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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지리산 둘레길 4코스(금계-동강)
여행일 : ‘21. 10. 30(토)
소재지 : 경북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일원
여행코스 :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의중마을(0.7km)→벽송사(2.1km)→모전마을(2.8km)→세동마을(2.3km)→운서마을(3.3km)→구시락재(0.7km)→동강마을(0.8km)(거리 및 시간 : 12.7km/ 실제는 15.10km를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4구간인 금계-동강 구간을 걷는다. 23km로 이루어진 함양권역의 중심 구간으로, 산길이 대부분인 다른 구간과는 달리 이 구간은 냇가를 따라 이어진다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벽송사라는 선승(禪僧)의 요람을 들를 경우에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전체적으로는 임도길과 마을길을 반복해가며 걷게 되는데, 이때 예쁘면서도 정겨움이 가득 묻어나는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 들머리는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센터(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광주-대구고속도로 함양 IC에서 내려와 IC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주차장회전사거리(함양읍 용평리 924)까지 온다. 이어서 남원방면으로 달리다 조동마을사거리(함양읍 구룡리)에서 좌회전하여 1023번 지방도로 옮기면 지안재와 오도재를 넘어 금계마을(의탄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임천변에 자리 잡은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055-964-8200)’가 4구간의 시작점이다. 청마산악회처럼 지리산 IC에서 나와 60번 지방도를 이용해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 마천면 금계마을(의탄리)에서 휴천면 동강마을(동강리)까지 지리산 자락과 임천의 냇가에 들어앉은 6개의 산촌마을을 잇는 옛길. 구간(11km) 대부분이 임천을 따라 이어지지만, 우리 부부처럼 벽송사와 서암정사라는 의미 있는 볼거리를 둘러볼 경우에는 1.7km 남짓 다리품을 더 팔아야만 한다. 그것도 오롯이 산길을 따라 걷게 된다.
▼ 지원센터 앞 ‘의탄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나이가 36살이나 먹은 노후 교량으로, 2015년 새로 놓인 ‘지리산제1교’에게 ‘칠선계곡 관문’ 자리를 내어주고 이젠 둘레길 순례자들이나 건너다니는 뒷방늙은이로 눌러앉았다.
▼ 이때 임천(臨川, 칠선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저 지점에서 임천에 합류된다) 건너에서 ‘의평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저 마을은 산중에 위치하면서도 마천면에서 가장 넓은 평지에 터를 잡았다 해서 ‘의평(義坪, 평정말)’이란 이름을 얻었다. 마을이 널찍하다보니 옛날 하동포구에서 벽소령을 넘어온 보부상들이 저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서 장을 열고 소금 등을 팔기도 했단다.
▼ 다리를 건너니 ‘물길지리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함께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그리고 그 위에다 수심을 표시했다. 물놀이를 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 길을 나선지 7분. 의탄마을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100m쯤 더 걷자,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가파른 침목계단이 얼굴을 내민다. 들머리를 발견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곳이다. 이정표(동강 10.6㎞/ 금계 0.4㎞)가 반대편 길가에 세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의중마을로 이어주는 침목계단은 꽤 가파르다. 거기다 길기까지 하다. 벽송사를 경유하는 구간이 빡세다고 하더니 처음부터 기라도 죽이려는 심산일까?
