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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깨어나셨다. ‘여보! 이리와봐 ! 정말이라니까!’ 나는 아버지께서 만성폐쇄성 폐질환에 폐렴까지 겹친 힘든상황에서 어렵게 쾌유하는 꿈을 꾸었다.정맘 반가운 소식이다.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잘 모실까 ? 잠깐 생각에 잠기고 그 기쁨은 잠시.. 간병의 그 힘든 과정이 또 다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내는 또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노? 날 길러주시고 오늘에 내가 있기 위해서 물심양면 아끼지 않고 도와주신 부모님이 아니던가! 아내에게는 또 다시 위로하고 또 힘들지만 기쁨으로 맞이하자 ! 그까지 였다. 아버님이 05년12월27일 돌아가시고 한달뒤에 꾼 꿈이었다.
이내 잠을깨어보니 현실로 오고 싶지않았다. 차라리 꿈속에서 아버지랑 영원히 살고 싶었다.소파에서 어정쩡하니 앉아서 밖을 바라다 보시면서 계시던 아버지의 형상이 생각난다.자그마한 일들이 생각이 나서 마음을 무겁게한다. 우리집에 머무를때 동근이 침대에 누워계시던 모습이 생각나 나도 그 침대에 누워본다. 아파트 앞에 벤취가 있는데 내가 점심때 직장에서 아버지랑 밖에서 점심을 같이 하려고 전화하면 아버진 으레히15분이나 일찍 나와 계신다.
‘아버지 왜 그렇게 일찍 나오셔서 기다리셔요? ’ 점심시간에 한번은 장우동에서 ‘해물칼국수’를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생각난다.얼큰하고 맛있다고 아버지는 음식에 칭찬을 많이도 하셨다. 난 그 이후 해물칼국수를 먹지 못하고 있다. 냉면집에서 아버지랑 둘이서 맛있게 먹었던 그 집을 지금도 나는가지 못한다. 그 장소에서 먹다가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날것 같아 도저히 갈 자신이 없다.
아버진 점심때 시간에 바쁘다고 이렇게 바쁘게 시간 낼 필요가 없다 너도 바쁠텐데 .. 하면서 나에게 하지말라고 하셨다.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의 점심을 즐기는 측면도 있었다.오랜만에 차를타고 먹음직스런 메뉴를 드실수 있는 시간인지라.. 바람도 쏘이고...
지금도 아버지는 진주에서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과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
횟집, 치과, 진양호, 하동 강가, 문화예술회관, 영화관.. 한번은 작년에 톰크루즈가 나오는 영화 ‘The War'를 보시다가 너무 큰 효과음에 질려서 시작5분이 지나자 나가셨다.그것이 아버지가 본 마지막 영화다
경상대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회복기간에 아버지께 곰탕과 해장국의 국물을 드리려 아침일찍 사러갔다가 그만 봉지를 완전하게 밀봉을 하지못해 차안에 국물이 흘렀다.몇일간 악취가 흘러 결국은 밑부분을 다 뜯어내는 작업을 카센터에서 하게되었다. 아버지는 그 일을 두고 병석에서 그렇게 미안하게 생각하셨다. 아들이 잘못해서 저지른 일인데도....
아버지가 운명하시던 날은 평화롭게 숨을 거두셨다. 그토록 가빠하시던 호흡수가 분당45회 55회에서 이제는 심장이 멈춘순간은 평소에 건강하시던 주무시던 모습이다.평안히...아버지는 그처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어서 코레스테롤이 39 알부민이 1.5까지 하락하셨다.부종이 오면서 몸이 붓고 주사바늘이 들어갈수 없을정도로 ..
나는 이렇게 마지막을 예감했을때 의료진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교수님에게 부탁했다.원래 만성폐쇄성 폐질환이 있는 사람은 호흡기를 설치하지 않는것이 불문율이다. 왜냐하면 달았을때 제거를 하지 못한다.의식이 멀쩡한 사람에게 차마 호흡기를 제거하는것은 인간적으로 힘든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의사가 아니라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부산에 있는 친구는 ‘아버지가 호흡기를 달지않은 상태에서 혼수로 빠질때 그냥 놔 두는 것이 행복한 죽음이다’고 나를 말렸지만 의사로서 행해지던 그 방법을 수긍할수 없었다.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을 의료진에게 드렸고 어쩌면 그 방법이 아버지를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기관지삽관을 하고 기관지 절개술을 하고 중환자실로 옮기는 과정들이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죽음과 가까이 가고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내가 의사가 아닌 보호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판단되었다. 어쩌면 살릴수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하지 못한 부분을 할수있는 효도를 해야지 !
