하다만 어차피 돈 받고 찍어줄 사진 촬영권 파는 거야 무슨 대수겠냐. 옛날에 너처럼 여기 와서 동네 애들한테 공짜로 마를 구워 팔며 남의나라 공주를 후려간 사나도 있었는데.” 그가 수첩 같은 사진첩을 들고 여학교에 가 촬영권을 팔고 오면 서라벌사장 주인은 이따금 그런 농담을 했다. 하기야 그곳은 도처에 그런 이야기들이 깃들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도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황오동에서 북천변에 있는 경주여고로 갈 때마다 여왕이 죽은 다음 왕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곳 북천이 범람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후일 실의 속에 동해의 푸른 바닷길을 따라 영덕을 지나 명주로 올라간 어떤 사내를 떠올리곤 했다. 특별히 어떤 관련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하늘의 운을 받지 못한 그 사내가 그의 고향 영덕을 지나 명주로 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라벌사장에서 일년 동안 일을 배웠다. 정확하게는 다음해 가을까지, 꼭 10개월 동안이었다. 처음엔 그냥 일자리를 구하러 들어온 것이었지만, 하루하루 일을 배우다보니 취미도 적성도 맞는 것 같았다. 가끔 주인 대신 만만한 자리의 출장 촬영을 나갔다 오면 특별히 그러자고 신경을 쓰고 그렇게 찍었던 것도 아닌데 사진 구도를 독특하게 잘 잡는다는 칭찬도 여러 번 들었다. 서라벌사장 주인은 너는 이대로 여기서 착실하게만 일하면 이다음 누구처럼 마를 구워서가 아니라 사진으로 경주 여자 하나를 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깊은 가을날 형이 경주로 그를 찾아왔다. 전날 어느 학교의 3학년생들이 단체로 몰려와 찍은 학력고사 원서용 사진을 오전에 인화해놓았다가 오후에 종이 작두로 반듯반듯하게 잘라 번호순서대로 작은 봉투에 넣고 있을 때 형이 불쑥 사진관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있었구나. 와서도 한참 찾았다.” “어, 어떻게 알았는데?” 그는 작두질을 하다가 너무 놀라 오히려 태연하게 그렇게 물었다. “영덕, 여기서 멀지 않아. 널 본 사람도 많고. 주인은 어디로 간 모양이지.” “응. 밖에.” “큰소리 내지 말고 이제 집으로 갈 준비해라. 일년이면 너 바람도 충분히 쐬었으니까.” 그 한마디로 형은 모든 얘기를 끝냈다. 전에도 형은 그에게 늘 집을 나가 있는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형은 군에서 제대해 집으로 온 지 열흘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한 시간쯤 후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에게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하고 형을 따라 사진관을 나왔다. “은수야. 어머니 아프게 하지 마라. 어머니는 우리가 아니어도 이미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야.” 아버지 이야긴 줄로만 알았는데, 그날 밤 불을 끄고 누운 방에서 형은 자신과 그 사이에 태어나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또 한사람의 형제에 대해서 얘기했다. “너하고 나하고 다섯 살 차이야. 그러면 보통 그 사이에 누군가 하나 더 있어야 하는 게 맞겠지. 내가 일곱 살 때고, 너는 막 태어난 다음 한 살 더 먹어 두 살이고, 이름이 해수였던 그 아이는 다섯 살이었어.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내 기억 속에 그 아이는 혼자 앉아 있을 때보다 어머니가 안고 있을 때가 더 많을 정도로 몸도 약하고 얼굴도 하얗고 그랬어. 그런데도 참 잘 웃었어. 그런데 기침을 참 심하게 하며 앓다가 어느 날 밤, 그 아이가 죽었어. 나는 이제까지 어머니가 우는 것을 그날 밤에 딱 한번 봤어. 지금도 내 마음 안에 그날 밤처럼 슬픈 밤이 없고. 우리가 아프게 해야 할 거 그 아이가 다 아프게 하고 간 거야.” 그런 형제의 존재를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거기에 대해서는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한 집안의 금기적 단어였던 것이고, 그 금기적 단어로 형은 어린 날 영덕 장판에까지 소문이 날만큼 일찍 철이 들었을 것이다. 황오동에 있던 옛 사진관 자리로 왔을 때 서라벌사장이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기에 새로 지은 건물에 꽤 규모 큰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사진관만 없어진 게 아니라 사진관이 어디 갔느냐고 물을 데조차 없어진 것이라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그는 불국사 앞 숙박단지에서 잠을 잤다. 아직도 불국사 경내엔 예전에 자신이 처음 경주로 왔을 때처럼 그곳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들 몇이 예전에 먼저 찍은 사진들을 패널처럼 펼쳐놓고 사람들을 불렀다. 거기 숙박지에 자동차를 두고 석굴암까지 걸어올라간 것은 다음날 오후의 일이었다. 그냥 무더운 여름 한낮, 삶의 반칙처럼 먼저 자기 자리를 두고 떠난 사람을 생각하며, 혹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냥 그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렇게 땀을 흘린 것만큼이라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는 귀가 멍멍해지도록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 가량 토함산 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매미들은 마치 소리로 사람의 생각을 파먹는 나찰의 정령들 같았다. 