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론 대 존재론: 실천론 대 인식론
2023 06 13. 젊이에게
현존은 존재에 대한 논의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사유의 발전은 어느 정도 이들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어 온(ὤν)은 동사(είμί)의 분사형이며, 부정형은 에이나이(εἶναι)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유럽어들에서는 “있다”와 “이다”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입말은 구별이 있다.
한 단어가 두 가지로 용도로 또는 같은 입말이 여러 단어로 달리 쓰인다. 그런데 이것은 소나무이다 또는 이것은 원이다에서 ‘이다’와 (여기에) 소나무가 있다와 (저기에) 원이 있다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인식론적으로 둘의 의미는 다르다. 전자들은 개념(일반)과 상징(관념)에 대한 서술이며 지시작업을 표현한다. 후자는 실재성에 대한 표현이며, 현실적으로 현전하는 대상들이 어떠한 방식에서 기호로 등장하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서는 이런 구별한다는 것이 심각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근대의 200여 년 동안에는 이것들 사이에 구별과 혼동이 현존과 존재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자각하였다.
고중세에서는 실체라는 대상화를 통하여 개념작업의 류(일반화)와 종(개별화) 사이에 구별로서 대상들에 대한 용어 또는 단어를 설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근대에서 종들이 현전인데 비해, 류들은 사유의 추상적 추론의 작업에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근대에서는 사물과 상태의 현전과 추상적 대상의 존재 사이에서는, 이들 사이에 고중세의 연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을 넘어서, 이원성과 더불어 평행 또는 대칭이 있을 것으로 보았고, 19세기 후반의 인식론자들은 당연히 정합적 이론 속에서는 대응되고 합의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고대에서 의식과 사물 사이의 연대란 오관의 감각기관들(상식)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사물에 대한 인식이 의식에서 한정적인 이론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르네상스 이래로 상대성이 인정되면서, 사물의 성질과 의식의 성질이 이분화되어 있어도 둘 사이에 연결과 접속 또는 평행과 대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과 역엔트로피에 대한 사유에서, 고중세와 근세의 상응이든 이원이든 인간의 오성(지성, 이성)이 만든 조작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고중세와 근대에서는 사물과 의식 사이의 정합성이 먼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했다고 여기는 새로운 실증적 인식에서 보면, 과거의 인식론은 사물과 실재성을 다루었다라기 보다 대상과 현실의 겉면만을 인식이라고 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실재성 자체를, ‘변형하고 변화하며 움직이고 있는 물질자체를’, 인식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점을 고대 이래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진동하고 흐르는 물질은 논리적 사고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그래도 물질의 깊이 없이 표면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일반론자와 추상론자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깊이에 내재 하는 물질적 성질들은, 의식에 내재하는 내재의식(무의식)과 같은 방향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실증과학으로서 심리학이 도래한 이후일 것이다. 일반론자와 추상론자들이 다루는 대상이 물질의 변화성(필연성)과 의식의 실재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다루는 대상은 현존이 아니며 실재성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대상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언어적인 측면에서 용어와 단어가 대상을 지칭한다고들 한다. 소쉬르가 흥미롭게 제시한, 입말의 활동에서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는 실재 사물과는 연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기표와 기의가 이미 사고의 대상으로서 인식론의 대상이기에, 현존하는 물질과는 연관이 없다. 그러면 입말의 기표가 사고의 기의와 연관은 있기는 하나, 둘 사이에 통일적인 일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일치를 가정해야, 입말을 말하는 자들 사이에 그래야 소통도 가능하고 정보의 전달도 가능하며, 머릿속에서 사유도 가능하며, 사유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도 있다.