중환자실에 하루두번방문때 의식이 있을때는 아버지는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빨리 집으로 가자는 의사표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대충 짐작은 하신것 같았다. 말은 못하시기에 손에 펜을 쥐어서 종이에 쓸수있도록 했지만 아버지는 무슨 글인지 모르게 쓰셨고 알아볼수가 없었다 그것도 조금 쓰다가 힘이 없어서인지 포기하시곤 했다.
면회시간에 아버지는 기저귀를 갈다가 대변을 그자리에서 자꾸 조금씩 보시어 또 다시 갈고 갈고 했다."아버지 ! 괜찮습니다. 부끄러워 마시고 천천히 볼일 보세요 ! " 아내도 이제는 처음과는 달리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같이 변보는 것을 도운다. 평소에 아버지는 깔끔한 성격이라 생각도 못할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어서 절망감이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돌아가시기 2일전에 나는 중환자실로 면회시간외에 한번 볼수있게 부탁을 드렸다.
허공을 바라다 보시고 눈동자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흐느끼면서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느꼈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물이 당신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셨음인지 눈물이 눈가에 맺혀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더 이상 해답이 없는 상황에서 고통을 더 주긴 싫었다. 진작에 호흡기를 달지 말았어야 했는데...하는 후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더 솔직히말하자면 나도 이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의료진에게 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러나 차마 의료진은 제거는 못하고 기계호흡에서 자발호흡으로 바꾸고 6시간 지나서 아버지는 운명하셨던 것이다.나는 이내 죄책감이 가슴에 밀려오고 있었다.허나 아버지는 천국에서 나를 원망하시지는 않을 것이다는 한편의 안심도 있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한편으로 좀더 일찍 그런결정을 했으면하고... 바라셨는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요즘도 저녁에 속보를 위해 저녁에 밖을나와서 걷는 도중에 경상대 응급실 옆을 지나게 될 때면 아직도 마음이 아라하게 아파온다.후회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수목원에서 찍은 사진을 본다.
05년3월29일 퇴원을 하시고 식목일날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는 주치의에게 한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허나 퇴원하시고 4개월뒤에 다시 투병생활을 하시고 그 뒤4개월만에 돌아가셨다.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마지막순간까지 보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운명이다.
투병중일때도 부모는 끝까지 자식생각을 한다.
한번은 중환자실에 면회를 갔는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밖에 볼수없는 상황에 나는 직장 때문에 저녁에 한번을 보는데 그 한 40분정도에도 아버지는 나보고 그만 가서 일보라고 하는 손짓을 하셨다.
어릴때 길러주시고 검소하게 생활하시면서 자식4명 다 대학보내고 투병중인 생활에서도 끝까지 자식생각을 하시는 것에 비하면 자식들이 하는 일은 극히 작다.그저 받기만 하고... 옛날부터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도 안된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아버지는 별다른 유언도 없이 생을 마감하셨다. 그럴 줄알았다면 의식이 있고 집에서 어느정도 거동을 하실 때 미리 하실 말씀을 하시라고 할껄 하는 후회도 있다. 하지만 평소에 당신이 하시던 말과 행동들을 반추해 보면, 자식에게 어떤 유언을 하셨을 꺼라는 것을 나는 어느정도 짐작 할것 같다.
북한에서 두 주먹만 들고 피난을 와서 엄마와 힘들게 그리고 검소하게 사시는 모습들..이산가족 1세대로서 힘들게 사시면서 외롭게 남한에서 친척도 없이 사시면서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성실과 검소로서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들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진주에 어디를 가든지 아버지를 만난다.
문화예술회관에서 화진이가 바이올린을 켤때 보시던 모습 ! 남강변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힘들지만 산책을 하시면서 걷던 모습들, 평소 비싸다고 가지말자고 하면서 실지 횟집에가면 맛있게 드시는 모습들, 집 소파에 어정쩡하게 힘겹게 걸터앉아 먼 곳을 응시하던 모습들! 누워서 다리좀 주물러라 ! 하시던 말씀!.
