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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이 글은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http://cafe.daum.net/alhc) 게시판을 그간 뜨겁게 달궜던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던 주인장의 글을 다소 각색한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몇몇 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관련 기록이 너무나도 적다는 점에서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 극과 극을 내달리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대륙백제는 있다, 없다부터 시작해서 그 기록은 거짓이다, 사실이다...또한 백제와 싸운 존재는 북위가 맞다, 아니다 등등 으로 말이다. 당연히 관련 기록이 적으니 이런 탁상공론이 이뤄지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쉽사리 포기하지 못 하는 것은 이 주제가 상당히 매력적인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장은 여기에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 어떤 장황한 글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간의 연구성과를 비판한다거나 주인장이 새로운 어떤 가설을 내놓을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주인장이 그동안 일천한 실력으로 살펴본 몇몇 문헌자료들에 대해서 다시금 정리하면서 기존에 온라인상에서, 혹은 학계에서 무수히 논의되어왔던 부분들과는 조금 다르게 이 문제를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어떤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이 될테고 차후에 주인장이 이 주제로 논문을 쓸때 참고할만한 것들을 몇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볼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분명 4개의 사서에 이 기록이 실려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록이 당시의 전쟁 상황 전부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정보만 제공해주는 것이지 전쟁 장소나 전쟁 상황, 전쟁 전후 상황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사를 검증 혹은 분석하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근거를 제시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천한 실력을 지닌 주인장이 각종 문헌을 찾아봤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적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근거 첫번째다. '관련 기록이 너무 적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부분을 살펴봐야만 할까. 가장 대표적인 토론쟁점들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험윤의 대상에 대한 점
2. 북위의 해양력 보유 유무(정도가 아님)
3. 당시 백제의 국력과 북위와의 전쟁 가능성
4. 북위 혹은 백제의 동원병력
5. 북위, 백제의 전쟁장소와 전쟁과정
일단 1번을 논하기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록의 진위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즉,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사서에 남아있지만 그 기록이 남조측 기록에만 있다는 점, 백제의 외교문서를 통해 남조가 정보를 접한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아예 있지도 않은 일을 적었을 가능성, 한발 물러나 북위가 아닌 고구려와 싸웠거나 아니면 수십만 기병이 아닌 국지전 수준의 작은 전투를 치뤄놓고는 승전을 크게 부풀렸다고 하는 의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정말로 문헌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비난 수준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인장은 이 글에서 앞의 기록들을 사실이라 판단하고 글을 써나가도록 하겠다.
그렇게 봤을때 그 다음으로 해야할 것이 문헌에 나온 험윤의 대상에 대한 내용과 왜 그 기록들이 북조측 기록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인장은 중국이고 한국이고 일본이고 사서를 남길때 그냥 맘에 안 든다고 막 빼지는 않았다고 본다. 특히 본기(本紀) 기록에 있어서는 더욱더 말이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논문이나 책을 쓸때는 항상 목차를 짜고 어떤 내용을 어떤 식으로 쓰겠다고 서술방법이나 참고문헌 등을 정해둔다. 이는 당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을테고『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중국측 사서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즉, 나름의 편찬원칙을 파악하지 않으면 그 사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주인장은『삼국사기』에는 '비류백제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삭제'하고『일본서기』에는 '비류백제에 대한 기록이 다 살린다'는 식의 편찬원칙이 적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삼국사기』에 나온 기록이「광개토호태왕비」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며(반대로 후연에 대한 전쟁 부분은 오히려『삼국사기』에만 나온다) 고고학적으로 전라도 일대에 존재한 것이 확실한 어떤 정치체가『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게 주인장이 생각하고 있는 이원화된 백제사의 일부다.
