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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성이 자기 영혼을 치유하려면
더 큰 자유를 위한 자기탐구의 여정
④치유로 가는 일곱 단계
남성은 전통적인 새턴의 지배에서 오는 압박을 계속 느낄 것이며, 경제적 목적을 위해 육신과 영혼을 희생하도록 요구받을 것이다. 가부장적 가치와 더불어 다른 남성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분노를 지닌 채 오래 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성 개인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까지 돕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그중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사람도 생길지 모른다.
집단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먼저 남성 개개인이 충분히 변화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치유 작업부터 우리가 초래할 수 있는 모든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의 초점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일곱 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조상의 상실을 되새겨라
2단계: 비밀을 털어놓아라
3단계: 자신의 멘토를 찾는 동시에 타인의 멘토가 돼라
4단계: 남성에게 애정을 갖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5단계: 자신을 치유하라
6단계: 영혼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라
7단계: 새로운 혁명에 동참하라
1단계: 조상의 상실을 되새겨라
남성의 본질에 기반해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부족의 조상과 맺는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더불어 대규모의 도시 이주로 남성은 대부분 자신의 뿌리를 잊고 말았다. 가정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손으로 하는 일과의 관계, 자신의 영혼과의 관계를 말이다. 경제적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은 그 대가로 영혼을 갉아먹는 사회적 역할에 자신의 에너지를 적응시키고 말았다.
남성은 내면 깊이 생긴 상처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픔과 무지로 말미암아 아들들까지 상처입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상처는 마치 저주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다. 이 케케묵은 상처를 의식으로 끌어올려 자신의 가족사에서 이 상처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깨닫고 스스로 되새길수 있는(즉,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간극을 치료하는) 이들만이 대대로 이어진 새턴의 힘겨운 압박을 넘어설 수 있다. 시인 샤론 올스SharonOlds는 자신의 시 〈새턴Saturn〉에서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생활하는 경험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매일 밤 그는 소파에 누웠다,
입을 벌린 채, 방의 어둠이
그의 입을 채운 채, 그리고 그 누구도
아버지가 아이를 잡아먹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더 나아가 아버지가 자식 하나하나를 어떻게 먹어치우는가도 묘사한다.
잇몸의, 내장의 신경 하나하나에서까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리고
여전히 멈출 수 없었다.
(…)
아버지는 원했다.
삶을 자기 입속에 밀어넣고서는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를, 남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아들에게 보여주기를.
아들들은 아버지가 새턴의 멍에를 쓰고 괴로워하는 걸 보았다.
매끼 식탁에 음식이 올라오고 제때 방세를 내며 신을 신발이 있다는 걸 우리는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시인 로버트 헤이든Robert Hayden은 〈그 겨울의 일요일들Those Winter Sundays〉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힘겹게 투쟁했으며 정작 자신은 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는지 되새긴다.
아버지에게 난 건성으로 말을 건넸다,
추위를 몰아내주고 내 좋은 구두까지
닦아놓으신 아버지에게.
그때 내가 어찌,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엄숙하고도 외로운 사랑의 사명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상처 속에 신음하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도록 허락받지도 못하고 달리 대안도 없이 말못할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부끄러움 없이 슬퍼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은 잃어버렸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솔직한 감정이다. 슬픔은 공개적으로 기억하는 행위이며, 순간에는 좋지않은 감정으로 여겨질지모르나 그 솔직함 덕분에 정화와 치유라는 효과를 가진다.
남성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슬픔을 아무리 무의식 깊숙이 욱여넣어도, 정신은 이를 눈치채고는 그 무거운 감정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벌을 내린다. 슬픔의 가장 흔한 형태는 우울이다. 우울은 삶의동력을 무디게 만든다. 삶이 겉보기에 아무리 잘 돌아간다고 해도 우울은 알지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끌어내린다. 삶의 가장 달콤한 순간조차 이 무거움에 물들어버릴 수 있다.
무의식으로 억압된 슬픔이 우울로 이어질 때 분노는 부정당한다. 분노는 생명체가 상처에 대해 반사적으로 보이는 정당한 반응이다. 치유를 원하는 남성이라면 상처를 입힌 사람뿐만 아니라 상처 자체에도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강력한 감정이 그러하듯 분노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받은 아들이 자신을 스스로 정화하고 상처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아들마저 상처 입히고 말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분노를 직면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새턴의 감옥에 갇힌 죄수로 살아갈 것이다.
