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국영상대학교★미디어보이스과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Yeil
    2. 오케이
    3. 서은비19학번
    4. 리가텐
    5. 따코우
    1. 곰탱공쥬
    2. 임현목
    3. 이동민
    4. 이준호
    5. 이웃집 또 털어
 
카페 게시글
학술자료실 스크랩 경계를 넘어서-21세기 문학 지도를 위한 밑그림
내게도사랑이 추천 0 조회 71 07.01.30 02: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계를 넘어서

   ―21세기 문학 지도를 위한 밑그림

 

우찬제




1. 21세기의 문학과 진실

 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의혹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문학의 이름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변하는 현실과 문화 지형은 우리의 사유와 표현 욕망의 변모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때때로 혼돈스러워 하기도 하고 곤혹스러워하기도 한다. 게다가 지금은 새 천년이 시작된 21세기다. 혼돈스럽고 곤혹스러운 상황을 넘어서 문학의 이름으로 우리가 21세기를 어떻게 꿈꾸거나 구상할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의 새로운 문학 지도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는 이 글을 쓴다.

확실히 오늘의 현실과 문화는 빠르게 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의 위상이나 역학 또한 상당히 바뀐 게 사실이다. 특히 이미지와 스펙터클로 출렁거리는 문화 상황에서 문학은 그 본연의 리터러시나 문학성의 훼절을 경험하게 되었고, 또 디지털 정보화 시대를 맞아 지시 대상 혹은 객관적 상관물 내지 재현 개념의 혼돈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굳이 보드리야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대적인 상황이 스펙터클들의 무한한 퇴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실감할 수 있는 바이다. 강한 인상과 자극을 수반하며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스펙터클의 놀라운 볼거리, 엄청난 구경거리는 어느덧 이미지 자체를 넘어서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마저 규율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펙터클들은 실재를 넘어서 실재를 대체하고 다른 차원에서 실재화된다. 기존의 객관적 상관물이나 컨텍스트 개념을 교란시키면서 그것들은 스펙터클로서의 사회를 형성한다. 그 사회는 TV나 디지털 복합 매체 등을 통해서 빠른 속도로, 찰나적으로, 강렬하게, 그리고 점멸하는 환각처럼 대중들을 파고든다. 스펙터클의 발빠른 생산과 소비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 같은 이미지와 스펙터클의 소비 사회에서 전경화되는 것은 무엇보다 공간성이다. 이미지들이 플롯으로 엮이고 스토리로 짜이기 위해서는 인과성이나 시간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점멸하는 이미지들에서 과거의 플롯이나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노릇이다. 시간성은 훼절되고 역사의 시간은 한없이 지워진다.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벤트, 스펙터클, 해프닝, 매체 이미지 등을 통해 시간 지평의 붕괴와 인스턴트성에 대한 집착이 형성된다고 한 하비의 말을 그냥 듣고 흘릴 일이 아니다.1 시간성이 뒷걸음질치는 가운데 공간성이 성큼성큼 이 소비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지의 장면적 공간 구성에서 하이퍼 공간, 사이버 공간까지 헤아려보면 우리가 지금 이미지의 공간 천국에서 살고 있음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 공간 천국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시간을 의식하고 역사를 고뇌하던 시절에 비해 고통이 줄어들었던가. 아무리 문화 지형에서 시간성과 역사성이 지워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현실에서는 시간의 문제와 역사의 곤혹이 살아 숨쉬는 게 아닐까. 다만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 현상만 가속화되는 게 아닐까. 시간의 줄기를 이탈한 환각적 공간의 이미지들만 출렁대는 가운데 인간 의식이 거기에 미혹되고 있는 게 아닐까. 가령 생각해보자. 현실의 시간과 역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말이다. 여전히 아니 더 잔혹한 방식으로 엽기적인 살인 행각이 이어지고 있고, 이익 집단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미국처럼 10여 년 간 장기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나 한국처럼 환란을 겪은 나라나 할 것 없이 부의 편중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생태 환경의 위기나 핵무기의 위협은 또 어떤가. 또 우리네 분단 현실 역시 역사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요컨대 일찍이 칸트가 주장했던 이상주의 사회에 인류는 전혀 근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이미지나 스펙터클이 꾸미는 공간 천국에 섣불리 안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밖에도 많을 것이다. 어쨌거나 공간성에 의해 뒷전으로 밀린 시간성과 역사성이 우리네 잠자는 의식을 부단히 일깨우고 있다. 프루스트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든지, 조세희식의 시간 여행을 하거나, 이인성식으로 낯선 시간 속으로 탐문 여행을 하라고 말이다. 예로부터 문학의 상상력은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몸과 혼, 인간과 인간, 공간과 공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심연을 채우고 연결짓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대상이 보이는 간극의 거리와 깊이가 상상력을 추동하는 주요 기제였다. 요즘의 이미지나 스펙터클들은 한편으로 공간적인 단절을 뚜렷이 보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공간적인 여백을 지우고 있는 형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혹은 스펙터클과 스펙터클 사이의 단절감은 이미 지적했거니와, 언어 기호에 비해 시각적인 이미지 기호는 한 장면 안에서의 여백을 최소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복합 매체의 경우는 장면 구성에 있어서 여백의 영도화(零度化)를 지향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럴 경우 소비자에 의한 직접적 소비의 정도는 심해지지만 상상이나 사유의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이다. 공간 시대의 공간 소외 양상은 정녕 역설이지만 우리 시대의 분명한 증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제 앞의 말을 다시 고쳐 적어야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잃어버린 시공을 찾아서"로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언어에 바탕을 둔 문학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시공을 상상력으로 채우고 고민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공에서 행복의 가능태를 꿈꾸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현실의 상징적 그물망 사이에서 혹은 그물망을 넘어 상상적 진실을 탐문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는 뚜렷하다. 그렇다면 그 노력을 위해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나는 이 글에서 경계선의 사유와 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확정된 진실의 자리를 잃어버린 까닭에 우리는 당분간 경계선에서 서성거릴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서성거리고 있는 경계선은 주체와 타자, 경쟁과 상생, 디지털 신화와 생태학적 신화, 미메시스와 환상 사이의 경계선이다. 변방을 두드려 중심을 울리고자 하는 심정으로, 내가 서성거리고 있는 경계선에서 21세기 새로운 문학 지도를 위한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



