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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유와 감각 사이, 그리고 상상력
-권오주 시집 『빛의 화살은 새가 된다』(시문학)
최휘웅(시인)
권오주의 첫 시집 『빛의 화살은 새가 된다』를 읽으면서 시는 사유와 감각, 그리고 상상력 중 그 어디에 거처를 두어야 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오늘날 생산되는 많은 시들은 사유의 깊이를 추구하는 시, 또는 언어감각에 치우친 시, 아니면 무한한 상상력을 활보하는 환상시 등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은데, 권오주 시의 위상은 이런 유형에서 모호하게 읽혀지는 측면이 있었다. 사유는 삶이나 죽음, 또는 인생이나 자연에 대한 깊은 철학적 인식과 관련이 있고, 언어감각은 언어의 결을 갈고 닦는 데서 생성된다. 이 때 관념적 언어는 최대한 배제되는 예술지상주의적인 순수시의 입장을 고수한다. 한편 일군의 시인들은 꿈, 환상 같은 무한한 상상력을 시로 견인하기 위하여 몰두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시의 경향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작동할 때 생기는 혼란된 시의 모습일 것이다. 시가 지나치게 철학적 사변에 치우치면 시와 수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래서 시의 순수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관념을 배제하고 언어미학을 고수하게 되면 내용이 공소해질 위험이 있다. 환상시가 상상력에만 치우치면 현실적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상호 모순적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인이 안고 가야할 과제다. 권오주 시인의 시집에서도 이런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사유와 감각, 상상력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하는 과욕이 시의 얼개를 상당히 복잡하게 하고 난해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첫 시집으로서 권오주 시인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사유와 감각, 상상력의 조화가 시인의 지향점이 될 것이란 예측을 하게 한다.
시집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제목 ‘빛의 화살은 새가 된다’는 구문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 하는 탄성이 왔다. 시적 사유와 감각, 그리고 상상력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어서이다. 빛, 화살, 새, 이 세 단어의 결합은 범상치 않은, 상식을 초월한 시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다. 빛이 상징하는 의미는 밝음, 희망과 같은 긍정적 세계일 것이다. 이것이 화살로 비유됨으로서 속도감이란 감각을 더하게 되고, ‘새가 된다’와 결합함으로서 무한한 새로운 공간을 날고자하는 비약을 꿈꾸게 된다. 빛이 새로 변환하는 시적 상상력은 현실초월의 무한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 제목의 시가 그리고 있는 내용 역시 고단한 도시의 삶에 속박돼 있는 자들의 꿈꾸는 내면을 포착하는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두운 길목 탈선의 궤적을 지나
그대의 손을 끌어당기는
붉은 잠의 새벽이 흔적을 털어낸다
아침 햇살로 까치들이 모여들고
푸른 신호등 깜빡이는 교차로에서
허공으로 그어지는
샤갈의 중력이 누설된다
-「빛의 화살이 새가 된다」 1연
경쾌한 아침의 이미지들이 어두웠던 어제를 지우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발 돋음 하고자 하는 도시인의 내면을 그린다. 관념적인 언어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감각적인 언어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미지 중심의 시가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시의 3연에서는 낙원을 꿈꾸는 자들의 소망이 아침 햇살과 새의 이미지들과 결합되어 현시되고 있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내면지향적인 이미지들은 도시 삶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상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상당수 시가 시적 사유를 언어감각으로 표출하기 위하여 고심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사유가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이미지다 하는 강박이 사변思辨의 깊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의 시는 사변을 깔고 있다. 그런데 그 사변이 철학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감각적인 이미지로 변환되어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벽은 굳어버린 등뼈를 웅크렸다
숨어 있는 햇빛이 눈동자를 제어하는 동안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낯의 시간이 창문을 건드렸다
(중략)
햇살은 벽 뒤로 사라지고
추억의 오래된 계단에 걸터앉아
벽 쪽으로 떠밀었다
표정이 지긋이 굳어갈 즈음
골목이 끝나는 겨울의 가운데
눈보라의 어둠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나는 소용돌이의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벽을 위한 변명·2」 중 앞과 끝 부분
이 시에서 ‘벽’은 시각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나와 세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관념을 표상한다. ‘벽은 굳어버린 등뼈’란 감각적인 이미지가 굳은 내면의 메마른 감정과 등가 관계에 있다. 세계와 단절된 채, 이런 ‘벽 쪽으로 떠밀린’ 시적 자아는 ‘추억의 오래된 계단’에 머물러 있다. 과거에서 발이 묶여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고착된 시적 자아의 감정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심적 상태에서 바라본 세계는 ‘눈보라의 어둠이’ 날리고, ‘소용돌이’가 판을 친다. 이런 벽의 의식은 현대의 삶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데서 파생한다.