그렇게 봤을때『삼국사기』에 왜 같은 사건이 한쪽 본기에는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없었을까, 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어떤 한 국가의 사관이 쓴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참 후대인인 고려인 김부식이 편찬한 사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한 국가의 사관이 다른 나라의 역사까지 포함한 사서를 썼다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은 지우고 유리한 것만 남겼다는 것을 아주 당연시 여길 수 있지만『삼국사기』는 분명 그런 사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위측 기록에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빠졌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일부러 지웠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학계에서도 북위측이 자신들의 패배를 기록에서 완전히 삭제했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시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전쟁과 관련된 기록이 너무 없으므로 이 부분은 삭제되었어도 뭔가 어떤 기준 하에 일관적으로 삭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험윤이라는 존재를 고구려와 바로 등치시킬 수도 없다고 본다. 역시 기록에 없기 때문이다. 고로 문헌만 갖고 살펴봐도 이 기록이 사실이 아닌 것을 적은 것이다, 혹은 백제와 싸운 것은 북위가 아니라 고구려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시 문헌을 싹 살펴보는 것이 우선적이라 본다. 그 다음에 동일 사건을 기록한 2개 이상의 기록이 있는지, 아니면 동일한 사건이 다른 시각에서 정리된 기록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 덧붙이자면『삼국사기』에는 백제와 북위의 전쟁이 488년 딱 하나만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분명 중국측 기록을 보고 김부식이 넣었을 가능성 혹은 본래 있었던 기록들 중 그것 하나만 살렸을 가능성 2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위와 백제가 한번 이상 싸웠고 한번 이상 싸운 기록이 중국측 기록에 분명히 있는데 왜 김부식은 그거 하나만 선택했느냐는 점이다. 주인장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검증할 수 있다면 김부식이 선택한 그 기사가 거짓보다는 기록된 사실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당대의 대표적인 관학자며 유교주의적인 사관에 맞춰 기존 기록을 고칠 정도로 기록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다룰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로 이 부분은 먼저 기록이 어디어디에 남았으며, 왜 그 기록들에 남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게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그런 기록을 남긴 사서의 편찬원칙을 이해하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중국측 기록뿐 아니라『삼국사기』에 기록된 한줄의 기사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기록들을 분석해낸 다음에 전쟁에 대한 일련의 시나리오를 설정할 수 있다고 보겠다. 저는 나름대로 이런 과정을 거쳤을때 북위와 백제가 당시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지 전쟁을 수차례 벌였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검증과정 갖고는 단순히 '백제와 북위가 모년에 전쟁했다' 이상의 확실한 결론은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럼 그 다음으로 많은 논쟁이 되는 북위의 해양력 보유 유무 여부에 대해서 한번 언급해봐야겠다. 대부분의 대륙백제 지지론자들은 당시 유목민족이 세운 북위가 대규모 수군을 보유하기란 불가능하며 당연히 그 전쟁은 북위가 상륙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온 것이 아니라 백제가 중국에 차지하고 있던 땅에서 벌어진 것이라고들 주장했다. 이는 초기 한국사 연구자들이 백제는 대륙에 땅이 있을리 없다고 하면서 당연히 북위가 대규모 상륙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다, 라고 해석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연구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북위의 해양력 보유 유무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하게 양극단에 치닫은 연구성과를 내놓는 것으로 끝맺음해야만 할 것인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를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재작년 말쯤에 창녕 비봉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B.C 8,000년 전의 배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고학적으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석기만으로도 통나무를 가공해 배를 만들어 타고 다녔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물론 그 배를 타고 연안항로를 따라 멀리까지 다녔을지는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암튼 해양고고학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성과를 봐도(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천 늑도유적) 이미 오래전부터 해양을 따라 다양한 세력들이(신석기시대이므로 정치체라든가 소국이라는 표현보다는 세력, 집단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 합니다) 교류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위가 해양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하겠다. 즉, 북위의 수군 양성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간 북위가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이므로, 기병이 주력이므로 등등의 이유로 북위의 한반도 남부 도하작전에 대해 부정했던 것은 올바른 검증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인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광범위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위와 후대의 수 · 당을 자주 비교하곤 하는데 주인장은 북위와 수 · 당의 차이를 군사정책 입안자의 인식 차이로 규명하고자 한다. 한때 전쟁사 분야에서 '기술결정론'이 대세였던 때가 있었다. 즉, 기술이 우수한 집단이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타집단과의 대립에서 승리한다는 식의 주장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기술결정론은 비판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술력보다 오히려 전쟁에 대한 그 집단의 인식이라는 점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똑같이 강철을 다룰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두 집단이 있다 하더라도 한쪽은 그 기술력으로 전차를 만들고, 다른 집단은 그 기술력으로 철기병을 만들었다고 치자. 전쟁의 승패는 뭐 양쪽 집단의 전략 전술 차이에서 올 수 있겠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 혹은 무기와 같은 기술적인 부분은 분명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인식이 바로 이러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기술력을 갖고 만들 수 있는 무기들이 적혀있는 메뉴판에서 양자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프랑스는 마지노선에서 알 수 있듯이 느리지만 질서있고 차근차근 진행되는 전쟁방식을 선호했었는데 그 결과 프랑스의 전차는 육중한 장갑에 대형포를 갖춘, 그야말로 보병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독일은 이에 반해 1명이 아닌 2명이 탈 수 있고, 경장갑에 가벼운 포를 달았으며 무전시설까지 갖춘 전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차부대' 혹은 '전격전'이라고 불리는 단어들이 이때 생겨나게 되었고 독일은 전쟁 초기 주변 국가들을 월등히 압도하는 전략 전술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양자의 차이는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개념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뭘 선택하느냐...
