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글
이강백은 반복 구조를 작품 구성의 주요 극작 원리로서 활용하는 작가이다. 이강백은 등단작인 <다섯>(1971) 이래 최근의 <느낌, 극락같은>(1998)에 이르기까지, 반복을 통해 작품을 구성하고, 반복에 의해 내용을 구축한다. 그에게 반복은 형식이자 내용인 셈이다.
기왕의 연구에서 이런 이강백 희곡의 특성은 알레고리나 은유 같은 개념어들 틈에서만 언뜻언뜻 지적되어 왔다. 알레고리는 표면적으로는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상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구조를 가진 작품을 말한다. 그리고 이 알레고리는 넓은 의미의 은유에 포괄된다. 그런데 서사 텍스트가 하나의 전체로서 알레고리 혹은 은유가 되기 위해서는, 은유의 연쇄라는 독특한 반복 구조를 띄게 된다. 반복되는 은유들은 내용의 여러 측면을 하나의 상에 집중시키고 그 가운데 '희곡 줄거리 전체의 소우주'를 의미하는 기능을 갖는다. 즉 은유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반복이 하나의 형식으로 관여할 수 있고, 우리는 은유라는 개념을 통해 이강백의 희곡에 나타나는 반복 현상을 간접적으로 의식해온 것이다.
문학 작품에서의 반복 현상은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학적 형식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시 분석에서 이루어진 병렬 현상에 대한 연구이다. 시 텍스트의 음운론적, 통사론적, 의미론적 등가 관계들은 텍스트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구조망, 즉 병렬 현상을 형성한다. 이를 더 밀고 나아가면, 사물의 유사성에서 효과를 찾는 은유·직유·우화, 그리고 비유사성에서 찾는 대조법·대비법 등은 현저한 또는 당돌한 종류의 병행법에 속한다. 서사 텍스트에서라면, 계속 반복되는 모티프, 주제, 줄거리 등이 질서범례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병렬 현상은 본질적으로 반복의 한 방법인 바, 반복 구조의 규명은 작품의 미학적 특성에 대한 발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현상은 흔히 작품 구조의 균형과 통합성을 보장하는 장치로서, 의미화를 강조하는 장치로서, 한 작품을 구축하고 중심화하는 원칙으로서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반복은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형식일 뿐 아니라, 동시에 문학의 철학적 내용 자체이기도 하다. 최근 데리다와 들뢰즈같은 철학자는 반복을 동일성의 재생으로 보는 해석에 대해 비판하면서 반복의 역동성 및 차이에 기반한 반복을 강조하고 있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반복이 오리지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오리지널 역시 반복에 의해 존재한다. 오리지널과 반복의 상호의존성은, 현전으로서의 말이 글이라는 기호를 통해서만 자기 동일성을 생산해내는 것과 같다. 반복은,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오리지널을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피를 드러낸다. 반복에 의해 어떤 것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었던 차이가 나타난다. 따라서 오리지널과 반복은 정의와 재정의라는 끊없는 과정의 순간들로서 이해된다. 들뢰즈는 반복의 개념을 플라톤의 개념과 니체의 개념으로 대비한다. 플라톤적 방법이 보충이나 왜곡 없이 오리지널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재현의 세계라면, 니체적 반복은 오리지널에 어떤 것을 추가하고 차이를 드러내는 시뮬라큐라의 세계이다. 플라톤적 반복은 반복 효과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확고한 원형 모델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모사의 타당성은 모사된 것과의 일치 여부에 의해 수립된다. 반면 니체적 반복은 이 세상의 '차이'에 기초를 둔다. 이 세상의 모든 요소들은 근본적으로 상이하며 그들의 유사성은 오직 '근본적인 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길 뿐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모사의 세계가 아니라 像의 세계이고 반복이되 아이러니의 반전이 있는 그리고 차이점을 수반한 반복의 세계이다.
차이에 의한 접속으로서의 반복을 탐구하는 철학적 지향은, 사실 동양철학의 전통과 잇닿아 있다. 노자와 장자는 {도덕경}과 {장자}에서 각각, 有/無, 生/死, 是/非의 차이를 긍정하고 그 차이를 품은 채 반복하는 만유의 질서를 논해왔고, 그 질서를 道라 명명했다. 노장이 말한 有와 無는 서양철학사에서 말하는 현상과 본체의 관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동양에서 말하는 無나 空은 그것이 하나의 본체나 실체가 아니라, 有의 작용을 통하여 드러나는 그 무엇이다. 즉 有와 無 어디에도 본체는 없고, 다만 변화하고 반복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실체와 현상은 똑 같은 하나로서의 존재의 표리와 같은 관계를 갖고 있을 뿐이다. 즉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두 개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의 존재의 두 가지 차원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道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모든 사물 사건 현상의 변화도 오직 하나로서의 존재의 여러 차원 혹은 측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불교 철학의 十二緣起說이 有와 無의 두 끝에 얽메이지 않은 채 윤회하는 우주의 원리를 논한 것도 또한 이와 상통한다.
이렇게 반복이 형식이자 철학적 개념이라 할 때, 문학 작품의 반복 현상을 밝혀낸다는 것은 그 문학 작품의 미학적 형식이자 미학적 의미 및 철학을 동시에 읽어내는 유효한 접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서사문학 텍스트에서 형식으로서의 반복 현상은, 언어적 요소의 반복(단어들, 습관적인 대사들 같은), 제스츄어나 외형의 반복, 은유의 효과를 내는 미묘한 반복, 사건이나 장면의 반복 등 다양한 층위에서 나타날 수 있다.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 사이에 모티브나 주제, 등장인물이나 사건들이 유사하게 되풀이될 수 있고, 이 경우에는 작품들 사이의 주제상·형식상의 상호 반향이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반복 현상은 신화적·우화적 모티프 및 역사상의 사건이나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현상은 각 작품 속에서 어떻게 쓰이면서 의미구조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인생이나 현상에 대한 작품의 철학적 입장을 드러내게 된다.
본고에서 논의 대상으로 삼은 이강백 희곡에는 실로 다양한 반복 현상이 발견된다. 다른 작품에 같은 이름의 극중 인물이 설정되기도 하고, 한 작품 안에서 같은 표현들의 반복이 축적되면서 은유와 알레고리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또한 한 작품의 구조 자체가 반복에 의해 구축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작품은 다른 작품의 모티프를 반복해서 활용한다. 이강백에게 작품을 쓴다는 것은, 반복의 구조 및 반복의 철학에 얽힌 행위이며 실천이다.
본고는 작품의 구조 층위에서 나타나는 반복 현상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이강백 희곡에서 반복 구조가 어떻게 활용되고 다양하게 변화하는지, 반복에 의한 균형 및 대치가 어떠한 극적 효과를 이루어내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다른 양상은 간접적으로만 언급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 구조의 발견과 그 반복 구조의 극적 의미에 대한 규명은, 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형상화 방식에 대한 한 발견이 될 것이며, 작품의 철학적·내용적 특성에 대한 규명으로 나아가리라 기대한다.
Ⅱ. 사건의 반복
1. 통제의 기호와 반복의 폭력성 및 주술성
<다섯>(1971)에는 가, 나, 다, 라, 마라는 다섯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신탐라국으로 가는 배에 밀항, 배 밑의 창고실에서 자신들의 다가올 미래에 막연한 기대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동기는 '직경 2m 크기의 경보종'의 울림과 '직경 2m 크기의 적색 신호등'의 번쩍임이다. 경보종과 신호등은 이들이 밀항자임을 환기시키는 감시의 기호이며, 이들의 목숨이 외부의 세력(선장 및 선원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권력의 기호이다. 판옵티콘panoptocon처럼 감시의 기호는, 감시인이 실제로 있건 없건, 감시를 수행한다. 이 기호들은 그 위협적인 크기와 밝기로서 말항자들의 심리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밀항자들은 경보종이 울리고 신호등이 번쩍일 때마다 제 몫의 상자와 양철통으로 뛰어들어가 몸을 숨긴다.
극중 8차례 이상 경보종과 신호등이 울리고 번쩍임에 따라, 밀항자들 사이에 폭력성이 드러난다. 경보종과 신호등에 예민해진 이들은 외부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고, '냄새'나는 사람이 빨리 잡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자 '마'를 의심하면서 냄새를 맡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라'의 몸에서 나던 '냄새'가 정어리 냄새라는 것을 알게 되곤 실망한다. 또한 그들은 밀항자로서의 운명공동체성을 느끼기보다 먼저 안전하게 숨으려는 이기적인 태도를 점점 더 들어내게 되어, '다'는 넘어진 '가'를 도와주지 않고, '가'는 '다'의 통을 발로 차 쓰러뜨린다.