▼ 길을 나선지 12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 ‘의중마을(이정표 : 동강 10.5㎞/ 금계 0.5㎞)’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해발이 300m나 되는 산촌마을이다. 그런데 오른편으로 의평마을에서 올라오는 도로가 나있는 게 아닌가. 좋은 길 놓아두고 고생을 일부러 사서 사는 꼴이 됐다. 참고로 ‘의중(義仲, 중말)’이란 지명은 의탄리의 3개 자연부락(의중·의평·추성) 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 동구 밖 쉼터에는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이런 안내판은 4구간에 걸터앉은 여섯 개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따로 검색해 보지 않고도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그나저나 안내판은 이곳의 지명을 ‘의탄리(義灘里)’로 적고 있었다. 고려시대 행정조직인 ‘의탄소(義灘所)’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지방특산물인 탄(숯, 灘)을 중앙에 공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행정구역인 소(所)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대나무 숲에는 ‘죽포대(竹圃臺)’가 들어앉았다. 1905년의 을사늑약 때 항일의병을 일으킨 죽포 이규현(竹圃 李圭鉉, 1848-1935)이 지팡이를 놓고 쉬던 곳이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의 동맹록(同盟錄, 의병에 참여한 지사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이스타항공 회장이자 현(21대) 국회의원인 이상직씨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 대숲을 벗어나자 당산나무 몇 그루가 60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벽송사에 오르는 수행자는 물론이고 각박한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범부들에게도 벗이 되어주었을 느티나무 아래에는 원두막 말고도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완주 인증을 받고 싶다면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전망 좋은 곳에 서자 건너편 산자락에서 거대한 불상(佛像)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건축 마감재로 유명한 ‘마천석(馬川石)’을 캐내고 남은 단면에다 돋을새김 방식으로 조성하고 있는 ‘천왕대불’이다. 2025년에 완공되면 세계 최대(높이 108m)를 자랑할 것이라는데, 얼마나 큰지 현재 얼굴 부분만 조각되어 있는데도 이처럼 멀리서도 바라보이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마천면은 우리나라 3대 화강석인 ‘마천석’의 주산지이다. 검정 계열의 화강석으로 강도가 높은데다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해 건축 마감재로 가장 선호되는 석재다.
▼ 의중마을의 당산은 ‘용유담’으로 직행하는 숲길과 벽송사를 거쳐 용유담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용유담으로 바로 가는 길은 임천을 왼편에 두고 산기슭을 따라 산책하듯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여행자가 선정한 ‘둘레길 베스트 숲길 5’에 들 만큼 걷기에 편하고 또 아름답단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벽송사를 거치는 산길을 타기로 했다. 산허리를 헤집으며 내놓은 이 길은 오래된 숲과 화전민의 흔적에 돌계단까지. 오래된 정취가 더욱 향기로운 정겨운 옛길이다.
▼ 안내판은 이 길을 ‘절로 가는 길’이라 적고 있었다. 절에 기대어 살던 사하촌(寺下村) 사람들이 절을 찾아가던 옛길이란다. 추성마을로 가는 신작로가 뚫리면서 이제 흔적만 남아있지만, 옛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러, 산나물이랑 약초를 캐러, 땔감 하러 산을 오르기 위해 석축을 쌓고 바위를 쪼아가며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의봉당영골탑(義峯堂 靈骨塔)이라 새겨진 바위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의봉당(수도자가 아닐까 싶다)의 유골을 모셔놓았다는 얘기인데, 낯선 나라 낯선 곳에서 만난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의 묘역이 딱 이랬었다.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로 우리에게 익숙한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로, 그의 묘도 역시 생가(Bergen 소재) 근처 바위절벽에다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고 있었다.
▼ 이 길은 옛날 세사를 시름하는 이들이 지리산을 찾아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다. 그들은 이 길에서 기도와 순례. 때로는 세상을 호령할 호연지기로 통과의례를 삼았다. 유배나 유폐를 겪는 이들은 초연과 침묵을, 불기둥 같은 혁명가에겐 장엄함을, 그리고 이곳에 깃든 민초들은 일상의 평화로움을 지리산과 함께 호흡했을 것이다.
▼ 길을 나선지 45분, ‘서암정사(瑞庵精舍)’에 도착을 했다. 둘레길은 절간을 피해 오른편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서암정사는 1989년부터 불사를 시작했으니 역사로만 보면 최신식 사찰이다. 그런데도 자그만 암자를 연상시키는 이름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적지 않다. 첫 번째 만남은 천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다. 용틀임 조각에 한자로 법문을 새겨 넣었다. 마하대법왕(摩河大法王) 조어삼천계(調御三千界). 거룩하고 위대하신 부처님께서 온 세상을 조화롭게 이끄신다니 일단은 믿어보자.
