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는 없다. 쇼팽도 빠졌다. 말러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살림)은 20여 명의 작곡가에 대한 가볍고 신나는(?) 이야기들이다. 접근하기 쉬운 팝 음악을 만나듯이 경쾌하게 달려 나간다. 잡지에 실린 것 같은 흥미로운 글을 읽고 있으면, 저자 조윤범의 방식으로 클래식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초보자들이 읽기에 좋고, 어느 정도 클래식에 대해서 아는 이들도 정사와 야사가 적당히 섞인 글들을 통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은 바흐에서 시작해서 윤이상으로 끝난다. 책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전부 다 읽어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심 있는 음악가에 대한 글부터 읽으면 좋을 듯하다. 그 중 몇몇 작곡가들을 먼저 소개하려 한다. 다른 음악가들이 궁금한 독자는 책을 사서 읽으시길!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마다 꺼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보다 작곡가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음악도 더 쉬워질 테니. 이 책을 읽고 있으면 클래식에 대한 이해도가 배가될 것이다.
사실 <파워 클래식>을 읽게 된 이유는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클래식에서 영화음악으로 전향한 탓에 비판을 받았던 비운의 작곡가. 그의 이름에 빗대어 전통주의자들로부터 “황금(gold)보다는 옥수수 알갱이(corn)에 가깝다”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저자 조윤범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짧지만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꺼내고 있다.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발명한 후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등과 함께 그 스타일은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볼프강 코른골트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단아처럼 전통을 고수했다. 일찍이 말러가 신동이라고 인정했던 천재적인 음악가. 푸치니는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를 듣고 “독일 음악의 위대한 희망”이라고 코른골트를 극찬했다. 하이페츠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으며, 카라얀도 교향곡 음반을 내놓았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클래식을 떠나서 할리우드로 간 코른골트는 영화음악계를 뒤흔들어버린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실내악을 연주하는 저자 조윤범은 자신의 관점에서 코른골트를 평가한다. 왜 실내악에는 바그너 같은 음악이 없을까.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여기 바그너 스타일의 실내악을 작곡한 코른골트가 있다. 그의 현악육중주곡은 바그너적인 반음계적 화성 위에서 더 복잡한 멜로디를 발전시켰다. 도중에 폭발하는 멋진 부분들에서는 젊은 코른골트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당신이 만약 현악육중주곡을 연주한다면 드보르자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를 연주하고 나서 다음 곡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연주하기 전에 생각해보라. 그 사이에 코른골트의 육중주가 있다는 것을.”(p299~300) 코른골트는 바그너의 전통 안에서 자신의 해법을 찾아냈다. 조성음악을 고수했고, 이런 스타일은 할리우드 영화와 너무나 어울렸다.
코른골트는 맥스 스타이너, 알프레드 뉴먼, 디미트리 티옴킨 등과 더불어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아버지 중 하나다. 다만 우리에게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에롤 플린 주연의 <로빈 후드의 모험>(The Adventures of Robin Hood, 1938)은 코른골트에게 아카데미 음악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와 에섹스의 사생활>(The Private Lives of Elizabeth and Essex, 1939), <시 호크>(The Sea Hawk, 1940) 같은 대표작을 남겼다. 이 세 편의 음악을 포함해서 코른골트의 영화음악 모음집이 찰스 게르하르트의 지휘로 내셔널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나온 음반도 있다. 아마도 코른골트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개혁하지 않았다면 존 윌리엄스 같은 음악가가 나오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코른골트의 영화음악 모음 앨범.
“<도망자>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예전에 TV 시리즈로 방영되어 한창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영화의 원제는 'The Fugitive'인데, 앞으로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할 ‘푸가(Fuga)’라는 음악용어 역시 이 단어처럼 ‘도망치다’라는 뜻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도망가다니, 음악에서 뭐가 어디로 도망간다는 걸까? 푸가는 원래 선율과 비슷한 다른 멜로디들이 계속 쫓아가며 겹쳐지는 음악을 말한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 뒤에서 또 노래를 부르며 뒤따라오는 것이다.”(p23) 바흐를 다룬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런 부분이 저자가 클래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제 푸가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는가?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남겼고, 둘째로 그 이전까지 부족했던 음악의 형식들을 모두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작들도 기가 막히게 많다. 바흐를 예찬하기 위해서 야사를 인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마을에 전쟁이 닥치자 피난을 가려고 했다. 그는 집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 바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바이올린을 들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적군에게 곧 붙잡혔고 그는 감옥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이 무서움을 달랠까 생각하다가 그는 연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악기 케이스를 열어본 순간 그는 실망했다. 전쟁 중에 악기를 들고 뛰어다니다 보니 바이올린의 네 줄 중에서 세 줄이 끊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는 마지막 한 줄로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그 곡은 바흐의 <4개의 관현악 모음곡> 중 3번의 ‘아리아’라는 악장이었다. 그리고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그 마지막 줄이 바로 바이올린의 G선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G선상의 아리아>에 얽힌 일화다.”(p32)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 들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G선상의 아리아>를 쉽게 설명해준다.