남성은 자기 내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좀 더 의식하고 깨달아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과거를 바꿀 수도 없으며 아버지와의 외면적 관계에 특별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조용하게 작동하고 있다. “아이가 짊어져야 하는 가장 큰 짐은 부모가 살지 못한 삶”이라는 융의 주장을 생각해볼 때,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상처가 자신의 내면 어디에 전달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자신이 아버지의패턴을 그대로 답습해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버지의 패턴에 반응하는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면, 누구든 그는 새턴의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다.
아들이라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버지의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나를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아버지는 무엇을 희생했을까? 아버지 자신의 희망과 꿈은 무엇이었을까? 꿈을 이뤄낸 걸까? 아버지는 원하는 감정대로 살도록 허락받았을까?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살았을까, 아니면 새턴의 허상 속에 살았을까? 할아버지와 자신의 문화에서 대체 무엇이 아버지의 여정을 가로막았을까? 아버지의 삶과 이력에 대해 난 무엇을 알고 싶었나? 남자가 되는 일에 대해 나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었나? 이런 질문들을 아버지에게 던졌다면 아버지는 대답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이런 질문들을 던진 적이 있었나? 아버지가 살지 못한 삶이란 무엇이었나? 혹시 아버지가 살지 못한 삶을 내가 대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식적으로 소리내어 표현하지 않아도 그 안에 숨은 대답은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며, 그 때문에 상대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다. 이런 질문을 거침으로써 아버지는 우리와 같은 남성이자 똑같은 고난을겪은 형제가된다. 그러면 상처가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측은지심으로 움직일 수 있다. 증오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에 우리가 여전히 얽매인 상태라는 뜻이다. 이제 성인이 된 위치에서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돌보는 과정도 더 잘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단계: 비밀을 털어놓아라
상처는 부정할수록 더욱 곪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2단계 프로그램(AAAlcoholics Anonymous)에서 말하는 대로 “저항하는 대상일수록 더 끈질기게 남는다”. 남성의 삶은 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에 기반한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Neruda가 노래했듯, “남자라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시인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병들게 하는 것은 ‘남성이라는 역할’이다. 남성의 영혼은 외부의 힘으로 정의될 때 왜곡된다는 사실이야말로 남성의 가장 깊은 진실이다. 소로H.D.Thoreau처럼 극단적인방식을 써서라도 자신의 영혼과 삶을 다시 만나기위해 은둔의 삶을 살려는 이들이 한두 명쯤 있다면, 그 곁에는 매일매일 집단의 익명성과 영혼없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 존재한다. 소로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은 ‘조용한 절망의 삶lives of quiet desperation’을 살고 있다.
우리의 정신은 의식보다 더 많은 걸 알기 때문에 이러한 영혼의 왜곡은 기록되어 연쇄반응으로 이어진다. 이중 가장 주목할 것은 아무리 숨으려 해도 남성의 삶을 찾아내고는 그 속에 침투해 물들이고 지배하는 ‘슬픔’이다.
또다른 비밀의신호는 바로‘분노’다. 올바른 방향을 잃고 획일적으로 변한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작동한다. 그리고 이모든 “인간핏줄의 분노와 오욕”아래는 끔찍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어떤 남성도 자신이 진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마초같이 행동하는 남성은 자신의 공포를 숨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위스턴 휴 오든의 시도 그런 진실을 노래한다.
애국자라고? 천만에,
거대함에 사로잡힌 아이들일 뿐,
거대한 상처에, 막대한 돈에, 그리고 대폭발에.
스스로 진짜가아니라고, 다시말해 영혼이 원하는 것과 외부에서 요구하는 것사이에 갇히고 말았음을 인식한다고 해도 남성은 이를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다. 내면의 삶과 아니마로부터 점점 소외당하는 남성은 여성이 그 짐을 짊어져 주길 바란다. 특히 섹스의 경우 그 중요성이 너무나 커져버렸다. 자신의 감정과 육체에서 소외된 느낌을 섹스를 통해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새로운 고통의 날이 밝기 전에 자신과 다시 이어져달라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위안을 달라고 타인에게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는 예전처럼 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의존하는 대상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긴장과 반목은 커져만 가며, 에로스는 권력의 그림자로 대체되어 버린다.