억압과 감시의 반복은, 극중인물로 하여금 반복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게 하고, 그 반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한다. "상자 속에 들어가 저 경보종 소릴 듣고 있노라면 강철로 만들어진 벌레들이 내 뼈를 갉아먹는 기분이 들어."({전집 1}, 24면)라는 '가'의 자각이 대표적이다. 이에 '나'는 경보종과 신호등을 떼어내버리면 어떨까 생각하고, '마'와 사랑을 하게 된 '라'는 선장에게 태양을 주겠다고 용기를 낸다. 두려움에 떨며 항상 제자리로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 반항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과 감시의 반복은 그 반복의 힘으로 인물들의 반항을 통제한다. '마'와의 행복한 생활을 꿈꾸는 '라'에게, '나'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가장 행복한 순간 "푸른 하늘 위에 떠 있는 한 마리의 하얀 비둘기 같은 폭격기를 볼 것"({전집 1}, 27면)이라고 조소한다. 용기로 선장에게 맞서겠다고 호언하던 '라'도 신호등과 경보종이 깜박이자, 소금에 절인 정어리가 들어 있는 자기의 예전 통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반복은 지속적인 반복에 대한 암시가 되고, 그 암시는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사람들을 순치시키는 폭력이 되는 것이다.
<알>(1972)과 <파수꾼>(1973)은 통제 기호의 반복과 그 기호에 반응하는 인물들의 행동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섯>과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다. <알>에서는 공룡이, <파수꾼>에서는 이리가, 한 집단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적들은 <다섯>의 경보종과 신호등처럼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것으로 설정됨으로써, 백성들에게는 그 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권력추구자에게는 그 두려움을 조정하는 위력을 부여한다. <다섯>의 경보종과 신호등이 소리나 빛이었던 것처럼, 공룡과 이리는 구체적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공룡과 이리는 울부짖음이나 굉음, 파수꾼의 북소리 등에 의해서만 그 형상을 대리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실체 없는 기표들이다.
<알>에서 박물관장은 박물관의 알 속에 훌륭한 임금님이 들었다고 한 후, 그 알 속의 임금님이 살기 위해서는 현재의 왕이 죽어야 한다면서, 왕의 자살을 유도한다. 이어 그는 알 속에 공룡이 들어있다고 자신의 말을 뒤집은 후, 위대한 임금님이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알을 택하고, 공룡이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을 택하라고 한다. 박물관장은 시민들과 왕을 상대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임금님이 있는지, 공룡이 있는지) 대신 박물관장을 왕으로 선택하자, 박물관장은 그 알을 제거한 후 그 알에는 임금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물관장은 '알 속에 임금님이 있었다, 공룡이 있었다'를 반복하면서,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린다. 이 반복은 '주문'이 되어, 시민들을 길들이는 수단이 된다. <파수꾼>에서도 파수꾼이 외치는 "이리떼다"라는 경고와 북소리 역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면서, 조건반사를 하는 동물로 만들어간다. 사람들은 "이리떼다"라는 소리에 질겁한 나머지, 지붕 위에서 떨어져 죽고, 우물 속에 빠져 죽고, 집을 불태운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 속에서, 이리떼에 대항한다는 불가침의 논리를 내면화시켜간다.
그런데 <다섯>과 비교할 때 <알>과 <파수꾼>이 지닌 차이는, 이 두 작품이 그 기표의 정체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이다. <알>과 <파수꾼>은, <다섯>에서처럼 위협과 감시의 이 기표가 지닌 체제 유지적 힘을 되풀이 강조하는 한편, 이 기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통찰한다. <알>의 극적 상황은, 지식의 독점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박물관장을 왕으로 선택할 때 유일하게 이에 반대했던 '시민 라'가 박물관장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박물관장을 죽이면 알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장만이 알의 정체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시민들의 지혜와 권리란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진정한 불안은 공룡이 아니라, 지식으로부터의 소외이다. <파수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 파수꾼은, 망루 위에서 '이리떼다'를 외치는 파수꾼과 망루 아래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는 파수꾼, 두 부류로 나뉜다. 이리떼를 발견할 권리는, 망루 위의 파수꾼에게 독점되어 있다. 해설자의 대사에 따르면, 이 망루 위의 파수꾼은 부동자세를 한 시커먼 그림자로만 무대에 보여지는 전설적 인물로, 촌장의 하수인이다. 이 망루 위의 파수꾼의 실체는, 전설이 되었으므로, 의심될 수 없다. 의심될 수 없는 것이 지식을 독점하고 있고, 따라서 백성은 통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박물관장과 촌장으로 대표되는 권력자들은 지식의 점유를 통해 불안을 조장하고 그것을 권력의 발판으로 삼는 반면, 시민들은 자신들이 외부의 적들에 맞서서, '멋진 모자를 쓴 임금님'을 수호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알>의 박물관장과 <파수꾼>의 망루 위 파수꾼이 독점하고 있는 '지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알은 석회로 만든 모형물일 뿐이며, 이리떼는 없다. 그러나 지식을 탐하는 자는, 이 사회에서 제거될 수밖에 없다. <알>의 '시민 라'는 알의 정체를 알고자 했기 때문에 죽었고, <파수꾼>의 운반인과 '다' 역시 이리떼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처벌되거나 격리된다. 진실을 얘기해서 사람들을 헛된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다'에게, 촌장은 묻는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냐?"({전집 1}, 101면)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지식의 독점과 감옥과 처벌 제도가 따른다. <알>과 <파수꾼>은 바로 이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섯>, <알>, <파수꾼>은 노회한 권력자와 우매한 군중, 회유당하는 자유인을 통해, 권력의 기호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준다. 극중인물은 반복되는 구조에 갖힌 채, 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로 투쟁하면서, 습관화된 방황을 희망없이 되풀이한다. 상황의 반복은, 극중인물이 작디작은 우물에서 움직일 뿐, 그 우물에서 벗어날 희망의 길이 이미 막혀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황의 반복이 지닌 이러한 의미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추출해낼 수 있다. <호모세파라투스>(1984)의 2장, 이쪽 나라에서 매년 진행되는 기념식 장면은 상황의 반복이 지닌 주술성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신문 발행인 시민 여러분, 매년 이때가 돌아오면 우리는 이 묘지에 찾아와 화환을 바칩니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그날 저쪽의 폭력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삼가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가족을 가리키며) 그날의 싸움에서 다섯 형제를 바친 가족입니다. (중략)
어머니 (아버지를 앞으로 민다.)
아버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러니까……지난해에도, 또 저지난해에도 똑같은 말씀을 드렸듯이……
어머니 여보, 원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세요.
…(중략)…
신문 발행인 (중략) 그럼 이것으로 금년도의 기념식을 마치면서, 우리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기 위해 시가행진을 합시다.(주먹 쥔 손을 치켜 들고 구호를 외친다.) 원수를 잊지 말라!
유지들·가족들 원수를 잊지 말라!
신문 발행인 원수를 무찔러라!
유지들·가족들 원수를 무찔러라!
신문 발행인 (선두에 서서 퇴장한다.) 원수를 잊지 말라!
유지들·가족들 원수를 잊지 말라! ({전집 3}, 143면)
이쪽 나라 사람들은 해마다 저쪽 나라 사람들에 의해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면서, 잊지 말고 무찔러야 할 '원수'를 만들어낸다. 이 원수 만들기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는, 의심과 변화를 차단하는, 극중 관광객의 역설적 말처럼 '멋진' 세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반복은 정치 권력에서 뿐 아니라, 세상살이의 경험 일반에 나타나는 하나의 질서이다. <올훼의 죽음>(1975)에서 악수하는 행위, <북어 대가리>(1993)의 창고지기인 기임과 자앙이 상자를 옮겨 놓고 옮겨 내가는 행위, <통 뛰어넘기>(1993)에서 통 뛰어넘는 행위의 반복은, 이러한 반복 행위가 불러 일으키는 불안과 함께, 억압적 생의 질서를 표상한다.
2. 몸의 통제와 반복의 해체성
<물거품>(1991)에서 나가 그와 그녀 사이를 세 차례 오고간다면, <영월행 일기>(1995)에서는 한명회의 여종과 신숙주의 남종이 세조와 단종 사이를 세 차례 오간다. <물거품>에서 그가 그녀의 남편으로서 그녀에 대한 물리적 권력을 갖고 있듯이, <영월행 일기>에서의 세조 역시 단종을 유배시키거나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녀를, 세조는 단종을 탐색하는가. 나는 그리고 여종과 남종은 세 차례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는가.
<물거품>의 나는 세 차례 연못으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이러한 순방은 나에게 변호사 수임료를 내는 그의 강압적인 부탁 때문이다. 연못에 있는 그녀를 데려오라는 그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데리러 낯선 곳을 향한다. 첫 번째 방문에서, 그는 연못가에서 젖을 짜내 그릇에 담고 있는 그녀를 본다. 나는 그녀에게 법적인 증거 없는 그의 말(그가 그녀의 전남편을 죽였다는)을 믿을 수 없으며,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아 있는 남편의 아내 자리로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그녀는 아내와 어머니라는 일상사로부터 벗어나는 데 따른 고통을 겪으며 연못가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나는 '증거'의 세계라는 보이는 세계로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두 번째 방문은 그가, 자기를 세상에서 '보이도록' 하고 그녀를 연못에서 끌어내기 위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스스로를 고발한 이후에 이뤄진다. 나는 살아 있는 남편에 유리한 증언을 해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한다. 사실이나 정의에 따른 공정한 판단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유리한' 증언이 옳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지금의 제 남편과 똑같으시군요! 저를 설득시키려는 그 논리와 태도, 어쩌면 그 말투까지 제 남편 그대로예요!"({전집 4}, 164면)라고 지적하며, 보이되 보이지 않는 세계인 연못에 머문다. 이 방문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어 나는 그의 부탁이나 명령과 무관하게, 순전한 나의 의지에 따라, 연못과 그녀를 찾아간다. 이 세 번째 방문에서 나는 그녀의 젖을 받아 먹으며, 밤의 연못을 발견해간다.