2. 주체와 타자

이미지의 단편성, 스펙터클의 점멸하는 파편성이 횡행하는 문화 지형에서 파편과 분편들의 시-공간 소외를 초극하기 위해서, 혹은 온갖 반성 없는 단독자들의 초상에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 혹은 주체와 타자가 경계를 넘어 서로 스미고 짜이는 형상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사실 문학은 오래 전부터 주체 중심의 현실에서 타인의 얼굴을 발견하고 타자의 가슴을 껴안기 위한 상상적 진실의 도정을 걸어왔었다. 혹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의 상황에서 진정한 화해에로 이르기 위한 문학적 진실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도 있다. 최근의 문화와 문학 상황은 그런 오래된 진실을 그리워하게 한다.

주체 중심의 현실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궤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구 철학사에서 주체 혹은 동일자 중심주의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일자(一者)라고 언급한 그리스 시대 엘레아 학파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학설에서 다자(多者)를 이루는 타자(他者)들은 인정되지 않고 모든 것은 일자로 환원된다. 엠페도클레스에 있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식 주체와 대상이 같은 것이어야 한다며 동일자 중심주의를 보인다. 이 같은 동일자 중심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철학적 숙고의 일환으로 타자론이 제기된다. 그것은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유아론을 극복하고 상호 주관성을 확보하려는 철학적 경향이 그 하나라면, 주체성이 구성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의 타자론을 펼치는 주체의 생성에 관한 이론적 경향이 그 둘이다.

앞의 성찰을 우리는 E.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 5』에서 모나드론적 상호 주관성의 확보를 위해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설은 신체 표현의 유사성에서 타자를 확인한다. 나는 나의 신체 표현과 유사한 표현을 하는 타자의 신체로부터 나와 동일한 의식 활동을 하는 타자를 구성한다. 즉 타자도 나와 동일한 주체(상호 주관적인 타자)임이 보증되며, 이때 유아론은 극복된다.2 심리철학에서 다루는 타자의 마음의 문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론은 주체의 생성에 관한 이론이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관한 연구』 『시간과 타자』 등에서 E. 레비나스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의 주체성이 정립됨을 논증한다. 이때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의 관계이다.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 주체는 다른 모든 주체에 앞서는 근본적인 주체이다. 그의 철학에서 윤리학적 함의는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레비나스의 타자 이론은 나의 주체성이 출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타자가 개입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주체 구성을 가능케 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낯선 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욕망, 곧 형이상학적 욕망에 의존하고 있다.3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했던 라캉의 사유에 맞닿아 있는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저작들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내가 지각하는 세계 혹은 나의 지각장(知覺場)과 그 세계의 상관자로서의 나의 의식의 출현의 필수 조건이 바로 타자라고 들뢰즈는 사유한다. 주관에 주어지는 산만한 지각들을 종합해 하나의 대상으로 조직하고, 대상들을 주관하는 세계의 질서 전체를 구성하고 보장해주는 일이 타자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고 그는 파악한다. 세계의 온갖 질서가 내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나와 동일한 방식으로 지각하고 있을 타자를 통해 보증된다. 즉 들뢰즈가 주장하고자 하는 논점은 "나의 욕망은 타자를 통해서만 대상을 포착한다. 가능한 타자가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것도 욕망할 수 없다"4는 것이다.