아버지는 진해에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4년을 홀로 외롭게 지내시다가 마지막 1년 남짓을 막내아들과 진주에서 지낸 추억을 지금은 천국에서 반추하며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 고 생각하실까 ? 아님 섭섭했다고 생각하실까 ? 나는 자신이 없다 ! 이글을 쓰면서도 자꾸 눈물이 책상위에 떨어져서 손수건을 얼굴에 훔치는 모습이 아버지에게 못다한 효도 때문이리라 !
난 끝까지 아버지에게 희망을 주는 거짓말을 했다.차마 힘들다고 말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쾌유할수 있습니다. 폐암이나 다른 암처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번 폐렴만 잘 나으면 얼마든지 다시 걸어 나갈수 있습니다.용기를 가지세요 !’ 의사이면서 아들의 말에 아버진 얼마나 실망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
인간의 육체는 한계가 있다.
그 수명이 다하면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의사이기 전에 아들로서 아버지를 붙잡고저 했던 일들은 하나의 허망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을까!
어떤 면에서는 죽음이 구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천국에서 돌아가신 엄마랑 편안히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웃고 계실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쁘다.나도 멀지않아 돌아가신 엄마,아버지와 천국에서 같이 볼수있다고 생각하니 ...알차게 생활하다가 맞이하리라 그 분들을....
엄마와 아버지는 같이 있었다.
경화동 1가 우리들이 살던 집이다. 아버지는 5개월 동안 땅밑에 좁은 곳에서 산다고 힘들었다고 하신다. 그 5개월을 계시다가 다시 깨어 나신것이다. 난 꿈속에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찌 돌아가신지 5개월이 지났는데 다시 살아나신다 말인가! 엄마는 옆에서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계셨다. 어느 화창한 날 ! 분명 경화동 마당 평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의 이마 주름살.. 엄마와 아버지의 개성특유의 억양! 엄마는 00년 10월에 돌아가셨으니 6년이 다되간다. 엄마보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실 더 보고 싶었다. 이내 꿈을 깨었다. 사실 요즘 새벽에 잠이 자주깬다. 그리고 한동안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잠이든다.
투병중에 아버진 이런이야기를 하셨다.
계속되는 폐렴과 기흉이 치료가 되지않고 매일 주사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시고 흐느끼면서 우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죽으면 장례도 다 치루어 주나?’ 나는 그런생각은 하지 마세요 ! 조금 있으면 완쾌되어 나가실 것입니다.그때 아버지는 직감을 하셨던것일까!
병이 악화되어 대학병원으로 옮겨 응급실에서 산소마스크를 하실때도 아버지는 조그만 가방을 놓치않고 3일을 버티셨다. 의식은 명료한데 아들인 내가 관리를 할테니 아버지 놓으세요 해도 막무가내로 놓지 않았다.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는 것인지 ! 아버지는 그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놓지 않고 잡고 계셨다. 그 가방에는 아버지의 신분증,6.25참전 용사 증명서 그리고 돈40만원 정도 현금카드 비밀번호 .. 였다.
아들인 내가 다 아는 목록이고 비밀번호 통장들을 내가 다 관리하는 입장인줄 당신은 알면서도 손을 놓지않고 계셨다. 3일뒤에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가방을 놓았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행한 마지막 행동이었다.
당신은 왜 그 가방끈을 쥐고 놓지 않았을까?
거기엔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 이산가족1세대의 생활정신 , 검소,가족을 위하는 마음,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그때 그 상황을 조용히 반추해 본다.
투병중에 아버지는 환상을 많이 보시고 허황된 이야기를 주변사람에게 많이 하셨다.
전쟁중인 이야기,군대 있을때 이야기,돌아가신 친구분들 이야기.. 경화동있을때 비가많이와서 마루에 까지 물이 치밀던 옛날 이야기.. 당장, 당신을 죽이려고 누군가 칼을들고 쫓아온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은 호흡부전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중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폐의 기능이 정상적인 역할을 할수없는 지점까지 간것이다. 고무풍선 처럼 부풀러져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자체를 할수없는 것이다.폐기종이 폐기흉과 폐렴이 겹쳐 아무리 강력한 항생제를 써도 소용이 없게된 것이다.