이 작품에서 그는 지식, 정치적·경제적 권력, 명예, 살아있음 등을 '보이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는 이 보이는 것들을 유일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폄하하고 배제한다. 지식은 세상살이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힘과 권력에 수단과 방법을 제공한다. 이러한 지식은 정치적·경제적 지배의 욕심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이들은 대상을 점유하고 사유화하면서, 기준의 보편화를 꾀한다. 그러나 기준의 제시와 그 기준의 보편화를 꾀하는 사람에게, 기준을 벗어난 것들 및 기준과 차이지는 것들에 대한 긍정은 생겨날 수 없다. 보이는 것의 강조는 곧 배제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연못을 찾아 그로부터 벗어나 버렸을 때조차, 그녀의 거처를 알기에 그녀를 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를 보이는 것의 논리에 가두기 위해, 나를 그녀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를 '보이기' 위해 그녀를 찾아나선 나는, 그녀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해간다. 나는 세 번에 걸쳐 같은 길을 가 같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 행동의 반복 속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혹은 깊이의 그 무엇에 다다른다. 나는 확고하고 권위적인 그에게 항상 회의를 표현해왔고, 그러한 표현을 통해 자신을 그와 구별시켜왔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설득하고 회유하는 말들은 그와 다를 바 없다. 그와 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 차이 없음에 직면해, 나는 차이를 발견하려는 자각을 갖게 되고, 정치가인 그가 '증거' '보이는 것' '유익' 등을 통해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세계 언어를 찾게 된다. 나는 그녀 및 연못과의 만남을 거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긍정하게 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차이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나는 그와 그녀라는 3인칭의 타자, 거울인 그와 연못인 그녀를 거치면서, 그와 그녀를 합친 자아로서의 '나'가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란 보이는 것·있는 것 너머의, 삶의 저 깊이에 있는 세계이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거울과 연못의 비유적 힘은, 거울이 보이는 세계만을 비추는 반면, 연못은 보이는 세계를 비추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깊이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온다. 연못은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깃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전체를 표상한다. 내부와 외부의 아우름을 표상하는 연못은, 노자가 道의 은유로서 제시한 연못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자에 따르면, 이 연못으로서의 道는 만물의 탄생과 소멸, 결연을 가능케 해주는 선험적 기반으로서, 분쟁과 싸움을 누르고 풀며, 빛과 더불어 화답하고 동시에 먼지와 동거한다. 이 연못에서는 자기 것에 대한 자의식, 소유에 대한 집착, 자기 현존에 대한 격렬한 선언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고요한 물처럼 湛然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그녀의 외형만이 존재한다면서 그 외형의 통제를 통해 그녀를 점유하려 하지만, 그녀는 외형이 통제되고 있을 때조차 그에게 점유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와 다른 세계 속에 노닐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못처럼 눈에 보이는 외형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를 지닌 존재이다. 有에 의해 無가 배제되지 않고, 無의 기준에서 有가 무시되지도 않는다. 그녀에게 내부가 없으면 외부도 없고, 외부가 없으면 내부도 없다. 그녀는 보이는 것만이 실재한다는 그에게 구토를 함으로써 내부를 보여주고, 그의 시야에서 외형마저도 감춰버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다시 연못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아집에서 놓여나 있다. 연못에 떠오르는 물거품은 떠오르면서 부서져 없어진다. 물거품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고, 생성하면서 소멸하는 것이다. 그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을 포유한 채, 존재하면서 사라져간다. 문명과 세상의 논리 저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자연처럼.
따라서 내가 보이는 것 및 세상의 논리를 주장하는 그로부터 벗어나 그녀와 연못에게 다가가는 것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아집과 자의식을 해체함으로써, 보이는 것 속에 깃든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녀의 젖은 보이지 않은 채 깃들어 있으면서 보이는 것에 생명을 주는, 보이되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젖을 받아 먹으며, 보이는 것으로서의 외형 및 몸만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보이지 않는 내부를 포유한 전체로서의 외형 및 몸을 되찾아가는 것이다.
<영월행 일기>에서의 세 차례 방문은 <물거품>의 그것과 같고 다르다. 세 차례의 방문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월행 일기>에서는 <물거품>에서 그 단초를 보인 '몸'에 대한 탐색과 그로부터의 해방이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영월행 일기>에서 '영월행 일기'의 내용을 재현하는 것은 몸 통제 양상을 통한 권력의 생산과 유지를, 몸의 회복을 통한 자유 획득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영월행 일기'에서 여종과 남종은, 단종의 '표정'을 살피고 오라는 세조의 명령을 받고 영월로 떠난다. 동양적 전통에서 볼 때, '나'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 몸 그 자체이다. 정신과 육체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전통에서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살덩어리'만이 드러날 따름이다. 반면 정신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몸을 생각하는 유가 전통에서, 몸은 곧 의식의 드러남이며, 몸-눈빛이건, 낯빛이건 아니면 몸짓이건-을 통해서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이해란 인과적 사유 이전의 직접적이고 감성적인 체험을 가리킨다. 나의 덕, 나의 감정, 나의 의지는 반드시 행위와 몸짓을 통하여 공동체의 상호 주관적 시선에 드러날 때 그 존재가 확인된다. 이때 나의 몸은 공동체 구성원의 독해를 기다리는 기표가 되며, 내면의 덕과 감정은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된다. 그러므로 맹자는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낼 수 없으며,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조가 단종의 '표정'을 살피는 것은 육체 속의 정신, 육체와 정신의 총합으로서의 몸을 살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단종의 표정을 왜 살피는가. 모든 사회에서 사람의 몸은 통제하고 금지하며 조절하는 권력 앞에 노출된다. 감옥뿐만 아니라 군대, 학교, 병원, 공장, 회사 등의 모든 장소에서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일련의 기법을 총동원하는 현상을 보면 이 사실이 명확하게 이해된다. '길들여진 몸'을 만드는 여러 다양한 기법과 전술을 통틀어서 푸코는 '규율'이라고 명명하는데, 규율적 권력이 동원하는 주요 기법이 바로 관찰 및 규범적 판단이다. 개인이 항상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복속을 유지케 하는 확실한 관건이다. 규범적 판단의 보편화는 사회 구성체의 모든 곳을 관류하면서 개체를 끊임없이 비교, 분리, 계층화, 동질화시키는 데 목표를 둔다. 간단히 말해서 규범적 판단의 목표는 대상을 '정상화'하는 데 있다. 권력은 명령과 같은 명시적 언어 행위를 통해서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며, 복종 역시 명시적인 순종의 언어를 통해서만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세조는 단종의 표정을 관찰하고 그 표정을 판단하면서, 단종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몸의 통제는 남종과 여종에게도 반영되어 있다. 이는 여종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여종은 자신이 무서운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으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자신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녀의 몸 속에 주인의 감시, 주인이 만든 규율이 스며 있어, 그녀는 주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감시와 규율을 느낀다. 그녀의 모든 욕망은 예속된, 길들여진, 훈련된, 통제된 것이다. 반면, 남종은 "남들이 우리를 종처럼 도구처럼 대우하는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란 말인가"({희곡선}, 98∼99면)라며, 통제되기를 거부한다. 육체가 겪는 경험의 그 어느 것도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주체와 마음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몸이다. 그가 자유를 말할 때, 그는 물리적인 억압(신분적 예속 같은)뿐 아니라 자신의 타율적 영혼으로부터 해방되는, 몸 전체의 해방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의 통제, 몸에 대한 통제의 반복 속에서, 단종과 남종은 어떻게 자유를 얻는가. 단종은 두려움의 무표정을 짓다가, 통곡의 슬픈 표정을 짓고, 급기야 탈속의 웃음을 웃는다. 단종은 "보아라, 그대여! 내 몸은 비록 왕관 빼앗기고 곤룡포 벗김 당하였으나, 내 마음은 헝겊으로 만든 만조백관들을 바라보며 흡족하도다! 들어라, 봇짐장사여!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를 보낸 자들에게 내 말 전하여라! 내 마음이 진정 왕과 같거늘, 어찌 구차한 왕관을 쓰기 바라고, 구태여 곤룡포를 입기 바라겠느뇨?"({희곡선}, 104쪽)라며, 만면에 가득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그는 이 웃음 때문에 죽는다. 세조는 이 웃음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바, "경들은 들으라! 노산군의 무표정을 견뎠던 내가, 슬픈 표정도 견뎌냈던 내가, 기쁜 표정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도다! 만약 노산군의 기쁜 표정을 그대로 두면 온갖 시정잡배마저 제왕과 다름없다 뽐낼 터인즉, 대체 짐이 무엇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희곡선}, 107면)며,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렇다면 단종을 탈속케 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도록 한 이 웃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해석의 단서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호르헤는 웃음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이 금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웃음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죽음을 쳐부술 수 있는 새로운 파괴적 겨냥'을 동시에 주는 체제전복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세조의 논리는 이러한 호르헤의 논리를 빼닮았다. 호르헤가 신의 절대성과 그 절대성에 대한 두려움을 체제 유지의 근간으로 삼는 중세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면, 세조는 왕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왕권주의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절대 권력과 그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지배/복종의 관계를 유지하는 체제에 있어, 웃음은 위험스러운 반역 행위가 된다. 웃음은 단순한 육체적 현상-횡경막의 떨림, 목젖과 연구개의 발작적인 운동, 안면 근육의 일정한 뒤틀임으로 표현되는-이 아니라, 정신의 표현으로서의 몸의 반응이며, 따라서 이 웃음은 통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했던 것이다.