나는 시멘트 한줌에 의지하여 서 있는
절벽 끝 도시입니다
슬퍼하기엔 낡아버린 그리운 사람입니다
바다에서 잠자는 수많은 광물
이 도시에서 빛나길 바랍니다
기분 탓입니다
눈을 노려보는 두 개의 뿔이 심장을 찌릅니다
아스팔트에 비친 긁힌 내 얼굴을 바닥에 눕힙니다
우울한 침묵의
길을 향해 움직이는 아드레날린의 반응이
내 깊은 곳의 상처로 남습니다
멍청한 하늘이 파랗습니다
눈꺼풀을 닫으면
브론즈의 얼굴로 타버린 환원된 흙과 물입니다
방안을 어슬렁거립니다
옷을 입고 가방을 꾸밉니다
긴 복도의 끝까지 현기증으로 걷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긴 현기증으로 걷습니다
-「환상프로젝트」 전문
이 시의 발상은 도시가 삶을 속박하는 절벽 끝에 있는 벽이란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시의 제목 ‘환상프로젝트’는 도시가 만들어가고 있는 삶이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는 반어적 의미를 내포한다. 도시인은 항상 화려하고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낼 것처럼 무언가를 기획하고 시도하지만 우리의 삶은 초라하고 왜소한 상처투성이다. 결국 ‘환상프로젝트’는 도시인의 꿈과 현실의 괴리를 반영한 부정적 의미가 된다. ‘시멘트 한줌에 의지하여 서 있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절벽 끝 도시’에서 현대인은 ‘슬퍼하기엔 낡아버린’ 메마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을 이 시는 자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바다 속에서 잠 자는 수많은 광물’들이 있듯이 도시의 삶의 이면에도 그런 빛나는 것들이 있을 것이란 희망을 애써 가져 보지만 현실은 각박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도시의 삶은 재화를 얻기 위한 경쟁과 투쟁으로 상처만을 양산하는 가운데, 우울, 신경증과 같은 병적 증상들이 범람한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아드레날린의 반응’ 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아드레날린은 중추 신경계의 특정 부위에서 생성되며,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호르몬이다. 아드레날린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과대분비가 되면 만성 스트레스, 두통, 불안, 어지럼증, 근육통, 수면장애를 일으키게 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게임과 도박 등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물질문화에 노출되어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시어 ‘브론즈’는 청동과 같은 의미이고, 동시에 온라인 경쟁게임의 최저등급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현대 도시 삶의 자극적 특성을 함축한 언표로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자극적인 게임과 문화 때문에 매일같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렇게 이 시는 위기에 처해 있는 도시 삶과 그 병리적 현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바람은 잿빛으로 풍경을 감춘다
옥외 광고판을 바라보는 너는
거리에 쌓여 있는 규칙의 유토피아를 무너뜨린다
무너지는 것은 거대한 허식의 콘크리트에 기대어 서는 것,
녹슨 창살의 건물 앞에서 불안을 쓰다듬는다
-「회색도시·2」 1연
네 편으로 된 연작시 「회색도시」의 내용 역시 앞에서 언급한 시 「환상프로젝트」 와 같은 선상에 있다. 전반적으로 관념적인 판단은 유보된 채. 사실적인 도시풍경을 배경으로 도시에서 겉돌고 있는 자의식이 펼쳐지고 있다. 제목 ‘회색도시’가 암시 하는 것은 검은 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불투명하고 불안한 삶이다. 일견 화려한 유토피아 같은 도시의 실체는 ‘허식의 콘크리트에 기대어 서는 것’에 불과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옥외 광고판’처럼 과장된 화려함 뒤에는 늘 허위와 불안의 의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조급함과 분노와 두려움 속에서 방황한다. 같은 제목의 다른 시편에서 읽혀지는 핵심 내용이다. 연작시 「회색도시」는 이런 자의식의 흐름을 연상수법으로 현란하게 펼쳐 보인다.