상호 주관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이든 주체 형성에 관한 이론적 경향이든간에, 철학 특히 현대 철학에서 보이는 타자 논의는 인간에 대한 심화된 이해 지평을 열어준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발견과 타자를 통한 존재론,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함께 꾸미는 공동선의 지평에 대한 문학 쪽의 성찰도 그 동안 어지간한 편이었다. 신들의 이야기에서 영웅들의 이야기로, 다시 인간들의 이야기로 변모되는 과정은 곧 수직적 타자에서 수평적 타자를 발견해온 과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인간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영웅적인 인간에서 보통의 혹은 저잣거리의 인간들의 이야기로 변화하면서 타자의 문제는 좀더 내밀한 의미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니콜리코프만 해도 그렇다. 범인과 비범인 사이의 경계를 확정적으로 짓고 스스로 비범인임을 자처하던 무렵의 그는 확실히 주체 중심주의자로 보인다. 자신의 신념에 의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그 동생까지 죽이게 되는 과정에서 그는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타인의 진정한 얼굴을 보게 된다. 그가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본 타인의 얼굴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창녀인 소냐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소냐라는 타인의 얼굴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통한 존재의 거듭남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과 진실에 감화되지 않았던들 라스니콜리코프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으러 가는 짓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냐에 의해 라스콜리니코프가 구원에의 길로 인도되는 모습에서 우리는 문학으로 된 "나자로의 부활"을 예감한다. 그것은 곧 주체 중심주의에 의해 죄로 얼룩진, 그래서 벌받고 있는 참담한 인성(人性)의 고해성사이면서, 참다운 인간 세계로 거듭나기 위해 타자와 더불어 신성(神性)의 메시아를 간절히 부르는 소설인 『죄와 벌』의 기본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또 아메리칸 드림이 추락하고 대공황을 맞아 고통을 겪었을 때를 배경으로 씌어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의 대단원에서 우리는 주체화된 타자, 타자화된 주체의 현현을 보게 된다.


사내 아이가 제 있던 구석으로 가더니 때가 더럽게 묻은 덧이불을 하나 들고 와서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응." 어머니가 말했다. "저쪽 사람은 왜 그러니?"
소년은 단조로운 목쉰 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고파서 그래요."
"뭐라고?"
"굶고 있어요. 목화밭에서 병이 들었는데 지금 엿새째나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요."

어머니가 그쪽으로 걸어가더니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한 오십 가량 되어 보였다. 털이 부숭부숭한 얼굴이 야위었고 멀겋게 떠 있는 눈이 아무데나 멍청히 응시하고 있었다. 〔……〕 어머니의 눈이 로자샤안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가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갔다. 두 모녀는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로자샤안의 숨이 가빠지고 헐떡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겠어요."

어머니가 미소를 머금었다. "난 네가 그럴 줄 알았다. 알고 있었어!" 그녀는 무릎 위에 꼭 쥐어져 있는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로자샤안이 소곤거렸다. "다들 좀 나가주실래요?" 비가 가볍게 지붕 위를 두드렸다. 〔……〕 그러더니 그녀는 지친 몸을 벌떡 일으켜세우고 덧이불을 몸뚱이에 휘감았다. 그녀는 천천히 구석 쪽으로 걸어가서 쓰러져 있는 얼굴과 그의 멍청하게 뜬 놀란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에 누웠다.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로자샤안은 덧이불의 한쪽을 풀고 자기의 한쪽 젖가슴을 드러냈다. "이걸 빠세요. 그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더 바싹 몸을 들이대고 그 남자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 됐어요. 어서요!"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아래로 들어가서 그를 받쳐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헛간 위쪽과 건너쪽을 쳐다보았다. 딱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계속된 허기와 고난으로 인해 태아를 사산한 여인이 굶주린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는 장면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세계 대전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인류 공멸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던 심층 원인에는 바로 이 같은 타자애가 스며 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여기서 타자를 응시하는 눈빛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금방 눈치챈다. 이 밖에도 우리는 주체와 타자와의 의식적․무의식적 스밈과 짜임으로 문학 텍스트가 형성된 사례를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다"라는 명제를 문학적으로 실천한 황지우나 "그는 나였다"를 소설화한 이인성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병의 메타포도 바로 주체와 타자의 상생 지평과 연관된다. "창조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얘길 거"5라는 『토지』 속의 한 인물의 말을 받아서 표현하자면, 타자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주체와 타자의 상생 지평에 대한 응시야말로 문학 상상력의 기본 요소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3. 경쟁과 상생

문학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타자의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철학에서 타자의 윤리학을 강조하는 동안 현실에서는 오히려 경쟁의 논리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어쩌면 문학과 철학에서의 타자의 진실을 향한 노력은 주체 중심의 경쟁 논리가 만인 대 만인 사이의 투쟁 관계를 조성하는 현실에 대한 반명제였는지도 모른다. 세계사의 어제와 오늘을 일별해보면 인류가 정말 힘겨운 시간들을 어지간히도 많이 보내왔음을 잘 알게 된다.

