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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스크랩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석여 추천 0 조회 419 17.02.11 2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펌 1 (쥐리 비르망,『피카소의 파리』중에서 p44~)



 

1907년작,유채물감, 233.7*243.9cm, 뉴욕 현대 미술관 소장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으로 변질되어  아비뇽의 처녀(?)로 희한하게 불리는

<아비뇽의 창녀들>

 

 

 

 

피카소는 처음에는 기꺼이 윤락가를 자주 드나들었지만 조금씩 발길을 끊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루에 15시간이 넘도록 그림에 몰두하는 일이 많아졌고, 무엇보다도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락가는 여전히 피카소의 마음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입체주의 시발점을 알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1907년 봄과 여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나체의 5명의 창녀들이 바르셀로나의 아비뇨 홍등가에서 손님을 유혹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제목은 앙드레 살몽이 정한 것으로 피카소는 더 직접적으로 <철학적 홍등가>라는 제목을 붙였었다. 그는 관람객이 그림을 보면서 유곽 앞을 지나는 것처럼 성적 충동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펌 2



 1907년에 발표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회화사의 천지개벽이나 다름없었다. 이제까지 보아 온 인상파 이래 근대 회화와는 참으로 다른 세계였다. 20세기의 리얼리티가 19세기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한 이가 바로 피카소였다. 아비뇽은 프랑스의 아비뇽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매춘 거리 이름이다.

 

 

무작정 그림이 좋았던 여고시절부터 내게 피카소는 참 어렵고 불편한 존재였다. 쿠르베에서 반 고흐와 모네와 마티스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사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도 그들은 그자체로서 내겐 전율이요 감동이었다. 

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은 예외적이었다. 사지가 뒤틀린 듯 어긋나 있는 몸통. 눈, 코, 입의 방향이 제각각인 기괴한 얼굴. 마치 아동화나, 카툰 같은 그림들. 화집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그려내던 초기의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를 넘어서면 도무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난해해서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피카소는 접근하기에 늘 멀었다"

그런데도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황제쯤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나로선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피카소의 큐비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우연히 아이들과 TV 다큐프로그램을 보고서였다. 기차역에 가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맨 앞에 기관사가 앉아있는 기차의 정면이 보이고 다음에는 측면인 객차의 창이 지나가고 맨 나중에는 기차 꼬리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간 기차의 정면과 측면, 그리고 뒷면을 각각 한 화면에 재구성해서 그린 것. 그것이 바로 입체주의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보니 이번에는 또 다른 실망이 찾아왔다. 내가 영 부담스러워서 회피하고 싶었던 피카소의 입체주의 표현양식이 갖고 있는 이론적 바탕이, 이번엔 너무 단순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피카소에게서 기대한 것은 단지 그런 변형하고 짜맞추어서 조합해내는 형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실체조차 알지 못하면서 무언지 허전해져서는 피카소를 점점 더 기피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 얄팍한 선입견과 몰이해 때문이란 걸 느끼면서도 피카소를 내 앞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영 쉽지 않았다.



풍만한 육체도 해골의 겉모습일 뿐

이번 미술관 기행에서 새삼 실감한 것 중의 하나가 피카소의 명성이었다. LA와 뉴욕에 있는 미술관들에는 가는 곳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부터 입체주의 회화뿐만 아니라 그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작업하는 것이 곧 휴식'이라는 피카소의 지칠 줄 모르는 예술에 대한 열정의 단과실이었다. 역시 피카소를 피해갈 수는 없는 거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을 정도였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 캔버스에 오일, 243.9×233.7cm)을 본 날, 아주 운좋게 도슨트(미술관의 안내원)의 그림해설까지 듣게 되었다. 성격 좋아보이는 중년의 도슨트를 한 무리의 관람객들이 순식간에 둘러쌌다.

피카소가 파리 미술을 정복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 입성한 것은 19세 때였다. 입성한 지 7년 만에 비장한 각오로 그린 것이 바로 이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그의 천재성을 이야기할 때, 영감이 떠오르면 하루에도 몇 작품을 완성할 정도로 다작이었다는 사실을 들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만은 구상 스케치를 수차례 할 정도로 오래오래 정성을 들였다고. 그 때문에 그림은 최초의 구상에서 확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피카소도 다른 화가들과 비슷했다. 세기말 화가들의 정신적 풍토를 반영하는 소재들은 창녀나 보헤미안, 광대 같은 밑바닥 인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피카소가 마음에 둔 최초의 테마도 그랬다.

청색시대나 장밋빛시대에서 보인 것처럼 '인생무상' 계열이었던 것.