그렇게 봤을때 주인장은 북위의 군사정책 입안자들 역시 이런 선택을 위해 고민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단 북위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든 다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스타크래프트(이 게임 유명하니 다들 아실 듯...)를 할 때도 두 게이머가 동일한 종족으로 시작해서 어떤 테크를 탈지, 혹은 멀티를 할지, 유닛을 뽑을지 여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결정적으로 비슷한 유닛끼리의 대전에서는 전략 전술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전쟁사 분야에서 이런 식의 문화적인 접근은 그동안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외국이든, 한국이든. 주인장은 지금까지 이런 식의 전쟁에 대한 인식, 전쟁에 대한 개념적인 면으로 전쟁사(특히 한국사에서)를 바라본 연구성과를 본 적이 없다.
다시 돌아와서...화북을 제패하고 다양한 집단을 수용하고 인구 1,500만을 거느린채 제국으로 발돋움한 북위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은 국경 수비, 무기 개발과 보급, 군대의 확충과 타국에 대한 원정 등의 다양한 안건들을 두고 고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중에는 동방의 고구려 혹은 백제와의 대립도 들어있었을테고 북방의 유연, 서역제국들, 남쪽의 여러 왕조들과의 관계도 당연히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북위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은 전체 군사력을 100이라고 했을때 과연 수군의 비중을 얼마나 뒀을까? 라는 고민을 해봤다. 물론 주력인 기병의 비중이 가장 컸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인장은 그 상황에서 강상수군은 어느 정도 보유했겠지만 원양해군까지는 보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앞서 언급했지만 원양해군이 없던 북위가 새롭게 원양해군을 육성하기보다는 당장 주력인 기병을 육성하는 것이 보다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자면 수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은 남조를 몰아낼때 강상수군의 활용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대만을 정벌할때 나름대로 원양해군을 활용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수가 처한 국제적인 상황에 맞춰 수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이 수군을 양성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이후 수는 대만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고구려 정벌때도 수군을 운용하지만 대만과 고구려는 엄연히 달랐고 그 결과, 수의 수군 활용이라는 군사정책 적용은 실패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당대에도 이어지는데 당은 수의 전례를 본받았고 나중에는 1,900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실어날라 백제를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에도 그 2배에 달하는 대군을 실어나르게 된다. 결국 패했지만 말이다. 암튼 당시 당과 고구려(백제도 물론)의 군사 정책 입안자들은 서로 다른 전쟁개념을 갖고 있었기에 당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당황했던 것은 분명한 듯 싶다. 즉, 주인장은 수군 육성은 국력에서 찾을 문제가 아니라 해당 국가의 정책 입안자들의 의지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보고 있다.
그간 온라인상 토론에서도 언급이 많이 되었지만 국가 정책입안자들은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군을 양성했고(이는 곧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군을 육성할 여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수군을 대규모로 양성할 수 있음에도 수군 대신 육군 위주의 전쟁을 치루기도 했으며(수와 초기 당의 고구려 침공시) 먹고 살 것이 없어도 배를 만들고 군사를 실어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몽골의 강요에 못 이겨 대규모 함선을 만든 고려처럼). 즉, 배를 만들 수 있고 혹은 배를 만들어 뭐를 얼만큼 싣고 못 싣고를 떠나서..."배를 만들어서 어디를 치자!"라고 결정을 했을까, 안 했을까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당시 북위가 백제를 배 타고 공격했다면 누가, 어떻게, 왜 그랬는지를 밝히는게 수순일 것이다. 단순히 당시 그럴만 했으니까 혹은 그럴 여력이 됐으니까 그랬다, 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억지요, 진정한 공부이자 토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가 되면 등자가 개발되어 전격적으로 보급되는 시기인데 그 이유로는 흔히들 선비족 지배자들이 한족(그냥 화북에 있던 피지배층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겠다)을 징집해 기병을 육성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평소에 말만 타고 살던 사람이 아니라면 말 위에서 움직이기는 커녕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해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족들을 대거 징집해 기병을 육성하기 위해서 오호십육국 시대(각종 유목 수렵집단이 화북에서 활약하던 시기)에 등자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인 것이고 주인장 역시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실제 가장 빠른 등자 역시 이 시기로 소급되고 있고 말이다. 한때는 중장기병이 개발되면서 등자가 사용되었다고도 했지만 실제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등자 없이 말을 몰 정도로 능숙했으며 이는 북방 유목국가의 중장기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즉, 당시 북위가 활약했을 무렵의 대부분 국가들은 중장기병(騎射가 아닌 장창을 들고 돌격하는 식의)과 등자를 활용했고 이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당대에 월기(月騎)라 불리는 경기병이 다시 등장한 것, 원정군의 주력을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 편성했다는 것이 그래서 획기적인 사실이 아닐까 한다.