지난 1992년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쟁탈 경쟁이 본격화된 지 500여 년이 지난 지금 경쟁과 정복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심화되는 추세다. 500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공할 만한 살상 무기를 현재 끔찍할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도한 경쟁이 인류를 공멸의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지적해야 한다. 신대륙 착륙 이후 유행했던 정복과 지배를 버리고 협력과 응집의 정신으로 거듭날 준비가 아직 부족한 편이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칸트가 주장했던 이상주의 사회에 인류는 전혀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민족․도시․국가․지역별로 나뉘어 파워 집단에 속하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의 간극이 계속 확대되는 추세가 아닌가. 현재 각국의 파워 엘리트 그룹은 경쟁 이데올로기와 세계화 추세를 최고의 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파워 집단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구촌의 분열을 방지할 수 있는 협력의 틀을 새로 창안할 수 있을까. 지구촌의 환경을 보호하고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해 진정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심각하게 따져볼 일이다.

1992년 유엔이 개최했던 리우 정상회의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위원회(BCSD)가 보고서를 통해 강조했듯이, 생태학적 측면을 도외시한 무한 경쟁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변화와 인류의 욕망에 결코 부합할 수 없다. 무한 경쟁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가 개인 또는 정부의 유일한 동기 부여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추세 속에서 경쟁 자본주의가 다시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새 천년 지구촌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환경 분야의 위협 요소를 검토하면서 리스본 그룹은 "경쟁 제일주의"를 가장 파괴력이 큰 위협 요소로 꼽았다. 적확한 지적이다. "경쟁 제일주의가 확산되면서 국가 내부적으로는 빈부 격차가 계속 커지고 외부적으로는 지구촌의 분열이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인류의 공멸을 방지하기 위해 지구촌을 공동으로 경영할 수 있는 새로운 의사 소통 네트워크, 즉 지구촌 공동 계약이 맺어져야 한다"고 제안한다.7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상상적 제안이 우리에게 진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우, 우, 우리는 마, 마라톤 선수, 선수가 아닙니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윤수였다.

"모, 모두 승리, 승리하면 누가, 패, 패배합니까?"
경규가 뛰어나와 윤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님들, 또 앞자리의 3학년 남학생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윤수가 마이크를 움켜쥐고 외쳤다.

"자기, 자기, 초, 촛불을 꺼! 꺼! 그러면 아, 아무도 패배하지 않……"

아아, 나는 또다시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3학년들이 무더기로 달려들어 윤수를 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문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놀랍게도 이들은, 뜯어말리는 선생님들까지 거칠게 밀쳐냈다. 미친놈! 빌어주진 못할 망정, 이 따위가 후배야? 네 촛불이나 꺼라 임마! 아우성. 갑자기 밝아지는 실내. 눈부신 불빛에 퍼뜩 드러난, 초라하게 흩어진 양초 토막들. 자기 아이를 찾는 학부형들의 외침. 어서 모두, 자리에 앉아라 앉아. 가녀린 촛불을 든 채, 여학생들의 흐느낌.

그리고 길고 긴 나의 흐느낌.


최시한의 연작소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한 장면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학생들의 "승리"를 비는 "기원의 밤" 행사에서 일어난 문제적 인물 윤수의 행위와 발언은 매우 두드러진다.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의 승리를 축원하는 촛불을 켜고 있는데, 윤수는 "각자의 촛불을 끄면 아무도 패배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현실이 강요하는 경쟁의 논리에 포박되어 있는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 그것은 명백한 모반이다. 하고 보니 "미친놈!"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아수라장이 될 것은 차라리 당연하다. 이런 상황을 놓고 최시한의 서술자는 "정말 이상스런 형제들"이라고 적는다. 경쟁의 촛불과 상생의 호소가 어울리지 못하고, 의사 소통의 네트워크를 마련할 수 없을 때, 이상스런 형제들일 수밖에 없다.

현재 인류는 예의 이상스런 형제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통의 효율적인 형식과 내용이 요구된다. 아득히 먼 공간적 거리를 초극하고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의 심연을 건너 상생의 지평을 상상해온 문학적 진실의 몫이 다시 빛을 발해야 하는 이유는 이 점에서도 아주 분명하다 하겠다.