단종이 권력의 반복되는 통제 속에서 웃음을 가진 것처럼, 남종도 세 번의 영월행을 통해 자유인의 웃음이라는 몸의 표정을 갖게 된다. 첫 번째 영월행에서 여종은 노랑나비냐 흰나비냐, 당나귀가 동쪽으로 가느냐 남쪽으로 가느냐, 다리를 무사히 건너느냐 마느냐 등을 통해 자신의 운을 시험하려 한다. 그러나 남종은 여종 행위가 엉뚱한 기적과 우연을 바라는 행위라고 하면서, 마음이 정해진 대로 상황이 전개된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신분이나 처지에 순종하면서 상황에 따라 맞춰 사는 여종의 태도와 신분의 자유를 구하는 남종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 영월행에서 여종은 한 번 간 길을 단순하고 쉽게, 생기있고 힘차게 간다. 반면 남종은 이 영월행이 계속될지 모른다는 것, 영월행이 단종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권력 놀이이고 자신이 그 권력 놀이의 하수인이 되어 있다는 것, 종노릇에서 풀려나는 것이 요원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하다. 그래서 남종은 졸면서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당나귀를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고함치고, 봇짐이 무겁다며 지체한다. 그런 그는 단종의 표정을 직접 보기 전에, 평창강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면서 단종의 슬픈 표정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통해 단종의 슬픔을 미리 보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영월행에서 남종은 지배 권력의 체제에 짓눌려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여종에게 도망가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체제로부터 이탈하려는 욕망이 체제의 감시망에 의해 붙들리고, 오욕의 심부름길에서 그는 "사람잡는 백정"이라는 욕을 먹는다. 욕과 돌팔매를 맞으며 자책과 비굴함을 털어버린 그는, "머릿 속이 텅 비고" "창자가 쑥 빠"지고 "윗도리 아랫도리 홀랑 벗"어 던진 그는, 당나귀를 타고 위험한 다리를 건너며 기적을 시험한다. 그리고 그 기적처럼 단종의 웃음을 만나고, 스스로도 자유인의 웃음을 짓는다. 그는 이제 통제의 권력과 몸을 욱죄는 가치와 욕망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자유를 외치며 웃는다. 비록 그 웃음 때문에, 단종처럼, 죽게 될지라도.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남종의 이 웃음은, 단종의 그 웃음처럼, 모든 제한적 금지, 모든 고정화와 절대화를 뚫고 터져나온다. 시적 황홀에 근사한 이 웃음의 경지는, 장자가 말한 坐忘의 지경과 유사하다. 脫自的 자기망각인 坐忘은 만물의 차이를 비교하거나 우열을 매기지 않고 차이들의 동거를 긍정한다. 동시에 자아성을 지우기 위해 아는 것도 버리고, 자기의 기억도 망각하고, 자기의 내면성도 상실해간다. 역사를 초탈한 세계,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전대적 자유자재의 그 세계는 전혀 현실 역사에 맞지 않는, 그래서 현실 역사의 엄숙한 결단과 결정 앞에 언제나 버림받아 온 그런 사유의 세계이다. 이른바 老莊之道의 세계이다.
단종이 영월에 유폐된 채 세조의 거듭되는 감시를 받는 것은, 현왕과 폐위된 왕 사이의 권력 대응, 체제 유지와 반역 가능성 사이의 대응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임을, 그리고 그 상황의 불안을 보여준다. 또한 남종에게 영월을 오가는 길은, 권력의 기호와 복종의 기호 사이를 오가는 길이며, 그 대립되는 기호들이 야기시키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이항대립의 닫힌 체계 내에서 단순히 지배받는 대상물이 되기를 거부토록 하며, 이 이항대립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단종과 남종은 이항대립의 세계를 불연 듯 넘어서,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의 웃음을 짖는다. 이 웃음은 몸에 대한 통제를 몸의 작용에 의해 해체한 결과이며, 이항대립이라는 有의 질서에서 벗어나 無用의 자유를 얻은 표정이다. 현실과 권력 관계의 저 너머에서, 저 깊이에서.
Ⅲ. 시작과 끝의 반복
1. 타락한 현실과 반복의 허무주의
<알>, <파수꾼>, <호모세파라투스>, <불지른 남자>(1993)는 작품의 시작과 끝이 비슷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시민 가 시민 여러분, 이 도시 전체가 구석기 시대의 박물관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도시에서 수많은 원시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반쯤 화석이 되었으나 아직도 살아 쉼 쉬고 있으며, 우리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죠.(지문 생략) 여기 원시인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 사람이 부족하네요. 이 도시는 여섯 구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한 명의 대표가 더 나와야 합니다. 아차, 깜박 잊고 있었군. (맨 끝에 가서 부동자세로 선다.) 나 역시 원시인이죠. ({전집 3}, 48면)
(2) 시민 가 나머지 하나가 어디 갔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가리키며) 나? (분장실을 향해) 빠진 원시인을 찾았습니다.
박물관장 (라우드 스피커에서 커다란 음성이 울려나온다.) 아냐, 사실은 알속에 공룡이 들어 있었어. (짧은 사이를 두고 반복) 그게 아니야, 알속엔 위대한 임금이 계셨지. (사이)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알속엔 공룡이 있었다. (사이) 아니야, 위대한 임금이 있었지……
시민 가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분장실로 뒷걸음치며) 원시적 공포에 사로잡힌 나! 나! 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전집 3}, 78∼79면)
<알>은 3막으로 된 작품인데, 그 앞뒤에 위 예처럼 서막과 후막이 딸려 있다. 이 서막과 후막은 '시민 가'가 해설자로서 연극 전체의 윤곽을 소개하는 장면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을 뿐 아니라 '시민 가'의 대사도 일부 유사하다. 단막극인 <파수꾼>은 '이리떼다'를 외치는 소리와 그 소리를 뒤따르는 북소리로 시작되고, 끝난다. <호모세파라투스>는 관광 안내원과 지방 유지들이 역의 플랫폼에서 기차의 도착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마지막 10장 역시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불지른 남자>는 캄캄한 밤, 지붕 밑 다락방 위에 있는 재현과 다락방 아래 있는 재숙이, 다른 등장인물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10장 역시 그런 장면으로 끝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극중인물들이 등장해 만들어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네 작품의 앞뒤에서는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상황이 보여지고 있지만, 시간대는 다르다. 극중 현실이 진행된 시간만큼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그 시간 차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음은,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혹은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 되리라는 것을 구조적으로 시사한다. 특히 이 네 작품의 마지막 장면들이 첫 장면들의 반복이면서 동시에 더욱 악화된 상태로 보여주기 때문에, 비극성은 더욱 심화된다.
해설자로서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던 <알>의 '시민 가'는, 마지막 장에 이르자 '알 속에 공룡이 있었다, 없었다'를 반복하는 박물관장의 음성을 듣고 원시적 공포에 사로잡힌다. 박물관장의 이 주문은, 극중 인물로서의 '시민 가'뿐 아니라 해설자로서의 '시민 가'까지 억압하고 있는 셈이다. 극중 현실에 대한 거리 두기를 하던 해설자마저 억압되는 상황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다는, 아무도 반복되는 주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술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파수꾼>에서는 진실을 알아버린 그래서 허위를 폭로하려 했던 '파수꾼 다'가 마지막 상황에서는 진실을 묻어두는 몸짓으로 북을 두드린다. 진실을 아는 자마저 삼켜버리는 권력 구조의 음침함이 거친 바람소리를 타고 무대를 짓누른다. <호모세파라투스>에서는 이쪽과 저쪽의 반목을 해결하려던 시장이 관광객으로 가장하고 이쪽 나라에 온 박제사의 계략에 말려들고, 마지막 장면에서 박제사는 사람을 박제하는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쪽 나라에 머문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시장과 관광객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쪽 나라의 기차역 플렛폼 주변을 똑같이 보여주지만, 첫 장면과 달리 마지막 장면에는 박제사가 관광객이 아니라 배웅객으로 혹은 환영인으로 자리를 바꿔 있다. 박제사는 어느덧 이쪽 나라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불지른 남자>의 첫 장면은 재현이 감옥살이를 한 후 막 돌아온 시점이고, 마지막 장면은 재현이 양로원의 치매증 환자들한테 맞아 죽은 후이다. 재현이가 감옥살이에서 돌아와 죽기까지는 사흘이 경과했을 뿐이다. 그는 살아서 미군 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죽어서도 '캄캄한 이 세상을 밝힐 수 있도록' 불을 켠다. 그러나 그가 켜놓은 불은 이내 사위어 들고, 주위 사람들의 조심거리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해서는 맞아 죽는다. 죽어서도 켜놓은 불마저, 누나 재숙은 조심스럽게 거부한다. "재현아, 이젠 아무도 네가 불지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서, 어서, 내 말 듣고 떠나! 제발 성냥은 그 자리에 두고 이 세상을 떠나거라!"({전집 5}, 316면)
이렇듯 네 작품은 비극적 상황의 변함없는 반복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정치적 현실의 문제성을 부각시킨다. 이 비극적 상황은 인간 개인의 자의성을 벗어난, 인간 개인을 둘러싼 객관적 현실로서 보여진다. 이들 작품에는 권력자를 표상하는 인물군(<알>의 박물관장, <파수꾼>의 촌장, <호모세파라투스>의 박제사, <불지른 남자>의 최종식 등)과 그 권력 구조에 순수 혹은 순진함으로 대응하려는 인물군(<알>의 '시민 다', <파수꾼>의 '파수꾼 다', <호모세파라투스>의 시장과 장남, <불지른 남자>의 재현)이 있다. 이들 작품들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사회 권력 구조의 강건함과 음험함, 개인의 순진함과 무력감이며, 그것의 순환이다. 여기서 사회 권력 구조가 이상적으로 변화할 가능성,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닫힌 현실 속에,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이 바람 소리는 절망의 소리이고, 절망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허무주의의 소리이다.