지금생각하면 죽음을 집에서 가족이 돌보는 가운데 조용히 맞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같다.병원이 사실 생명을 연장시킨 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의미가 없다. 사람이 사는 것도 삶의 질이 문제이고 그런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의 연장이 의미가 있는것이지 인공호흡기를 달고 몇일, 아니 몇 달을 연장한다는 것은 긴 인생에 있어서 몇일 몇 달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단 병이 악화되어 3차병원에 가게되면 보호자는 그로부터 격리된다. 인간의 수명이 병을 치료해서 나을수만 있다면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는 병은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평소에 하고싶은 말은 하고 정리를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현대의학이 병을 낫게하는 것도있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냥 생명만 유지하는 경우도 흔지않다.
진주에서 계실 때 우리집에 모시지 못하고 병원에서 퇴원하실 때 2-3주 정도 집에 계시고 집과 가까운곳에 원룸을 구해서 아버지를 모셨다. 막내인 내가 장남처럼 모시는 것이 며느리와 시아버지 에게는 서로 부담이 많이 되었나 보다 ! 아버지는 그점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계획을 받아들이 셨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들로서도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지난 여름 ! 그 무덥던 여름날 , 아버진 우리집에 오셔서 마루에 앉아 계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집은 이처럼 시원하구나!’ 나는 순간 미안함 마음에, 같이 모시고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후벼팠다. 아버진 에어콘 바람을 싫어하시고 사실 선풍기 바람도 차서 거의 켜지않았다.계시던 원룸에도 간병인과 같이 있어도 선풍기를 못 트셨던 것이다.
동근이 방에서 곤하게 주무시던것을 나는 보았다. 그처럼 곤하고 편하게 주무시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깨워서 원룸으로 향하게 했던 순간이 가슴이 메어지도록 아파온다.좀더 주무시고 편안하게 다음날 가셔도 되는데 !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이 제일 불효막심 했던 순간이었다.
지금은 아버지가 쓰시고 계시던 TV 와 생수를 병원에서 쓰고있다. 생수통에는 아버지가 구입한 날짜를 직접쓴 숫자가 있다.매일 물을 마실때 보면 가슴이 찡해온다.진주 어디에 가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겨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아버진 늘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되어있다. 우리들의 추억이....
지금 생각하면 1년도 못 사실것을 내가 억지로라도 모시고 살것을 ! 후회가 막급이다.허나 가정도 중요했다. 아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4형제중에서 유독 막내가 모든 것을 짊어진다는 것에 대한 부담도 아내는 상당했으리라!
한동안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용기가 나질 않았다.아버지를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가슴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수도 없이...산에 스님이 되어 들어가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것 같았다.인생의 허무... 부질 없는 인간사...우울증으로 한참을 겪고 난뒤에나는 이런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이 어릴때 부터 들려주시던 이야기,속담,평소의 말씀,추억들.. 이런것들이 언제부터인지 나에게 각인되어 나타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들이 이제는 동근이와 화진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그리고 전달되어 부모와 자식간에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아버지 생각하면 울음이 금방터질 것 같지는 않다.죽음을 인정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었다.그리고 가족이 살며시 보였다.동근이,화진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좀더 알차게 인생을 보내면서그분들이 가족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했듯이 가족을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
가족과의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나중에 동근이,화진이가 우리를 생각할때 좋은 추억을 반추하기를 바라며...그리고 엄마,아버지를 천국에서 만날 날을 즐겁게 기다리며... 그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리라....
첫댓글 이 아침 이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눈물도 주루룩... 너의 고해성사같다. 내리사랑이라고...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효는 종족보존, 세대교체을 역행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인간이기때문에 효를 다하지만 너 만큼했으면 됐다. 너의 존재자체가 아버지에겐 효였을 것이다.
니가 가슴아파하면 아버지는 더 힘들어 하실 것 같다. 친구의 아픔이기에 위로랍시고 해 본다. 주제넘었다면 미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자만이 그아픔과 생을 관통하는 고통,끝없이 지치게 하는 절망감에서 헤어난다는 게 얼마나 힘든줄 이해하리라.아버지는 우리곁을 떠나 셨지만 너의 아들,딸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정신과 뜨거운 피가 면면히 내려오고 있음을...너의 끝없이 내려갈 후손들에게도....
이 겸철...아버지의 아들이며 아들의 아버지, 네 글을 읽으며 이 말이 떠오르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