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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기억, 문화 그리고 정체성에 있어서의 문학
정체성공유를 통한 아시아 지역의 연대
나의 친애하는 한국의 친구들 그리고 아시아전역에서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
저를 두 번째 아시아 문학포럼에 초대해주신 광주민족문화작가회의(WANL) 회원 여러분! 이 자리를 빌려 테러와 전쟁이 빈발하는 이 어려운 시기에 작가로서의 의견을 피력하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테러가 발생하는 시기의 문학은 피와 땀과 공포로 얼룩져있다. 작가들은 테러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테러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해시키느라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사람들은 테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미치광이 짓으로부터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희망적인 미래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질주하고 있다.
나는 수백만의 신이 존재하고 수많은 종교가 혼재하며 4000가지 이상의 계급이 존재하는 나라, 인도에서 왔다. 우리는 수많은 사투리를 제외하고도 15개의 공식 언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의 문학은 수많은 언어를 통해 다양하게 번창해왔다. 불행히도, 이러한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작품들은 사투리로 씌어졌기 있기 때문에 이들 작품이 우리의 문화와 민족,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진정한 인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음에도 이들 작품은 영어나 심지어는 인도어로도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들 작품 중 극소수만이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주정부들은 이러한 작품들의 영어나 인도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다. 그 좋은 예로 카르카타나(Karnataka)정부는 최근에 ‘번역학교’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그 학교의 회원으로서 나는 이 사업이 장기적으로 우리문학의 상호연관성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인도에서는 영어로 써진 작품만이 ‘인도문학’으로 종종 잘못 인식 되어지곤 한다. 하지만 영문 작품은 인도문학의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역사왜곡의 위험성에 대한 제도적인 번역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Dr. Asif Farrukhi 의 말처럼 승자들은 그들의 잔인함과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그들의 피로 점철된 일련의 행위들을 영웅시하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을 안다. 문학은 결백한 이가 피를 흘릴 때 순교라는 함정에 노출 된다. 어떤 이가 이라크에 그들을 해방시킨다고 외치며 쳐들어갈 때, 어떤 이가 레바논을 폭격하면서 그 편파적인 전쟁을 38일이나 지속할 때, 어떤 이가 탱크와 헬리콥터와 군함을 몰고 가자 지구의 시민들을 공격했을 때, 문학은 영웅심의 함정에 노출된다. ‘쌍방피해’라는 표현은 엄청난 수의 인명을 잃은 일방의 손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문학은 테러를 자행하고 테러에 대한 보복적 전쟁을 도발하는 사람들이 만든 환상의 허위에 노출될 수 있다.
우리는 인도에서 무수한 피의 역사를 경험해왔다. 1947년 독립, 1992년 바브리 모스크(Babri Mosque)의 강제퇴임, 1993년 봄베이(Bombay)의 폭동, 2002년 고드라(Godhra)와 구자라트(Gujarat)의 폭동, 최근 뭄바이(Mumbai)지역의 열차 폭동, 그리고 여전히 기억이 생생한, 무슬림이 인도국가의 구조자체를 위협하기 위해 투척한 두 개의 폭탄세례를 받은 말레가온(Malegaon)지역까지. 우리는 테러에는 그 어떤 종교도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간의 증오심과 광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아 왔다.
인도의 독립이 쟁취된 그 날, 동일한 민족과 국가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그 처절한 고통은 실로 가공할만한 비극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여러 명의 작가에게 모티브를 제공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Kushwanth Singhdml의 ‘파키스탄으로의 기차’, Bhisham sahani의 어둠이라는 의미의 ‘타마스(Tamas)’가 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주요사건들의 발생지인 북쪽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지방에서 자비로운 왕의 통치하에 있던 마이소르(Mysore)주에서 안락함을 영위하고 있던 작가 H. V. Savitrammadm에게도 이 비극은 강력한 영향을 주었고 그 실상은 그녀의 몇몇 작품에 고스란히 용해되었다.