2. 기억과 느낌의 반복, 그 계기성
위의 네 작품이 사회적 현실의 비극성을 반복 구조를 통해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물거품>과 <느낌, 극락같은>은 반복 구조를 통해 순간과 영원성의 틈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위 네 작품이 유물론적 현실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 <물거품>과 <느낌, 극락같은>은 관념론적 존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물거품>의 현재 시점은 내가 요양원에 있는 그를 찾아가 과거를 기억해보는 대화를 시작하는 데서 시작, 다시 그 과거를 기억해보는 대화를 되풀이하는 데서 끝난다. 현재 시점에서의 그와 나는 늙어 죽음 바로 앞에 있다. 시간의 역사를 걸친 늙은 인물들이 현실적 시간의 끝이자 영원한 시간의 시작인 죽음 앞에서, 과거를 기억해본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이 작품이 시간과 기억이라는 인간 현존의 절대 조건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시간과 기억에 대한 그와 나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늙고 쇠약한 노인인 나는 '낡고 바래서 원래의 형태와 색깔이 변해 있는' '인생과 함께 오랜 풍상을 겪어온 듯한 인상을 주는' 옷을 입고, 온화한 시선을 띄고 있다. 반면 간병인의 부축을 받는 그는 부유해 보이는 화사한 색깔의 옷을 입은 채, 불안한 표정으로 수전증으로 인한 손 떨기를 계속한다. 나는 몸뿐만 아니라 의상도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는 화사한 색깔의 옷으로 쇠약한 육체 위에 얹혀있는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수용과 거부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시간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나는 기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과거는 현재의 지속이다. 반면 그는 과거의 사건과 인물들을 '잊었다'고 고집하며, 잊으려고 애쓰며, '사라지고 없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전집 4}, 144면)한다. 현재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없는 것, 없었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수학적이고 자연과학적으로 시간을 인식, 과거를 현재와 분리시킨다. 그래서 과거를 기억하면서 과거와의 연속 속에서 현재를 살려는 나와 달리,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거부한다. 내가 지속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는 끊없이 단절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내가 함께 과거의 상황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시간성에 대한 차이, 현존에 대한 인식 차이가 드러나는 과정이 된다.
기억이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에 대한 완벽한 재생이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자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며, 체험의 고유한 질을 보존하고 있다. 나와 그의 차이는 내가 그녀를 데리러 연못가에 세 번째 갔다온 직후의 상황에 대한 기억 내용에서 분명하게 도드라진다. 나의 기억은 연못을 바라보며 그녀와 나눈,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명상과 경험을 강조한다. 반면 그의 기억은 감옥과 재판, 증인 등과 관련된 사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는 기억을 거부하면서, 나를 따라 기억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렇다면, 이 그와 나의 '차이' 속에서 이루어진 기억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1) 그 이 세상엔 있는 것만 있을 뿐 없는 것은 없는 거야! 세상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그래! 광할한 우주의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없는 것은 보이질 앉아! 내가 자넬 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걸 우리가 확인하고 싶어서였네!
나 그러나 지금은 없는 것을 기억하고, 없는 것을 말해야 하네. 그래야 자넨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
그 난 없는 것을 기억하진 못해! 거울에 비춰졌던 사람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거울엔 아무런 흔적도 없네! 여보게, 난 편안히 죽고 싶어. 죽음 속엔 없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고, 죽음 속엔 사라진 것이 보여서는 안 되네. 알겠는가, 내 심정을?
나 자넨 기억을 두려워 하고 있군. 물거품은 사라지고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깊은 밑바닥에서 보글보글 떠오르지. (의자에서 일어선다.) 자, 떠오르는 기억을 살펴 보세. 자네와 부인이 물거품 때문에 다퉜던 날이 언제였지? 자넨 물거품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었구, 자네 부인은 그 주장에 반대했었지. 그 다툼은 겉보기에 사소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대한 싸움이었어. 그래서 자넨 나에게 자네 편을 들어달라구 부탁했었네. (그가 앉은 의자를 붙잡고, 그를 바라보며) 그 부탁을 기억하고 있겠지? 자넨 그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몹시 불안한 목소리로 그 부탁을 했었어. ({전집 4}, 141면)
(2) 그 죽음이야, 죽음…… 나를 데리러 왔어.
나 (그의 등 뒤에 와 있는 여섯 명의 간병자들을 바라보며) 아직은 아냐, 두려워 말게.
그 그들은…… 나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거야.
나 여보게 두려워 말라니까. 연못을 생각해 보게, 연못의 저 깊은 밑바닥에선 끊임없이 물거품이 솟아나오고 있네. 자, 마음을 진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과 화해하게! 그래야 자네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어.
그 난 정말 마음 편히 죽고 싶네! 하지만 이 세상엔 있는 것만이 있을 뿐 없는 것은 없는 거야! 세상뿐만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그래! 우주의 그 어디를 살펴봐도 사라지고 없는 것은 보이질 않아!
나 (의자에서 일어선다.) 다시 한 번 기억을 해보세. 자네와 부인이 물거품 때문에 다퉜던 날이 언제였지? 자넨 고집스럽게 있는 것만을 주장했었고, 자네 부인은 그 주장에 반대했었지. 그 다툼은 겉보기엔 사소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대한 싸움이었어. 그래서 자넨 나에게 자네편을 들어달라구 부탁했었네. (그가 앉은 의자를 붙잡고, 그를 바라보며) 그 부탁을 기억하고 있겠지? 자넨 그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몹시 짜증난 목소리로 그 부탁을 했었어. ({전집 4}, 186면)
(1)은 작품의 시작 부분에 있는, (2)는 작품의 끝 부분에 있는 대사이다. 이러한 대사는 이 작품이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해서, 그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 대사 (1)과 (2)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거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1)과 (2)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에서 그는 '없는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2)에서 그는 기억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리고 (2)에서 그는 죽음이 자신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자신의 불안을 고백한다. 그는 없는 것을 기억했고, 자신이 없는 것 속으로 들어갈 것임을 자각한다. 그는 끝내 없는 것과 충만한 화해를 하지 못했지만, 기억을 통해 없는 것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로 한발 들어선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과거로 없어진 것을 되살려내는, 과거를 현재로 보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기억은 과거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활용되는 도구적 장치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실재성을 뒤바꾸어놓는 기억 자체로서 기능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거부하던 그가 보이지 않는 의식 작용이라는 기억을 수행한다는 자체가, 그의 변화를 드러낸다. 그는 기억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긍정을 하게 되고, 과거 및 미래와의 관계 속에 현존하는 지속의 현재를 살게 된다. 인과율의 물질 세계에 살던 그는, 보이는 공간의 세계 속에 살던 그는, 기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 지속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은 변화하는 것으로서, 상황의 변화를 끊없이 생산해내는 것이다. 기억의 반복은 과거가 끊없이 현재화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현재를 생산해내는 것과 같다. 이제 그는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축적해나갈 수 있게 되고, 과거와 지속된 현재를 살게 되며, 변화의 계기를 얻게 된다.
<물거품>의 시작과 끝이 기억을 위해 설정되었듯, <느낌, 극락같은>(1998)의 시작과 끝 역시 기억의 문을 열기 위해, 기억으로 스며들기 위해 설정된다. 이 작품의 현재 시점은, 조숭인이 서연의 장례를 치루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와 조문하는, 짧은 기간이다. 이 현재 시점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전개되지 않는다. 이 현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향해 열려 있는 한 순간이다.
조숭인 어머니, 제가 왔어요.
함이정 어서 오렴. 오늘밤, 네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조숭인 (관 앞으로 다가와서 두 번 절한다.) 이 분이 저의 정신적 아버지셨죠.
함이정 그 동안 숭인아, 어른이 다 됐구나.
조숭인 제 육신의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어요. 장례비용에 쓰시라고 두툼한 봉투를 주시더군요. (조의금 봉투를 꺼내 두 손으로 함이정에게 내민다.) 받으세요, 어머니.