우연히 남성으로 태어났을 뿐 실은 남성으로서 실격이라고 느낀다는 것, 공포와 분노 사이에서 고통받는다는 것, 감정적으로 남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정작 그 의존 대상에 대해서는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남성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다. 이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견디기 힘든 이 진실을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 가능해지면 타인과도 공유해야 한다. 여성이 아니라 다른 남성과 말이다. 이 남성 역시 두려움 때문에 자기방어의 벽을 치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와 진실을 공유하려 할 때 처음에는 경멸하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에는 자신을 둘러싼 방어벽에서 뛰쳐나와 우리를 형제로 받아들일 것이다.
신화 속에는 높은산을 넘고 괴물과 맞서 싸우며 용을 물리치는 영웅의 모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남성이 자기감정의 진실을 털어놓으려면 그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영웅의 모험 여행은 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영혼의 황무지에서 이루어진다. 남성이상대해야 할 악당은 대문앞을 지키고선 수문장이아니라 자기내면의어둠, 스스로가 용감무쌍해져야만 해방될수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이 영웅적 과업을 융은 이렇게 말한다.
두려움과 부정이라는 사악한 영혼은 영원한 투쟁으로서의 삶에 반대하며 위대한 행동을 방해하는 적수다. 이들은 우리를 무는 배반의 독사처럼 우리의 육체 속으로 약함과 늙음이라는 독을 주입한다. 우리를 어머니라는 굴레에 가둬버리겠다고,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붕괴·소멸시켜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퇴행하는 영혼이다. 영웅에게 두려움은 도전이며 극복해야 할 과제다. 용감무쌍해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 자체가 침범당한다.
우리의 과제는 두려움의 극복이다. 마초처럼 행동해서 보상받으려 하거나 불명예스러운 공범이 되려 한다면 실패한다. 과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영혼의 진실을 스스로에게 밝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 진실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밝혀야 한다. 이렇게 진실을 밝히는 일은 아마도 삶에서 최고의 시험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완수한다면 “남자라는 게 지긋지긋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3단계: 자신의 멘토를 찾는 동시에 타인의 멘토가 돼라
심리치료를 받고자하는 남성은 가장 중요한 솔직함과 더불어 강력한 정서적 힘이 있다. 대부분은 두려움이 너무 심해 치료받을 용기를 내지 못한다. 정신치료는 자신의 삶을 은밀하게 타인과 공유할수있으며, 감정에 솔직해진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동시에 남자가 된다는 과제의 비밀까지 공유할 수 있는, 남성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다. 많은 남성에게 정신치료는 어머니로부터 독립해 남성의 세계로 들어서는 통과의례 역할도 한다.
대개 남성들은 문제가 ‘자기 외부’에 있으며 ‘그문제만 고치고 나면’ 삶이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치료 과정이 진행되면서 자신의 삶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으며 무의식중에 내렸던 선택으로 더 큰 자기소외의 미궁으로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성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원인이 자기 내면의 여성성 문제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스스로의 신을 잃어버린 채 자연과도, 자신의 육체와도 이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남성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고통에 둔감하다. 하지만 일단 이 사실을 의식하고나면 그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현명한 어른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내기를 갈망한다. 자신을 치유하는 게 우선이며 이는 자신의 배우자도 해줄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울거나 분노하는 과정을 거쳐 스스로가 지닌 두려움을 인정한다. 이 모두를 겪고 나서야 진정한 치유가 시작된다.
대부분의 남성은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할지도 모를 거대한 공허함을 몹시 두려워해서 자진해서 정신치료를 받겠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남성들에게 눈을 돌려 자신이 타인에게서 예전에 배웠거나 현재 배우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전수하려 할지 모른다. 멘토란 경험할 수 없을 다른 쪽을 겪어보았으며 그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다. 개인으로서 남성들은 깜짝 놀랄 만큼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만, 집단으로 보면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남성집단을 활용하면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공유하고 멘토링할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적잖은 남성들이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평생 소외감에 시달릴 것이다.
