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스파르투의 시계
대부분의 선객이 갑판에 나와 있었습니다. 일부는 그대로 갑판에 머물러 거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대개는 몽골리아 호 옆에 갖다댄 작은 배에 옮겨 타고 있었습니다.
픽스 형사는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배에서 옮겨 타는 사람들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사나이가 여러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더니, 픽스 형사에게 영국 영사관이 어디냐고 물으면서 여권을 내밀었습니다. 아마도 영국 영사관의 입국 허가증을 받으려는 모양이었습니다.
픽스 형사는 아무 생각없이 그 여권을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이 런던 경시청으로부터 보내온 은행 도둑의 인상 그림과 모습이 너무나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픽스 형사가 사나이에게 물었습니다.
" 이 여권은 당신의 것인가요?"
" 아닙니다. 배에 계신 제 주인의 것입니다."
" 입국 허가증을 받으려면 본인이 직접 영사관에 가셔야 합니다."
" 영사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 저 광장 모퉁이에 있는 건물입니다."
픽스 형사는 부두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 그럼, 주인 어른을 모셔와야겠군요. 귀찮은 일은 싫어하시지만 말입니다."
사나이는 이런 말을 하며 픽스 형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곧 배로 돌아갔습니다.
픽스 형사는 재빨리 영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영사관에 들어서자마자,
" 영사님, 도둑은 몽골리아 호에 틀림없이 타고 있습니다!"
하고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만난 사나이와 여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 음, 그래요? 나도 그 대담한 도둑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군요. 그러나 만일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는 역시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거요. 도둑질을 한 사람은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법이고, 요즈음에는 여권을 보이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으니까요."
" 아닙니다. 그 자는 보통이 넘는 놈이니까 오히려 당당하게 찾아올 겁니다."
" 입국 허가증을 받기 위해서 말이오?"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입국 허가증을 내 주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러나 여권이 정당하게 나온 것이라면 입국 허가증을 안 내 줄 수 없소."
" 하지만 영사님, 그 자는 입국 허가증을 도망가는 수단으로 쓸 테니까, 런던에서 체포 영장이 올 때까지 저는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둬야만 합니다."
" 이봐요, 픽스 형사! 그건 당신의 일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오."
바로 그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직원의 안내로 두 사나이가 들어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은 픽스 형사와 이야기 했던 파스파르투였고, 또 한 사람은 주인인 필리어스 포그 씨였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포그 씨는 영사에게 여권을 내밀며 입국 허가증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영사는 그 여권을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 물었습니다.
" 당신이 필리어스 포그 씨입니까?"
" 그렇습니다."
" 그럼 이 사람은 당신의 하인입니까?"
" 예, 파스파르투라는 프랑스 사람입니다."
"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 봄베이로 가는 길입니다."
" 그래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입국 허가증을 내 주지 않기 때문에 여권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셨던가요?"
" 그건 압니다. 다만 나로서는 수에즈를 지나갔다는 표시가 필요해서 영사님의 사인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영사는 여권에 날짜를 적어 넣은 다음, 사인하고 영사관의 도장을 찍어서 내 주었습니다. 포그 씨는 수수료를 치르고 정중하게 인사하고, 파스파르투와 함께 영사관을 나갔습니다.
픽스 형사는 포그 씨가 밖으로 나가자, 영사 앞으로 다가앉으며 물었습니다.
" 어떻습니까?"
" 참으로 훌륭한 신사 같았소."
" 그야 그렇지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듯 점잖은 신사가 경시청에서 보내온 범인의 인상 그림과 어지 그다지도 닮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 그야 많이 닮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본디 그 인상 그림이라는 게...."
영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픽스 형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 그럼, 하는 수 없지요.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하인이 주인보다는 단순한 테이고, 게다가 프랑스 사람들은 떠들어대기를 좋아하지요. 그럼 이만...."
픽스 형사는 부리나케 뛰쳐나갔습니다.
한편 포그 씨는 그 때 벌써 몽골리아 호 선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스파르투는 부두에서 왔다갔다하며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스파르투를 발견한 픽스 형사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습니다.
" 거리 구경을 하십니까?"
파스파르투도 마주 웃으며 말했습니다.
"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 서둘러대는 여행이라서 마치 꿈에서 헤매는 기분입니다. 참, 여기가 수에주라지요?"
" 예, 수에즈지요."
" 이집트 땅 말입니까?"
" 그렇지요, 이집트지요."
" 아프리카 대륙이고요?"
" 예, 아프리카 대륙입니다."