…(중략)…
조숭인 제 육신의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니를 용서 안 해요. 어머니가 집을 떠나신 후에, 아버지는 분노에 떨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죠. "네 에미는 그 놈에게 갔다. 나하고 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서연이란 그 놈에게 가 있었어. 그런데 이젠 몸까지 가 버렸구나!" 아버진 건강하세요. 가끔씩 식욕을 잃는 때가 있긴 하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예요. 불상 주문은 여전히 많아요. 아버진 저에게 가업을 이으라고 하십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음악 따위는 쓸모없다면서……아버지의 불만은 제가 완전히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거죠. "너는 점점 자라면서 이상해지는구나. 육신은 나를 닮았는데, 생각하는 것은 꼭 그 놈을 닮았다!" 저는 아버지의 그런 말씀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욕보다 더 듣기 싫었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칭찬보다 더 듣기 좋았지요. (서연의 관으로 다가가서 가만히 손을 얹는다.) 제 정신의 아버지를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유감이군요. 이제는 살아계시지 않으니 볼 수가 없잖아요.
함이정 그분의 느낌은 살아계셔. 난 밤샘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죽음이란 그분의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그분의 느낌은 죽일 수 없다고…… 숭인아, 너도 알거다. 죽음 뿐 아니라 출생도 그래. 난 네가 태어나기 이전에 너를 느꼈어. 네가 내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 몸안에 들어와서 태아가 되기도 전에…난 네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 너 역시 그런 느낌으로 그 분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조숭인 어머니… 저한테도 그런 느낌이 있어요. 두분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 된 것이 단순한 인연은 아닌걸요.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머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두 분의 아버지는 어떤 관계이셨나요?
이 인용한 장면은 작품의 시작 부분이고, 조숭인의 마지막 대사를 빼면, 또한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이 시작 부분에는 작품 전체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거의 다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함이정을 둘러싼 동연과 서연의 관계, 동연과 서연에 대한 조숭인의 입장 등이 이미 밝혀져 있고, 따라서 극중인물 사이의 사건이나 심리적 반응 등은 이 작품의 중요한 극적 계기에서 미리 제외된다. 이 당돌한 도입부는 이 작품의 중심이 전혀 다른 곳, '느낌'의 순간, '느낌'에 의해 有/無, 生/死, 과거/미래가 함께 하는 순간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함이정과 조숭인의 기억을 통해 이르른 과거에는, 동연과 서연이 불상 제작 및 함이정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매양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동연이 형태, 치장, 명성 등에 집착한다면, 서연은 내용, 마음, 자유를 향해 길을 떠난다. 동연과 서연이 이항대립의 양 극단에 있다면, 함묘진, 함이정, 조숭인은 양 극단 사이에서, 양 극단을 매개한다. 함묘진과 함이정이 동연에서 서연에게로, 형태에서 내용으로 다가간다면, 조숭인은 그 반대로 형태에 대한 거부에서 형태의 수용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원망이나 몰이해로 서로를 배타적으로 밀어내다가, 어느덧 조금씩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수용한다. 수용에 의해 자명해지는 것은, 동연과 서연, 형태와 내용이 차이를 지닌 채 공생 공멸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형태가 有라면 내용은 無이다. 그러나 有가 없이 無가 없으며, 無가 없다면 有 역시 있을 수 없다. 有와 無는 서로를 타자로 간주하면서 그 타자가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스며들은 상호얽힘의 관계이다. 이 작품의 현재 시점이 형태와 내용을 지닌 채 살아 있는 함이정과 조숭인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형태와 내용의 상호의존에 의해 가능한 존재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기억을 통해 과거의 사건들이 드러나지만, 이 작품 전체를 통해 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상호 겹치는 순간들로 '느껴지게' 된다는 점이다. 앞서 인용한 함이정과 조숭인의 대화에서, 함이정은 조숭인에게 비록 서연이 죽었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화의 의미는 과거에 대한 기억 속에서 분명해진다. 과거의 상황 속에서, 느낌은 각 등장인물의 행동을 일으키고, 등장인물들 사이의 행동을 연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함이정은 조숭인이 태아로서 그녀의 몸 속에 들어오기도 전에 그를 느꼈고, 아버지 함묘진이 죽기 전에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었고, 서연을 만나면 극락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함이정이 서연을 만나 극락을 느낄 때, 함묘진은 그 느낌에 의해 열린 극락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느낌은 시간과 공간의 간격과 거리를 뛰어넘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니 생사를 잇고, 유무를 잇는 그 무엇이다.
이 느낌에 의해 과거와 현재는 직선의 선후관계가 아니라 분별되지 않는 동시성 속에 있게 된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인 상이성이 타파된다. 이는 극의 여러 장치를 통해 거듭 확보된다. 현재 시점에서 20대의 젊은 청년인 조숭인은, 함이정이 기억하는 과거 상황 속에서 20대의 청년 모습을 그대로 한 채 함이정과 대화한다. 함이정이 동연과의 결혼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즉 조숭인이 태어나기도 전인 상황에서조차, 조숭인은 현재의 20대 청년으로서 함이정과 대화한다. 현재의 조숭인은 함이정의 뱃속 태아인 조숭인과 시간의 격차를 넘어서 하나가 된다. 이러한 시간의식은 작가의 '연출을 위한 작가 노트'에서도 확인된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각자 정해진 연령으로 그 시간 전체 과정을 연기하도록 주문하는 한편, 무대장치는 시공간이 다른 스물 네 개의 장면들을 하나로 합쳐 놓은 듯이 설정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과거는 느낌의 기억 속에서 현재와 하나가 되고, 미래 역시 느낌에 의한 예시에 의해 현재와 동거한다. 원적인 회귀의 시간관에서 보면 우주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이루어지고 머물고 무너지고 비어버리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순환의 세계이다. 이 순환의 한 지점에서 볼 때 과거·현재·미래는 각각 고정된 것이 아니요, 고정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시간은 존재와 더불어 순환하고, 존재는 緣起된 시간의 매순간을 산다. 이 작품은 시공의 구별이 없는 상태를 극의 현재로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에 의한 존재의 넘나듬은, '극락'에의 '느낌'을 찾는 것과 함께 한다. 서연은 살아서 제 속에 있는 부처의 마음을 발견해 해탈했고, 육체의 몸을 벗은 뒤 열반했다. 함이정은 그의 삶 속에서 서연의 '극락'을 느껴가게 되고, 조숭인은 함이정과 기억에 의한 느낌을 되살리면서 서연을 느껴가게 된다. 극락에 든 서연은 윤회에서 벗어난 존재, 시간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따라서 서연을 느껴간다는 것은 시간에서 벗어나는, 존재의 業을 벗어나는 상태를 느껴가는 것이다. 이렇게 '느낌'은 생사와 시공을 넘어 등장인물들을 이어주면서, 생사와 시공을 넘어선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Ⅳ. 포괄구조와 내포구조의 반복
1. 현실의 담론과 반복의 폐쇄성
<영자와 진택>의 포괄구조는 감화원의 수용자들이 '복지재단의 이사들, 후원회 회원들, 수용자 가족'들 앞에서 연극을 하는 상황이다. 이 감화원의 수용자들은 상습적인 도벽을 가진 여자들, 폭행과 기물 파괴의 버릇을 지닌 남자들이다. 내포구조는 이 수용자들이 하는 연극이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도 성격도 감화원 수용자들과 같다. 무대를 봉제공장으로 바꿨지만, 감화원의 외관이 공장 같다거나 감화원 수용자들이 옷 만들기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봉제공장은 감화원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포괄구조와 내포구조는 서로 닮은 하나이며, 극 속의 연극은 극 전체의 되풀이인 셈이다.
그런데 이 내포구조 안에서는 하나의 현실이 끊없이 반복되어 왔으며, 또한 반복되어 갈 것임을 되풀이 보여준다. 극중극 봉제공장의 공장장이 된 사람들은 차츰 술을 마시게 되어 술주정뱅이가 되고, 복숭아 나무로 아내를 때린다. 공장장의 아내는, 다른 봉제공 여자들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다 못해 옷을 훔치고, 도둑질을 들켜 감독에게 강간 당하고, 끝내 남편인 공장장에게 매를 맞는다. 이러한 상황을 공장 대신 농장이 있던 시절 진택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었고, 공장에서의 진택과 영자 역시 겪어간다. 관리인은 술주정뱅이 공장장을 해고시킨 뒤 다시 '순진하고 고상한 인간'을 공장장으로 앉히고, 감독은 공장장을 술주정뱅이로 타락시키면서, 이 상황을 반복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서 봉제공들은 도둑질을 계속한다.