소년들에게는 바깥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고 본보기가되어줄 성숙한 남성의 존재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니체가 일찍이말한 것처럼, 가르치는 자는 과연 누가 가르칠 것인가? 누가 멘토들을 이끌 것인가? 우리 시대에는 집단 수준의 통과의례가 없으며, 신화에 기반한 경험으로 남성의 인생 여정을 도와줄 존재도 없다. 따라서 개인이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능력을 갖춘 개인은 석가모니가 그랬듯이 뒤돌아 손을 뻗어 동료 남성들을 이끌어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측은지심에서라도 말이다.
4단계: 남성에게 애정을 갖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남성들은 서로 경쟁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에 다른 남성이 우위에 설까봐 경계하며 두려워한다. 가부장제아래에서 벌어지는 권력게임이 빚은 결과다. 하지만 이러한 딜레마를 단순히 사회가 가하는 상처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동성애 공포의 진짜 원천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섹슈얼리티라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연결고리를 통해 남성은 ‘애정관계’ 자체를 여성과의 관계만으로 국한해버렸다. 따라서 남성은 서로 사랑하기를 두려워한다. 관계가 성적으로 변질할까 봐 두렵기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공포라는 조용한 손길이 결정적 역할을 맡게 된다.
운동장은 남성들의 육체적 동지애가 허용되는 곳이다. 경기장에서 서로의 피까지도 공유할 수 있으며, 라커룸에서는 껴안고 포옹하며, 심지어 함께 눈물을 흘려도 된다. 하지만 이보다 생동감도 떨어지고 초월적이지도 않은 상황에서라면 해묵은 의심과 미심쩍음이 남성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스포츠나 전쟁 말고는 남성이 다른 남성들을 만나 초월적 경험을 할 기회가 거의 없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감정적 친밀감을 가질 동성 친구를 갖는 일은 참으로 드물지 않은가. 남성 간의 친밀함은 여성 간의 친밀함에 비해 대체로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며, 남성 대부분은 자신의 두려움과 무능함, 그리고 연약한 희망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감정의 짐은 여성들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남성이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분노는 다른 남성에게 투사되며, 그러고 나면 투사 대상을 만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다른 남성들로부터 소외되는 이유는 사실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른 남성에 대한 두려움이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남성에게 애정을 갖기 위한 첫걸음을 이미 뗀 것과 같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무서운 과제를 먼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와 두려움을 바로 눈앞에 둔 채로 자기를 포용하는 일은 분명 매우 힘들다. 하지만 동성애 공포증을 에로스와 자비로운 동포애로 대신하는 일은 당장 우리가 사는 곳에서 시작된다.
5단계: 자신을 치유하라
상처 입은 남성은 자기 아들과 다른 남성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새턴의 굴레는 계속 새로운 젊은이를 찾아 희생자로 만든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치유는 가능하며 실제로 이뤄질 수 있다.
문화 자체, 그리고 문화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바꿀수는 없다. 개인의 이력에 생존해 있든 그렇지 않든 부모가 끼친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에 자신의 개인사와 문화적 맥락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생존을 위해 거기에 자신을 꿰맞췄다는 사실도 지금 와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의 누구나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길을 잃었다. 멘토를 갈망하면서 눈먼 자가 역시 눈먼 자를 이끄는 격이었다. 모든 남성은 삶의 어떤 단계에서든 이 중간항로를 건너 스스로의 삶을 구원해야 한다.
첫 번째 항로는, 자신이 내면의 짐을 짊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나중에 진실하지 않은 선택을 할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집을 떠나 독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죽음과 직면하는 것이 최후의 항로가 된다.
톨스토이Lev Tolstoy의 소설 《이반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은 인생 여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지못한 남성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은 영어로는 존존슨JohnJohnson정도 흔한 이름으로, 소설이 보통사람을 모티프로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반은 사회가 규정하는 역할을 받아들이며 의식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중 불치병을 앓게 되면서 자신에게는 스스로 기댈 수 있는 내면의 진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내와 친구들 역시 공허한 사람들이며 이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반은 결국 심리치료를 받는 이들이 종종 그러하듯, 자신의 삶은 전부 가짜였으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에 맞춰 살아왔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자 모든 남성이 지닌 가장 큰 두려움이 이반에게 닥쳐오는데,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공포다. 이반은 아동기에 얽매이고 문화에 떠밀리는 잠정적인 삶을 떠나 진정한 남자됨manhood으로 향하는 중간항로를 경험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살지 못했던 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 역시 한심할 정도로 안 되어 있었다.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남성에게 중간항로의 핵심은, 상황에 맞춘 반사적 행동과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철저하게 다시 살펴보고 영혼의 외침이 갈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다.
