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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주와 막걸리 소주는 병이 대체로 녹색 계통이고, 막걸리는 뿌연 빛이 주종이다. 이 사진은 회사명이나 상품명이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색깔을 덧칠한 탓에 병의 이미지가 본래의 원형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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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는 그저 호박전이나 부추전, 두부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안주가 된다. 아니, 소금만 있어도 모자랄 게 없다. 풋고추와 된장이 있다면 더도 덜도 아닌 진수성찬이다. 옛날엔 사실 다 그랬다. 하지만 소주는 독해서 돼지 삼겹살이나 막창 같은 육류 안주를 먹어야 한다. 소금만 갖추고 소주를 마시다가는 위장이 한여름 땡볕에 내놓은 얼음처럼 녹고 만다.
육류를 덜 먹으라는 세상에서, 고기 안주가 애당초 필요하지 않고, 계산할 때 부담도 아주 덜한 막걸리가 서민들에게 반가운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요즘 막걸리가 유행이다. 막걸리가 소주보다 몸에 좋고, 술값도 훨씬 덜 드니 당연지사이다.
나도 근래 들어 막걸리집에 종종 간다. 솔직히 고백하면, 아니 갈 수가 없다. 술꾼들이 막걸리집에 포진하니 같이 어울리려면 그리로 갈 수밖에 없다. 막걸리를 마시면 다음날 아침에 얼굴이 부어오르는 나로서는 그 술이 최악이지만, 그래도 용 빼는 재주가 없다. 내가 술값을 낸다 하더라도 친구들이 막걸리 마시자고 할 판인데, 돈이 없어서 주로 얻어먹으니 어쩔 것인가.
오늘도 나는 막걸리 집에 앉았다. 막대기를 꽂거나 개를 내보내도 특정 정당 공천장만 줘서 후보로 세우면 당선이 거의 보장되는 '묻지마 지역투표'를 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의식은 수준 이하인 게 분명한데, 어찌 된 일인지 특히 남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정치 이야기를 한다. 옛날소설이나 한문소설을 분류할 때 쓰는 용어에는 군담소설(軍談小說), 적강소설(謫降小說), 의인소설(擬人小說), 몽유소설(夢遊小說), 전기소설(傳奇小說) 등등 정말 많지만, 정치적 무의식 수준인 우리나라 남자들이 술집에 앉아서 줄기차게 정치 이야기를 하는 광경을 누군가가 소설로 쓴다면 그건 틀림없이 기이한 일을 다룬 전기소설이 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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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의 효능 "막걸리 1병의 효능이 요구르트 100병과 맞먹는다" - 대구 달서구 죽전동의 한 주점 간판 위에 막걸리가 항암, 갱년기 장애완화, 혈액순환, 신진대사 원활, 피부미용 등에 효과가 좋다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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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막걸리집에서는 정치 이야기가 한창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로 다투듯이 그 쪽 화제를 끄집어낸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강용석이 요즘 완전 스타가 됐드라."
"맞다. 본래 강용석 이름 석자 아는 국민 몇 있었겠나? 서울 국회의원이니 거선(거기에선) 더러 알았겠지만 대구사람 중에야 누가 알았겠나? 대구 국회의원들이 열두 명 몽땅 한나라당 소속이니 그 사람들이야 강용석 본래 알았을 끼고(것이고)……. 그렇지만 요 며칠 새 모르는 국민이 없게 됐지."
"모르면 간첩이지. 옛날엔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담뱃값 얼만지 묻는 사람, 지리에 어두워서 관공서나 큰 건물 어딨냐 묻는 사람이 간첩이었지만, 요새는 강용석 이름 모르면 정말 간첩이지. 그거 보면 시대가 많이 바뀐 거야."