이러한 내포구조의 의미는 관리인, 감독, 공장장의 역할 관계, 공장장이 제 아내를 때리는 행위와 연결시킬 때 보다 확연해진다. 관리인은 "인간이란 윤리와 도덕으로 가르쳐야 해. 그게 내 신념이야. 매질을 하거나 벌을 준다는 건 오히려 인간을 나쁘게 만들지. 하지만 지옥에서는 내 신념이 통하질 않아. 도둑년들과 술주정뱅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귓구멍을 틀어막고 코웃음을 치지"({전집 5}, 26면)라고 하고, 감독은 "세상엔 두 종류의 여자들이 있다구. 하나는 이미 알려진 도둑년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도둑년들이야"라고 한다. 이들의 담론에 따르면 여자는 모두 도둑년이고, 남자는 모두 술주정뱅이이다. 그래서 때리고, 벌을 줘야 한다. 관리인과 감독이 '순진하고 고상한 인간'을 공장장 자리에 앉히는 것은, '순진'과 '고상'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진택과 영자는, 이들의 간계에 쉽게 무너질 만큼, 순진하고 고상하다. 이들은 순진과 고상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계략에 빠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진택이 복숭아 나뭇가지로 영자를 아무리 매질해도 '귀신'을 쫓을 수 없다. 극의 마지막, "네가 우리 대신 매를 맞을 때 화창한 봄날이 왔고 네 몸이 울긋불긋 피투성이 될 때 복숭아나무마다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전집 5}, 67면)라는 합창은, 영자의 희생을 찬미하는 노래라기보다, 영자의 희생을 찬미하면서 그 희생을 이용하는 관리인과 감독의 담론이다. 이렇게 볼 때, 내포구조는 관리인과 감독의 담론이 진택과 영자의 담론을 어떻게 지배해가는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다분히 비유적이지만, 진택은 관리인과 아버지가 같고, 감독과는 어머니가 같다고 설정되어 있다. 아버지 및 관리인의 층위에서 볼 때, 진택은 남성 중심적 수직적 권력 체계의 한 지점이다. 관리인은 다른 관리인들과 함께 "아버지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해주시기를!"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위치를 지켜나가고, 자신의 이복동생을 술주정뱅이로 만들어가면서 자신의 권력 체제를 순환시킨다. 진택은 위계적 권력 체계 속에서 체계적으로 압박 당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층위에서 볼 때, 아버지처럼 진택은 어머니 같은 영자를 때리는 폭력자이다. 반면 어머니 및 영자는, 남성 중심적 권력 체계 바깥에 소외된 존재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에 혹은 남자들 사이의 내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다가 남자에게 맞거나 강간 당하는 피착취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의 극중극은 남성중심적 권력 체계의 위계성과 폭력성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내포 구조는 지배 체제가 피지배층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남성중심적 권력 체계는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내포 구조의 이야기는 내포 구조 내에서도 계속 되풀이 되어온 끔찍하게 지속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이 내포 구조의 이야기는 포괄 구조의 현실, 감화원과 수감원으로 이뤄진, 세계와 세계 속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로 이뤄진 현실을 복제한 것이다. 이렇게 포괄 구조와 내포 구조, 내포 구조와 그 속의 또 다른 내포 구조가 겹침으로써, 현실의 구조적 복제가 되풀이됨으로써, 이 구조는 사람을 강금하는 폐쇄적 틀이 된다.
2. 삶과 반복의 윤회성
<영월행 일기>의 현재 시점에서 조당전은 '영월행 일기'의 전 주인에게 형식은 주되 내용은 자신이 갖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당전에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몸화'이다. 그는 육화된 내용을 갖기 위해, '영월행 일기'에서 신숙주의 남종과 한명회의 여종이 단종의 표정을 살피러 영월을 세 번 찾아가는 행위를, 김시향과 함께 재연한다. 아래 인용에 밝혀져 있듯, 조당전은 '과거의 내용을 생생한 감정으로 맛보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이다. 과학적 지성 즉 이성의 표현태인 글이 아니라, 몸으로 지각하는 세계 즉 몸으로 사는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조당전 이 책을 보세요. 이 책은 오백년전 과거의 책입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날 글자들로 쓰여 있지요. 물론 나는 이 옛 글자들을 읽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읽는다는 건 내용의 참맛이랄까, 생생한 느낌을 맛보지는 못해요. 내가 당신을 당나귀에 태우고 다녔던 걸 장난이라 생각지 마세요. 그건 이 책의 과거 내용을 현재의 생생한 감정으로 맛보기 위해섭니다.
김시향 글쎄요…그게 가능할까요? 선생님과 저는 지금, 그러니까 현재의 사람들인데요… 어떻게 과거를 생생하게 맛볼 수가 있겠어요?
조당전 과거와 현재는 겹쳐 있죠. 마치 두 장의 사진처럼. 현재의 우리 모습은 과거의 우리 모습을 닮은 거에요. 더구나 감정은 변함이 없죠. 옛날의 짜디짠 소금은 지금 맛보아도 짜디 짜고, 옛날의 달디단 꿀은 지금도 달디단 맛이거든요. (당나귀를 가리키며) 자, 저 당나귀를 타고 영월로 갑시다! ({희곡선}, 81면)
과거의 생생한 경험은, 현재와 유리된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몸 속에 깃든 과거에 대한 경험이며, 따라서 과거를 포유하고 있는 현재에 대한 경험이다. <영월행 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포괄구조와 내포구조 사이의 반복이라는 극 구성에 의해 드러내고 있다.
8장으로 짜여진 이 작품의 포괄 구조에서, 고서적 연구회 회원들은 '영월행 일기'의 진품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김시향은 조당전에게서 '영월행 일기'를 되찾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 상황은 '영월행 일기'의 내용을 시연한다는 내포 구조와 겹쳐진다. 3장, 5장, 7장의 전반부는 조당전과 김시향이 '영월행 일기'를 바탕으로 남종과 여종의 역할을 맡아 극중극을 하는 부분이고, 4장, 6장, 7장의 후반부는 고서적 동호회 회원들이 영월행의 결과를 놓고 세조 및 문신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각기 역할을 나눠가며 모의하는 장면이다. 극중극 장면만이 내포구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고서적 동호회 회원들의 반 모의 장면도 부가적 내포구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현재 상황에는 고서적 연구회 회원들과 김시향, 조당전이, 500년 전 과거 상황에는 세조와 단종, 신숙주와 한명회, 남종과 여종 등이 극중인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인물의 극중 성격은 겹쳐져 있는 닮은 꼴이다. 이동기는 세조와, 부천필은 신숙주와, 염문지는 한명회와, 남종은 조당전과, 여종은 김시향과 상황을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태도 등이 판에 밖은 듯, 서로를 모방하는 듯 엇비슷하다. 이런 중첩되는 인물상은 현재의 내 안에 과거와 미래의 또 다른 하지만 또한 다르지 않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죽고 살고 반복하여 순환하는' 만물의 윤회성에 대한 극적 형상화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포괄구조와 내포구조 사이의 경계, 현재 상황과 과거 상황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현재 상황 속에 과거 상황이 침윤되어 있고, 과거를 모의하는 현재 상황에서 과거는 어느덧 현재가 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의 선의 불명확함 즉 명확하지 않은 극중극의 선은, 남종이기도 했다가 조당전이고 어느새 다시 남종으로 돌아와 있는 조당전을 통해 계속 깨어지고 다시 그어지고 한다. 이런 극중극은 외부 이야기와 내부 이야기가 명확히 나뉘어져 있는 것과는 다른 극적 기능을 갖는다. 즉 명확하지 않은 선에 의해 계속 넘나드는, 변화했다가 현실로 돌아오고 어느새 변해있는 인물을 보면서 관객은 조당전과 남종을, 김시향과 여종을 같은 인물로 느낀다. 이러한 관객의 느낌은, 조당전과 김시향의 느낌이기도 하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면, 조당전과 김시향은 '영월행 일기'를 읽지 않고도 남종과 여종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지 느끼고 있다. 이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고, 그 다른 나는 나와 다른 나는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당전과 김시향의 '느낌'은 원초적인 교감이나 교제이기에, 느끼는 자와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서로 떨어지지 않은 채 공존하며, 세계와의 근원적 탯줄을 형성하는 공명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느낌은, 현재의 몸과 다음의 몸은 변치 않고 계속 이어짐도 아니고[不常] 아주 끊어져 없어짐도 아니며[不斷] 하나도 아니고[不一] 다름도 아닌[不異], 영원한 지속 속에 공존하고 하고 있음에 대한 경험이 된다.
이 겹침의 시공에서, 남종과 조당전은 자유를 향해, 여종과 김시향은 얽힘을 향해, 같은 길을 간다. 같은 길을 동행하는 이들에게, 자유와 얽힘, 자유의 불안과 얽힘의 안정은 대립이 아니라 차이와 연기의 그런 관계이다. 데리다 식으로 말할 때, 자유와 얽힘은 독자적인 실체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반작용으로서 성립한다. 얽힘의 바깥에 있는 자유는 얽힘의 반작용이다. 따라서 자유는 얽힘의 흔적과 얽힘의 기억을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다. 즉 자유에는 얽힘의 흔적이 延期되어 있거나 지연되어 있다. 얽힘이 자유에 작용을 가하였고, 또 자유가 얽힘에 작용을 주었기에, 자유와 얽힘은 각각 相生하거나 相隨한다. 그래서 이들의 서로 다른 욕망은 동일성에로의 동화를 추구하지 않은 채 함께 간다.