어머니가 성장 과정에서 하는 역할, 그 뒤에 등장하는 어머니 콤플렉스가 지니는 원형적인 파문, 그리고 아버지와 부족 원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이제 스스로 맞닥뜨려야 하는게 뭔지 분명해진다.
남성은 심리적 개인사, 특히 자신을 돌봐주고 지켜주길 갈망하는 아이 같은 마음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이 ‘내면아이’는 나중에 세상으로 뛰쳐나와 싸우다 결국 그 목숨을 다한다. 그러고 나서도 피난할 곳을 향한 갈망은 여전히 거대하게 남아 있으며 남성은 지금까지 그 짐을 보통 여성에게 내려놓곤 했다. 그러나 여성 대부분이 이제는 예전처럼 남성을 양육해주려 하지 않음에 따라 이 역할은 남성 자신의 몫으로 넘어왔다.
로버트 블라이가 묘사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소년들에게 행하는 통과의례를 살펴보자. 남성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팔뚝을 칼로 긋고는 피를 그릇에 모아 담는다. 이어지는 피의 성찬식에서 남성들은 그릇을 돌리고 나이 든 남성이든 젊은이든 상관없이 그 안의 피를 함께 나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젖이 널 키웠다. 이제 아버지의 피가 널 키우리라.”
남성이 홀로서기를 두려워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키워주길 바라는 마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물에게는 먹이고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 외로운 평원의 방랑자, 영화 속에서 상남자의 모습은 모두 의존성에 대응하는 남성의 병적인 과잉보상이다. 실제 이런 사람 주변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들에 대해 뭐라고 증언할지 생각해보라. 남성은 양육 받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여성이나 다른 남성들에게서 찾으려 할지도 모르지만, 자기를 돌보고 챙기는 건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타인에 대한 욕구나 두려움도 올바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양육nurturance’이 남자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 이면에 자리한 원형적 욕구라면,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성취감을 얻으려는 원형적 욕구는 ‘힘을 얻는 일empowerment’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 내면의 진실과 관계를 맺는 모습, 두려움과 수치심을 다루는 모습, 여성성을 균형 있게 존중하는 모습, 외부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모습들을 지켜봐야 한다. 개인이 힘을 얻는 일을 권력 콤플렉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권력 게임은 모든 남성을 정신적으로 거세한다. 힘을 얻는다는 것은 삶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쓸 수 있는 긍정적 에너지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삶으로 뛰어들어 깊이와 의미를 얻기 위해 싸워도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둠의 힘이 다가올 때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내면의 자원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버지를 가까이 두고 힘을 얻을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나, 현실적으로 남성 대부분이 이를 혼자서 해야 한다.
아버지/어머니 콤플렉스는 에너지 덩어리로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인다. 남성개개인은 내면에 자리잡은 이마고를조사해 자신을 지탱하는 삶의 능력과 더큰 삶을 위해 싸울 힘에 대해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이 에너지 덩어리들은 어떻게 충전될까? 어떤 암시적 또는 명시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어쩌다가 잘못된 선택을 초래했을까?
남성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애도하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버지의 상처는 무엇이며, 무엇을 갈망했으며, 당신이 살지못한 삶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물어봐 주길 바랐을 질문들을 이제 남성개개인이 새롭게 던져야 한다. 남성이 되는 법, 두려움을 대하는 법, 용기를 찾는 법, 대중이 외면하는 쪽을 과감히 선택하는 법, 남성성과 여성성의 에너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법, 그리고 영혼의 자이로스코프(바퀴축을 삼중 고리에 연결해 어느 방향이든 회전할수있도록한 장치)에 맞춰 자신의 위치를 찾고 움직이는 법을 알고자 한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한다. 답을 몰라도 상관없다. 적어도 이 사람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릴케가 젊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같다.