4. 디지털 신화와 생태학적 신화

흙의 문명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인공 위성의 문명화가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지상 고속도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세계 정보 고속도로가 경쟁적으로 질주하고 있는 게 오늘의 추세다. 이런 세계 정보화의 주역은 당연히 컴퓨터다. 컴퓨터는 확실히 짧은 시간 안에 인간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바꾸어놓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컴퓨터를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컴퓨터를 통해 생각하며, 컴퓨터로 자기를 표현하며 컴퓨터와 더불어 대화하고, 또 무엇보다도 컴퓨터로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된 시대, 이렇게 컴퓨터가 보편적 매개가 되고 있는 시대와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로 인한 변화는 이전의 어떤 변화보다도 광범위하고 혁명적인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의 도래와 더불어 출렁이는 세계의 새로운 격랑이 가히 혁명적이라는 것은, 컴퓨터가 하나의 도구거나 대상의 성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인간과 상호 작용을 하려고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이다. 혹 상호 작용을 넘어서 인간적 질서를 전복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컴퓨터는 이제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삶에 있어서 전본질적인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보르헤스는 「책」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고,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이며,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 라고 썼다. 이제 컴퓨터 환경에서 사이버네틱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전자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 이상일 것이다.

컴퓨터는 스스로 경계 없는 제국을 만들고 무한한 자연을 형성하려 한다. 기존의 "천연 자연"이나 "인공 자연"과는 질적으로 다른 "디지털 자연"에서 인간이 거주하도록 명령할지도 모른다. 기왕의 문학은 대체로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왔던 게 사실이다. 특히 엘리엇의 "신성한 숲"이라는 명명이 암시하듯, 광활하고 원초적인 신성한 공간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시정신의 본령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지적 자연으로서의 신성한 숲은 인간 문명의 전개에 따라 훼손되었고, 현상적으로 회귀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절박한 그리움이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인공 자연"에의 정조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인공 자연"이란 태초에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공간에의 상상적 참여 결과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이고, 또 현상적으로 훼절된 자연 상태에 대한 반명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공 자연"과 대결하는 "디지털 자연"이란 무엇인가. 컴퓨터의 실험적 조합과 상상적 조작에 의해 조성되는 가상 현실이요, 사이버 시공이다. "인공 자연"이 태초의 자연 상태를 상정하고 참조하는 데 반해, "디지털 자연"은 그 어떤 자연 상태도 선험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기성의 참조의 틀이 없으므로, 당연히 그 지시 대상도 기존의 어떤 상태에서도 찾아질 수 없다. 일련의 과학소설들이 설정한 미래의 자연 상태는 바로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디지털 자연"은 그러니까 현실적 질료와 상상력 질료, 그리고 과학적 질료와 환상적 질료들 사이에서 무매개적인 화학 반응의 결과물이다. 아마도 컴퓨터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메시지는 이 같은 성격의 "디지털 자연"을 무한 증식, 무한 복제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이 디지털 자연을 향한 화학 반응은 또한 빠른 속도의 정치학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속도의 정치학에서 뒤지면 이미 용도 폐기될 운명에 처해질 구식 자연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8

논리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디지털 신화의 시나리오는 끝이 없을 것이다. 문학의 창작이나 소통과 관련해서도 디지털 신화의 경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여러 논자들에 의해 거론된 것처럼 말이다. 가령 컴퓨터의 통신 시스템에 의한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 활발해져 역동적 창작 과정을 보일 것이라든지, 유기적인 개체 생명과는 다른 조립 생명을 지닌 무수한 하이퍼텍스트들이 수시로 생산되고 소통될 전망이라든지 하는 등의 논의만을 떠올린다 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질혼성(異質混成), 내파외합(內破外合)의 글쓰기 과정에서 비선형화, 네트워크, 시뮬레이션, 부분의 독자성 혹은 컨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운 부분 텍스트 양상들이 출몰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진정한 문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논의도 있었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소비 문화를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가 문학적 글쓰기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심미적 이성에 의한 간접적 인식력과 상상력으로 작품을 읽던 기존의 경향과는 달리, 복합 매체 환경이 제공하는 향유의 직접성만을 선호하는 대중들이 늘어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학 제도 또한 다변화될 것이고, 그에 따라 무수한 보통 작가들이 명멸하면서 저자의 권위가 현격하게 약화될 것이다.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은 복합 매체 환경에서 완벽하게 실현될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방향만으로 치닫는 질주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컴퓨터가 디지털 신화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 대안에서 생태학적 신화도 길항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을까. 혹은 디지털 자연이 원초적 자연을 참조하지 않고 멀어지려고 하는 경향이 오히려 원초적 대지의 자연과 소통하고 대화하려는 역설적인 방식은 아닐까. 물론 순진한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상상력은 이 순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 문명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의 측면에서, 생태학적 사유나 상상력이 주목된다. 확실히 현재의 생태 위기는 우리 삶이 터잡고 있는 근대 물질 문명과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게 사실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말이다. 저간에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 생명과 비생명, 자연과 인간, 몸과 마음, 초월과 자연 등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했던 것을 반성하고 부정하려 한다. 그리하여 전일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인식론을 견지한다. 생태학적 세계관, 가치관은 인간 중심적 경쟁의 논리를 부정하고 상생의 지평을 지향한다. 또 생태학적 윤리학은 주체 중심주의를 부정하고 타자의 윤리학을 추구한다. 이를 통해 지구의 위기를 경고하면서 진정한 지구 "살림"의 지평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미 말했던 대로 근본적이다. 디지털 상상력이 전위인 것처럼 생태학적 상상력 역시 우리 시대의 전위라고 말하면 지나친 역설이 될까. 가령 디지털 자연에 대응하여 대지의 나무들을 노래하는 시인 정현종의 서정시가 전위적이라는 것은 생태학적 세계관의 근본성과 관련된다. 「세상의 나무들」에서 그는 생명의 신명을 즐기는 우주수(宇宙樹)가 되어 하늘 높은 데로 솟아오른다.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세상의 나무들」 전문

