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1편> 교만함과 오만함을 경계, 하나님 안에서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 엄마의 품안과 암탉과 병아리, 믿음과 선물의 분량대로 살아라.
1. 말씀배경
시편 131편은 다윗이 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열 두번째로 3개의 절로 구성된 짧은 노래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자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는 교만을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름부으심 안과 능력 안에서 살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안간 것 같이 고요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않은 일을 욕심을 가지고 분에 넘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을 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 교회 전체가 이런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편 131편
1절, 다윗은 강한 부정어 ”로“를 세 번이나 사용하면서 강한 결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하지 아니하고, 오만하지 아니하며, ~일을 하지 아니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먼저, 마음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지위가 높아지거나 가진 것이 많을 때 대체로 가지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큰 교만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위치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탈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지위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죄인들이 저지르는 일반적인 죄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죄인지 잘 모릅니다.
가난하거나 지위가 비천해도 하나님 없다고 한다면 그는 교만한 자입니다.
다시 교만을 정의하면, 교만은 하나님을 부정하여 피조물임을 망각할 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과 같이 동등히 여기거나 더 높아진 경우를 말합니다.
▶교만은 사탄의 속성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할 때 교만함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습니다.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 다비, 킹제임스성경은 계명성을 ”루시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게 교만한 모습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낮추십니다. 사탄도 결국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고 궁극적으로 지옥불에 들어가 떨어짐, 낮아짐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가장 낮아진 모습인 것입니다.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입니다. 그런 그가 교만해져서 반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의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인 것입니다.
▶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시고 대적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6:5]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5: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아담과 하와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도 교만의 죄인 것입니다. (창 3:5)
그러고 보니 죄의 시작이 교만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 사탄은 지금도 우리들을 교만해지도록 유혹하고 있으므로 교만은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까지도 교만해지도록 시험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받들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 4:5-6, 눅 4:9).
예수님은 그런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런 일에 거룩한 성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사역을 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일 말입니다.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슈퍼스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우쭐하게 하고 교만해지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셨지, 자신이 이런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상관없는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로, 눈의 오만입니다. 오만의 사전적인 의미는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교만과 유사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오만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룸“은 동사로 사용될 때에는 ”오르다, 높이다, 높다“는 뜻을 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오만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높은 눈, 높아진 눈“ 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과 연관되어 본다면, 눈으로 보는 높은 곳은 바로 다음에 기록된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 기름부으심 밖의 일, 곧 큰 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눈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높은 비젼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비젼은 모두 자신의 출세를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비젼은 우리들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기름 부으심의 종류와 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일과 놀라운 일을 행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면 눈의 오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사역이 좋게 보여서 그저 따라 하면 안됩니다. 남들이 하는 것에 열매가 많다고 따라가서도 안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각자의 기름부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분량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오만하지 않기 위해서는 로마서에서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 선물의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 앞에 놓어진 사명과 상관이 없는 큰 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은 우리를 안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 진리를 깨닫고 세 가지를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2절, 1절에서 교만과 오만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교만과 오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는 정말 시끄럽지 않는 조용한 상태를 말씀하고 있지만, 평온은 원어가 살롬이 아닙니다.
평온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샤와“는 일치하다, 부합하다, 동등하다, 같다, 평온하다는 뜻이 있으므로, 평정과 가깝습니다. 채워진 물이 잔잔하게 흐르지 않고 출렁이지 않는 정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 안에 돌이 던져지면 평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정이 된 상태입니다.
다윗은 비유적으로 그가 바라는 고요함과 평온함을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젖을 잔뜩 먹고 배가 부른 상태에서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의 평온함입니다.
병아리가 암탉의 품 속에 있는 것과 같은 평온입니다.
탐욕이 아직 남아 있거나 덜 채워지면 평온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정을 잃습니다.
배가 고프면 울면서 보챌 수 밖에 없는데 먹을 만큼 충분히 먹고 이제는 따뜻하고 포근한 어미의 품에 안긴 아이의 고요함, 평온함을 다윗은 바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안식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교만하고 오만하면 사탄이 흔들어 고요함과 평온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힘에 넘치는 일들을 저질러 놓으면 이런 고요함과 평온함이 없습니다.
다윗이 비유적으로 표현한 젖 뗀 아이의 평온함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품에 안긴 것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신 1:31, 사 46:3-4, 호 11:3)
[신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편온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경은 결코 우리들에게 고요함과 평온함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분주하게 만듭니다. 경쟁하게 만듭니다. 바빠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적을 쌓으라고 합니다. 미래를 위하여 많은 것을 축적하라고 합니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지식도 정보도 계속 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기의 사용법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를 잠시도 쉬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안식과는 정 반대로 가라고 합니다. 안식하라고 주신 안식일에도 안식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안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 국한하여 그 방법을 찾는다면, 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낮게 엎드려 있으면 비바람을 덜 맞습니다. ② 그리고 분량에 넘치도록 큰 일과 놀라운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기 위하여 우리를 복잡게 하는 것입니다. 분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용한 친밀한 관계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자꾸 이것 저것 하라고 부추겨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안에 고요함과 편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개인 다윗에게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130편에서도 모든 죄악의 속량이 개인에서 이스라엘로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처럼 개인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1-2절의 메시지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로 확대되기를 기자는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람으로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통치하는 나라의 영역입니다. 오늘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만, 오만의 길을 버리고 궁극적으로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채워지는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진정한 고요함, 평온함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개인이게도 있고, 한국교회와 가정에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