마음속 풀리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인내심을 갖게. 질문 자체를 사랑하도록 해보게. (…)지금 바로 답을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네. 답을 얻는다고 해도 그에 따라 살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중요한 건, 모든 걸 살아보는 것, 질문에 따라 살아보는 것이라네. 그렇게 하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그 답이 삶 속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네.
남성은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어떤 두려움이 나를 가로막고 있나? 마음속으로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제는 무엇인가? 내 삶은 내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나? 내 일과 내 영혼을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 있을까? 애정 관계와 개성화를 둘 다 성취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아버지가 살지 못한 삶 속에서 내가 기꺼이 차지해 깃발을 꽂아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 그러고 나면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실존세계 속 질문에 따라 살아갈 대담함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진정한 남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내면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는 게 처음에는 엄청 어렵다. 집단의 문화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내용이 개인의 콤플렉스와 충돌해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내면의 진실로부터 어떻게 떼어내야 할까? 설사 스스로의 진실을 밝혀냈다 해도 현실 세계에서 이에 따라 살아갈 용기는 어떻게 불러들일 수 있을까?
진정한 남성이 되려면 외부에서도 내면에서도 거침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정신은 내면의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과거가 놓여 있던 자리에 반항의 에너지를 대신 채워넣어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융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해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정신의 확대력이 자신의 치유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남성은 부모 콤플렉스가 지시하는 요구사항들을 떨쳐내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며 자신의 능력으로 허기를 채워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손봐주지 못했거나 일부만 챙겨준 부분을 이제는 스스로 작동시켜야 한다.
아버지가 없거나 아버지 자신이 너무 상처를 받아 목적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아들은 그 결핍을 그대로 지닌 채 살게 된다. 아들은 내면의 의문과 두려움, 열망에 눈을 돌려 거기서 나오는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이를 완전히는 아니라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다. 능동적 상상과 꿈이 있다면 자신에게 힘을 주는 아버지의 존재와 이어질 수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삶의 동력을 전달하고 활성화해야 한다는 커다란 책임을 갖고 있지만, 이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다. 부모 자신도 상처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용기를 지니고 자신의 영혼을 탐색한다면 부모의 상처에 따른 한계는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이는 단지 스스로만이 아니라 자기 아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이 과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인간성이라는 건 진흙 덩어리며, 우리 또한 모두 진흙 덩어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네 육체와 정신의 똥 덩어리 속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피워 내기 위해 싸워야 한다.
똥 덩어리를 굴리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진 쇠똥구리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성스러운 동물이었다. 살아 있는 생물이 오물 덩어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보았을 테니 그랬을 만도 하다. 우리도 쇠똥구리처럼 상처 입은 영혼을 힘겨운 개인사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6단계: 영혼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라
이제 남성은 자신의 최초 비밀, 즉 자신의 삶이 성역할의 정의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남성은 여전히 자신의 삶을 다시 살펴보기를 꺼린다. 무언가를 바꿔야 할 일이 생길까 봐 그렇다. 변화는 언제나 불안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에 따라오는 불안이 억압에서 오는 우울함과 분노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변화가 좀 더 매력 있어 보일 것이다. 융은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이 사회의 제약에 억눌릴 때 신경증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라고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삶의 여러 가지 질문에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해답을 내놓고 이에 만족할 때 신경증에 걸리는 모습을 난 이미 여러 차례 보았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나 결혼, 평판,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부 따위를 추구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손에 넣어도 불행한 삶을 살며 신경증에 시달린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편협한 영혼의 지평에 갇혀 있다. 이들의 삶에는 내용물도 의미도 충분하지 않다. 이들이 더 폭넓은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 때 신경증은 점차 사라진다.
융이 열거한 잘못된 목표와 우상의 목록은 사회에서 꿈꾸는 성공의 모습과 일치한다. 하지만 남성은 이들 목표를 성취하고 이러한 우상에 자신을 희생하고 나서도 자신이 진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수치스러우며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에서는 주인공인 윌리로먼의 가족이 윌리의 무덤 주변에 서서 윌리의 친구 찰리가 힘든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위해 추도사를 읊을 때, 윌리의 아들이 가슴 아픈 진실을 내뱉는다. “찰리 아저씨,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어요.”
