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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미학의 전범 - 오영수의 문학세계
이동하(소설가)
1, 뛰어난 단편소설미학-<화산댁이>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왕국을 꿈꾼다.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자 욕망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생은 분명하게 꿈을 이룬 작가이다. 등단작품인 <남이와 엿장수>(1949년, 나중에 <고무신>으로 개제)나 두 번째 작품인 <머루>(1950년)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나고 있듯이 반도시적 반문명적 소설공간과 순박한 전근대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선생 특유의 빼어난 단편미학을 성취함으로써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 보이기 시작한 1950년대는 전쟁 또는 전후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따라서 동시대 동년배 작가들 대다수가 보여준 세계는 비정한 살륙의 현장이거나 전후의 황폐한 도시의 이야기이다. 그에 반해 선생의 작품세계는 <화산댁이>(1952년), <윤이와 소>(1952년>, <갯마을>(1953년), <메아리>(1959년) 등으로 이어지면서 도시보다는 시골을 무대로, 자의식 과잉의 근대적 시민보다는 토착적이고 순응적인 인물들이 확고한 중심을 형성했던 것이다. 때문에 사회성이나 현실의식의 결여 또는 도피라는 일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히 재단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선생의 소설은 그때나 지금이나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채 여전히 읽히고 있는 까닭에서다.
선생은 또 뛰어난 단편작가이다. 30여년의 창작활동을 통해 2백여편의 단편소설을 남기면서도 장편소설은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여기에는 선생 나름의 확고한 장르의식이 뒷받침되고 있음을 다음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 생각엔 하나의 예술품을 담는 그릇으로선 장편보다 역시 단편이 더 적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내가 긴 소설을 쓰지 않고 단편만을 줄곧 발표해 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대담에서, 문학사상 1973. 1.)
장편소설이 사회적 문제를 담아내는 데 적당한 양식이듯이 단편소설은 예술적 의도를 성취하기에 더 적당하다는 의견이다. 흔히 단편소설을 가리켜 예술소설이라고 부르는 사정을 감안하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단편소설은 분량이 짧은 만큼 단일한 구조를 요구한다. 인물도, 갈등도, 주조적 정서도 단일하기 때문에 그 미학성이 한결 강렬하다. 장편소설이 역사를 닮고자 한다면 단편은 서정시를 지향하는 것이다. 선생의 작품세계의 특성 중 하나가 서정성에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단편소설은 단일한 구조를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선생의 작품 중에서 <화산댁이>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1952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게는 모자간의 이야기지만 크게는 근대/반근대의 대립 갈등의 담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생의 작품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중심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의 하나는 주인공 화산댁의 초상을 그린 다음 대목이다.
-반나마 흰머리에 보슬비가 거미알처럼 얹혀 흰 머리가 더욱 많아 보이고 대추씨 같은 눈꼬리에는 째엘 눈물이 괴었다. 가로 퍼진 짚세기가 축축이 젖어들어 아슬아슬 춥기도 했 다. 낡은 삼베 보퉁이를 갓난이처럼 가슴패기에 추켜 올리고 후줄그레한 베치마를 처녀 모양으로 꼭두머리에 뒤집어쓰고는 한 손으로 턱 밑에 꼭 잡았다. 초라한 행색이 나위없는 얻어먹이다.
몇 해를 두고 벼른 아들네 집을 찾아가는 화산댁의 모습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매번 명치에 와 박히는 세찬 감동을 느낀다.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의 누님, 어머님, 또는 할머니의 모습을 매양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화산댁은,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옛 여인의 초상이고 모성의 원형이다. 선생이 소설 속에서 그려 보이는 인물들은 대체로 그런 존재이고, 때문에 그런 인물들과의 만남은 늘 잊고 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어렵사리 아들네 집을 찾아간 화산댁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쌓이고 쌓인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 채 겨우 하룻밤을 ‘쓸쓸히’ 새우고 다음날 아침 도망치듯 귀로에 오른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도 그 세계도 온통 낯설었기 때문이다. ‘자식도 강보에 자식’이라고 화산댁은 체념하지만 그러나, 이 상처의 근원은 결코 그런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통절히 깨닫게 하는 데에 이 소설미학의 탁월함이 있다.
