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네들만 모여 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 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고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뿐, 엄마가 보고 싶다
「봄날 오후」 전문
봄날, 그녀는 피크닉 바구니를 끼고 총총히 소풍을 떠나간다. 봄 햇살에 버무려져 금새라도 얼었던 입안 가득 군침이 돌 것 같은 봄나물의 향기가 그녀의 피크닉 바구니에서 풍겨 나와 코끝을 아리게 할 것 같은데…. 생에 처음으로 혼자 나선 소풍. 코티분을 바르고 나선 그녀의 소풍 나들이에도 실한 바람 한번 난들 어떠하리. 싸아한 꽃가루가 그녀 가는 길 위에 뿌려진다.
어머니는 첫 번째 강을 건너는 화두
소풍을 막 떠나기 시작한 시인 김선우(30). 그는 첫 시집을 낸 소감을 ‘그냥 소풍을 떠나는 느낌’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그가 ‘만행’을 하는 스님처럼 보인 것은 왜 일까. 아니다. 그의 시가 ‘만행’을 하고 있다고 해야 적당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를 대면하기 전에 그의 만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나로서는 그의 시가 만행하는 스님처럼 보일 만도 하다. 오히려 그의 쌍꺼풀 진 동그랗고 큰 눈에 여리다 싶은 말투와 웃음은 ‘만행’을 감행할 만큼 용기(?)있어 보이진 않았지만(그냥 그녀의 첫 인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좀 뜬금 없지만 그의 시에 묻어나던 불교적인 색채와 향기에 취해 있던 필자로서는 그가 일종의 구도자일 거란 상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도란 것이 별스러운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살포시 말문을 열어 본다.
“예술작업이라는 것이 표현하고 소통하기를 원하는 것이고, 소통하려고 할 때 자신의 말과 상대방의 말이 어느 날 하나의 말로 딱 만나는 지점들을 꿈꾸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세상이 좋아질까, 내가 좋아질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구도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등단을 한 이후 5년만에 첫 시집을 묶어 냈다.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은 작년 말쯤 낼 예정이었지만 이래저래 늦추어지면서 올해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지게 된다. 등단 전의 작품 한 편과 등단작 중 일곱 편을 추렴한 총 59편의 시들은 그의 말대로 어느 날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 것이다. 언제나 착하게 입 속에 갇혀 있을 것 같던 혀가 세상으로 튀어 나왔듯이.
부지불식간 튀어나온 세 치 혀가 그의 시들이라면 그의 시는 한결같이 장똘뱅이들의 ‘역마살’이 끼어 있는 듯 하다. 그는 천성적으로 여행을 좋아한다. 때가 되어 어디를 가지 않으면 몸살이 난다는데 그의 시에도 역마살이 끼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시집이 나오고는 이상한 기분에 계속 집에만 있었다는 그에게 슬슬 역마살이 돋는 모양이다. 그를 보면 역마살이 그리 서글픈 일만은 아닐 듯 싶다. 역마살이 도질 때마다 매번 좋은 시들이 나오는 걸 보면, 그에게 역마살은 하나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들이 ‘입’이라는 사회적 억압장치에 안티를 거는 ‘혀’라면 그의 시에서 ‘역마살’은 투쟁의 한 방식일 수 있다.
“제 시집을 하나의 담론으로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평자들이 좋아하는 말로 한다면 ‘에코페미니즘’이라는 부류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생태학적인 상상력이 생명력을 잠재한 여성성과 만나는 지점. 물론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점도 있고, 의식적으로 가지고 가는 지점도 있구요. 이상하게 첫 시집을 묶을 때는 욕심이 나데요. 기본적으로 제 시집의 큰 줄기는 우리를 가두는 사회적 억압의 고리에 대해 딴지를 걸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 큰 줄기를 가지고 곁가지들이 생겨 나는 것 같아요.”
그의 시들의 ‘여성성’은 우주적이며 생태적인 자궁인 ‘어머니’라는 상징물과 맞닿아 있다. 특히 시 「어라연」, 「양변기 위에서」,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가을 구름 물 속을 간다」, 「내력」 등 그에게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떠나 처연하기까지 하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 처연함의 바닥엔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의미가 숨어 있기 마련인데 그에게 어머니는 그가 끄집어 내야 할 화두가 심어져 있다.
“저에게 있어 어머니는 제가 첫 번째 강을 건너가는 화두죠. 하지만 제가 어머니를 통해서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은 개인적인 의미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고난사와 그들 삶의 모습이 동시적으로 흐르다가 통시적으로 확장될 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순환과 생명을 담지한 여성의 역사라는 것을 어머니 몸을 빌려서 표현하는 게 제일 쉬웠어요.”