그러다 그 매미소리의 방해 속에서도 옛일의 고리 하나를 잡듯 그는 법화경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내용의 경전이며 또 어느 정도 두께의 경전인지, 그 안에는 또 몇 글자나 들어 있는지, 이번에야말로 서울에 돌아가면 그것부터 꼭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전에도 길 위에서 몇 번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막상 집에 가면 또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아내를 생각하면서 길을 걸으면 늘 그렇게 예전의 어떤 일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의 머리 속에 떠다녔다. 아내가 죽기 얼마 전 내소사에 갔을 때였다. 절 입구 안내판에서 그 절에 보관되어 내려오고 있는 법화경절본사본이 그 절의 대웅보전과 또 경내에 있는 고려동종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안내 글을 읽고 아내가 볍화경,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그게 그 얘기였구나. 전에 학교 다닐 때 누가 그거 얘기해주었는데.” “무슨 얘기?” “설명 들은 대로 말하면 절본이라는 건 길이가 긴 문서를 펼쳐보기도 편하고 보관하기도 편하게 병풍처럼 이쪽저쪽으로 접은 걸 말하거든. 그러니까 법화경을 길게 베껴쓴 걸 차곡차곡 접은 것 말이야.” “그게 뭐?” “조선시대 태종 때 이씨 성을 가진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죽자 부인이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일자일배했다는 거야. 글자 한 자 쓰고 절 한 번 하고, 또 글자 한 자 쓰고 절 한번 하고, 그렇게 법화경 일곱 권을 다 쓰고 나자 죽은 남편이 나타나 부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대.” 거기까지 얘기하곤 아내가 입을 다물어 그게 전부야? 하고 그가 물었고, 아내도 그런 얘기치고는 끝이 좀 그렇지? 하는 얼굴로 응,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래. 다시 살아난 것도 아니고.” “다시 살아나는 건 천녀유혼 같은 전설 속의 얘기들이고, 이건 그 절본사본 뒤에 적혀 있는 얘기거든. 이걸 일자일배로 다 사경하고 나니까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하고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그냥 머리 한번 어루만지는 걸로 끝나면 허무하잖아.” “그러니까 이 다음에라도 당신, 나 두고 죽지 마. 죽고 나면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다 그렇게 허무해지는 거니까, 우리는.” 아내도 그때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선 지나가는 바람의 그림자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돌았다. 비 오듯 흐르는 땀 속에 그는 어쩌면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해준 사람도 바로 그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언제나 아내에 대한 생각의 끝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세상 바깥의 또 한 축으로 연결되었다. 그러고 나면 저절로 자신이 싫어지고, 가슴 속에 깃듯 나쁜 기운처럼 깊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몸속의 그런 나쁜 기운과 생각들을 떨쳐버리듯 석굴암의 본존불을 유리문 바깥에서 열두 번의 절로 친견했다. 그리고 오던 길을 돌아나오다가 요사채 옆 기와불사 접수처에서 두 장의 기와 뒤에 각기 한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먼저 적은 것은 형과 그 사이에 태어나 다섯 살 때 저 세상으로 갔다는, 그로서는 그런 형이 있었다는 것만 알지 얼굴도 모르는 또 다른 형의 이름이었고, 뒤에 적은 것은 아내의 이름이었다. 아내의 이름을 적은 건 삼년이나 지난 다음 뒤늦은 천도의 뜻을 포함해서였지만, 얼굴도 모르는 형의 이름을 적은 것은 예전에 경주에서 영덕으로 오던 날 밤과는 다르게 이제 그 형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형은 딱 두 번, 자신과 그 사이에 태어나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또 한 사람의 형제에 대해서 말했다. 한번은 경주에서 형에게 끌려 함께 영덕으로 돌아오던 날 밤이었고, 또 한번은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여 뿌리고 돌아온 날 밤이었다. 그날 형은 술잔을 사이에 놓고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너는 두 살이었으니 당연히 기억이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죽음 앞에서도 그 아이를 먼저 생각해. 아까 계수씨를 화장할 때에도, 그리고 강가에서 네가 계수씨를 떠나보낼 때에도 나는 내내 그 아이를 생각했어. 그 아이가 떠난 건 어느 봄날 밤이었는데, 바람도 그렇게 많이 불지 않았는데 다음날 마당가 우물 위에 살구꽃이 가득 떨어져 있더라. 그런 봄날 새벽에, 동네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가 그 아이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갔어. 나는 방에서 눈을 감은 채, 문밖에서 할아버지가 마루로 나와 이렇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어. 해수야. 잘 가 있어라. 할아비가 널 보러 곧 가마. 어머니는 할머니가 마루로 나가지 못하게 방안에 꼭 붙잡고 있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웅웅 울고 있었고.