이 작품의 내부 구조는 매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인물이나 환경의 대비적 묘사가 그 한 예이다.
(1) 그것은 언젠가 산소를 다녀간 김의관네 맏며느리 바로 그대로였다. 일테면 곱다랗게 낭자를 하고, 쑥색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다. 옥양목 버선을 옥색 고무신에 송편처럼 담아 신고... 그리고 한됫베기(핸드백)를 살포시 꼈다.
(2) 화산댁이가 믿고 있는 한 막내며느리는 첫째 머리부터가 아니었다. 불에 그을린 삽사리같이 저런 흉참스런 머리가 아니었다. 옷만 하더라도 남정네들이나 입는 샤쓰에다 폭 도 말도 없는 몽당치마를 두르고 함부로 문 밖을 나다닐 그런 본데없는 며느리가 아니었 다.
(1)은 화산댁이 사 년 동안 보지 못한 막내며느리에 대한 일방적인 상상이고 (2)는 정작 대문 앞에서 맞닥뜨린 막내며느리의 실제 모습이다. 상상과 실제 사이의 낙차가 큰 만큼 화산댁의 충격도 크다. 치밀하게 계산된 묘사다. 마찬가지로 시골집과 아들집의 묘사도 의도적인 대비가 드러난다. 먼저 아들집 묘사부터 보자.
(3) 다다미방도 어색했지만, 눈이 부시도록 번들거리는 의롱이 두 개나 놓였고, 그 옆에 는 앉은키만한 경대도 놓였다. 벽에는 풀기 없는 무색 옷들이 쭈르르 걸렸다. 모든 것이 낯선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손도 못댈 것 같고 주저스럽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우선 어디가 구들목이며 어디 어떻게 앉아야 할지, 마치 종이 상전 방에 불려 온 것처럼 앉을 자리 부터가 만만치 못했다.
모처럼 별러서 찾아온 아들네 집에서 도무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편치 못한 화산댁의 마음은 ‘어느새 오리나무숲 사이로 황토 고갯길을’ 넘게 된다. 다음이 그녀의 머리(마음) 속에 있는 시골집 정경이다.
(4) 보리밭이 곧 마당인 낡은 초가집이다.
빈대 피가 댓잎처럼 긁힌 토벽, 메주 뜨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갈자리 방에 아랫도리 벗 은 손자들이 제멋대로 굴러 자고, 쑥물 사발을 옆에 놓고 신을 삼고 있는 맏아들, 갈퀴손 으로 누더기를 깁고 있는 맏며느리. 화산댁이는 그만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다.
사물의 묘사가 인물의 내면을 거울처럼 잘 드러낸다. 어느 것 하나 허투로 놓여진 게 없이 꽉 짜여진 구조다. ‘짚세기’ ‘도토리떡’ ‘밥상’ 등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긴장된 구조 속에서 작가의 미학적 의도를 빈틈없이 실현시킨다. 그래서 아들네 집에 온 화산댁은 자꾸만 쓸쓸해지고 왈칵 서러워진다. 이에 반해 아들은 어머니란 존재가 ‘넘세시럽다’고 언짢아 하고 일찌감치 잠이나 자라고 내쫓는다.
플롯의 결구를 이루는 ‘똥’ 소동은 일견 엉뚱한 듯 하면서도 작가의 주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화산댁의 위신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짚세기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한다. 도시인에게 똥은 냄새나고 더러운 사물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이거 무신 똥이 시꺼먼노. 사람 똥가 소 똥가?”라고 힐문 당한다. 게다가 “이 집하고 어째 되오?”란 물음에 정직한 답변을 못한다.
-화산댁이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되삼켰다.
“아들이오 딸이오?”
“아무것도 앙임더. 그저 아는 사람인데 볼일이 있어 왔다가...”
남정네는 갑자기 말이 거칠어졌다.
“그래, 촌 늙은이는 똥이 더러운 줄도 몰라?”
“예, 어찌겠능교, 늙은 것이 망녕이 들어서....”
아들의 체면을 생각하고 모자관계를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작가의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있다. 두 인물 또는 두 세계 사이에는 이미 혈연의 정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장애가 있음을 섬뜩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실인즉 시골사람들은 똥을 ‘끔찍이’ 안다. 그래서 ‘똥을 주무르다시피 살아온 화산댁’은 반문한다. “똥이 그렇게 야단일 바에야 어째 뱃속에 넣고 견디는고? 똥으로 키운 푸성귀는 어찌 묵는고?”