우리 자신이 누군지 알아낼 생각이 없다면, 변함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 속에 서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올바른 질문 던지기를 멈춘 남성들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질병에 시달린다. 이들이 자신을구원하려면 영혼의여정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한 남자의 꿈 이야기를 들어보다.
나는 한 남자와 물속에 있어요. 남자는 다리 상태가 좋지 않네요. 점점 가라앉고 있어요. 이 사람을 도와야 하는데 나는 수영을 잘못해요. 뭔가 해야 해요. 나는 무섭지만 잠수해서 물 밑바닥에서 이 남자를 찾아서는 물 위로 끌고 나와요. 그러고는 심폐소생술을 실시해요. 그래야만 했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할 테니까요. 그는 의식을 되찾아 다시 호흡하기 시작해요.
물에 가라앉고 있던 남자는 바로 내담자 자신이다. 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내담자의 자아와의식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 남자를 구하려면, 즉 자신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 내면 깊숙한 곳으로 기꺼이 잠수해 내려가 다시 숨(숨은 라틴어로 spiritus이며, 이는 영어로 ‘정신, 기력spirit’과도 통한다)을 불어넣어 줘야 하며, 이는 다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영웅의 오랜 여정을 다시 시작해내면 깊숙한 곳을 탐색하는 일은 남성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과제다.
내면의 작업을 끝낸 남성은 이제 외부세계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대부분 남성에게 일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수단이지만, 정작 자신의 개성화는 끝마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말했듯 “일하지 않는 삶은 썩는다. 그러나 영혼 없는 일은 삶을 질식시켜 죽여버린다.”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은 삶에 물질적 부분뿐만 아니라 의미까지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자신의 소중한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할지 이제 남성은 새로이 결정해야 한다.
남성은 육신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후에야 집을 떠나 세상속으로 들어갈수있다. 하지만 이때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 삶의 여정 자체가 나다. 내 상처도, 내가 상처를 막는 모습도 내가 누구인지 정의하지 못한다.” 우리가 삶 속에서 입는 상처는 영혼을 무너뜨릴 수도 자신의 의식에 활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크게 성장한 의식만이 삶의 여정을 밝혀줄수 있다.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슬픔을 털어버려라, 그리고 영혼을 회복할지니
(…)
네 벌판을 걸어가며 씨앗처럼 몸을 던져라,
죽음을 불러들이는 것들에 눈길을 주지 마라,
과거의 무게로 지금의 행동을 짓누르지 마라.
이랑에는 산 것을, 그리고 네 안에는 죽은 것을 남겨라,
삶은 구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므로,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을 추스를 수 있으리니.
영혼의 여정을 회복하는 일은 남성이 자신을 구원하는 데 꼭 필요하다. 남성은 자신을 더 큰 맥락 속에서, 영원이라는 틀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이 스스로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에 관해 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절대자와 이어져 있는가? 자신의 삶이 어떤 것인지 밝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 지금 이곳의 삶이 이미 신과 이어져 있음을 이해하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욕구에도 태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결국 의미를 지니는 것은 우리가 구현해낸 본질뿐이며, 구현하지 못한다면 삶은 헛될 뿐이다.
남성에게 종교나 정치, 또는 가정 속에서 편안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성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 여정이며, 이는 남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남성이 공포를 느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항해를 계속할 동력을 포기하고 이데올로기나 타인에게 의존하고 만다면 이는 남성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지닌 공포를 깨끗이 털어놓고 인정한 다음 삶의 여정을 되살릴 때다.