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도 살구꽃 떨어지는 것 말고는 방안과 마루와 마당의 정경이 다 보이는 것 같았어.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니? 데려다주고 올게요. 어둠 속에 그렇게 말했어.” “데려다주고......” “그래. 동네 뒷산 어딘가에 아버지가 그 아이를 묻었을 거야. 아버지는 새벽에 나갔다가 아침이 되어 빈 지게에 삽과 괭이만 얹어서 돌아왔어. 나는 이후에 아버지에게 한번도 해수를 어디에 묻었느냐고 묻지 못했어. 그건 묻은 게 아니라 데려다 준 거니까 함부러 물어서는 안 되는 말 같았어. 물어도 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 “어릴 때 들은 말이라는 게 참 그렇게 무서워.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 아이를 아버지가 어디에 데려다줬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 아닌 줄 뻔히 알지만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 오래도록 들어오지 않으면 해수를 데리러 갔나, 그렇게 생각할 때도 많았고. 어릴 때 어머니가 나한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어. 느 아버지는 어디 가서 이렇게 오지 않나. 그래서 내가 무심코 이렇게 대답했어. 해수 데리러요. 그런데, 그 다음엔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지를 안 찾으시는 거야. 그런 어머니도 몇 해 전에 해수 곁으로 가시고, 이제 해수를 아는 사람은 너하고 나밖에 없어.” “나도 잘 몰라요. 형이 말하니까 알지.” “그래도 우리는 서로 영혼으로 아는 거야. 아까 강가에서도 나는 해수를 봤어.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경험한 죽음이 해수여서인지, 나는 나와 가까운 사람 누가 죽었다고 그러면 어떤 그림처럼 떠오르는 풍경이 있어. 계절에 관계없이 우리 동네 뒷산의 어느 풀밭 같은 데를 해수가 꽃바구니 가득 살구꽃을 따들고 한 주먹씩 뿌리며 제일 앞에서 걸어가. 그러면 꽃이 날리는 그 길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걸어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어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또 그 뒤를 따라 걸어가고, 금방 죽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제일 뒤에 해수가 뿌리는 꽃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여. 아까 강가에서 계수씨 모습도 그렇게 보았어. 그래서 해수에게 그랬다. 해수야. 네 동생 은수 처다. 가야 할 자리까지 네가 잘 데려가 줘. 어릴 때 해수를 데려다주며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한 말을 내가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다음 해수에게 한 거야.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라. 해수가 계수씨를 잘 데리고 갔을 테니까.” “고마워요. 형이 그 사람 그렇게 가는 모습까지 봐 줘서. 그런데 나는 그제부터 내내 그 사람이 죽어서도 다른 사람 뒤를 따라 가는 생각만 했어요.” “아니, 해수 뒤를 따라갔어. 그러니 이제 잊어, 그건. 그러라고 지금 내가 너에게 얘기하는 거야.” 그러나 참 잊어지지 않는 일이 그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가는 길 도처에 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길의 도처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 도처에 그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지난 삼년 동안 알게 모르게 그의 신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해야지만 일이 되는 영상제작 회사에서 나와 혼자 다니고 혼자 일을 하는 개인 작업실을 연 것도 아내의 죽음이 남긴 뒷자리일 것이다. 아이도 아내의 장례 후 바로 형과 형수가 데려갔다. 그냥 신상변화 정도가 아니라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기저가 다 바뀐 것이었다. 아이의 일이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도 왠지 그렇게 송두리째 바뀌는 무엇이 있어야만 앞으로의 시간들이 견뎌질 것 같았다. 거북이를 만난 것은 일주문 아래 석굴암 주차장에서였다. 차를 가지고 석굴암으로 올라간 것도 아닌데 내려오는 길에 그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한여름 땡볕이 내리쬐는 주차장 한켠에서 어떤 사내가 봉고차 뒤에 몸을 가리고 박제 거북이를 팔고 있었다. 전체 가져온 것은 일고여덟 마리쯤 되는 것 같은데 그 중 두 마리만 포장을 벗겨 자동차 바깥에 선을 보이고, 나머지는 누런 쌀포대 같은 것에 한 마리씩 넣어 봉고차 안쪽에 쌓아두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힐끔힐끔 거북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냥 지나갔다. 사내는 줄 쇠자로 거북의 크기를 확인시키듯 등판을 가로 세로로 재 보였다. 등판의 가로 길이가 45센티미터였고, 바짝 쳐든 모습으로 고정시킨 머리 끝부분에서 꼬리를 감싸고 있는 등판 끝부분까지의 길이가 60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나마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 거북은 어디에서 잡은 것이며, 값은 또 얼마인지, 그리고 이 정도 자랐으면 몇 살 쯤 된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북을 파는 사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의 가격뿐인 듯했다. 