모차르트.
진정한 신동 모차르트는 어땠을까. 세 살 때부터 누나가 치는 화음을 피아노로 따라 치던 모차르트는 어느 날 책상 위에 앉아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가 뭘 하고 있느냐고 묻자 어린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 친구는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볼프강의 악보를 확인했다. 이 일화는 그림으로도 남아있는데, 당시 모차르트의 나이는 4세였다.”(p60)
모차르트는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도박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내기 당구뿐만 아니라 트럼프게임이나 경마 같은 각종 도박에 열중했다. 그 외에도 멋진 옷을 맞추는 것도 좋아했고, 마차를 구입하면서 돈을 쓰기도 했다. 여러 일화들을 보면 모차르트의 경제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지금은 모차르트의 죽음이 영화 <아마데우스>에 그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레퀴엠>을 의뢰한 발제크 백작 이야기나 모차르트가 걸렸던 류머티즘 열병에 대한 증거들도 공개된 지 오래다. “그러나 모차르트에 대한 천재적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보통사람의 시선을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그려낸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특별한 이들’의 것이 아닌 ‘우리들의 것’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p81)
<불멸의 연인>에서 베토벤(게리 올드먼)이 <월광>을 연주하는 장면.
“모든 음악은 베토벤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 이전을 우리는 ‘고전파’, 이후를 ‘낭만파’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고전파이기도, 낭만파이기도 하다. 이것이 수많은 교과서에서 베토벤이 다른 악파로 등장하는 이유다. 역사의 획을 긋는다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p82) 악성 베토벤 이야기도 쉽게 접근하려 한다.
“29세였던 1799년, <비창>을 발표한다. 이 곡은 너무 아름다워서 팝송 ‘미드나잇 블루’로도 편곡되었던 작품이다. 그는 그 뒤로도 24개의 피아노 소나타(모두 32개)를 더 만들어내는데 이들 모두 피아니스트들의 성경이라고 불린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도 빠질 수 없다. 1801년 작곡한 이 곡은 누구나 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리고 낮은 선율이 시작부터 전율을 안겨준다. 그러나 막상 치려고 하면 수많은 내림표들과 엄청나게 빠른 마지막 악장이 금세 연주자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19세기에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도 같은 제목의 피아노곡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 역시 아주 아름다운 곡이다. 두 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p84~85) 저자 본인이 연주자로써 느끼는 점들, 어떻게 음악을 들으면 더 흥미롭게 들을 수 있을까, 그런 길잡이를 해주려고 노력하는 책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저자는 처음에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떤 외국인 연주자가 한국 사람들은 모두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에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음악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는 언제나 감성을 자극하고 깊은 우울과 정열, 그리고 폭발력을 보여주어 많이들 좋아한다. 그의 음악에 절제란 없다. 한 번 사는 인생, 끝까지 가보는 음악! 차이코프스키는 그렇다.”(p160) 차이코프스키를 ‘러시아의 별’이라고 부른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갈고 닦아서 러시아 최초의 국제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하면 발레가 떠오른다. “발레를 연습하는 귀여운 조카들을 보고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바로 <백조의 호수>다. 1876년 작곡한 이 작품은 누구의 의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창작열을 불태워 만든 곡으로, 오늘날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볼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발레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품은 당시 흥행에 참패했고 차이코프스키 사망 후에나 인정받았다. 사실 오늘날 사랑받는 차이코프스키의 유명 작품은 거의 모두가 당시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모차르트 같은 음악을 클래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전문적인 연주자들은 그의 음악이 어색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비판했다. <백조의 호수>가 참패한 후에 차이코프스키는 다시는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곧바로 다음 작품을 작곡했다. 하지만 발레곡은 12년 후에나 다시 발표하게 된다.”(p174~175) 아름다운 발레 음악. 천재적인 안무가 매튜 본은 <백조의 호수>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서 관객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영화 <빌리 엘리엇>의 마지막 장면으로도 쓰였던 남성 발레. 위대한 음악은 이처럼 영원성을 지닌다.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을 읽으면서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쉬운 접근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