고로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북위의 군사정책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뭐 예를 들면, 북위가 백제와 싸우기 전 원양해군을 운용했던 경험이 있는지, 아니면 원양해군을 운용하기 위해 해안지대에서 배를 건조하거나 인원을 동원한 기록, 혹은 산동에서 병력을 발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는 기록 등이 있는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수 · 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 수 ·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사서에서 지운 흔적이 역력했는데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당시의 전쟁 상황에 대해서 추론이 가능할 정도로 약간의 자료나마 남아있다. 하지만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그렇지 않다. 이는 정말 어떤 의도 하에 일관된 원칙에 맞춰 지워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만 근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장은 그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고 정리한 논문이나 책을 보지 못 했다. 게다가 이번에 까페에서 벌어진 토론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이 점을 먼저 파악해야만 문헌사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다음에 원양해군의 규모나 그것을 동원할 수 있는 북위의 국력이나 당시 이런저런 면들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논하지 않고 하는 토론은 그야말로 '사상누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그간이 토론에서 이런 기본적인 부분조차도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조금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음으로는 험윤을 고구려와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유원재 선생님은 험윤을 단호하게 고구려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서 한발 물러나 북위와 고구려의 연계 가능성에 대한 검토도 있었다. 즉, 북위가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연안항로를 따라 백제를 공격했을 가능성, 북위의 사주를 받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고 이를 물리친 백제가 그와 같은 전공을 자랑했을 가능성 등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본래 남겨진 문헌은 살펴보지 않고 추론에 불과한 결론을 이끌어낸, 어떻게 보면 주객이 전도된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암튼 그런 언급이 있는만큼 그 가능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 무방할 듯 싶다.
그리고 이 역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북위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입장이 되어봐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5세기 후반 북위가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을 가능성에 대해서 한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잘 알려진대로 이 부분은 관련 기록이 없는만큼 북위와 고구려 양자의 입장을 다 살펴봐야 하겠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물질자료에 대한 해석이 아닌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당시의 상황을 아주 간단하게 봤을때(고구려 · 백제 · 북위 삼국간의 상황만 살펴봤을때) 고구려는 이미 475년 남으로 한성백제를 멸망시켰고 이후 금강 일대에서 백제 왕조는 다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는 479년 유연과 지두우를 분할하고 이듬해에는 호명성을 비롯한 신라 일대에 대해서도 정복전을 벌인다. 즉, 이 시기 고구려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은 주변 세력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인 우위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내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마치 오늘날 미국의 군사정책 입안자들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암튼 그 상황에서 백제가 북위와 대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면???
439년 화북을 완전히 장악한 북위는 당시 고구려와 북연에 대한 대립에서 판정패를 당한 기억이 있었다. 고구려의 등자 발생을 고구려의 북연 세력 흡수에서 보는 학자들도 있는만큼 이 시기 고구려에서 상당한 수준과 규모의 한화문물을 흡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때 북위는 고구려와 섣불리 맞서지 못 한다. 이에 대해서는 화북통일이라는 국가의 제 1목표를 위해 북위가 고구려와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시기상조의 불필요한 대립)는 판단 하에서 북위가 물러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태무제 시절 북위가 선비족 고유의 기풍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며 또한 효문제때 적극적인 한화 정책이 이뤄진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고구려와 북위는 친밀한 관계로 진전되는데 양국간의 혼인동맹이 갑자기 맺어진 이유를 주인장은 심정적으로 백제와의 대립 때문이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북위가 이미 화북을 통일하고 동방의 패자 고구려와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백제가 북위와 대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면???