인도의 독립! 남쪽으로부터의 환호! 나는 직접 어두운 역사 속에서 생을 영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펀자비(Punjabi)와의 결혼은 라호르(Lahore)에서 도망쳐 인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이 겪어왔던 고통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나의 시댁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의 장성한 아들 가운데 한 명은 그들과 헤어진 20년 후에서야 시크교(Sikh)의 구루가 된 채 가족과 상봉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테러에 대한 기억과 사람들의 고통은 그들이 설사 상처로 점철된 과거로부터 새 삶을 마련하고 독립된 인도에서 안전한 삶을 지속한다 할지라도 결코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9.11과 일방적인 테러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지 5년이라는 세월을 흘려 보냈다. 우리는 이제 이곳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최근 BBC방송의 여론조사는 ‘국제화와 미국의 힘은 전쟁이나 테러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라고 밝혔다. 국제화 때문에 우리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사건이 자신의 안방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국제적 마을’에서 더 이상 지방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지구는 동일한 영향을 받는 지역이 되었다. 세계화와 테러에는 밀접한 관련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언젠가는 테러와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처럼 작가들은 ‘온 거리가 피투성이인데 우리 어찌 장미를 논할 수 있는가’ 자문해왔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반영해왔다.
세상이 해체되어가고 있는 오늘날 아시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세계화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며 살아가도록 돕는다.
테러와 세계화는 서로 그리 동떨어져있지 않다. 나는 실제로 정치과학도도, 사회과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니다. 나는 작가이며 전문적인 엔지니어다. 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항공회사의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최첨단 기술이 불행히도 군사용으로 또는 전쟁용으로 가장먼저 사용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테러와 세계화간의 관련성을 이해하거나 추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한때 죄수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던 방갈로르(Bangalore)에 살고 있다. 25년 전 엔지니어로서 인도 과학기술원에 연구차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이곳에서 아시아의 많은 곳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 방글라데시, 이란, 스리랑카, 티베트에서 온 학생들은 우리와 상당부분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의 연구소는 한밤중에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평화로운 섬이었다. 우리 모두는 감히 테러리스트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과학자들에게 총을 겨누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방갈로르(Banglore)는 조용한 천국이었다. 대부분의 주택은 풍부한 나무와 녹지,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과 아내 가정부와 가족, 그리고 고용주와 피고용인 모두의 관계가 평생토록 지속되는 곳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 심지어 힘든 노동을 우상으로 여길 정도였다. 사람들은 온라인 도박이 생기기 전까지,‘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라는 TV쇼를 집안에서 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지 힘든 노동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온라인 도박과 백만장자의 꿈은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사람들이 음악과 예술 그리고 문학에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할애하던 당시에 우리는 돈을 추구하기 보다는 기쁨을 공유하는 데 몰입했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말을 걸 수 있었고, 그 누구의 집에나 방문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전화기도 텔레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서로를 믿고 서로와 함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농부들은 가뭄으로 인한 폐농에도 자살하지 않았고 전문적 범죄자들에 의한 극소수의 범죄만이 존재했었다.