강릉 고향집 엄마방에서 / 엄마랑 낮잠 든 오후였습니다 / 물너미 하나 엄마 배를 타넘어왔습니다…닥지닥지 붙어있는 늙은 몸 위에서 / 학이 날고 / 거북이 구름 속을 슬슬 기어가더군요 / …엄마 혼례 때 따라온 자개장 속에서 / 엄마랑 내가 흠씬 젖은 가을 오후였습니다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부분
개인적으로 그가 어머니의 몸과 접신(接神)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따로 있다. 그 접신의 과정은 삶과 죽음의 관념을 벗겨 내고 원초적인 희노애락의 굴곡들과 온전히 맞딱 들여지면서 이루어진다.
“저의 어머니가 칠십이세요. 그 나이의 어느 어머니인들 병이 없을까마는 저의 어머니가 굉장히 아프셨어요. 어머니가 굉장히 많이 아팠던 것이 제게 정서적인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게 만들어요. 어머니는 지독한 사랑의 대상이자 동시에 애증의 대상이지만, 그 몸에는 삶의 희노애락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 몸을 들추면 아주 다양하지만 하나로 출렁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시에서 나오는 파장들이 관능적이라고 한다. 그의 시의 관능성은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두툼한 귀볼과 자비로운 미소에서 풍겨 나오는 그윽한 관능성과 닮아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시가 굉장히 불교적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불교적 관능성? 더러운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관능성이 어찌 천박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서 풍겨 나오는 관능적 향기가 어디서부터 나오는 지 참으로 알기 힘들다. 하지만 명확한 건 그 관능성이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소름을 돋게 만든다는 것이다.
“제 시가 불교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개인적으로 신앙이 없지만 불교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동양학이 가지는 굉장히 중요한 상상력의 카테고리가 문학적인 것과 내밀하게 상통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 자체가 순환성의 여성성이나,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명 꽃 피우기에 닿아 있으니까 필연적으로 만나지는 세계가 불교 같아요. 저에겐 매력이 있고 철학적으로도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천성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인연이 많기도 하구.”
불영산 수도암에 갔다가 /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바탕 엉겼네/신랏적 부처들은 왜 그리 섹시하냐고 / 슬쩍 농을 건넸더니 반개한 두 눈 스스르 뜨시네 / … 벌집 속으로 무상하게 드나드는 달마들 / 선남선녀 옷자락이 하염없이 스쳐가네 /… 이 뭣꼬! /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내가 있네
시 「벌집 속의 달마」 부분
세속을 등진 그의 언니를 생각해서 일까. 어쩌면 그의 만행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인연들이 그의 시의 관능성을 더욱 향내 짙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에선 만행을 통해 얻어진 깨달음조차도 비워 내려 하는 것 같아 더욱더 관능적인 것 같다고 필자 나름대로의 느낌을 말하자 짧은 감탄사를 연발한다(아마 그 감탄사는 꿈 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것 같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시를 쓸 때는 잘 몰랐는데, 묶어서 나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관능적이라는 표현을 하더라구요. 관능적인 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시가 그런 성격을 띤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그러한 것, 스스로 글이 되어지는 것, 가장 솔직하고 자유로운 지점에서 발현되는 지극한 것이 관능적인 것과 만나질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붓다’와 ‘마르크스’예요. 그는 딸 부잣집의 넷째다(딸 여섯에 아들 하나란다). 부모님은 고향인 강릉에서 살고 지금은 동생 둘과 함께 경기도에서 살고 있다. 당연히 그도 많은 형제들 탓에 학비가 싼 국립 강원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로 가게 된다. 물론 일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채워지는 듯 했다. 일학년 때는 장학금을 받는 착실한 대학생이었지만 소위 운동권이 되어가면서 그는 나쁜(?)학생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학년 때부터 수업에 들어가는 날이 열 손가락으로 꼽히는 데다, 그나마 수업에 들어가선 지도교수랑 싸웠으니 뭘 모르는 어른들 눈에는 불량학생으로 낙인찍히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신념이 있는 불량학생이었다. 그 당시 문화운동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할 수 있는 길이 사양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 그는 학교 안의 동아리 활동을 통해 문화운동의 지형들을 그려내고자 했다. 그때 그에게는 좋은 운동가로 사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과 동일지점이었던 셈이다.
졸업을 하고 그는 전국학생문학 조직 중의 하나였던, ‘학생노동문학위원회’에서 일년 정도 일을 했지만 그야말로 사양길의 막바지에 접어든 문예운동이 그를 좋은 운동가로 살아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십대 초반을 지배한 화두는 당연히 혁명이었죠.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자유케 할 것인가하는. 그 나이에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을테지만, 학교를 졸업하고는 내가 나를 자유롭게 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기까지 형성한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이십대 초반에 내가 받아들였던 이념들이었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이념서들이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죠.”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붓다’와 ‘마르크스’라고 말한다. 이 둘은 그에게 내·외적 자유의 균형을 가져다 준 것이다. 비록 이십대 초반에 꿈꾸었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에겐 시가 있었다.
