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부3기생 친우님들께서 무더운 여름 무사히 잘 보내셨나요.
그대들이 60이라는 환갑을 넘어서서 어떠한 삶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현명한 삶일까 의문을 던져봅니다.
100년도 못사는 삶 긍정적으로 즐겁게............
2010.9.26 전남 완도에 다녀왔네요.
남도의 끝이라 할수 있는 섬 완도!
익산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경유하여 4시간을 달려야 찾아갈수 있는 섬이다.
팔목골절로 두달동안 바깥나들이를 못하다가 상태가 호전되어 완도 상왕봉을 산행하다.
완도는 해상왕 장보고의고장이기도하다.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해안에서 남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다. 육지와는 달도를 사이에 두고 남창교와 완도교로 연결되었다. 주위에는 고마도·사후도·백일도·흑일도·동화도·신지도가 있다. 신라시대인 829년(흥덕왕 3) 완도읍 죽청리에 청해진이 설치되었으며, 고려시대에 동·서 지역이 각각 강진현과 해남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인 1521년에는 현재 읍소재지인 군내리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치되었다. 1896년 완도군의 신설로 군내면이 되었다가 1922년 완도면으로 개칭, 1943년에는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내면의 대야리를 포함하면서 섬의 북부는 군외면, 남부는 완도읍으로 관할구역이 나누어졌다.
섬 중앙의 상황봉(象皇峰 : 644m)이 최고봉이며, 북쪽에는 숙승봉(宿僧峰 : 432m)·백운봉(白雲峰 : 600m) 등 기복이 심한 산들이 솟아 있고, 남동쪽에는 100m 내외의 구릉과 평지가 있다. 북부일대의 해안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간석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해안은 큰 만과 돌출부가 이어져 있으며 해식애가 발달했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며, 비가 많은 해양성기후이다. 온대활엽수가 자라며, 남단에는 팽나무·동백나무 등 상록수림이 자란다. 특히 완도항만 내의 주도(珠島)에서 자생하는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28호)이 있다. 농산물로 쌀·보리·고구마·마늘·밀감·유채 등이 생산되며,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연근해에서는 고등어·도미·삼치·갈치·멸치·장어 등이 잡히며, 김·미역·굴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양식된 김은 맛이 좋고 생산량이 많아 전국으로 출하된다. 취락은 섬의 중심지인 남동쪽 완도읍 군내리와 북쪽 군외면 원동리를 비롯해 해안가 곳곳에 분포해 있다. 완도교와 남창교를 지나 해남과 연결되는 국도가 동쪽 해안을 따라 나 있다. 남동쪽에 있는 완도항은 연안도서의 생활필수품 수송기항지이며, 제주도의 관광지원항이다. 일부 남쪽 해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법화암·구계등(九階嶝)·청해진지(靑海鎭址) 등의 관광명소를 비롯한 해안일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관광지로 유명하다. 특히 최근에는 제주행 카페리호가 운항된다.
전남 완도 상황봉 산행
▷일시 : 2010.9.26
▷높이 : 644m
▷소재지 : 전남 완도군 군외면 장좌리


♧상황봉(象皇峰 644m)은 완도의 크고 작은섬 200여개를 거느리며 노령의 마지막에 우뚝 솟은 오봉산의 중심 봉우리이다. 주변에 백운봉(白雲峰 600m), 심봉(쉼봉 598m), 업진봉(545m), 숙승봉(宿僧峰 461m)을 거느리며 다도해의 풍경을 눈이 시리도록 조망 할 수 있는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푸른 수평선에 어우러진 고금도, 신지도, 청산도, 소모도, 대모도, 여서도, 소안도, 보길도, 추자도, 제주도 등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상황봉을 찾으라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출의 장관이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다. 넓은 바다! 점점이 박힌 섬들 그곳을 비집고 나오는 찬란한 빛! 이것이 상황봉의 일출이다. 감히 대자연의 신비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일출이라는 것이다.
완도의 상황봉은 완도내의 산 전체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나 다름없다. 상황봉(해발 644m)을 중심으로 다섯 봉우리가 섬 한가운데 솟아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 삼면으로 아름다운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굵직한 산줄기가 육지를 향해 힘차게 뻗어 있다. 북쪽으로부터 숙승봉(534m), 업진봉, 백운봉(600m), 상황봉, 쉼봉(600m)의 5개의 봉이 일렬로 솟아있는 오봉산중 가장 높이 솟은 봉이 상황봉이다.
상황봉 일대의 수림은 가시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난대림이 주종을 이루고 중부 내륙지방의 산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완도에 이렇게 숲이 울창하게 된 것은 신라시대 이래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장보고의 죽음 이후 서기 851년 완도 사람들은 모두 전라북도 김제군으로 강제 이주됐다가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에야 다시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500년동안 비워둔 섬이니 숲이 울창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청해진의 영웅 장보고 열전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한반도 남쪽 바다 다도해의 한 섬에서 때로는 바다처럼 너그럽고 때로는 바다처럼 무섭게 일렁거리며 끓어넘치던 한 용사가 일어났으니 그가 바로 장보고(張保皐), 일명 궁복(弓福)이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에 무적함대를 만들어 바다를 개척하고 동북아의 제해권을 손아귀에 틀어잡은 위대한 바다의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변방의 섬사람으로 태어나 제 나라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힘든데 그는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용명을 떨쳤으며, 신라에 돌아와서는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왜와 당의 해적들을 쾌도난마처럼 소탕해 안전하고 가까운 뱃길을 열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장보고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해운을 개척한 데에 이어 멀리 동남아까지 교역권을 넓히고 바다를 호령하니 그 장한 기개는 해상 무역왕국의 군주(君主)와 다름없었다.