그 후로 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을 지켜보아 왔다. 소규모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던 집들과 널찍한 정원은 온데 간데 없고, 건물자체가 대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주변에는 새장처럼 담장을 두른 형태의 건축이 성행했다. 부동산투기꾼들이 몰려와 부동산가격을 천정부지로 상승시켰다. 갑자기 도시는 변모하기 시작했다. 도로에 있던 대부분의 집들은 상점으로 변했고 번쩍이는 쇼핑몰이 구석구석이 생겨났다. 대규모의 영화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저렴한 오락을 제공했고 덕분에 사람들은 쇼핑몰로 향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쇼핑몰은 상류층만이 입장 가능한 안락함과 그들만의 사치스러움을 제공하는 명품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류층과 중산층은 그들이 소유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찾아보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미디어를 동반한 공격적인 마케팅광고는 사람들에게 사치품마저 생필품이나 필수품인 것처럼 조장하고 있다. 범죄율은 상승하고 폭력배들의 싸움과 살인은 일상화가 되어버렸다. 죄수들의 천국은 대부분의 자녀들을 타지로 보낸 채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는 지옥과 다름없는 곳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조차 나의 직장상사는 자신의 집에서 강도와 살인으로 생사를 달리한 여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제 범죄는 더 이상 배고픔에서 오는 단순범죄가 아니라 무한정한 욕심에서 나오는 소유욕에 의한 것이다. 끊임없는 소유욕은 도시전체에 절도와 살인을 불러 왔다. 광고에서 반복되는 카피문구는 값비싼 물건들을 생필품인 양 인식시키고 소비재는 화려한 쇼핑몰에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최신형의 가장 빠른 자전거는 강도질과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이 되어버렸다. 한때 우리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값비싼 브랜드의 신발을 사기 위해 강도질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것에 놀랐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충격이 아니다. 세계화는 ‘지나치게 많은 소유’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인도의 실리콘밸리에서 IT전문가로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워야만 했다. 농부들은 얼마 되지 않는 부채를 탕감하지 못한 채 방갈로르(Bangalore)에서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곳에서 자살을 한다. 경제성장이 사회 전 계층에 그 혜택을 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분노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람들 또한 변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딸들을 과거처럼 낡은 옷을 입은 인도여성이 아닌 초미니 스커트에 화려한 치장을 한 인도여성으로 탈바꿈시키길 원한다. 한때 튼튼하고 건강했던 인도여성들은 지구반대편의 서구여성처럼 깡마른 미인으로 변모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생활방식, 사고방식 그리고 전반적인 가치관도 변화했다. 우리는 이제 자발적인 소비문화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불과 몇 년 전 광활한 미국을 여행하던 중, 나는 젊은이들이 피자하우스나 쇼핑몰 식료품점 그리고 커피숍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었다. 미국고등학생의 55%가 하루에 3시간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공부와 숙제를 마치고 그들의 취미활동을 할 수 있으며, 과연 우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루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무척 의심스러웠다. 더욱이 그들의 과중한 노동의 이유는 그들의 학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도회 참가비,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비용 그리고 값비싼 신발구매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연구에서 미국의 10대들은 CD, 옷, 그리고 화장품을 사는데 2,000년 한 해에만 무려 1,550억 달러를 소비했다고 밝혔다. 이렇듯 저속한 물질만능주의의 위험한 결과는 이미 우리 곁에 상존하고 있다.
방갈로르(Banglore)에서 불과 수 년 만에 나는 우리의 중산층자녀들이 커피숍에서 쇼핑몰에서 피자헛에서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밤늦도록 외제 휴대폰과 외제브랜드 신발과 외제 명품 옷을 구매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본다. 이제 우리의 아이들은 수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불필요한 소비를 위한 돈을 버는 서구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만족하거나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삶의 방법이었고 사물의 내재가치를 더 중시하던 단순함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문학은 단순한 삶과 고도의 사고를 요하던 과거와 달리 지나친 소비주의와 맞서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인도에서만 그치지 않고 아시아전역에서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 작은 시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거대한 맥도날드였다. 모스크바에서 나는 또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혁명 후에 귀족이나 지식인계층의 고급아파트는 몰수되어 서민들의 공동주택으로 분배되었다. USSR이 해체되었을 때 가족들은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오늘날 투자자들은 이들 아파트를 재구매하여 상류층을 위한 초호화주택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우리는 기존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부패한 소비문화의 공습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과 삶, 신뢰, 문화, 문명 그리고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이제는 서구문명이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를 말살한 후 그들의 도시와 사람들을 복제하고 있다는 논의마저 대두되고 있다. 세계화는 콜라나 화장품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아이디어마저 강요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사고방식을 포함한 수많은 것들을 수입하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즘은 비전 없는 지도자 밑에서조차 미국인들을 공고히 결속시켰다. 이제 우리는 전 방위적인 소비조장에 대항하고 이들이 테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수가 있는 곳에서 단결이 가능하다. 우리는 다소의 상이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차이점이란 우리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초래한 동일성이 주는 무미건조함 대신 세상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더구나 우리는 비슷한 역사와, 제국주의자를 향한 분투, 민주적인 독립국가 탄생을 위한 억압적인 통치경험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유사한 정체성은 유사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신뢰와 동등한 기억과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는 또한 세계화와 테러의 시대에 대한 도전과 폭력과 보복적 폭력에 대한 공동적 대응,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맞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공통적인 의견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다수의 단결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설계하기 위한 공통의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연대의식은 ‘강대국이 우리의 적과 동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테러로부터의 위협여부’가 결정되는 어려운 시기에 직면해 있다. ‘무엇이 진정한 테러리즘이고 무엇이 비테러리즘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판단할 것이며 누가 그것에 동의할 것인가?’
