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삶의 기초
모든 서신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정황을
잘 알고 읽어야 그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란 서신을 받은 수신자들은
로마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제사장에서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이중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핍박은 유대교 신자들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때로 그 핍박은 생명의 위협을 가져올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핍박은 당시 로마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재산을 다 잃는 손해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당시 겪었던 위기가
히브리서 10장에 부분적이지만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히 10 : 32) 냈고,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의 구경거리’(히 10 : 33)가 되었으며,
‘소유를 빼앗기는 것’(히 10 : 34)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런 구절들 속에서 이들이 당시 당했던
위기와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위기를 그들은 어떻게 잘 견딜 수 있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여러 곳에서 히브리서 수신자와 같은
극심한 핍박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지하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공개처형 당합니다.
이슬람권 나라 중에서도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린치를 당하고
살해 당하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인한 그런 핍박은 없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삶이 주는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나름대로 삶을 힘들게 하는 여러 압박들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양극화 문제, 청년 실업문제,
미래의 불확실함의 문제 등은 우리들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미래의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세계화 때문에 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이제는
그 한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온 세계의 일이 되고 있어서,
앞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온 세계 사람들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실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인생을 등반에 비유하여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산이 있고,
그 산에 관한 지도책을 따라 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급격한 변화라는 거센 바람이 불면서,
이전에 산처럼 여겨졌던 것이 모래언덕처럼
언젠가 사라지고 다른 쪽에 다른 언덕이 세워집니다.
모든 것이 계속 변하고 있고,
지금의 모습이 또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삶의 체험은 우리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을
견고한 바닥이나 바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출렁이는 물처럼 느끼게 합니다.
정말 변화 그 자체가 실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산을 오르는 등반가나, 만들어진 길을 걷는
여행자가 아니라, 출렁이는 물 위를항해하는 항해사요,
모래 바람이 만드는 변화의 사막을 걷는 캐러밴이 됩니다.
이런 현실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파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의 여러 문제들,
또 건강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개인적인 문제들로 말입니다.
삶에 다가오는 이런 압박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내적으로,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파도처럼 밀려 오는데
우리의 삶을 어떻게 무엇으로 지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삶을 지탱하는 것은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매우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본문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이 속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환난과 핍박과 상실과 위협의 큰 파도가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의 삶을 붙들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현실에 의해서 패배당하지 않고, 현실이란 파도를 타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들의 흔들리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바로
믿음이었다고 여러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힘이 되는 믿음, 우리의 삶을
마침내 승리로 이끄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성경에 믿음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나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구절은 믿음에 관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지만
가장 잘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갖다
성경은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증거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뜻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정말 봐야 할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란 의미가 됩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 보이는 것을 과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엄청나게 마음과 물질을 쏟습니다.
명품 문화라는 것도 결국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는 문화의 산물입니다.
청소년들 또한 얼마나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지 모릅니다.
청소년들의 은어인 ‘얼짱’이란, 얼굴이 잘 생겼다는 뜻입니다.
얼굴은 ‘얼의 꼴’이란 의미이고 원래 얼은 정신이라는 뜻이니,
얼짱이란 얼 즉 마음과 정신이 ‘짱’이란 의미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반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려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잘 보는 눈을 갖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행을 할 때도 아무리 유적지를 많이 보고 다녀도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역사의 강줄기를 보지 못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산 길을 걷습니다만,
그저 보이는 것만 보면서 걷습니다.
산 길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을
주의 깊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내면의 소리가 너무 요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연의 기가 막힌 생태계,
하나도 낭비되는 것이 없고 서로 순환하면서 공존하는 질서,
이것을 본다면, 그리고 그런 질서를 만드신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본다면,
그는 정말 보이지는 않지만 봐야 할 중요한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란 이처럼 나타난 것보다,
나타난 것을 그렇게 만드신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아벨의 이야기
구약성경 창세기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 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졌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11장 4절에 나옵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겉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제사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농사를 하는 가인은 곡물로 제사를 드리고,
목축하는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농부가 곡물을, 목동이 양을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지 않는 데서 정말 중요한 차이가 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제사를 드리면서 그 제물을 받으시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가인의 제사는 거절되었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습니다.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봐야 하는 그 분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다.
다 같이 찬송하고 설교를 듣습니다.
보이는 것을 봅니다. 겉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 이것이 차이입니다.
이 차이에 따라 열납되는 예배가 될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데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실 유전자 염기서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 작은 차이가 심지어 종의 차이도 만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차이가 사실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에녹의 이야기
에녹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만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남다른 선행이었을까요? 더 많은제사였을까요?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증거였습니다.
그는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이후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65년이란 햇수는 그가 365일
매일 매일 동행했다는 메시지를 은연 중에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행이란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한 집에 삽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동행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이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자고 하시지만 우리는 저렇게 하자고 생각합니다.
뜻이 하나가 되는 그런 동행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365년, 365일 동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도 가족의 현실이 있었고,
건강의 문제도 있었고, 삶의 여러 문제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보이는 현실만 보지 않고, 그의 삶 속에서
함께 걸으시는, 보이지 않는 분의 임재를 봤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을 만든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눈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바로 곁에, 지금 여기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 그분이 함께 동행한다고 여기면서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게 했습니다.