그러니까, 모자간의 이야기가 시골/도시의 이야기로 확장된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화산댁이>를 통해 선생은 농촌 중심의 토착적인 삶의 풍속과 근대적 도시 중심의 새로운 삶의 풍속 간의 충돌과 불화를 뛰어난 단편소설미학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빼어난 기법과 단편미학의 성취는 선생의 다른 작품들-예컨대 <머루>, <갯마을>, <박학도>, <후조>, <메아리> 등-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소설사에는 뛰어난 단편작가들을 여럿 보여준다. 그러나 30년 넘게 한결같이 단편소설에만 전념한 작가가 선생 말고 달리 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2, 토속적 문체미학
선생의 소설을 읽는 재미의 태반은 토속적 문체가 주는 감흥에 있다.
우선 문체가 간결 소박하다. 문장이 한정 없이 까다로우면서도 정작 진술내용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흔한 요즘 소설을 대하다가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 머리가 다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그만큼 군더더기 없고 투명한 진술문장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화한 문장도 없지 않다.
아이를 X-이런 식으로 해 업고...(박학도)
기러기 한떼가 (뒤집은) V 꼴로 정연히 열을 지어...(후조)
선생의 문체미학은 사투리와 더불어 토속적 어휘의 풍성한 사용에서 온다. 첫 작품인 <남이와 엿장수>에서부터 그러하다.
-남이는 그제야 낯을 씻고 제가 일상 쓰던 물건들을 챙겼다. 크림통과 가루분통이 하나 씩, 그리고 한쪽 모가 떨어져 삼각이 된 거울이 한 개, 얼레빗과 참빗, 그 밖에 숫본, 골무, 베갯모, 색헝겊, 당새기, 허드레옷 해서 그것도 한 보퉁이가 실하다.
위의 문장에서 보이는 일상용품의 목록은 결국 그 인물이 속해있는 시대와 그 삶의 풍속을 드러내 준다. 콩주머니/앙살/눈잼/저지레/옥색 고무신/앙감질 등 어휘들과 함께 그 언어들은 독자로 하여금 아련한 기억들을 자극한다. 컴퓨터/휴대폰/엠피쓰리 등을 잊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어휘들은 선생의 소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귀주머니/애둥소/써레/갈이질/호박순애기/푸수/피음새/보닥솔(머루)
후리꾼/짓/보재기딸/미역바리/모자기/톳나물/가스레나물/파래(갯마을)
사기호롱/서캐/소두엄/열중이(닭)/두릅/취/물팔매(메아리)
뼘질/골미창(은냇골 이야기)
망개떡/자빠뿔이/두풀내기/포천소(오지에서 온 편지)
이상 어휘들이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풍경들을 구체성 있게 떠올리게 한다면 아래의 사례에서 보이는 어절 차원의 언어들은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훨씬 더 선명하게 그려낸다.
-뜨분한 생각(머루)/한 담배참씩이면(남이와 엿장수)/보리쌀 삶을 즈음 해서(남이와 엿장 수)/한풀 반내기 누렁 암송아지(머루)/재피(산초)눈을 하고(머루)/개 물밥그릇 핥듯(박학 도)/짚불에 타는 구렁이 모양으로(명암)
선생의 소설 문장은 특히 자연묘사에서 빼어난 문체미학을 보여준다. (1)은 <남이와 엿장수>, (2)는 <메아리>에서 보이는 예문들이다.
(1) 밖은 물기 먹은 초열흘달이 희붓한데, 남이는 설거지를 마쳤는지 부엌은 조용하다. 어디서 아낙네들의 웃음 소리가 먼 듯 가까운 듯 들려 오고 밤은 간지럽게 깊어 갔다.
먼 산은 선잠 깬 여인의 눈시울처럼 자꾸만 선이 희미해 오고 수양버들은 아지랑이가 간지러운 듯 한들거렸다.
분이는 밑이 추지도록 웃었다.
두견새 울음이 매끄러워지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어느 산골이고 밭두둑이고 길가고 할 것 없이 진달래가 활짝 핀다.