1930,40년대에 팔레스타인의 치하에서 일하던 유대인들은 테러리스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나치의 잔악함이 자행됨에 따라 팔레스타인들과 싸우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해방 전사’로 정의 되었다. 이스라엘의 6대 총리였던 Menachem Begin은 1940년대 영국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지명되었다. 이스라엘에 돌아온 뒤 그는 영국군에 대항하는 지하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1946년에 그는 영국군의 총사령부가 위치해 있던 King David Hotel을 폭파시켰다. 영국은 50,000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지명 수배했다. 하지만 1970부터 1990년대까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테러조직과 Begin이 영국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Begin은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점령지에 유태인의 정착지를 확대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결국은 총력전이 되어버린 1982년 남부레바논의 부분적인 침략을 감행했다는 점이었다.
전 세계는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과 탈레반이 소련에 대항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저항군에게 수십 억 달러의 무기를 공급했다.’고 보도함으로써 그들을 선동하는 것을 지켜보아 왔다. 세계무역센터가 연기로 사라질 때, 오사마 빈 라덴은 최고의 현상금이 붙은 ‘테러리스트’였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테러리스트가 되고 어제의 테러리스트가 오늘의 자유를 위한 전사로 탈바꿈된다. 우리는 서구에 대한 공격이 곧 테러가 될 수 없고 테러에 대한 전쟁을 영웅적 행위로 인식할 수 없다.
베트남의 문명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이라크의 문명은 파괴되고 있다. 여기 너무나 많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존재한다.
전 세계는 사담 후세인이 9.11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하지 않았음을 안다. 테러와의 전쟁은 테러 그 자체이다. 이라크 전에서 미국의 부상자 수와 한 달 동안의 이라크군의 사망자수는 세계무역센터의 희생자 수를 능가 한다. 미국인들의 생명이 타국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 우리는 테러리즘의 근원을 치유할 수 없다면 테러리즘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고정 관념적이 구별법에서 벗어나 전 아시아인의 양심과 아시아인은 인도적인 차원의 공존과 미래의 문명을 위해 결속하고 있다. 시대는 사람과 집단과 종교를 해체시키는 파괴적인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응집력과 긴밀한 의사소통, 상호협력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문학은 우리의 바람과 희망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에서 테러리즘과 증오를 퇴치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편협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세상전체를 다차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유대 국가를 논할 때 주권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자살폭탄테러를 논할 때 이스라엘의 잔인한 보복을 동시에 고려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전쟁과 테러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절제된 외침’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절제를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전 세계인은 평화를 향한 열정을 능동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함으로써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나는 지난달 영국의 트라팔라(Trafalgar)광장 가까이에 위치한 성 마틴(St.Martin)의 거리를 걷다가 에디스 캐블(Edith Cavell) 동상에 새겨진 ‘애국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증오심과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글귀를 보았다. 또한 그곳에는 ‘검은 옷의 여인들’이라는 거대한 포스터를 가슴에 달고 매주 수요일마다 에디스 캐블(Edith Cavell)의 동상 앞에서 평화를 위한 철야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동상의 주인공은 세계 1차 대전 동안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벨기에서 퇴각한 수백 명의 동맹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독일인에 체포되어 처형된 군 간호사였다. 나는 검은 옷의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들은 ‘전쟁은 안 된다’, ‘우리는 적이 되기를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군국주의와 전쟁이 미국과 영국정부를 불편하게 만든 자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폭력이 폭력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사람들이 신선한 음식과 물을 갈구하며 죽어갈 때 무기상 만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고 외쳤다. ‘검은 옷의 여인들’은 평화와 정의, 전쟁, 군국주의 그리고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국제적인 여성단체이다.