“그 당시 문예운동들이 다 깨지고 있는 상황에서 솔직히 여러 상처들을 입었어요. 그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잃어버리게 된 겁니다. 내가 그 동안 가지고 왔던 다양성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내가 꿈꾸었던 것들이 버려진 느낌 속에서 굉장히 힘들어 하다가 그때 시가 내게로 왔던 겁니다. 시가 제겐 구원이었죠.”
‘결핍이 나를 밀고 간다’란 말처럼 사회 속에서 하고자 했던 일들이 내외부적으로 힘들어 진 상황에서 시는 그에게 구원의 밧줄이었던 것이다. 그는 93년부터 본격적인 습작을 시작하게 된다. 3년 뒤인 96년 그의 표현처럼 미친 듯이 습작한 시들 중 「대관령 옛길」 등 열 편의 시가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실리면서 등단하게 된다.
그는 등단 소감에서 김남주 선생의 이야기를 했다. 원래 한 문학가에 쏙 빠져 있질 못한다는 그이지만 그에게 김남주 선생은 시적인 영향을 떠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인간이 사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을 때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보여 준 사람이 바로 김남주 선생이었다고.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당당해 졌으면 그는 삶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이냐에 봉착해서 모든 예술이 가능해 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80년대 우리 삶에 부과되었던 소명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야말로 창백한 미학주의의 울타리안에서는 진정한 문학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스스로가 문학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그래서인지 그는 80년대를 빛나게 보냈던 사람들이 다양해진 90년대에 자기 문학을 어떻게 할 줄 몰라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진다.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이 좀더 당당해졌으면 한다고.
“80년대의 시들이 문학적으로 굉장히 빈곤한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어려웠던 시대에 빈곤한 언어들이 난무했지만 그 속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언어들이 있었어요. 그것들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야말로 이분법, 사분법을 해서 일종의 개성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는데, 저는 90년대 시단이 그다지 다채롭지 않다고 봐요. 사방에서 다양성을 이야기 하지만 실지로 우리의 문학이 다양성을 얻었는가에 대해선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한 쪽 다리는 어정쩡한 곳에 두고 있고, 몸을 통과하지 않고 관념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기형적인 면이 많다고 봅니다.”
그는 문단의 관습적인 말하기 방식에 안티를 건다. 대표적으로 여성시를 하나의 시 자체로 보지 않고 끝에는 꼭 여성시의 계보라는 말을 붙여 넣는 것에 그는 기분이 나쁘다.
“문단을 점유하고 있는 남성들이 90년대 여성시단을 묶어두려는 경향은 정말 웃긴 일이죠. 특히 최영미나 허수경, 신현림 등 90년대 여성시단의 모습으로 묶여지는 것에 개인적으로 할 말을 잃었죠. 제 시가 최영미의 도발적이고 솔직한 면과 허수경이 갖는 농익을 때로 농익어 터질 듯 한 감수성이 아주 절묘하게 녹아 있다는 말을 간간히 들었어요. 제가 시사적으로 논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최영미든 허수경이든 내 시 속에서 제대로 구현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전 제 시가 두루 내 것으로 익혀 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순간 순간 깨어있는 게으름으로 그는 현재 전업 시인이다. 말이 좋아 전업이고 ‘화려한 백수’란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백수생활에 별 불만족이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않다(돈을 많이 벌지는 않겠지만, 궁하게 살지는 않는다고 그의 사주에 나와 있었단다). 그는 직장생활을 한 번도 안했다. 돈이 필요해 이년 반 동안 학원강사를 해 번 돈으로 아직도 살고 있다. 사는 일에 욕망을 버리면 소비량이 적어진다고. 하지만 그는 속도에 밀려가는 걸 싫어한다. 어느 날 길을 가다 나뭇잎이 어깨에 딱 떨어졌어도 ‘이게 여기 앉았네’하고 한참을 보고 있는 여유가 좋아 좀 게으르게 살려고 한다. 순간 순간 깨어 있는 게으름을 위해 조만간 여행을 갔다올 거라는 그는 시가 잘 안되거나 시보다 다른 형식으로 말하고 싶을 때마다 산문을 조금씩 쓴다. 그러다가 음악도 듣고 여유도 좀 보내다가 감동하다가 그렇게 살거란다. 그는 여유가 뭔지 정말 아는 것 같다.
첫댓글 시인에 관한 글 올려줘서 고마워요^^
선우님에 대해 더 알게 하는 이 인터뷰를 이제야 세세히 읽었네요. 선우님의 생생한 이야기들. 단단합니다.
민족예술의 누가 언제 인터뷰 한것인지 정확한 출처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여기 저기 퍼온 글들은 많이 봤는데 그 어디도 출처가 명확하지 않네요.
월간민족예술인 모양이군요. 홈피에 가보니 2004년 1월호 이전의 기사는 보이지 않는군요. -정 혜 진 기자- 가 인터뷰 한 모양이군요. 2001년 5월인지 확실하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