이 여정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단순한 자아도취가 아니다. 남성은 여전히 타인에 헌신하고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그러나 개성화는 남성에게 피할 수 없는 소명이다. 이를 망각하고 얼마 길지 않은 지상에서의 삶을 낭비한다면 타인의 문젯거리밖에는 되지 못한다. 영혼의 여정을 되살리려면 본성을 따르고 타인을 따르며 우리에게 시험처럼 주어진 신비를 따라야 한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구체화할 수 있으며, 동시에 ‘두 거대한 신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 짧은 에피소드’에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7단계: 새로운 혁명에 동참하라
역사적으로 볼 때 문화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의 무의식이 그에 대한 보상작용 쪽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특출한 직관력을 지닌 개인이, 다시 말해 무의식 속 재료를 보통 사람들보다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외면당했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해내는 단계가 필요하다. 외면받던 가치를 먼저 발굴해 시대를 앞선 결과물로 내놓는 예술가를 예로 들 수 있다. 당대에는 조롱당하고 인정받지 못할 수도, 더 심하게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가가 뿌린 씨앗은 사람들의 전이지대liminal zone(성격이 다른 두 가지 공간을 연결하지만 두 공간 중 정확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대)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마치 예언자가 박해당해도 그가 전하는 진실은 이미 집단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과 같다. 진실을 가둔 자루를 묶고 있던 새턴의 끈이 느슨해지고 변화의 기운이 떠돌기 시작한다. 독재자들이 예술가와 공상가들을 억압한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집단순응적 사고 시스템을 원하는 새턴이 통제하는 데 가장 위험한 부류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성은 영혼 없는 기계처럼 구는 일 따위는 그만둬야 한다. 프랑스의 육군 총독이었던 위베르 리요테Hubert Lyautey가 묘목 한 그루를 심으라고 정원사에게 명하자 정원사는 그 묘목이 완전히 자라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며 그를 말렸다. 그러자 리요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가, 그렇다면 오늘 오후에 바로 심어야겠군.” 우리도 ‘오늘 바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문제의 일부분이지만 해결책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두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누구 하나도 혼자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다른 남성이나 여성, 아이를 힘으로 지배해야만 진정한 남자라는 말 따위를 하는 이에게 반기를 들어야 한다. 두려움에 가득 찬 광신자, 번지르르한 궤변을 늘어놓는 정치가 등 타인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반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턴의 지배를 퍼뜨리며 남성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서로를 갈라놓는 전제군주 같은 ‘침묵’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남성이 지닌 비밀이란 동화 속에서 걸리버를 묶고 있던 난쟁이들의 노끈처럼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는 드러내어 밝혀야 한다.
이 새로운 혁명에는 거창한 일 없이도 동참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솔직해지기 시작하는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자신이 두려워했던 만큼 낯설지도 외롭지도 않으며 다른 남성들 역시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함께 옆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남성이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게 될 때, 자신이 지닌 비밀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당당히 책임지려 할 때 비로소 혁명은 시작된다. 여전히 싸우며 괴로워해야 할 테지만, 최소한 솔직할 수 있다. 혁명은 가정에서 스스로와 더불어 시작해야 하며, 새턴의 그림자 안에서 자라오며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옛날 신화 속 거대한 낫을 든 난폭한 신들처럼 자신을 거세하고 파괴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던 새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남성은 타인에게도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 스스로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자신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자기 영혼의 여정이 지닌 가치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삶이 새로운 의미와 기원을 갖게 된다. 모든 곳에서 남성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기 시작할 때 구시대의 폭군은 비로소 그 지배력을 상실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우주 어딘가에 힘 자체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제우스는 ‘힘’과 ‘폭력’이라는 이름의 하인들을 데리고 다니며(원래는 비아Bia와 크라토스Cratos 형제다. 그리스어로 ‘비아’는 폭력, ‘크라토스’는 힘을 뜻한다) 안하무인으로 모두를 대하곤 했다. ‘혁명적 선견지명’이라는 뜻을 가진 프로메테우스마저도 캅카스산 바위에 묶여 모진 형벌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영원히 억압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었으니, 모든 폭력과 폭군들이 두려워하던 그 힘은 바로 ‘정의’다. 그 앞에서는 신들조차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폭군같던 신들이무너지고 우리 하나하나가 새턴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때, 집단이 떠안기는 기대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설 때 정의는 다시 돌아온다. 현재 남성들 대부분은 여전히 억압받고 있으며, 자신의 상처 때문에 다른 남성을 억압하며 여성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정의로 가는 길은 아직 멀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우리 앞에 펼쳐진 기나긴 길 위에서 우리 각자는 스스로 정의를 찾아내야 한다.
여행자여, 저 별을 따라 머나먼 길을 걸어왔구나.
하지만 소망의 왕국은 저 밤 다른 끝에 있나니.
부디 무사하기를, 동지여, 재앙 속을 살며 빛을 양식 삼아
함께 즐겁게 여행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