(2) 간간이 산이 쩡-하고 울 때가 있다. 하루에 한 번쯤, 어쩌면 한 달에 몇 번쯤-산골 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은 자주 운다. 먼 지축에서나 울려 나오듯 은은하면서도 맑고 중후 한 그런 울음이다.
산은 너그럽고 허물이 없어 좋다.
옻나무는 성급히도 서둔다 했더니 어느새 신나무도 불이 타듯 물이 들었다. 아침마다 된 서리가 차북히 내리고 먼 산등성이는 날로 엉성해 간다.
이윽고 어느 골짜기에서 컹컹 짖어대는 북술이 소리가 쩡쩡 산을 울려 오고, 메아리는 또 물팔매처럼 골짜기로 골짜기로 까물어져 갔다.
이상에서 보듯 자연묘사가 빼어나다. 두드러진 특징은 ‘밤은 간지럽게 깊어간다’거나 ‘두견새 울음이 매끄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같은 의인법의 잦은 구사이다. 수사법 중에서 의인법은 가장 오랜 것으로서 인류의 원시적 상상력을 환기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도시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독자에게 그것은 잃어버린 자연의 신비감을 문득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그런 문장들은 단순히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인물의 내면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즉 일차적으로는 원시적 자연을 떠올리게 하면서 아울러 인물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이중적 환기력을 발휘하고 있다.
선생의 소설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읽히는 문장들은 이처럼 인물과 자연이 동화되어 있는 경우이다. 선생의 작품세계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감동 역시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즉 인간과 자연의 깊은 교감이 그것이다. 이런 감동은 자연에 동화된 삶을 살아가는 선생의 인물들이 아니고서는 드러낼 수 없는 미학이다. <머루>에서 석이의 몸짓 하나에도 ‘밑이 추지도록’ 웃는 분이나, <메아리>에서 송이를 따다가 ‘너그럽고 허물이 없는’ 산에서 아내와 정사를 치르는 동욱 같은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과의 근원적인 친화력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간간이 산이 쩡-하고’ 우는 소리나, 복술이가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물팔매처럼’ 메아리치는 것을 독자들도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듣고 있는 듯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선생의 소설미학이 성취해 내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3,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믿음
선생의 작품세계를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정신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 깊은 믿음이다. 이 믿음 때문에 선생은 만년에 홀연 낙향함으로써 허구의 영역에서 실천적 생활 영역으로 옮겨 앉는 결단을 보여주기까지 하지만, 어쨌거나 선생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량하며 정이 많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 선생의 중심인물들이 거의 다 그런 심성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을 미워하거나 폭력 같은 것을 행사할 줄 모른다. <머루>의 석이나 분이는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빨치산들의 출현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만 증오나 복수심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석이도 울고 분이도 울고 모두 다’ 울었을 뿐이다. <후조>의 구두닦이 소년 구칠이도 마찬가지다. 훈육선생에게 도둑으로 의심받아 혹독한 매를 맞았지만 이를 갈거나 하지 않는다. 누나와 같이 ‘자꾸 울기만’ 했다고 말한다. 저항의 몸짓이라곤 단지, 훈육선생이 사과의 뜻으로 개장국을 사먹으라고 주는 돈을 거절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선생의 소설에서 근대적 자의식으로 인해 갈등하는 인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인물들이다. <머루>의 석이 엄마가 그렇다.
-일찍 둔 맏딸이 경풍에 죽고, 다음 맞아들은 해방 한 해 전에 일본서 뼈가 나왔다. 여 섯 살 먹은 석이와 젖먹이 연이를 안고 마흔둘에 과부가 되었다. 십 년이 넘도록 오뉘를 업고 끼고 악으로 살아오느라고 손톱 발톱이 길 새가 없었던 석이 엄마였다.