이런 현실에서 이 시집의 주인공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추구할까? 다음에 인용하는 시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질주한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
바람을 깃털처럼 어루만지면
탄로나지 않게 숨결을 어루만진다
소파 위에 잠자는 고양이
어디로 숨는지
들켜버릴 것만 같은 발뒤꿈치
옷장의 문을 열며
술래의 잠적을 짐작한다
나는 질주하는 속성에 매달린다
숨죽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혼자 도주하는 밤길을 잊어버린다
죽은 영혼이 숨긴
푸른 숲의 그늘을 그리워 한다
나는 꿈꾸는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헤맨다
-「방법론」 전문
시 「방법론」은 표면상 고양이의 행동양식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나’는 고양이면서 시인, 곧 이중 자아이다. 어쩌면 시인은 고양이의 습성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묘미는 고양이의 행동이 현대인의 의식과 등가관계로 읽혀진다는 점에 있다. ‘소리 나지 않게 질주’하는 것은 겉으로는 고양이지만 속도에 갇혀 있는 현대인의 의식과 관련이 있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감각을 잃은 체, ‘질주하는 속성’에 매달린 현대인의 현주소와 맞물린다. 남보다 먼저 가기 위하여 달리고 또 달린다.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들켜버릴 것만 같은’이나 ‘숨죽이는 시간’이 이를 암시한다. 시적 화자는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권오주의 첫 시집 『빛의 화살은 새가 된다』는 현대 도시 삶의 어두운 그림자에 앵글이 맞추어져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도시의 삶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벽, 회색. 질주, 허위, 불안으로 표출되는 세계란 점에서 그렇다. 이런 세계에 대하여 시적 자아들은 회의하고 방황하며 절망한다. 현실에 절망한 자들이 곧잘 몽상적 자의식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은데, 권오주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어제와 오늘
기억들이 방황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적막의 흔적조차 사라질
은밀한 반란을 지구에 남긴다
밀밭의 시간을 들판에 뿌린다
길들여진 추억은 모호하고
내일 즈음
허기진 숨을 몰아쉬면
오아시스에 숨겨진
하늘이 눈부시다
자라나는 손톱은 말라가고
펄에 박힌 늙은 어부의 말이
풀어놓지 못한
꿈은 서럽게 바람을 일으킨다
나는 나지막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하여
걸음을 옮긴다
-「기억 저편」 전문
물질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는 인간을 소외의 늪으로 몰고 간다. 이런 부박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곧잘 자기 안에 갇혀 있기 마련이고. 꿈과 같은 몽상적 세계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시 「기억 저편」은 시적 자아의 꿈꾸는 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된다. 화자는 이 시간 여행을 ‘적막의 시간조차 사라질/ 은밀한 반란’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난 해방된 순간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시는 기억 저편에서 추억을 불러와 어떤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고통이었던 것도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반추하면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떠오른다. ‘오아시스에 숨겨진’ ‘눈부신 하늘’이나 ‘풀어놓지 못한’ ‘늙은 어부의 꿈’이 표상하는 것도 이러한 심리현상일 것이다. 설사 현실이 되지 못한 서러운 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은 황홀한 순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실에 절망한 자들이 곧잘 빠져드는 세계가 이런 몽상적 시간이다.
권오주의 시는 꿈과 현실의 괴리를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그가 인식한 현실은 거의 절망적이다. 단절과 소외, 불안과 위기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위기의 삶을 ‘굳어버린 등뼈’의 ‘벽’으로 형상화 한다. 그리고 고양이의 행동양식을 빌려와서 속도에 매달리고,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생존방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때로는 그의 시적 상상력은 몽상적 세계에 몰입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식의 발로처럼 보인다. 권오주 시의 시적 자아가 꿈꾸는 세계는 과거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기억 속에 잠복되어 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시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한다.
권오주 시의 시적 사유는 도시 삶의 부정적 인식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사유의 깊이가 잘 들어나지 않는다. 그의 시가 관념적 진술을 거부하고 이미지 중심의 표현에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거기에 몽상적 이미지들이 중첩되면서 메시지 전달이 희석되는 경향이 있다. 역으로 뛰어난 감각적인 구문들이 의미의 연결고리를 잃고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시는 언어감각이 사유를 받쳐주고 거기에 상상력의 확장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이 삼자의 균형을 찾는 일이 권오주 시인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아닌가 싶다.
최휘웅
198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계간 《부산시인》 편집주간이다. 시집으로 『지하에 갇힌 앵무새의 혀』, 녹색화면 외 여러 권이 있으며 평론집 『억압. 꿈. 해방. 자유. 상상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