▼ 그 뒤는 사천왕상이 버틴다. 하지만 전각 안에 양쪽으로 둘씩 서있는 여느 사찰들과는 달리, 절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절벽의 자연석에 사천왕상이 일렬로 부조되어 있다. 증장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이 순서대로 조각되어 있는데, 그 위에 낀 푸른 이끼가 마치 바위와 한 몸처럼 느껴진다.
▼ 사천왕상을 지나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대방광문(大方廣門)’이 나온다. 대웅전으로 연결시키는 문이니 ‘불이문(不二門)’이라 할 수 있겠다.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진리가 본래 둘이 아님을 뜻한다. 불교의 진리가 불이문을 통해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된다. 그래서 금당(金堂)이 바로 보이는 곳에 세우는 게 보통이다.
▼ 대방광문을 통과하면 붉은 기운을 띤 황금빛 대웅전이 얼굴을 내민다.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원응스님이 창건해 한 뿌리라고 할 수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특이한 창건 목적이 그 원인이지 싶다. 모태라 할 수 있는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야전병원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국군에 의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는데, 그 과정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찰이 바로 서암정사이기 때문이다.
▼ 마당을 가로지르면 ‘굴법당(窟法堂)’이다. 이름대로 바위 굴 내부 자연석에 불상을 조각해 법당으로 활용한 특이한 구조다. 법당 안은 아미타불을 위시해 8보살과 10대 제자, 신장단 등을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흡사 석굴암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그밖에도 원응 스님이 15년간 필사해서 완성했다는 60만여 자의 금니화엄경을 비롯해 다수의 사경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은 금지란다.
▼ 범종각 옆의 연못도 인공적이지만 독특한 느낌을 준다. 뒤편 굴법당과 바위벼랑, 그리고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산자락까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하긴 ‘함양팔경’ 가운데 하나(서암석불)로 꼽힌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대웅전 앞에 서면 낮은 담장 너머로 지리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산은 아마 ‘창암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너머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형제봉?
▼ 절간을 빠져나오는데 일주문 격인 큰 돌기둥이 작별을 고한다.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은 백천강하만계류(百千江河萬溪流), 동귀대해일미수(同歸大海一味水), 삼라만상각별색(森羅萬象各別色), 환원원래동근생(還源元來同根生)라 적고 있다. ‘수많은 시내가 흘러 바다에 돌아가니 같은 물맛이고, 삼라만상의 다양한 모습도 근원에 돌아가니 한 몸이라’는 뜻으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지만 실은 서로 연계되어 있기에 세상 만물이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상이다.
▼ 벽송사로 가는 길은 서암정사에서 내려와 새롭게 시작된다. 일주문(돌기둥)을 빠져나오자마자 나타나는 삼거리. 둘레길은 직진,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추성마을을 거쳐 칠선계곡으로 들어서게 된다.
▼ 서암정사와 벽송사는 차도로 연결된다. 하지만 자동차까지도 거친 숨을 내뿜어야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긴 한국불교 최고의 종가가 어디 그리 쉽게 길을 내주겠는가.
▼ 그렇게 10분 남짓 올라섰을까 ‘벽송사(碧松寺)’에 이른다. 너른 마당과 3단으로 층이 나뉜 구성이 인상적인 사찰로 1520년(중종 15년) 벽송당(壁松堂) 지엄(智嚴, 1464-1534)이 옛 절터에 절집을 중건하고 자신의 당호로 절 이름을 삼는데서 유래했다. 이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경내에 있는 석탑에서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할 뿐이란다. 1704년(숙종 30년)과 한국전쟁 때는 소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도 있다. 이런 배경으로 국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됐고, 1963년 원응 구환스님이 전각들을 다시 짓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는데, 대웅전과 일주문 등은 아직도 복원이 안 되고 있단다.