풍만한 육체를 가진 미녀들의 모습도 해골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실제로 처음에는 해골을 들고 있는 인물을 화면에 그려넣었다고. 그림의 제목도 심각하게 '철학적 매춘숙'이었단다. 그러나 '철학적 매춘숙'이 '아비뇽의 처녀들'로 바뀐 것처럼 최초의 구상은 점차 새로운 조형적 실험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처음으로 사실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갔던 것이다. 이 그림이 큐비즘의 출발이며 현대예술의 시발점이란 찬사는 이 지점에서 씨앗을 품었던 것.


아비뇽은 바르셀로나 매춘 거리 이름

제목에 나오는 아비뇽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유수의 도시가 아니라 피카소가 유년을 보냈던 바르셀로나에 있는 선원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이 몰려있는 매춘 거리 이름이다. 이 그림은 이곳의 다섯 매춘 여성을 그린 것인데 이 낭만적인 제목과는 달리 그림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나부를 그린 것만은 확실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나부상과는 전혀 다르다. 전대의 화가들이 그린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부드럽고 양감이 풍부한 여체가 아닌 것이다. 화면은 입체감이며 원근감이 일체 없는 평면적 묘사로 일관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나부들의 배경을 이루는 실내는 깊이감이 없고 나부들은 인체의 둥근 느낌을 잃었다. 윤곽선은 심하게 각이 져서 더욱 모가 나 있어서 얼굴 표정은 영판 아이들이 그린 만화나 캐리커처 같다.

가운데에 있는 두 나부는 그나마 여성성이 조금 엿보인다. 잘록한 허리, 쌍꺼풀처럼 가장자리를 그려넣은 큰 눈. 귀는 8자 형태다. 가만히 보면 얼굴은 정면을 마주하고 있는데 코는 길게 옆으로 그렸다. 피카소의 말인즉슨, "나는 일부러 코를 비뚤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코를 보게 될 테니까."


"돌아앉은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겠소?"

화면 오른쪽의 두 나부는 여성성은커녕 마치 괴물 같은 모습이다. 뒤쪽의 나부는 허리를 조금 굽히고 커튼을 젖히면서 지금 막 이 장소로 들어오는 듯한 모습인데 얼굴의 비례균형이 맞지 않다. 눈 주위에 있는 붉은 줄무늬와 볼 주위로 난 초록색 줄무늬는 마치 가면을 쓴 듯한 모습이다. 이것은 피카소가 트로카데로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조각을 보고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다. 인물 사이에 몇 부분을 줄무늬로 메운 공간에서는 세잔이 '생트빅투아르 산'에서 사물을 단순하게 처리한 기법의 영향이 보인다.

아래쪽에 있는 여자도 줄무늬가 있는 얼굴에 관객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으면서도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이 기괴한 모습에 놀란 관람객에게 피카소는 "당신 같으면 돌아앉은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겠소?"라는 말로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이렇게 해서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 최후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최초의 구상에서 의도했던 우의적 의미는 사라지고 조형적 표현만이 오롯이 화면에 남았다.


근대회화의 상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은 당시로서는 천지개벽이나 다름없었다. 이제까지 보아 온 인상파 이래 근대 회화의 역사에서조차 너무나 동떨어진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웬만큼 튀는 행동에는 끄떡도 않는 몽마르트르의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피카소가 드디어 돌았다는 소문이 심각하게 나돌았다. 드랭은 아무래도 피카소가 이 큰 캔버스 뒤에서 목을 매는 게 아닐까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피카소의 활동은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피카소에게는 독창성이 없다. 그는 항상 옛날의 대가, 앵그르나 로트렉 등 누군가의 작품과 가까이 있다."

"피카소의 단지 입체파적인 그림들은 그의 구성력을 감추기 위해 택한 수단이다."

"'아비뇽의 처녀들'도 사실은 아프리카의 원시 탈을 모방해 그려진 것이다."

피카소에 대해서 비난의 소리들이 쏟아졌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순수한 피카소의 창작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 인류 공동의 우물이나 다름없는 원시미술과 회화의 다양한 인상적 기법들을 차용해서 혼합하고 거기에 피카소만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20세기의 리얼리티가 19세기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한 유일한 화가가 피카소였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허물을 벗어나갔다.

"이건 아니야. 나는 아직 더 잘 할 수 있어."

마티스가 색을 자유롭게 구성해 나갔던 것처럼 피카소는 형태를 자유롭게 구성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 큐비즘의 출발점이 된 '아비뇽의 처녀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이나 형태 파악을 부정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스페인에서 태어나 미술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15세에 '첫영성체'를 시 전시회에 출품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브라크와 함께 큐비즘을 창시했다. 회화 조각 도예 무대장치 등 모든 분야에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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