정현종의 나무는 생명의 에너지로 충일해 있다. 그 우주의 나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기운을 연결하며 생명의 환희로 모든 것을 춤추게 한다. 또 상승과 확산 운동을 통해 세상의 가슴을 첫사랑의 가슴처럼 만든다. 이 같은 나무 이미지는 상승 지향의 소망을 격정적으로 담고 있었던 정현종의 바람의 꿈이 심화되고 자연 상태에서 구체화된 결과다. 생명과 사랑의 나무들과 숲에서라면 거친 문명에 지친 영혼들도 안식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다. 오늘의 문명 현실에서 얼마나 도전적이고 전위적인 상상력인가. 이런 상상력에 힘입어 우주와 세계 그리고 인간은 새로이 숨통이 트이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지 않겠는가. 디지털 환각만이 환각이 아니다. 이 생태학적 상상력이 응시하는 환각 지대의 진실이 한편에서 문학의 "살림"을 넉넉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한다. 요컨대 디지털 신화와 생태학적 신화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쌍두마차라 할 수 있다. 이 양쪽의 전위들이 그 사이에서 길항과 긴장의 다양한 패턴과 상상력을 길어낼 것인즉, 그 결과도 얼마든지 전위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5. 미메시스와 환상

앞에서 본 정현종의 「세상의 나무들」은 있는 생태에 대한 미메시스에서 출발했으되, 있어야 할 진실의 생태를 환각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한 경우다. 말하자면 미메시스와 환상의 빈틈없는 교호가 이 시의 성취를 이끈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상상력의 광휘를 보게 된다. 있는 실재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넘어선 "가능 세계possible world"를 투시하고 상상할 때 우리는 다른 많은 삶을 살 수 있다. 가령 똑같은 씨앗에서 난 풀들이라도 그 생태 조건에 따라 다르게 자라지 않는가. 나무들 역시 그렇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경우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같은 재료로 요리를 하더라도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의 음식이 된다. "하나에서 비롯된 많은 결과물`many in one"의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작가나 시인 역시 같은 것을 두고 다르게 보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작가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경험 세계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 세계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위한 필요 조건의 하나가 우선 상상의 눈이다.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의 이야기에서 그 상상의 눈은 이렇게 작동된다. 처음에는 "사람들과 새들, 물과 돌"을 보던 눈이 "생각과 꿈, 환상과 번쩍거리는 섬광"을 보고, 또 "죽음처럼 무서운 침묵의 밤"을 응시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어둠의 벽"을 뚫을 수 없다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 절망과 응시의 반복으로 상상의 눈은 더욱 빛나고 깊어진다.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환상의 우주를, 그 깊고 광활한 가능 세계를 응시하려는 눈 그물들은 호메로스와 오비디우스 이래 세계 문학의 기본적인 자양분이었다. 환상의 영역이나 가능 세계의 공간은 그 자체로 인간의 꿈과 욕망의 존립 근거였다. 호메로스에서 보르헤스나 마르케스까지, 혹은 「단군신화」에서 「금오신화」를 거쳐 최근의 판타지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학사는 그것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세기의 한국 문학은 비교적 환상에 인색한 편이었다. 근대의 경험 이후 현실적 과제 혹은 경험의 진실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국권 상실과 식민지 강점, 분단과 전쟁,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갈등의 체험 등이 환상의 가능성 이전에 경험의 진실을 탐문하도록 유도하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경험의 진실은 상상의 진실을 억압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지배적 질서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도전의 방식으로 환상성과 환상적 기법들이 문학에서 적잖이 나타나게 된다. 곧 "억압된 것들의 귀환 장정"의 여러 방식 중의 하나가 문학에서 환상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상인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형적 서사의 한계 인식, 관습적인 리얼리즘 서사에 대한 불신, 경험적인 리얼리티 파악의 곤혹스러움 혹은 경험적 진실의 재현 불가능성, 현실과 허구 혹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어려워졌으며 잠재적 현실이고 꿈꿀 만한 가능 세계인 환상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현실을 탐문할 수 있다는 생각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게다가 디지털 테크놀러지의 약진이 가져온 가상 현실의 실감 혹은 디지털 복합 매체와 경쟁이 불가피해졌다는 사태 파악이 환상이란 문학의 본래 우주를 그리워하고 응시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요컨대 환상의 진실은 미메시스 혹은 경험의 진실을 반성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타자의 상상력이요 타자의 형식이다. 