" 아! 아프리카라!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벌써 파리를 지나왔다니....아침 7시 20분에서 8시 40분 사이에 화려한 파리를 달린다기에 마차 창문을 통해 내다봤지만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바람에 그만....유감입니다."
" 그렇다면 몹시 서두르시는 군요."
픽스 형사는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 내가 그러는 게 아니라, 주인 어른께서 서두르시지요. 아참, 양말과 셔츠를 사야겠는데..... 여행 가방 하나만 들고 런던을 떠났으니 원."
" 그럼, 제가 시장까지 안내해 드리죠."
두 사람은 시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파스파르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습니다.
" 배가 떠날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
" 시간은 넉넉해요. 이제 겨우 12시니까요."
픽스 형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파스파르투는 주머니에서 큼직한 시계를 꺼내어 들여다보고 놀라 외쳤습니다.
" 12시라니요? 9시 52분인데요!"
" 당신 시계는 너무 늦군요."
픽스 형사의 말에 파스파르투는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펄쩍 뛰었습니다.
"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시계는 증조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집 가보인데, 시간이 틀리다니요? 1년에 5분도 틀리지 않습니다."
" 알겠소. 당신의 시계가 틀리는 이유는 그 시계를 런던 시간에 맞춘 채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오. 그러니까 여기서는 두 시간이 늦을 수 밖에 없지요. 어서 시간을 맞추시오."
" 뭐라고요? 내 시계 바늘을 돌리라는 것입니까? 원 천만의 말씀."
" 그대로 두면 당신 시계는 태양과 맞지 않아요."
" 태양이 나쁘지요. 틀린 건 태양이니까요."
파스파르투는 시계를 소중스레 주머니에 도로 넣었습니다. 잠시 뒤 픽스 형사가 화제를 돌려 말했습니다.
" 그러니까 주인께선 급히 서둘러 런던을 떠나셨군요."
" 그렇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8시에 클럽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서둘러대는 바람에 45분 뒤에 허겁지겁 떠나왔습지요."
"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 앞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세계를 일주한답니다."
" 뭐요? 세계 일주라니요?"
픽스 형사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렇다니까요. 그것도 80일 동안에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오기로 내기를 했다나 봅니다. 상식적으로 빋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튼 괴롭습니다."
" 포그 씨라는 분은 정말 괴짜시군요."
" 저도 그런 생각입니다."
" 포그 씨는 부자신가요?"
" 물론이지요. 돈도 칼날처럼 빳빳한 새 돈으로 갖고 있답니다. 그런데도 여느 다른 돈 많은 사람들처럼 인색하지도 않답니다. 그 증거로, 몽골리아 호가 예정보다 빨리 봄베이에 도착하면, 기관사에게 상금을 두둑히 주겠다고 약속했답니다."
" 포그 씨에게는 부인이나 자식들도 없습니까?"
" 예, 그렇답니다. 그러니 남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요."
픽스 형사는,
'틀림없이 은행에서 큰 돈을 훔쳐 내어 급히 런던을 떠난 것이 분명해.'
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스파르투가 물었습니다.
" 봄 베이는 얼마나 멉니까?"
" 꽤 멀지요. 배로 열흘은 걸릴 겁니다."
" 이거 야단났군! 우린 모두 급합니다. 저는 가스 램프 스위치를 잠그는 걸 잊었거든요. 제 잘못이라 가스값을 물어야 하니 큰일 아닙니까. 여행이 오래 되면 전 큰일입니다."
" 당신은 전부터 주인을 알았었나요?"
" 아닙니다. 바로 고용되던 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시장에 도착했습니다. 파스파르투가 물건을 사는 사이에 픽스 형사는 재빨리 영사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사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했습니다.
" 이제는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자가 틀림없습니다. 80일간에 세계를 일주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미친 체하는 것이지요."
픽스 형사는 신명나서 어깨를 흔들어대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사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 그가 정말 범인일까요? 혹시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요? 당신 말이 옳다면 무엇 때문에 수에즈를 통과했다는 증명을 받으려 했겠소."
" 그 까닭은 알 수도 없지만, 알 바도 아니죠. 아무튼 제 얘기를 들어 보십시오."
픽스 형사는 영사에게 파스파르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간추려 말해 주었습니다.
" 듣고 보니 의심을 받을 만도 하군. 그럼 이제부터 어찌할 생각이오?"
" 런던에 전보를 쳐서 봄베이로 포그 씨의 체포 영장을 보내 달라고 하고, 저는 몽골리아 호를 타고 인도까지 뒤를 밟기로 하겠습니다. 그 곳은 영국 영토니까 체포 영장만 있으면 잡을 수가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