그들은 또한 ‘당신은 힘없는 자가 아니다. 들어라 너의 침묵은 동의로 받아들여질 것이다.’라는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안다. 작가로서 나는 작가들에게는 주요 언론매체들이 인정하기 거부하거나 밝히기 꺼려한 것들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힘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무기개발에 낭비하고 있다. 그들 중의 일부만으로도 국가를, 생명을, 평화를 건설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강자들에게 평화는 전쟁만큼 수익성이 좋지도, 무기 로비만큼 매력적이지도 않다.
나는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친절한 운전사의 안내를 받던 중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단지 ‘가자 지구와 웨스트 뱅크’가 어딘지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팔레스타인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돌변하여 ‘젊은 아가씨, 팔레스타인은 없소, 그리고 그들은 존재한 적이 전혀 없었소, 이곳은 신에게서 약속 받은 우리의 땅일 뿐이오.’라고 쏘아붙였다. 나는 그의 무례한 답변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그녀는 농담조로 ‘성경문구는 그들이 위급할 때마다 인용하는 문구야.’ 라고 했지만, 난 전혀 즐겁지 않았다. 사실상 인도도 유사한 경험이 있다. 왕위와 왕관을 포기한 채 숲으로 들어가 수도하기를 원했던 가장 성스러운 라마(Rama), Maryada Purushotham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가, 그의 출생지를 놓고 얼마나 많은 이가 순교를 했던가 말이다.
나는 이스라엘인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 중의 한 명은 ‘이스라엘과 인도의 공통적인 문제는 무슬림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놀란 나는 즉시 대답했다. ‘인도의 문제는 무슬림이 아니라 테러리스트와 테러리스트들이 종교가 없는 것이다.’라고.
내가 만일 이스라엘에서 여성평화운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모든 이스라엘 인들이 전쟁에 찬성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Ammu Joseph같은 언론인은 ‘평화를 위한 목소리는 고통 받은 만큼 많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의 상당부분이 취재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미디어에는 ‘평화언론’에 대한 저항이 존재 한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여성평화운동은 각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나는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양국이 우방이 될 수 있는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합동으로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명한 이스라엘 평화운동가인 Gila Svirsky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반전시위는 예루살렘, 텔아비브 그리고 하이파에서 항상 행해지고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는 텔아비브 중심가에서 대규모 평화 행진을 한다. 우리는 심지어 5,000명의 시위대를 이끌기도 했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은 레바논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해왔고, 12명의 젊은 남녀가 공군기지로 향하는 도로를 점령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의 명분은 우리가 전쟁보다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범죄다. 전쟁은 아무리 많은 국제기구의 승인을 얻고 이루어진다 해도 범죄였고, 범죄이며, 범죄일 것이다. 사담 후세인과의 전쟁을 포함한 그 어떤 전쟁도 정당화될 수 없다.’
누가 전쟁을 야기하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힘에 대한 두려움을 선동하는 정치인과 무기개발자와 무기상, 그리고 모든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잔인한 힘만을 추구하는 군사지도자들이 그들이다.