그것은 인류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경로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며, 또한 그 동안 억압되었던 것들이 돌아오면서 넓혀지고 온전해지는 가능 세계의 공간이다. 가령 아르헨티나 출신의 환상적 리얼리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경계의 이분법적 사고와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추구를 보이던 무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적이고 환상적인 소설 작업을 통해 그 순진성을 조소하고 해체하면서 중층적이고 역동적인 상상력을 보여준 작가가 바로 보르헤스다. 그의 「거울 속의 동물들」은 환상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황제 시대에는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지금처럼 단절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성질과 색, 그리고 형태가 서로 다양한 작은 통로들이 있었다. 거울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평화를 지키며 거울을 통해서 서로 왕래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거울 속의 사람들이 인간들을 공격해왔다. 그들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 비린내나는 처절한 전투 끝에, 인간은 황제의 신비한 능력에 힘입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황제는 침략자들을 몰아내어 거울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인간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서 하라고 명령하였다. 즉 그들의 힘을 빼앗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 본연의 형상까지도 빼앗아, 인간과 사물에 종속된 단순한 그림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는 이 신비한 동면 상태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은 바로 그 "물고기"다. 거울 깊숙한 곳에서 선이 보일 것이고 그 선의 색깔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 다음에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점점 우리들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우리 행동을 흉내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유리벽을, 혹은 금속으로 만든 벽을 깨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거울 속의 사람들과 물 속의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인간에게 대항할 것이다.

여기서 거울 속의 동물들 이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합의된 리얼리티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다. 말하자면 거울의 미메시스 체계 혹은 우리가 현실에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기본 원칙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전도되어 있는 것이다. 캐서린이나 게리 F. 울프 등은 그럴 때 환상이 성립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합의된 리얼리티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보르헤스는 거울 속의 세계라는 새로운 2차 세계가 창조될 수 있었다. 이때 그 2차 세계는 나름의 내적 리얼리티, 즉 내적 논리를 지닌다.

이미지 및 기호 변이의 네 단계에 관한 보드리야르의 논변은 널리 원용된다. 1) 기본적 리얼리티의 반영; 2) 기본적 리얼리티에 마스크를 씌우고 뒤집는 것; 3) 기본적 리얼리티의 결여(부재)에 마스크 씌우기; 4) 기본적 리얼리티와 전혀 무관한 경지.9 여기서 1)이 소박한 미메시스의 단계라면 4)에 이르면 가상 현실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새롭게 생성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요즘은 디지털 복합 매체에 의해 가상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지만,10 그 같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체험 이전에도 환상은 4) 쪽의 새로운 차원에서의 중층적 리얼리티를 형성해왔다. 요컨대 환상은 문학과 인간의 오래된 심층 에너지에서 발원되어 다채로운 분광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근대성을 초극할 수 있는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다. 언제나 1)의 세계 즉 소박한 미메시스의 세계와 대화하면서 환상은 많은 문학적 에너지를 지닐 수 있었다. 역으로 미메시스도 환상과 심층적인 대화를 통해서 유현한 상상적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마디로 미메시스와 환상의 대화는 문학의 "오래된 미래"다.