▼ 절은 여느 사찰과는 확연히 다르다. 절의 중심에 금당(金堂)이 아닌 ‘벽송선원’이 들어앉았다. 대부분의 전각은 단청(丹靑)도 하지 않은 채로 맑고 고요한 기운을 내뿜는다. 내로라하는 대사들을 배출한 사찰치고는 소박한 외모다. 아니 흐트러짐 없는 선원의 이미지에서 오히려 선불교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맞다. 벽송사는 한국 선불교의 종가다. 벽송대사가 산문을 연데 이어, 벽송의 제자이자 한국 선불교의 양대 산맥인 청허(서산대사·1520-1604)와 부휴(1543-1615)가 수행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 등 선교 겸수 대종장도 108명이나 배출됐단다.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 )이라는 별명은 그래서 나왔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조선시대 선종의 법맥을 지켜냈고, 흐트러진 불교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 보물 474호 ‘삼층석탑’은 절의 뒤쪽 가장 높은 곳에 따로 있었다. 탑이란 본디 법당 앞에 있는 게 보통이니, 원래의 사찰과 중창된 현재의 사찰 위치가 틀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 탑은 조형예술이 발달한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예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보존된 탑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그저 남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보물 한 점을 눈에 담았다는 보람이 전부랄까?
▼ 삼층석탑 곁에는 ‘미인송’과 ‘도인송’이라는 노송 두 그루가 전설을 안고 서있었다. 도인송을 향한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미인송의 구애가 눈물겹다. ‘미인이 도인에게 연정을 품고 유혹을 했으나 도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미인은 연정을 버리고 존경의 마음으로 곁에서 바라보기로 했다’는 것이 이들 소나무에 얽힌 전설이다. 하지만 미인송은 사모의 마음을 마저 버리지는 못했나 보다. 버팀목에 의지해가면서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도인송을 향해 기울고 있다. 참!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보면 어떨까?
▼ 언덕에 서면 넉넉한 절간 너머로 맞은편 지리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함양을 둘러싼 지리산과 덕유산은 이 지역 어느 곳에서든 힘찬 산세를 담은 풍경을 넉넉하게 제공해준다.
▼ 절에는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속계와 법계의 가름이 없다는 얘기일까? 아니 비 가림 보호각 안에 모셔진 2개의 목장승이 이를 대신한다. 원래 사찰 초입에 세워져 수문과 호법의 신장(神將) 역할을 했으나 보존을 위해 경내로 옮겨 놓았단다. 이 목장승에 기원하면 부부의 애정이 돈독해진다는데, 사람들은 그 근거로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에서 찾는다고 한다. 가루지기타령에 ‘변강쇠가 옹녀와 지리산으로 들어와 살면서 나무대신 장승을 땔감으로 사용하다 혼쭐이 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주요 무대가 벽송사를 중심으로 한 함양군 마천면 일대라는 것이다.
▼ 둘레길은 목장승 전각 옆에서 산등성이로 이어진다. 숲은 단풍이 한창이다. 4구간(금계-동강) 전체로 보면 단풍이 많지 않은데 이곳은 노랗고 빨갛게 물오른 단풍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그게 여심을 자극했나보다. 어느 하나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만의 포즈를 취하느라 열심인 걸 보면 말이다.
▼ 능선으로 오르는 이 구간은 동네 뒷산 하나 정도의 오름을 해야만 하는 수고로움이 더해진다. 솔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꽤 가파르다. 스틱을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버거운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맞다. 오색단풍 영롱하고 자연조화가 절묘한 풍경 속으로 빨려드는데, 그런 잡생각이 파고들 틈새가 어디 있겠는가.