이들의 서로 다른 욕망은 이렇게 차연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시작과 끝이 없는 緣起의 순환 속에 빠져든다. '영월행 일기'라는 책과, 그 책의 빈 마지막 장 및 그 공백에 남겨진 혈흔은, 이 윤회에 대한 또 다른 은유이다. 이들은 일종의 돌쩌귀이다. 돌쩌귀는 반복해서 문의 여닫음을 가능케 해 주는,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도는 순환을 상징한다. 공백으로 남은 책의 마지막 장은, 책의 부분이면서 또한 책의 부분이 아니다. 혈흔 역시 피이되 피가 아닌 피의 흔적이다. 공백과 혈흔은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있음과 없음의 흔적으로서, 생과 사를 여닫는다. 또한 이 공백과 혈흔을 지닌 '영월행 일기'는 공백과 혈흔에 의해 계속 쓰여지는 텍스트이다. 텍스트의 세계에서 자기 안과 자기 밖의 구분과 경계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것과 다른 것의 칸막이도 사라진다. '영월행 일기'는 남종과 여종처럼 생사를 거듭나며 다시 쓰여지고, 남종과 여종은 '영월행 일기'처럼 흔적 속에서 거듭난다.
Ⅴ. 반복의 門, 그 안과 밖
이강백은 구조주의자이다. 그는 의미를 생성해내는 구조의 구축에 주력한다. 이강백의 희곡은 의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의미가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유도한다. 따라서 의미와 구조 사이의 상관성을 밝히는 것이,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내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이강백 희곡에서 반복 구조는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며, 작품들 상호간을 매개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그의 희곡 세계에서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반복하기도 한다. <알> <파수꾼> <호모세파라투스>는 사건의 반복을 다룬 항에서 뿐 아니라 시작과 끝의 반복 항에서도 함께 논의될 수 있으며, 그 주제 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물거품>과 <영월행 일기>, <느낌, 극락같은>은 비슷한 구조를 교차 반복하고 있으며, 동양적 형이상학을 주제로서 이끌어낸다. 이렇게 이강백은 반복에 의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복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희곡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본고의 논의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사건, 첫 장면과 끝 장면, 포괄 구조와 내포구조의 층위에서 반복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각 구조와 의미의 관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즉 각 층위에서 반복 구조는 주술성과 폭력성·허무주의·폐쇄성 등의 비극적 세계관을 담는 장치가 되기도 하고, 해체성·계기성·윤회성 등의 새로운 세계 인식을 열어가기도 한다. 같은 구조라도 그 구체적인 쓰임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 생성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전자의 비극적 세계관은 사회 현실을 대상으로 한 경우와, 후자의 새로운 세계 인식은 사회현실 너머의 형이상학적 자유를 탐색하는 경우와 관련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강백의 희곡에서 반복이 서로 다른 의미 생성의 토대가 되는 것은, 그의 희곡 세계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관의 門을 갖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인가.
<다섯>, <알>, <파수꾼>, <호모세파라투스>, <불지른 남자>, <영자와 진택> 등은 사회현실의 문제성을 다룬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사회 현실은 변화불가능한 순환에 갖혀 있는, 시대나 역사에 따라 별 다름이 없는, 정태적인 닫힌 텍스트이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회현실이 권력과 이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有의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은 자연을, 이웃을, 어떤 지적 문제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데 의미를 갖으며, 이성 역시 이론적이며 획일적이며 과학적이며 또한 정복적이다. 권력과 이성은 그것이 무엇을 위해 봉사하건 자기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서는 권력자의 횡포와 대중의 어리석음, 지식인의 무력이 다각도로 풍자되고 비판된다. 아무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과 회유를 서슴지 않는 인물이건, 체제의 개선이나 전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건, 하나의 질서를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숭고한 의무감을 역설하는 엄숙주의나 진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욕망 역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자신의 이성적 기준으로 동질화하려는 욕망의 변형이다. 生과 지식, 권력 등만을 추구하는 有의 세계는 선택적 사고를 강요하고, 차이를 배제한다. 이 세계에서는 동일한 가치만이 재생산되고, 반복될 뿐이다. 동일한 하나의 가치를 강요하는 세계에 갇힌 사람들에게, 세계란 끝없는 폭력이고 허무이고 폐쇄이다.
반면, 희곡의 초점이 사회현실의 문제성 즉 有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들의 경우, 권력과 이성의 논리를 벗어난 자리, 권력과 이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有와 동거하는 無의 발견이고, '차이'의 긍정이며, '차이를 포유한 채 반복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물거품>, <영월행 일기>, <느낌, 극락같은> 등의 작품은, 有/無, 生/死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노장적, 불교적 철학이 반복 구조라는 형식과 절묘하게 조응하는 탁월한 예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물거품>), 형식과 내용(<영월행 일기>, <느낌, 극락같은>)의 차이와 공존 및 그 반복은, 有/無의 차이와 相生 및 그 반복이라는 동양 철학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지평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이는 有의 세계는 해체되어가고, 有와 無의 서로 상반된 흔적들이 고리처럼 얽힌 채 반복되며 윤회한다. <물거품>에서의 그녀의 죽음이나 <느낌, 극락같은>에서의 서연의 죽음은,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차라리 기쁨의 대상이다. 有의 세상을 떠나 그녀는 道의 연못으로, 서연은 극락으로 되돌아갔고, 그런 채로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느낌 속에서 살아난다. 500년 전의 만남을 현재에서 겪으며 미래의 만남을 다시 기약하는 <영월행 일기>의 조당전과 김시향의 이별도, 참담한 헤어짐이 아니라 만남을 위한 역설적인 잠시의 별리일 뿐이다. 죽음과 헤어짐을 관조하는 이들에게 有의 生과 無의 死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영원한 반복이다. 부인의 죽음 앞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치는 저 장자처럼, 有/無와 生/死의 비의를 깨달은 사람들은 담담히 至樂의 지경에서 노닌다. <물거품>의 그녀와 '연못'의 상징은 <영월행 일기>에서 有의 억압을 끊는 '웃음'으로, <영월행 일기>에서 남종과 조당전 및 여종과 김시향 사이의 '느낌'은 <느낌, 극락같은>에서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채우며 잇는 '느낌'으로 변화하고 충만해간다.
이렇게 볼 때, 이강백 희곡에서 반복은 두 개의 門이 아니라 表裏를 가진 하나의 門이다. 有의 세계에서 반복은 비극이다. 그러나 有無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반복은 긍정이고 담연한 웃음의 경지이다. 有無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볼 때 有의 비극은 피할 수 없고, 有의 비극에 설 때 有無가 공존하는 세계는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강백의 희곡은 그 사이에 난 문을 열고 닫으면서 거듭 쓰여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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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titional Structure and Philosophy of Repetition in Dramas of Lee Kang-Back
Back, Hyun-Mi
Lee Kang Back is a playwriter who uses structure of repetition as a principle in writing plays, from his first play "Five"(1971) to his recent play "Feeling, Like Paradise"(1998). For his plays, repetition is a form as well as a content. Specially, he has expressed the Asian outlook of universe by using repetitional structure. In this article, I analyzed three aspects of repetitional structure in his plays and threw light on the meaning of the structures.
Repetition is a structural principle in literature and is also a philosophy that expresses an outlook on the world and a perspective on phenomenon. Structuralists such as Victor Shklovski and Roman Jakobson emphasized the principle of repetition as the form that makes meaning in literature. On the other hand, philosophers such as Jacques Derrida and Gilles Deleuze have reinterpreted repetition, stressing a dynamic aspect of repetition that is based on difference, criticizing the interpretation that repetition is the regeneration of the same. These tendencies of philosophy are connected with the outlook on the world of Asian traditional philosophies. Lau-tzu(老子) and Chuang-tzu(莊子) discussed the order of universe that is repeated in the difference on existing/nonexisting, living/dying, right doing/wrong doing. In this logical connection, the repetitional structures in Yee Kang Back's plays can be analyzed.
In his plays, there are three kinds of repetition, repetition of accident, repetition of first scene and last scene, and repetition of a main play and 'a play inset within the main play'. These three kinds of repetition show different meanings according to individual plays. In one group of plays, these three kinds of repetition emerge as the media that express tragic outlook on the world. In the other group of plays, these repetitions emerge as the media that express Asian outlook on the world.
In the first group, there are "Five(다섯)", "Egg(알)", "Sentry(파수꾼)", "Homoseparatus호모세파라투스", "A Man Who Fires(불지른 남자)", "Youngja and Jintaek(영자와 진택)". These plays focus on problems in a society. In these plays, our social reality is revealed as the violent system that can't be improved. The external reality is the existing world that is under the control of reason and power. Thus, the social reality is tragic. Three kinds of repetition in these plays are structural frames to show the tragic reality.
In the second group, there are "Foam(물거품)", "A Diary of Journey to Youngwoel(영월행 일기)", "Feeling, Like Paradise(느낌, 극락같은)". These plays deal with the world that is repeated in the difference on existing/nonexisting, living/dying. These plays are excellent examples of repetitional structure corresponds to the philosophies of Lao-tzu, Chuang-tzu and Buddha who have discussed the difference on existing/nonexisting and its repetition. 'Her' death in "Foam" or the death of Seo-yeon is not tragic but delightful. 'She' left the external world for 'the pond of Tao(道)', and Seo-yeon for 'the paradise of Buddha'. And they also continue to live in the feelings of people, connecting death with life and existing with nonexisting, even though they died. The separation of Dang-jeon Jo and Si-hyang Kim is also the paradoxical parting for a short time to meet again. For them, life as existing isn't separated from death as nonexisting, and universe is repe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