백제는 이미 고구려한테 한번 패하고 해상활동을 행하는데 있어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의 해상로와 여러 거점들을 빼앗겼으니 말이다. 관미성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임진강과 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을 백제가 상실함으로써 백제는 새로운 항로를 통한 해상활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호태왕 시절과 장수태왕 시절 고구려는 전라도 일대에 대해서 확실한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 했다. 오늘날 고고학적으로 나주 일대에서 또 다른 정치체의 흔적이 확인되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인장은 이를 비류백제의 계승 세력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암튼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다.
중요한 것은 고고학적으로 한성백제와 대등한 수준의 정치체가 나주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북위와 싸워 이겼다는 백제인들이 받은 각종 관작들이 중국 동해안 일대와 더불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고고학적인 사실과 문헌에 나온 사실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고 관건인 셈인데 주인장은 당시 백제가 충분히 고구려와 북위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백제와 북위가 대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주인장이 보기에 당시 고구려는 동서남북 주변 세력에 대해 모두 정치적,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북위에 대해서도 말이다. 결정타를 먹은 백제와 역시 고구려의 예속하에 있던 신라에 대해서 고구려는 확고한 지배권을 발휘했고 동북방 혹은 북방의 유목 수렵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유연과 연계해 서북의 지두우를 분할할 정도였으니 이는 북위로서는 굉장한 심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팽창일로에 있던 고구려와 사절단만 죽어라 교환하던 북위가 갑자기 혼인동맹을 맺으려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주인장은 북위와 백제의 대립을 보기 위해서는 이 부분도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들 별 얘기가 없는 상황이다. 북위가 고구려와 손을 잡았고 유연과의 상황 속에서도 우위에 있었으니 북위로서는 백제와(만약 백제가 대륙에서 활동했다면) 대립할만한 여건을 만들어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수태왕 시절 고구려를 두고 외교로 이룩한 평화를 구가했다고 평(評)하기도 하는데 주인장은 당시 북위 역시 그렇게 평화를 구가하여 화북을 오랜기간 장악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오히려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북위의 공격을 반겼을지도 모른다. 분명 백제와 북위는 고구려에게 있어 잠재적인 적국이었고 둘이 싸워서 둘 중의 하나가 이기든 지든, 둘 다 지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일테니 말이다. 즉, 주인장은 고구려가 주(主)가 아니라 북위가 주(主)여야만 당시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주인장은 '험윤=고구려설'을 부인한다. 당시 사회상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백제가 딱히 북위의 사주를 받은 고구려를 이기고 그 둘의 연합군(수십만 기병)을 이겼다고 남제한테 고할 필요도 없을 듯 싶고 말이다. 백제가 미리 여러 장군들에게 관작을 수여하고 남조에 통고한 이유는 그 장군들의 활동영역이 남조와 연관이 있고, 북조와도 연관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만약 그들의 활동영역이 고구려였다고 해도 그들이 남조에 굳이 통고했을 이유가 있었나 싶다. 백제의 정책입안자들이 왜 남제에 통고했는지 밝히는 것, 주인장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 부분은 특히나 각국 정책입안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듯 싶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삼국사기』라는 우리측 기록이 있어 자세하게 확인 가능하지만 북위측의 경우는 역시 연구가 진행이 안 되어 있는 실정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올바른 토론과 연구가 진행되려면 삼국의 정책입안자들의 결정을 확인하고 입증할만한 기록들이 마련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토론들 역시 '사상누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럼 이제 한단계 진전된 논의를 해보자. 일부에서는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데에서 이를 백제가 북위와 인접한 대륙에 영토, 혹은 거점이나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현 단계에서는 너무 앞서나간 해석이 아니냐고도 말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지만 고구려에게 연이어 공파되어 한성을 잃고 물러났던 당시의 백제가 과연 그런 일을 할 국력을 갖추고 있었을까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이는 당연한 의문이다. 더불어 백제가 남조와 연계되었다고 해도, 남조가 과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줄 수 있었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즉, 백제의 남조 용병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 것이다.