내 삶의 보이는 수많은 현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분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녹의 믿음이었습니다.
파스칼의 기도문
파스칼의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의 이 아름다운 기도문의 핵심적인 간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큰 일을 작은 일처럼 여기면서 살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볼 때 가능합니다.
또 어떻게 작은 일을 크고 소중한 일처럼 여기면서 살 수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평범한 일상생활과
직장생활 속에 계신 보이지 않는 분을 볼 때 가능합니다.
사소한 일도 소중한 일처럼 여기려면,
그 일을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그런 의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으로 감각할 수 없어서 그렇지 사실 보이는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 분명한 현실이요 실재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만 우리가 그 분을 못 보는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은
배 위에 누워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지못하고 오직 바다만 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눈이 열리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환경이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러면 더 큰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렇게 두려움이 생기면 환경이 더 크게 보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생기다가 결국 마음에 병이 듭니다.
내적 하울링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보이는 현실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갖도록 기도합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삶을살기를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붙들었다는 확신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안개 낀 창공을 비행할 때,
조종사가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은 조종석의 계기판입니다.
반드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라는 것이 소원과 기대의 차원에 그칩니다.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공상의 차원에 머뭅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라는 것을 성취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란 말입니다.
바라는 것이 막연한 꿈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차원이 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이 반드시 바라고 사모해야 하는 것,
그것을 이미 얻었다고 여기는 것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풍요의 의식으로 살게 됩니다.
‘누가 내 몫을 가져가면 나는 어떻게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너무나 풍요로운 분이시다. 나에게 주실 것이 풍성하시다.
나는 남을 섬길 수 있는 은혜가 있다.’
이렇게 풍요의 의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바라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려고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들을 이루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이룬다고 해도,
땅의 성취들이 우리의 깊은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이상하게 그것을 이루고 나면
또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미 이룬 사람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까?’
그러면 그는 ‘아닙니다.
나에게 다른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돈을 벌었다 싶으면 명예를 추구하고,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을 얻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달라집니다. 그 절대적인 것을 얻었다면 달라집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하나 가지는 것은 물건 하나를 얻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바램의 차원이 너무 커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즉 땅에서는 바라지만 땅에서 성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실상으로
가졌다고 여기면서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은 그것을 성취한 것처럼,
실상으로 붙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바라는 것, 바래야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치지 않는 갈망의 깊은 이유
이 땅에서 바랄 수 없는 것,
그러나 이 땅에서 바라는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바래야만 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심으로 일어난 놀라운 영적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것을 얻지 못하면 내가 바라던 것을 다 얻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정말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얻었다면
설령 이 세상에서 내가 바라던 것을 다 얻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정말 바라는 것을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 너머를 바라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그 땅을 떠나,
한번도 보지 못한 가나안이란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이고 비전입니다.
그것을 얻었다는 것은 말하자면 바라는 것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사실 그가 살던 본토를 떠나 약속의 땅을 얻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수준과 능력으로는 바랄 수 없는 약속의 땅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약속의 땅에 도달한 이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약속의 땅에 이르고 난 이후에,
그는 그곳에서 어떤 영적 직감을 가집니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이 그를 이끄신 가나안 땅에 왔지만,
그곳이 약속의 땅이긴 하지만, 그곳이 하나님이
그를 이끌고자 하신 최종 목적지는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9-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셨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9-10)
그는 약속의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곳에서 다시 이방 땅에 있는 것처럼 거하는 것입니다.
약속한 땅에 왔기에 주인처럼 거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나그네처럼 거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땅에 왔는데 영원히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시 떠나고
이사해야 할 곳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약속에 땅이라는 일차적 목적지에서,
다시 그 땅을 넘어선 진정한 최종목적지를 본 것입니다.
성경은 이곳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란 곳이
그가 머물 고향이 아니라며 약속의 땅에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그 너머,
하나님이 계획하신 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정한 고향을 향하여 걷는 순례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그러나 내가 최종적으로 머물 곳은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한 고향을 향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곳은 이곳에 사는 우리로서는 결코 바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바랄 수 없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두 가지 내용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믿는 것,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상의 핵심은 바로 천국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 땅에서는 바랄수 없는 천국을 이미 얻었다는 것,
나는 천국을 유업으로 얻은 자라는 것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매우 작은 차이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세상은 순례입니다.
슬픔도 있고, 아픔도 있고, 때로는 기쁜 추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그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은 늘 나와 환경의 고통스러운 대결의 무대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지금
나와 함께 있음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 보십시오.
오늘의 삶이 달라집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평안이 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순례요, 춤이 됩니다.
바랄 수 없는 천국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언가를 얻었다 싶지만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입니다.
더 많이 얻었다는 사람일수록 떠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의 결말은 소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아도 믿음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얻으면 그의 삶은 다 얻은 삶입니다.
‘나에게는 유업이 주어져 있다’.
이런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은 넉넉하게 삽니다.
이긴 싸움을 삽니다.
우리의 상황은 각자 다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도 처한 상황이 다 달랐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뛰는 경주의 종류가 틀립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있든지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은 삶,
파도 치는 바다를 건너면서 무엇보다 참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여러분을 반드시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갔습니다.
이 믿음을 가짐으로 주어진 삶이 어떠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서울영동교회 정현구 목사의 설교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