6. 새로운 문학 지도를 위하여

타자의 윤리학이나 상생의 정치학, 디지털 신화와 생태학적 신화의 긴장과 조화, 미메시스와 환상의 대화 등을 동시대의 중심 화두로 여기는 나는 문학 상상력과 태도의 텃밭을 거기에 두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이미 말한 대로 타자애보다는 주체의 독선이, 통합보다는 분리가,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포괄보다는 배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보다는 공멸의 위기가, 반성적 사유와 행동보다는 무반성적 편견과 타락의 경향이 두드러진 것이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거나 다가가지 않으려는 "섬"처럼 존재하기 쉽다. 개개인이 피차 섬처럼 존재할 뿐 아니라, 그런 섬 같은 개인들 사이에 그 누구의 발길도 숨길도 닿지 않는 섬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고 노래했다. 2행으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시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은 편이다. 단절된 섬의 존재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 단절의 틈을 메우고자 하는 시인의 몽상 의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섬은 행복하지 않은 섬이면서 동시에 행복한 섬이라는 양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단절 상태에 있을 때 그 섬에 행복이란 단어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시인의 꿈이 그 섬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숨결을 아로새겨놓는다면 행복한 공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단절 상태에서 정지된 두 사물은 만날 수 없다.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다가서는 교감과 구체적인 율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인을 일러준다.

그런 교감과 율동으로 경계선의 대화를 진정으로 시도할 때 우리 시대의 문학은 새로운 상상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언급한 네 가지 경계선은 경우에 따라 서로 포개어지기도 할 정도로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또 그것들은 동시대의 중핵적인 관심사이자 이미 오래된 것들이기도 하다. 여러 차례 "오래된 미래"라는 수사를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좀 포괄적이고 성긴 논의이긴 했지만, 위의 네 가지 경계선은 가장 동시대적인 것이면서 아울러 가장 "오래된 미래"의 것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문학의 전위라면 마땅히 지혜롭게 실천해야 할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 경계선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서성거리며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문학의 지평, 삶의 시-공간을 꿈꾸고 열망해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시-공간을 회복하고 인간과 문학의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일이 한갓 잃어버린 단추를 되찾는 일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경계선에서의 고난스런 대화를 좀더 오랫동안 향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여 마침내 경계를 넘어서 창천을 비상하는 상상의 장쾌한 날갯짓을 우리가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1세기의 문학 지도는 아직 비어 있다.


1. 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I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Oxford; Basil Blackwell, 1989), p. 59.

2. E. Husserl, 이종훈 옮김, 『데카르트적 성찰』(철학과 현실사, 1993), pp. 153~58. 「모나드론적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선험적 존재 영역의 해명」 부분 참조.

3. 레비나스의 주체와 타자의 이론에 관해서는 강영안, 「레비나스의 주체와 타자」, 『주체는 죽었는가: 현대 철학의 포스트모던 경향』(문예출판사, 1996), pp. 223~50 및 서동욱, 「주체의 근본 구조와 타자: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79호(민음사, 1996년 봄), pp. 90~104 참조.

4. G. Deleuze, Logique du sens(Minuit, 1969), p. 355. 여기서는 서동욱, 앞의 논문, p. 101에서 재인용했음.
5. 박경리, 『토지』 4부 1권(솔, 1994), p. 363.
6. 리스본 그룹, 채수환 옮김, 『경쟁의 한계』(바다출판사, 2000), pp. 185~86.
7. 앞의 책, p. 183.
8. 졸고, 「디지털 복제 시대의 문학」, 『타자의 목소리』(문학동네, 1996), pp. 226~27 참조.
9. Christopher Norris, What? Wrong with Postmodernism(Baltimore, 1990), p. 172.
10. 김열규는 "조물주가 만든 세계와 함께 인간이 만든 세계〔가상 현실: 인용자〕가 이제 개벽할 것"이라며, 이 "새로운 창세기"에 가상 현실에 힘입어 문학의 성격도 많이 달라질 것임을 지적한다: "문학도 예외일 수 없다. 일찍이 "가능한 세계"를 허구로 창조한 문학은 그 자체의 지표로서 "허구의 종착"으로서 가상 현실을 미리 그 시초에서부터 내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회화든간에 재현된 것의 의미를 그것들의 뒤에 또는 바탕에 있는 것으로 예상된 무엇인가에 연관지었을 때 그것이 가령 역사라고 불려지든 아니면 시대 또는 시대 정신이라 불려지든 어떻든 "리얼리티"란 말과 무관할 수는 없었다. 데리다가 바로 "로고센트리즘`logocentrism"이라 부른 이 경향은 서구 문화사에서 일관되게 지켜져온 것이지만, 이제 바야흐로 재현 또는 표현된 것과 더불어 비로소 실존하게 되는 리얼리티를 우리들은 가상 현실에서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가상 현실은 그 동안의 예술사가 내적으로 소망해온 또 다른 리얼리티다. 실존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이제 예술을 위해 실존하는 "유토피아"가 된 것이다"(김열규, 「정보화 사회와 문학」, 『인문사회과학논총』 4권 1호(인제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97. 12), pp. 50~51).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