일단 현재의 단계에서 너무 앞서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근거도 없는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면 소설로밖에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한성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도성을 잃고 쫓겨갔음에도 고고학적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엄청난 수준의 또 다른 문명권이 확인되는만큼 이를 백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일부에서 우려하는 백제의 국력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아직 백제사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 과정이 끝난다면 여러 사람들이 우려하는 장수태왕에게 왕이 죽고 수도가 공파된 후의 백제가 북위와 싸울만한 힘이 있냐는 점은 해결이 될 듯 싶다. 고로 이 부분은 차후 고고학적으로도 해석이 될 수 있고 주인장은 아직 이 부분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점차 그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확대될수록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점점~
주인장 또한 약간의 추론을 하자면 백제가 대륙에 갖고 있던 거점은 그리 광역적인 부분이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백제가 갖고 있던 주산군도 역시 장강 하구의 몇몇 섬들과 해안 일대의 거점일 뿐이며, 흑치 지역으로 기정사실화된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일대의 담로들도 특정 거점이었다고 파악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지 백제는 거점을 갖고 있었던 듯 하다. 물론 이 부분 역시 현재 남겨진 담로계 지명들로는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확언할 수는 없다. 문헌에 없는 사실, 아니 문헌에 있는 사실도 고고학적으로 전혀 다른 사실이 확인된다면 이때 우리는 고고학적 사실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륙백제의 경우는 문헌, 고고학 자료 둘다 부족하니 그게 문제라 할 수 있다.
아, 그리고 남조와의 연계점과 남조의 백제용병설, 까페의 한단인님도 그렇고 몇몇 분이 남조의 용병설을 언급했는데 주인장은 솔직히 이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용병은 그야말로 댓가를 치루고 빌려온 남의 군대다. 자고로 용병의 유용성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 폐해도 잘 알려져 있다. 주인장이 당시 남조의 군사정책 입안자라면 북위라는 늑대를 몰아내려고 백제라는 여우를 들이지는 않을 듯 싶다. 실제 기록상으로도 백제의 승리로 남조가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말이다. 단순히 백제왕이 다 처리한 일을 재가해준 것 뿐이다. 고로 주인장은 당시 백제왕이 국내 정치상황상 예의상 남조에 공문을 보내 자신이 행한 일을 재확인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무령왕이 중국에서 준 영동대장군이라는 호칭을 무덤까지 갖고간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고 있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봤을때 백제와 남조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백제가 아니었나 싶다.
만약 정말로 백제가 남조의 용병처럼 활동했다면 남조측 기록에 이에 상응하는 전후 보상 정책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북위야 뭐 전쟁에서 졌으니 전후 기록에 대한 부분을 지웠다고는 해도 남조가 그럴만한 이유는 없다고 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조측 기록에서도 그런 부분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즉, 백제는 남조의 요청 혹은 사주를 받아 북위와 싸운 것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백제의 의지로 북위와 싸웠고 어떤 이유로 남조에 통고한 것 뿐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름의 가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더 나아간다면 역시 소설이 될 소지가 크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만 하겠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고고학적으로 보다 활발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언젠가 결판이 날듯 싶다.
위에서 기술결정론 얘기도 잠깐 했지만...똑같은 기록을 갖고 이리 보고 저리 보는 점 때문에 다양한 연구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아직 관련 기록이 충분치 않으므로 당시의 전쟁 진행 과정을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다. 아주 상식적으로 봤을때 백제가 거점이 있었으면 분명 주둔 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동원했다면 백제도 본국에서 이 정보를 접하고 그에 상응하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백제도 최소한 수십만 기병에 상응하는 대군이 거점에 주둔하지 않는 이상, 상당한 규모이 군대를 실어날라야만 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당시 백제와 북위 양국 모두에게 원양해군을 운용하는 것은 분명 국가적으로 무리가 가는 큰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장은 위에서 말했듯이 양자의 군사정책의 차이에서 이런 부분은 어느정도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북위나 고구려, 백제는 당시 문화적, 기술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규모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질적 차이는 비등비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북위가 육군에 주력했고 백제는 수군에 주력했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전라도 지역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해양집단이 활약하던 유서깊은 지역이었고, 산동지역 또한 그런 지역이었지만 그 지역을 차지한 국가 정책자의 계획에 따라 그들의 특징은 계승 발전될 수도 있고 사장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물며 산동지역이나 요서일대에 해양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어떤 특정 국가에 귀속되어야만 한다면 북위와 백제 중 어느 쪽에 더 호감을 느껴 기울었을까? 