▼ 벽송사를 벗어나 20분. 사람들이 ‘벽송(왼쪽의 송대동과 모전마을 그리고 오른쪽은 추성동의 광점동을 가르는 능선)’이라 부르는 능선에 올라섰다. 이어서 소나무와 참나무가 적당히 섞인 평범한 능선을 따라 걷게 된다. 이 길을 서산대사도 넘고 승병들도 넘었을 것이다. 목탁대신 창을 들어야 했던 스님들은 얼마나 참담했으랴. 내 산하를 지키기 위함이지만 입가의 ‘나무아미타불’은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 능선을 5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모전마을 갈림길(이정표 : 동강 8.9㎞/ 금계 3.8㎞)’이 나온다. 삼거리인데 둘레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모전마을로 내려선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다 ‘송대동 삼거리’에서 탈출해 송대마을을 거쳐 송전마을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송대마을로 가는 길은 현재 끊어져있다. 발단은 일부 둘레길 도보꾼들이 농산물에 손을 대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길은 폐쇄되고 만다. 이는 또 주민과 주민 간에 서운한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엮이게 만들었다. 도보꾼들이 풀어놓던 푼돈이 함께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둘레길을 다시 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 오르막이 가파르면 내리막 또한 가풀막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 모전마을까지의 구간은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그것도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했을 만큼 가파른 구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탐방로의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 그렇게 30분 정도를 내려왔을까 시야가 툭 트이면서 임천과 그 건너의 법화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5분쯤 더 내려서자 이번에는 아담한 계곡과 나무데크 교각을 만난다. 지친 다리를 풀고 가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우리 부부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곤 지난번 3구간 때 우리를 초대해 주셨던 노익장 도반들을 모시고 작은 술상을 차렸다.
▼ 달콤한 휴식을 취한 뒤, 모전마을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임천과 법화산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는 멋진 구간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모전마을 삼거리’는 아까 의중마을에서 헤어졌던 주 둘레길과 다시 합쳐지는 지점이다. 이정표도 본래코스(동강 6.9㎞/ 금계 4.1㎞)와 순환코스(동강 7.1㎞/ 금계 5.6㎞)로 나누어 적고 있었다. 참! 벽송사를 거쳐 온 사람들에게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동강마을로 가다보면 4구간이 자랑하는 절경인 ‘용유담’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용유담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금계마을 방향으로 100m쯤 거슬러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 엄천강(임천)을 오른편에 끼고 잠시 걷다보면 엄천강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용유담(龍遊潭)이 얼굴을 내민다. 지리산의 맑은 계류가 억겁의 세월 동안 흐르며 깎고 다듬어 빚은 하얀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용유담을 가로지르는 합성형 라멘교(상판과 보, 교각을 일체형으로 지은 다리)도 여간 예쁜 게 아니다. 주인공인 용유담보다도 더 눈길을 끌었다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 절경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다리(용유교) 위에서 바라본 용유담은 특별할 게 하나 없는 물길에 불과했다. 맞다. 용유담의 진가는 반야정사 쪽으로 내려서 물가로 다가서야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인위적으로 깎은 듯 오목하고 볼록한 기암괴석들은 물론이고 지리산을 찾았던 옛 선비들의 자취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남명 조식 장구지소’란 글씨 옆엔 점필재 김종직도 보인단다. 정여창과 김일손은 함양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다.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은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을 찾아와 직접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용유담 옆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반야정사로 들어가니 용(龍) 두 마리가 날아오르고 있다. 마적도사의 전설을 형상화 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아홉 마리의 용과 함께 지내던 마적도사가 용들이 다투는 소리 때문에 아끼는 나귀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서 두고 있던 장기판을 던져 용들을 용유담에서 쫓아냈다는 전설이다. 이때 던진 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 주변 바위가 됐고, 소(沼)는 아홉 마리의 용이 놀던 곳이라 하여 용유담이라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 ‘모전마을 삼거리’로 되돌아가다 엄천강변으로 내려가는 샛길(이정표 : 세동마을 2.1㎞/ 용유담 0.3㎞)을 만났다. 수달은 물론이고 지리산 계곡에만 서식하는 가사어(袈裟魚)가 산다는 이 청정 물길이 좋았던지 선두대장은 아래로 내려가란다. ‘용유담 전설탐방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 탐방로는 물가까지 내려서는 건 아니다. 강변 비탈을 따라 옛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진행이 여의치 않은 곳에는 데크길을 새로 놓았다.
▼ 걷다보면 용유담이 내다보이기도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지만 지리산댐이 건설될 경우 물에 잠길 수도 있단다. tvN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을 촬영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인데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 탐방로는 썩 편치가 않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바닥에 깔려있어 걷기가 영 불편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곧장 ‘지리산둘레길’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모전마을에서 세동마을까지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이어지니 말이다.