사내는 인질의 몸값을 흥정하듯 사람들에게 거북을 데려가려면 80만원을 달라고 했다. 누군가 거북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그것이 녹색바다거북 가운데에서도 가장 흔한 갈색 종류로 아마도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잡아 박제처리를 한 다음 몰래 국내로 들어온 물건 같다고 말했다. “당신 거북에 대해 잘 아오?” “조금은 알지요. 지금은 한창 자라던 중간에 잡힌 거고, 다 자라면 몸길이가 1미터 정도 됩니다. 알은 한번에 100개에서 200개 정도 낳고, 헤엄을 아주 잘 쳐서 한번 이동할 때 1천 킬로미터씩 세계 곳곳의 바다를 돌아다녀요. 또 바다거북으로서는 유일하게 육지거북처럼 일광욕도 하는 그런 거북이죠.” 거북사내가 시비조로 물었고, 잘 아는 사내가 시비를 피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들은 다음에도 참으로 엉뚱하게 자동차 바깥에서 햇볕을 받으며 등과 머리를 반짝이고 있는 그 거북들이 잠시 전 자기가 걸어 올라왔던 길을 힘들게 엉금엉금 기어 그곳 주차장까지 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것의 유통이 불법이라는 걸, 그래서 거북을 파는 사내도 자동차 뒤에 몸을 가리듯 떳떳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걸 팔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는 그 거북을 자신의 친구처럼 서울로 데려가 작업실에 놓아두고 싶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며 저쪽에서 거북이를 파는 것을 볼 때부터 그는 땡볕 아래 놓인 그 거북이가 왠지 자신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는 거북을 파는 사내에게 이따가 저녁 때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꼭 현금만 아니라 카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가 카드를 내밀자 사내는 카드 위에 세금계산서를 얹고 라이터로 쓱쓱 문지른 다음 그에게 사인을 하라고 했다. 세금계산서는 경주의 어느 관광기념품점의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거북이를 담은 포대를 등에 둘러메고 다시 폭양 속에 땀을 뻘뻘 흘리며 토함산의 순환도로를 따라 걸어내려왔다. 그러면서 혼잣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나를 메고 간다. 그러자 정말 자신이 거북이를 메고 가고, 또 거북이가 자신을 메고 가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형도 나중에 작업실에 와서 거북이를 보고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그래, 좋은 친구를 데려다 놓았네, 이런 친구가 옆에 있으면 한결 낫지, 라고 말했다. 그는 형에게 그 친구는 바다 속에서는 우아하게 수영을 하며, 바다를 나와서는 한여름 땡볕의 주차장에서도 일광욕을 하고 또 소금기 가득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길 위에서도 일광욕을 하는 유일한 종류의 바다거북이라고 말했다. 6년이면 꽤 긴 시간을 함께 지켜보며 걸어온 셈이었다. 어떤 뜻의 몸짓이었는지 그 앞에서 한 번 크게 몸을 움직인 적도 있었다. 아마 그때 거북이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는 여자에게 그 거북이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 나아가고 싶어 하는지를 말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때 그 거북이는 푸른 모래를 헤치고 어디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일이어도 시간이 흐르면 그런 것도 쉬이 잊어버리고 만다. 아니, 쉬이 잊어지지 않는 일이 있듯 쉬이 잊어지는 일도 있다. 다시 거북이가 몸을 움직이는 것 역시 그렇다. 어느 날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는 다른 무엇을 하다가 자신이 거북의 몸을 건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계의 좌우 균형을 잡아주듯 거북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보다 더 많이 몸이 돌아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북이가 다시 푸른 모래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북이가 다시 자신에게 어떤 신호를 보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경주에 가본 지도 참 오래되었다. 서라벌사장 주인도 이젠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만날 수 있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는 그런 경주에 가서 아내에 대한 생각의 끝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세상 바깥의 또 한축으로만 연결되지 않는다면, 아니 그런다 하더라도 그게 이제는 예전처럼 못 견디게 마음에 부대끼지만 않는다면 석굴암을 오르며 법화경을 다시 떠올리는 일 역시 그렇게 못 견딜 일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시 갔을 땐 그곳 언덕길에 푸른 모래가 곱게 부서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그의 인생 속에 푸른 모래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 있는 법이다. 그는 거북과 함께 그 시간을 더 지켜보기로 한다. 엊그제 아내의 9주기가 지났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