바다를 통한 해외 진출이라는 우리의 꿈을 1000여 년 앞서 펼쳐 보인 풍운아 장보고, 해양 개척의 신기원을 세운 멋진 바다의 사나이 장보고, 그는 비록 추악한 정권 쟁탈전에 말려든 끝에 자객의 마수에 걸려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이룬 위업은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 살아남아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장보고는 신라 변방 이름 없는 한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 섬이 뒷날 그가 청해진을 세우고 무적함대의 해군기지인 동시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삼은 오늘의 전남 완도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지 않지만 신라 제38대 임금 원성왕(元聖王· 785~798) 때로 추정된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한 해가 제42대 임금 흥덕왕(興德王) 3년(828), 그로부터 13년째가 되는 제46대 임금 문성왕(文聖王) 3년(841)에 암살당했으므로 30대에 귀국해 40대에 죽었든, 40대에 귀국해 50대에 죽었든 출생 시기가 그 무렵으로 역산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대체로 원성왕 때부터 거의 해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흉작이 겹친 데다 사방에 도둑 떼가 들끓고, 왕실은 진골(眞骨) 귀족끼리의 왕위 싸움이 끊일 새 없어 온 나라가 난파선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가난한 섬마을, 걸핏하면 왜와 당의 해적들이 떼 지어 몰려와 노략질을 해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는 바닷가에서 자라며 소년 장보고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점점이 떠 있는 섬들, 훨훨 날아 섬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을까.
장보고는 9세기 초 동양 삼국에 널리 이름을 떨친 국제적 풍운아였으므로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 모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측 기록은 ‘신당서’ 동이전과 신라전의 기사를 가리키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번천문집(樊川文集)’ 중 ‘장보고·정연전’을 인용한 것이다. 일본 측 기록은 천태종(天台宗)의 고승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등이다.
장보고의 성명이 우리나라에서는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중국 측 기록은 장보고(張保皐), 일본 측 기록은 장보고(張寶高)로 네 가지가 된다. 궁복의 복(福)이나 궁파의 파(巴)는 흔히 아이들을 가리킬 때 쓰는 꾀보니 울보니 먹보니 잠보니 하는 ‘보’의 차음(借音) 표기요, 궁(弓)은 ‘활’의 차자(借字)로서 그의 본래 우리 이름은 ‘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인 ‘활보’가 아니었을까. 또한 장보고란 성명은 당나라에 있을 때 활궁변의 장(張)이란 중국 대성(大姓)을 쓰고 이름에서 ‘복’이 ‘보고’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장보고(張寶高)란 이름은 일본 측 기록에만 나온다.
전남 완도읍 장좌리 주민의 구전에 따르면 장보고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마을 앞 조금섬(將島 : 將軍島) 앞바다에서 고기잡이와 무술을 익혔다. 나이 15세가 되자 키가 6척에 기골이 위괴(偉魁)하고 성품이 강직해 의로운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도 아끼지 않아 사람들이 장수감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장보고에게는 정연(鄭年 : 鄭連)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잠수한 채 50리를 헤엄쳐가도 끄떡없을 만큼 물에 익숙했고 무술에도 뛰어났지만, 나이는 장보고가 몇 살 위였으므로 장보고를 형이라 부르며 함께 붙어 다녔다.
두목의 전기에 따르면 ‘장보고가 서주(徐州)에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은 30세 때’라고 했으므로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그가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시기는 20세 안팎, 즉 서기 810년께로 추측된다. 고국을 떠나 당으로 건너간 장보고와 정연이 처음 머문 곳은 지금의 강소성 금산현인 서주 땅이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취직(?)을 한 곳이 무령군(武軍)이란 서주절도사의 아군(牙軍 : 本軍). 아마도 처음엔 외국 출신이니 말단 졸병으로 입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남보다 뛰어난 힘과 기예로 미뤄볼 때 금세 부대 안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란 높은 벼슬까지 한 장보고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828년 이전의 일이었다.
819년 소장 진급 때부터 828년 청해진 설치 때까지 약 10년 동안 장보고의 행적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당나라 동해안에는 여러 곳에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했으며, 산동반도 등주 문등현, 강소성 초주·사주·양주 등의 신라방이 그것이다. 신라방에는 거류민들의 자치기구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었고, 그 책임자는 압아(押衙)로서 역시 같은 신라인이 맡고 있었다. 장보고는 군복을 벗자 급격히 거류민이 늘어나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산동반도 문등현에 자리 잡아 신라인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하니 곧 신라방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됐다. 신라인들이 장보고를 중심으로 뭉치게 된 이유는 그의 사람됨이 워낙 출중하고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그가 본래 섬사람으로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다를 잘 안다는 점과, 무령군 소장으로 쌓아올린 장수로서의 경력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신라방 사람들이 주로 종사한 사업은 해상교역 활동이었는데, 당이나 신라나 왕권이 약화되니 변경의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바다를 휩쓸고 다니는 해적들의 횡포 때문에 뱃길은 늘 위험했다. 군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장보고는 항해교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사설함대를 조직해 무역선단을 보호했다. 눈길을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국제항로로 돌렸던 것이다.
장보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신라 사람들의 무역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고 번창하게 됐고, 장보고의 명성과 지위 또한 자꾸만 높아져 갔다. 사람들은 장보고를 ‘장 대사(張大使)’라고 높여 불렀으니, 대사란 중국에서 절도사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뒷날 그가 귀국해 청해진을 설치하고 역시 대사라는 신라 관등직급에는 전무후무한 관직을 받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보고가 이토록 지위를 굳히고 위명을 떨치게 됐음에도 굳이 신라로 귀국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 또한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좋은 말 한마디 :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것도 없고 얻은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서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좋은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