▼ 강변으로 내려간 길은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송전길)로 다시 올라선다. 아까 모전마을에서 헤어졌던 지리산둘레길과 다시 만난 것이다.
▼ 강 건너 산비탈에도 마을이 들어섰다. 층층의 다랑논에 걸터앉은 산촌마을은 한적하면서도 평화롭다. 그림엽서 같은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만든다. 조금 더 내려가면 ‘백연마을’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황금을 강에 던져 버린 일화로 유명한 이억년과 조년 형제 중 형인 억년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이조년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되는 ‘다정가’를 쓴 고려의 문신. 이들 형제 중 맏형인 백년이 동생 억년과 함께 저곳으로 낙향했다고 해서 ‘백연’이란 지명이 생겨났단다.
▼ 도로를 따라 10분쯤 더 걷자 ‘세동마을’이 나온다. 송전리의 5개 자연부락(세동·송대·마적동·고양터·모전) 중 하나로 한국전쟁 때는 큰 고통을 겪었던 곳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또 다른 단어는 ‘닥종이’. 40년 전까지만 해도 닥종이(한지) 생산으로 이름난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이 최근 산촌생태마을로 거듭났다고 한다. 철마다 농산물 수확 등 다양한 체험행사를 펼치는가 하면, ‘쪽’을 이용한 천연 염색 체험도 진행한단다. 산림청이 우리나라 3대 산촌생태마을로 꼽았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운서마을로 넘어가는 도로변 언덕에는 ‘정려(旌閭)’가 지어져 있었다.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을 지낸 신영언(申永彦)의 효행을 기리는 빗돌을 모셔놓은 곳이다. 문헌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으나 종4품의 조봉대부(朝奉大夫)까지 증직 받은 걸로 보아 효심이 꽤나 지극했던 모양이다.
▼ ‘마적도사 전설탐방로’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이곳 세동마을에서 송대마을을 거쳐 용유담(모전마을)까지 옛길을 따라 마적도사에 얽힌 전설을 담은 탐방로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이다. 용유담을 비롯해 길을 따라가며 만나는 거품소, 나귀 바위, 장기판 바위, 마적동과 마적사 터 등이 모두 마적도사 전설과 관련된 곳이란다.
▼ 둘레길은 계속해서 엄천강을 옆구리에 차고 간다. 그 언저리에는 작은 마을들이 그림처럼 들어앉았다. 닥나무를 삶고, 종이를 뜨는 일로 항상 분주하던 마을이다. 하지만 종이 뜨는 일상과 샛집 지붕의 산촌 풍경은 이제 옛 얘기가 되어 버렸다. 양지에 밀려 한지는 설 자리를 잃었고, 억새를 띠로 이어 얹은 샛집은 이제 색깔도 고운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 세동마을을 지나친지 25분. ‘송문교(이정표 : 동강 3.1㎞/ 금계 7.9㎞)’를 앞에 둔 곳에서 이색적인 입간판을 만났다. 커피가 무료이니 한잔 마시고 가라는 것이다. 숙박하는 집도 아니고, 영업하는 집도 아니니 마음 놓고 마시란다. 세계 일주를 목표로 해외여행을 시작한지도 벌써 7년. 그동안 40개 가까운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이런 상황을 처음으로 만났으니 TV 프로그램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딱 어울리는 상황이랄까?
▼ 옛길로 올라서니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정수기가 손님을 맞는다. 믹스커피와 종이컵도 넉넉하고, 한가롭게 마시며 쉬어가라는 듯 비치파라솔에 의자까지 놓아두었다. 고마운 마음을 포스트잇에 담아놓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가슴은 왜 이리 먹먹해지는지...