질병과 일제와 그리고 가난만이 적이 아니다. 남편은 ‘썩다 남은 솔괭이’에 발이 찔려 죽고,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부증’ 때문에 시아버지가 죽는 등, 석이 엄마가 처한 삶의 환경은 지극히 척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누이를 잘 키워 ‘쟁기와 써레를 가뜬히 지고’ 사립을 나서는 아들을 ‘장한 듯’ 바라본다. 기쁘고 꿈같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모성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것이다. <박학도>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볏백이나 좋이 가리고 행세깨나 한다는 박참봉의 막내아들로서 귀염둥이’로 큰 학도지만 지금은 곤궁하기 짝이 없는 처지다. 때문에 곧잘 냉대 받고 봉변을 당하지만 매양 헛웃음을 짓고 만다. 마침내 ‘양갈보’로 전락한 아내가 흑인병사를 따라 가버리는 지경까지 이르지만 그는 여전히 ‘씨익’ 웃고 만다. 단지 ‘여느 때와는 다른 자조적인 그런 웃음’일 따름이다. 너무나 착하고 순한 인물인 것이다.
성선설에 기초한 선생의 인물들은 단순히 그런 심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메아리>의 박노인 같은 인물은 인간에 대한 선생의 믿음이 결코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며 또한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사람이 싫고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서 산으로 들어와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사는데 그게 앙입디더. 역시 사람은 사람끼리 이렇게 살아야 귀천이 있겠십디더.
이렇게 말하는 박노인은 원래 목수였으나 ‘나이 어린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입산했다. 지금은 ‘이 산속에 딱 하나 남은 빨갱이’를 데리고 목기를 깎으며 살고 있는데 그 빨갱이가 바로 한 때 아내의 정부였던 사내다. 그를 위해 과부(명숙이 엄마)를 데려오자는 동욱 내외의 말을 듣고 박노인은 ‘며느리나 보는 것처럼’ 기뻐한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날 걸려 동욱 내외가 살 집을 지어주고도 품삯에는 관심이 없다. 그 동안 ‘입살았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노인은 본능적 물질적 욕망에 뿌리를 둔 온갖 인간적 갈등을 넘어선 어떤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인간의 착한 심성의 근거로서 선생은 아마도 자연의 품성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 싶다. 자연 속에서, 즉 자연에 순응하며 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메아리>나 <은냇골 이야기>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복술이’는 중개가 다 됐는데도 좀체 짖지 않는다. ‘산 속에서는 개도 마음이 너그러워지는’거라고 동욱의 아내는 생각한다. ‘사람은 산골에 살아봐야’ 사람이 귀하고 소중타는 걸 알게 된다고 박노인은 말한다. 이런 말의 뒤에는 근대적 삶의 조건인 도시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비판의식을 느낄 수 있다. <오지에서 온 편지>의 발신자는 ‘서울이란 도시가 내게 있어서만은 지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한 인간의 파멸이냐 구원이냐의 심각하고 절박한 위치’에서 낙향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는 근대에 대한 선생의 저항과 성찰의 결과이다.
그러나 자연이 인간에게 언제나 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가뭄이나 기근, 추위나 홍수 등 적대적인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을 선생의 소설은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역시 자연 밖에 없음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인간이란 결국 자연에 적응되게 마련이고, 인간 본연의 생활이란 역시 자연과 자연의 섭리에의 적응에서만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
-자연과 조화된 생활-여기에서만이 인간 본연의 생활이 있고, 과학과 기계의 피해와 잃어버린 인간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근대적 삶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선생이 소설을 통해 그려 보이고 있는 세계는 결국 현대인이 잃어버린 신화적 세계인지도 모른다. <메아리>나 <은냇골 이야기>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것이다. 자연은 때로는 두려운 대상이지만 그러나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 삶의 영원한 터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자연의 아들인 것이다. 선생의 소설은 우리의 조상들이 근원적 고향으로 체험한 자연의 신성한 깊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선생의 소설이 주는 감동의 밑바닥에는 도시적 삶의 질곡 속에 발목 잡혀 있는 우리에게 무한히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본향에의 향수를 강력하게 일깨워주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자라고 지녀온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선생의 소설 속 화자는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달(자연)에 대한 시(꿈)를 잃어버린 대신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30년도 훨씬 전에 내려진 이 진단이 가공할만한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는 현실을 돌아볼 때 선생의 소설이 주는 감동은 목가적이기는커녕 때로는 경세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이다. <메아리>의 결구에서 만나는 감동, 즉 어느 골짜기에서 컹컹 짖어대는 복술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황폐한 마음의 골짜기로 물팔매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매양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선생의 소설미학이 성취한 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