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종소리
은행나무
허 열 웅
한 톨의 곡식도 천근의 무게를 지니고 토광 속에 쌓이는 늦가을 11월. 이제 도시와 벌판은 덧문을 닫고 설인雪人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만산홍엽 아름다운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회색빛 도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진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중국등지에 분포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공룡이 살았던 2억 5000만 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어진다. 그때 살던 다른 생물들은 다 사라졌는데 은행나무만은 지금까지 살아있다. 공해나 심한 매연에도 잘 견뎌 내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다른 나무는 다 죽었지만 은행나무는 살아났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노랗게 물든 단풍잎이 서양 금발미녀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Maiden hair tree라는 영명英名이 붙었다. 살구 씨를 닮았다 하여 행자목杏子木, 또는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한문 이름은 공손수公孫樹, 공은 한문으로 ‘너’를 뜻하는 존댓말이고, 손은 ‘손자’ 수는 ‘나무’이다. 즉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의 열매를 손자가 딴다는 뜻이다. 수명이 길기도 하지만 열매를 맺기 까지는 수 십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표적인 가로수로 식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질소, 먼지등에 잘 견디고 아황산가스, 납 성분을 정화하는 능력과 오염된 땅을 회복시켜주는 힘이 뛰어나다고 한다. 서울시 가로수의 41%가 은행나무라고 한다. 다른 나무에 비교해서 5~6배 정도 높은 환경 친화적 수종이다. 잎과 열매는 식용과 약용으로, 나무줄기는 우리나라 목재 중 가장 재질이 우수하다. 바둑판, 소반, 도마 제작 등으로 쓰여 졌으며 가구, 공예 등에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특히 의약용으로 이용되는 은행잎에 관한 세계 특허가 90여개나 된다하니 그 효능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효능 중에서는 모세혈관을 확장시켜 주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함으로서 고혈압등과 같은 혈관계질환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사람처럼 남녀가 있다. 대체로 식물의 경우 암꽃과 수꽃이 같은 나무에 있는 경우의 자웅동주雌雄同柱가 일반적이며 서로 다른 나무에 피는 경우 자웅이주雌雄異柱는 드문 현상이다. 은행나무를 비롯한 소나무, 뽕나무, 이팝나무, 월계수, 버드나무, 비목나무 등이 있다. 은행 암나무는 수나무에서 날아온 꽃가루가 있어야만 열매를 맺는다. 수나무에서 피는 꽃은 이른 봄에 잎과 함께 나오고 밑으로 처진다. 암나무의 암꽃은 자잘한 연둣빛 꽃 6~7개가 잎 사이에 숨어서 핀다.
은행나무는 키우기도 까다롭지 않다. 병들거나 벌레가 생기지 않아 정원에 심어도 좋고 아파트라면 화분에 분재를 만들어 집안에 놓으면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집안 공기를 항상 맑게 유지할 수 있다. 또 잎을 잘 이용하면 아끼는 책을 좀이 슬지 않고 깨끗하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책갈피에 잎을 끼워두면 은행잎에 들어 있는 ‘부틸산’이라는 화합물로 인해 방충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르는 뜻은 해와 달, 별, 구름과 교접하여 견고한 나이테 하나를 잉태하려 함이다. 그렇게 겹겹으로 둥글게 감아 천년의 역사를 증언하고자 함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충북 영동 천태산 영국사에는 1,000살이 넘는 31.4m 높이의 천연기념물 223호가 있다. 또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 ~15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62m, 둘레가 14m가 넘는 동양에서 가장 큰 천연기념물 30호가 있다. 이 나무의 가치는 1 조원이 넘고, 앞으로의 수명을 각 계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아 본 결과 200년 쯤 더 남았다 한다.
은행나무가 주저리 주저리 달린 열매와 함께 노랗게 단풍이 들면 전등불을 켠 것처럼 주변이 환해진다. 그렇게 세상을 밝히다가 어느 날 황금비늘 털듯이 잎을 훨훨 흩날린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시인의 단풍드는 날 일부) 이렇듯 은행나무는 제 몸과 마음의 전부를 다 털어버리고 한 해 삶의 절정에 선다.
은행나무가 영국 왕실 근위병의 멋진 열병식처럼 늘어선 가로수 길을 걸었다. 떨어 진 잎을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부채 살 모양으로 퍼진 잎 살. 앙상하게 세월이 빠져나간 내 손금도 은행잎을 닮은 것 같다. 한 그루 나무의 추억과 내 지문을 들여다보며 이 가을엔 한번만이라도 아름답게 타오르자고 다짐해 본다. 나이가 들면 평범했던 풍경도 더 곱고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 같다. 젊은 날 자기중심적이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 자연스럽게 바깥 풍경이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나의 밖에 무엇이 있는지 마음의 눈을 떠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떠날 때가 아득하게 가물거리는 거리에서는 ‘나’가 아니라 ‘남’ 이라는 이름의 풍경이 더 큰 부피로 다가 온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인연이 되었던 얼굴들이 내 기억의 수첩에서 하나 둘씩 지워져가고 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속에서 온갖 빛살들이 아롱지며 단풍잎이 색색의 춤을 추는 이 가을, 나는 은행나무 노란 그늘 아래에서 저물어 가는 내 생명에 무작정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첫댓글 선생님의 「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 를 出力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글 마디마디가 人生의 뒤안길에서 거울 앞에 앉은 세대의 産苦끝에 나온 글이라서 깊고 넓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또 선생님의 글을 읽는군요.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또 취합니다. 얼마나 고뇌하면서 저 좋은 글귀를 탄생시켰을가 감탄합니다. 선생님은 詩도 쓰셨었나봐요. 좋은 글 읽고 맑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선생님은 원래 시인이십니다. 지존님.
지존님의 과찬에 부끄럽습니다. 지존님께서 올리는 글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저 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고 잇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북한산을 등산하고 4.19탑 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길은 은행나무가 가로수였습니다. 저녁나절,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그러자 은행나무 잎새들이 한꺼번에 바람으로 변했습니다. 아마 황금의세계가 있다면 저런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은행나무에 대한 상식을 새롭게 얻어 갑니다.^^
부뚜막에 고양이가 부억에서 놀지 않고 너무 싸 다니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다니시다가 백마 탄 왕자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꼭 붙잡으세요
'은행나무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르는 뜻은 해와 달, 별, 구름과 교접하여 견고한 나이테 하나를 잉태하려 함이다.' 이런 멋진 표현을 하시는 분은 깊어가는 가을 속에 붉게 타는 분일겁니다. 은행나무가 '살아있는 화석'으로 지구의 역사와 함께한다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명에 무작정 불을 지르고 싶다고하십니까, 함께 불타고 싶습니다.
엄지바위님을 보면 영국 왕실 근위병의 사열을 받는 황태자로 보입니다. 바쁜 일과로 하루를 열고 닫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님의 글을 대할 때마다 박학하심에 놀랍니다. 좋은 글에서 나는 향기와 함께 늘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되니 감사합니다.
제가 늘 걷는 가로수 길에 요즘 은행나무의 낙엽이 한창입니다. 때로 굴러 떨어진 은행알을 줍기도 하지요, 그 특유한 냄새와 함께....
발로 코로 눈으로 느끼기만 할 뿐, 제 게으름이 글 한편 탄생시키지 못하고 이 11월을 보내려나 봅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원래 "아는 자는 말 하지않고, 말 하는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눌한 글을 칭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늘 서울엔 비바람이 불어 노란 아스팔트입니다. 떨어진 낙엽위로 음표를 밟으며 가을이 떠나 가고 있네요. 보내주신 격려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