▼ 운서마을로 가는 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산촌마을과 엄천강을 함께 만나는 길이다.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과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임도를 차례로 걷는다. 그 길을 걷다보면 발아래로는 엄천강이 까마득하게 흐르고,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촌마을들은 기껏해야 한두 채가 전부다. 그 순박한 산촌의 전경이 나그네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엄천강의 물돌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한마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니 그보다는 저 어디쯤에 있을 ‘새우섬’이 그 고움을 아련한 아픔으로 덧칠해버린다. 새우섬은 엄천강 물줄기가 급하게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육지 속 섬(지금은 삼각주가 되어 위리안치가 풀린 지 오래다)이다. 세종대왕의 12번째 왕자인 ‘한남군’이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서른 한 살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새우섬에서 마감했다.
▼ 동강마을까지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무인카페를 출발한지 30분. 둘레길은 그 첫 번째 고개인 운서고개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는 구간이다. 아니 도열하듯이 늘어서있는 노송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올라서게 된 고갯마루에는 정자를 지어놓았다. 이정표(동강 1.8㎞/ 금계 9.2㎞)는 이곳을 ‘운서쉼터’로 표기하고 있었다. 올라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모양이다.
▼ 고개를 내려서자 운서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저 마을은 산촌으로 유명한 휴천면에서도 가장 좁은 농경지를 지닌 마을로 알려진다. 마을의 3/1 이상이 국립공원 안에 있으며, 나머지도 산악지대라서 약간의 텃밭이 있을 뿐이란다. 그래선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가하면, 담도 낮아 집안일을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다. ‘귀농인들이 마을 주민과 잘 어울려 사는 곳’이라 소개하던 운서쉼터의 안내판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 풍경이라 하겠다.
▼ 이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흔적을 쫓아가노라면 자연과 인간은 한 몸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 둘레길은 이제 두 번째 고개인 구시락재로 향한다. 가파른 산비탈로 다닥다닥 논밭이 이어지고 길은 그 중턱으로 연결돼 있다. 고단함으로 일궈낸 그 풍경에 눈이 아리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그림엽서 같은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 운서마을을 지나친지 12분. ‘구시락재’에 올라섰다. 운서마을과 동강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로 조선조 성종 때 김종직이 지리산 기행을 위해 넘었던 고개이기도 하다. 기행문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그는 이 고개를 넘고 운서마을을 지나 천왕봉으로 올랐다고 적고 있다. ‘구시락’이라는 지명이 주는 이름이나 김종직의 품었을 호연지기와는 달리 고갯마루는 보잘 것이 없었다. ‘십이월의 항구’이라는 산양삼 생산 농가에서 널어놓은 ‘도라지·배 즙’이 전부랄까?
▼ 고개를 넘으면 엄천강이 널따란 들녘과 함께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 건너의 ‘원기마을(院基洞)’은 조선시대 나라의 긴급사항을 전달하거나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심부름꾼들이 머무르던 숙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역원(驛院)이 있던 터(基)’라는 것이다. 마을의 기원을 ‘새우섬’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새우섬에 유배된 한남군을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관리들이 쉬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 고갯마루에서 10분 거리에는 동강마을의 ‘당산 쉼터’가 있다. 이름처럼 오랫동안 지역민들의 쉼터 역할을 해왔는가 하면, 신성하게 여겨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온 곳이기도 하다. 한편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도 이곳을 화암(花巖)으로 소개하고 있다. 쉼터 뒷산의 모양새가 연꽃봉우리처럼 생긴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예로부터 ‘꽃봉산’으로 불려왔단다.
▼ 트레킹날머리는 ‘동강마을’
물기 하나 없는 개울가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동강마을이 나오면서 4구간의 장정이 막을 내린다. 이색적인 모양새의 화장실 앞에 동강마을의 안내판과 함께 벅수와 이정표(수철 12.1㎞/ 금계 11.0㎞)를 세워 이곳이 4구간과 5구간의 경계임을 알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5.10km 찍는다. 용유담 및 사찰을 둘러보느라 제시된 거리보다도 2.4km를 더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도 역시 집사람과 함께 했다. 우리 부부는 주말이면 여행이건 산행이건을 가리지 않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다. 그곳은 일정에 따라 멀고 가까움만 있을 뿐 다른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이라서 때와 장소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낯선 풍경을 만나고 느끼면서 걷는 게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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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정성들여 올려주신 후기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두분 오래오래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라면서 다음글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