실재성과 무관하다는 입말에서, 정보와 소통이 개념을 일반화 방식으로 삼은 것은 오랜 습관이며, 이런 습관은 협약과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 상식적/양식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판단을 지식으로 삼고, 판단의 명제에서 진위를 결정하면서, 진리론에 귀착하는 신념을 갖는다. 그리고 판단의 진리론이 신념을 넘어서 신앙에 귀의하여, 판단론, 진리론, 신앙론을 하나의 정합적 체계로 세우면서, 나아가 (현존이 아니라) 존재의 체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만든다. 인식론이야 말로 철학의 기본이라고 가정했던 것이 존재론의 원리인 것처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인식론은 실재성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다루는 용어와 단어, 그리고 판단의 대상은 사물이라기보다, 일반화의 개념이며 또한 추상화된 관념이라는 것을 인식론자들도 잘 알고 있다. 인식의 대상이 류적 개념의 외연과 더불어 추상적 상징이라고 해도, 사고의 대상으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실재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존재에 대해 말하고 존재를 실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고의 과정에서 개념과 상징이 존재론의 대상이 된다고 까지 나아간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 산타클로스 할배가 존재하며, 하늘나라에 옥황상제가, 물속에서 용왕이, 올림푸스에는 제우스가, 지하에는 하데스, 하늘나라에는 예수와 마호멧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늘나라든 지하든 그들의 관념이 현실적이지 않아서 실재성일까? 이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실재성을 근거로 한 현존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현대의 인식론이 추상과 상징을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동사 부정법과 같이 취급하고자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존재는 동사가 아니라, 불변하고 영원한 명사처럼 여기는 상징을 실체로서 여기는 것이다. 실체니 존재니, 대상이니 상징이니 하는 것과 달리 현존하는 대상과 대상들 사이의 관계, 여기서 발생하는 사고와 사건들이 현실에 있다.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이런 사고와 사건들이 문제로 제기된다. 철학은 용어의 성립에서 지혜의 학문이라고도 하고,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현실의 난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힘으로 실천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누가 어떻게 왜라는 방식을 알고자 노력이었다. 문제를 푸는 방식은 인간사에서 수십 가지일 수 있다.
문제를 푸는 것은 삶에서 실재적이다. 대상화의 인식론적 추론이 행위 방식을 알려준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사건의 여러 연결과 엉킴에서 풀 수 있는 길은 실재성을 벗어난 추상적 방식은 어쩌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실재적으로 일어난 여러 우발사고들과 뜻밖의 사건들은 표면에 등장하여, 우리들에게 현전에서 의미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다.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이 아니다. 상징화하여 기념하고 추념하는 것은 사건에서 과거의 한 추억처럼 한 점으로서 회상하며, 그 점을 잊지 않고 다른 점들과 연결하여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비추어서, 물음에 답을 찾는 사변적 기능이다. 삶에서는 그 얽히고설킨 타래를 푸는 노력이 먼저이고, 그 실행의 과정과 방식이 오래 축적되고 방향을 가질 때 일반화의 용어와 테제로 정립될 것이다.
삶이 먼저이고 철학은 다음이라고 말할 때, 현존과 실천이 먼저라는 것이다. 체계와 정합론 또는 존재론과 인식론도 한 체제 안에서 이미 고착된 축적과 관습에 따라서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소중하기도 하다. 그런데 체제의 고착화 또는 소수의 사유화에 의해 부조리와 난문제를 양산할 때, 사건들과 그에 얽힌 상태들을 해소하는 길은 다른 길일 것이다. 특히 사람들 사이의 문제거리와 제도상의 불합리의 해소에는 과거의 기억과 의식에 내재하는 활동성을 달리 활용하기(역사 다시 읽기), 달리 말하기, 달리 사물을 대하기(지각하기)가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초등에서 중고등에까지 인식론의 발달적 단계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왔다. 그 배움의 과정을 삐아제가 추상적 방식으로 설명했다. 이에 비해 루소가 보기에 청년의 나이 18세에서, 고등교육에서 사회활동으로 넘어오면 세상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설명과 전혀 다른 현존론의 세상들도 보게 된다. 기존의 세상을 오르소독스(정토파)라고 하는 이들은 달리 실천하기(저항, 봉기, 항쟁, 혁명), 달리 사유하기를 노토스 로고스(별종파)들이라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들에서 현존론으로 실천하고 사유하기 관점에서 보면, 정통파의 사고는 여러 파라독스들(paradoxe) 중의 하나로서 독사(doxa)에 지나지 않으며, 별종파의 사유는 파라독스로 보이지만 문제해소를 위해 다음을 풀어가는 중요한 독사(견해) 중의 하나이다.
젊은이란 관습에 안주하는 사고에서 벗어나는 시기이며, 실천과 사유에서 새로운 생산과 자유를 누리는 열락(說樂, 즐거움)의 시기이기도 하다. (학습과 노력에서 열說, 동지(또는 우정)를 만나는 락樂: 공자의 논어 학이편에서, 학이시습지면 불역열(說)호아, 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낙(樂)호아, ... [새로이]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동지가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 새로운 세계는 젊은이에게, 우리들에게 열락당으로 펼쳐질 것이다. (3:08, 56QLB, 3:21: 56Q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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