"그렇담 간첩 기준도 바까야지(바꿔야지). 옛날엔 글자 모르면 문맹이라고 했지만 요즘 세상에 글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이젠 글 읽고 뜻 모르는 사람을 문맹이라 하잖아. 강용석 이름만 알아서 안 되고 그 사람이 무슨 말 했나까지도 알아야 간첩이 아니고 진정한 국민이지."
"맞다, 맞아."
술잔이 빙빙 돌았다.
"강용석이가, 박근혜 대표가 그리 예쁘다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다며?"
"군살 없이 날씬하다, 완벽한 아치 모양의 허리, 애도 없는 처녀, 해맑은 미소……. 좋은 말 다 했다."
"너는 간첩 아이다(아니다). 제법 아네? 강용석이, 박근혜 대표 덕분에 '섹시한 한나라당' 됐다고 했다 카는(하는) 말만 안 빼먹었으면 100점인데 아깝다."
"그런데 성희롱이라고 떠들어대는 놈들도 있다 아이가."
"미친 놈들이지. 박근혜 대표를 좋게 말한 건데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노.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니가 정말 많이 아는지 그게 궁금하다 아이가."
"물어봐라."
"강용석이 세종시 수정안에 찬성했나, 반대했나?"
"아따, 억시(몹시) 까다롭게 구네. 국회의원 개개인이 특정 사안에 찬성을 했건 반대를 했건 그건 와(왜) 따지노? 당론이 결정됐으면 그만이지."
논란이 복잡해지려 하자, 다른 친구가 팔을 휘저어 좌중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됐다. 다 끝난 걸 뭐 자꾸 말해쌓노. 그만 하면 강용석이 인간 됐다. 너무 꼬치꼬치 그카지(그렇게 말하지) 마라. 사람이 100% 완벽할 수야 있나? 다 사정이 있지."
"맞다, 맞다."
그 때, 아까부터 줄곧 나를 주목하고 있던 한 친구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닌(너는) 와(왜) 애호박 안주만 자꾸 먹노?"
"내가? ……그랬나?"
"어허, 이 양반 보게. 노망 했나? 지(저)가 뭘 먹고 있는 줄도 몰라? 니가 아까부터 지금까지 애호박 안주만 먹었잖아?"
"그랬다고?"
잠시 황당해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어 바로 대답을 했다.
"내가 친박 아이가(아니냐). 친박이 호박전 좋아하는 거야 당연하지. 안 그렇나?"
"그럼 왜 늙은호박전은 안 먹고 애호박전만 먹노?"
"그야…… 박대표가 늙은호박이 아니고 애호박처럼 예쁘기 때문이지."
"말 된다. 우린 다 친박이다. 자, 친박끼리 화끈하게 한 잔 마시라(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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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호박전 부추전과 더불어 막걸리 안주로는 제격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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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어두워져서 술자리가 끝났다. 택시를 타니, 운전수가 또 정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손님은 우째(어떻게) 생각하는교(생각합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교, 아님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교?"
조심해야 한다. 묻는 양반과 다른 생각을 말했다가는 봉면을 당할지도 모른다. 대답을 않고 시간을 끄니, 성질 급한 택시기사가 자기말을 풀어놓는다.
"이명박 대통령 우리가 뽑아좄다(뽑아줬다) 아인교(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대구경북을 위해서 일할 생각은 쥐꽁대이(쥐꼬리) 만치도 없고 그저 서울사람들 좋은 일만 하고 있다 아인교. 다음엔 정권 바꿔야 합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는교?"
어허, 이 양반 봐라? 이 사람이 호남향우회 회원인가? 대구 사투리가 심한 걸 보니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대통령 임기 반 남았다 아인교. 퍼뜩(빨리) 세월이 흘러야 할 낀데(건데)……."
"……."
"담엔 박근혜를 대통령 시켜야 돼요. 정권 교체 해야지요. 안 그렇심니까?"
내가 대답이 없자 택시기사는 열을 받았는지, 그렇잖아도 낡아빠진 택시를 트르릉트르릉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도록 더욱 거칠게 몰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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