즉, 북위와 백제만이 아닌 해양집단의 입장에서도 당시 상황을 봐야한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역대 왕조들이 해안가의 주민을 구분해서 부르며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농업을 장려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백제나 고구려 등에서는 그런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후삼국시대까지 수달로 대표되는 강력한 해상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으로 봐서 해양세력은 상당히 독자적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로 주인장은 역사를 조금 더 거시적으로, 유연하게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SHaw님과 같은 경우, 북위가 산동 지역의 해양세력을 이용해 원양해군을 활용했을 가능성을 지적하면서도 산동 지역의 해양 세력이 북위에 대해 가졌을 입장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주인장이 잘못 안 것이라면 이 부분은 지적 부탁드린다) 이는 SHaw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한쪽면만 보는 경향이 많은데 주인장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인장 역시 그런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안 그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뭐 어쨌든 결론은 북위의 정책입안자들이 과연 산동 지역의 해양세력을 활용할 의지가 있었느냐, 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군사정책 입안자들이 정해진 국방비를 두고 육군, 해군, 공군 중 어느 쪽에 얼만큼의 돈을 주고 군대를 육성할 것인지와 똑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봤을때 북위의 군사정책 입안자들은 당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기존의 정책을 고수해서 대단위 규모로 육성된 기병 위주의 육군 양육, 아니면 안정된 주변 상황을 기회로 국력을 기울여 원양해군을 양육??? 주인장은 이 점이야말로 진짜 토론해볼 가치가 있고 궁금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주인장의 생각은 간략하게 이리 정리할 수 있을 듯 하다. 주인장은 현재 위의 과정들을 거쳐 '백제와 싸운 주체는 북위다'라는 결론과 '백제와 싸운 북위는 전쟁에서 패했다'라는 2가지 큰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는 상태다. 또한 세부적으로는 '백제왕은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남조에 승전을 통보했다'라는 결론과 '고구려에게 망한 백제와 북위와 싸운 백제의 실질적인 세력은 다르다'는 결론 또한 갖고 있다. 거시적으로는 '백제는 중국 해안가에 거점을 두고 있어왔다'와 '중국 해안의 해양세력은 북위와 백제 등과 교류하며 활약했다'라는 결론도 갖고 있고 말이다. 주인장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을 이해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아직까지는, 관련 공부도 적고 관련 자료도 적은 마당에 너무 앞서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차후 북위나 남조 공존시 상황을 묘사한 각종 중국측 기록을 정리해서 당시 해안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을 추려내는 작업이 이뤄지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아직 이런 연구는 없었다고 알고 있다. 단순히 몇 줄의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록한 것들만 언급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보다 넓게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찾아내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북위의 모든 군현을 지도에 표기해가며 북위의 당시 실질적인 지배범위를 세분화해서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듯 하다. 만약 북위가 산동이나 요서 일대 바닷가 끝자락까지 군현을 두고 통제했다면 원천적으로 백제가 그 곳에 설 땅이 있었다는 사실은 가능성이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는 문헌도 중요하지만 그 지역에서 직접 관련 금석문이 나오면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거기다가 전쟁 진행 과정이니 전쟁이 벌어진 지명이니, 하는 식의 세부적인 면보다는 그 전쟁이 당시 일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지(기록의 진위여부 검증)를 살펴보는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장은 기존의 연구와는 달리 당시 각국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전쟁의지, 전쟁개념, 전쟁인식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는 것이다.
즉, 정책입안자들의 의식에 대한 부분, 당시 북위와 백제의 군사문화(육군이 우선이냐, 수군이 우선이냐)에 대한 부분 등에 대해 연구해보고자 하는 것이 주요 논점인 셈이다. 덧붙여 말하면 당시 북위와 백제의 최고 군사 정책입안자들의 업적 혹은 프로필, 일생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기록이 있는지 없는지 아직 검색해보지 않았지만 예를 들면 북위의 무슨 대장군 아무개가 선비족에다가 대대로 대규모 기병군단을 운용해 전쟁을 치뤘다면...이후 그가 참전한 전쟁은 대부분 수전이 아닌 지상전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마치『삼국지연의』에서 수준과 지상전을 두고 주유와 제갈량이 소소한 말다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뭐 이런 식의 다양한 기록들을 다양한 방향에서 접근해야만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올바르게 평가받을 여지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이상이 주인장의 '백제와 대 북위전쟁'에 대한 간단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