누가 전쟁의 대가를 치르는가? 그것은 전쟁을 야기하는데 그 어떤 결정권도 가지지 않은 군복을 입은 젊은 남녀와 가난한 자, 노인, 그리고 어린이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대량학살 대량파괴를 위한 기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담 후세인, 모든 선진국,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을 비난한다.
그렇다. 우리는 국가와 개인이 공격에 대해 자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인간을 폭탄 속의 잔재에 매장하기 보다는 ‘자기방어’라는 더 나은 수단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폭탄만이 세계도처에서 발생 가능한 잔인하고 비생산적인 협상을 지연시키는 수단이라고 믿는다.
평화를 위한 이스라엘 여성들은 양당사자 모두가 그들의 남성적인 공격적 태도를 자제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마련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장하자!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성장할 기회를 주자!
이들 평화시위 여성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를 뉴스에 싣고 있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정부의 조치는 안전을 보장하기는커녕 죄 없는 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부 사람들을 기아로 위협하고 때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의료서비스조차 받지 못하게 한다. 주택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의 조치는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테러에 대한 해결책도 아니다. 실상 이러한 조치는 테러리즘의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줄 뿐이다. 오직 평화만이 안전을 가져올 것이다.”
평화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전해져야 하며 강조되어야 한다.
무력적인 남자들이 저지른 전쟁으로 세상은 분열되고 있다. 우리는 가슴으로 생각해야 한다. 언론매체들은 이러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문학은 이러한 영향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결국 전쟁 없는 곳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만일 전쟁이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다면 그 어떤 종교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를 기억한다. 이 서사시에는 크리슈나(Krishna)왕과 함께 선을 대변하는 판두 족(Pandavas)과 거만한 듀로다나(Duryodhana)와 함께 악을 대변하는 Kowravas 가문의 형제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 사촌 간으로 쿠루크셰트라(Kurukshetra)에서 일어난 싸움에서 판두 족(Pandavas)은 Duryodhana를 죽이고 승리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엄마 결국 판두 족(Pandavas_이 싸움에서 이긴 거죠?’라고 물었다. 그러자 문맹이었던 어머니는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전쟁에는 승자가 없는 거란다. 전쟁 후에 판두족(Pandavas)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겠니? 그는 결국 미망인들만이 살아남은 왕국과 고아들만을 승계 받았단다. 그의 친척과 그들의 자녀들을 모두 희생한 채 말이다.’라고. 몇 년 후에 나는 엘리 비젤(Elie Wiesel)의 노벨문학작품을 읽었다. 그는 ‘전쟁에는 그 어떤 승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희생자가 존재할 뿐.’이라고 쓰고 있다. 노벨상수상자와 문맹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둘 다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쟁에는 무기상을 제외한 어떤 승자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패자만이 존재한 따름이라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나는 많은 작가들의 다른 관점에서 저술된 마하바라타(Mahabharata)를 되풀이하여 읽었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그 자체로서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문학을 부활시켰다. 그 후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많은 여성작가들은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글들로 재탄생시켰다. 나는 문맹이었던 어머니가 전쟁에 승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점이 아직도 놀랍다. 나는 변화하는 시대에 지극한 영향을 받은 작가로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하면서 이 발제를 마치고 싶다.
나는 10대에 젊은 여자아이로서 사랑이나 로맨스를 쓰기보다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20대에 이르러서, 나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지배적이었던 페미니즘이나 남녀평등에 관한 여성운동의 일원이 되었다. 1992년에 나는 삶에 대한 고찰로 전향한 3번째 신작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이후, 나는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았다. 나는 완전 나의 소설 ‘야드바셈(Yad Vashem)'에 사로잡혀있었다.
‘야드바셈(Yad Vashem)'은 나치즘의 희생자가 된 육백만 유태인을 추념하기 위한 예루살렘의 유대인 학살 기념비이다. 나의 소설에서 그것은 인종차별과 대량학살 그리고 잔악한 살인으로 수백만의 무고한 목숨이 사라져 갔다는 것을 상징한다. 역사는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것 모두가 기억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소설은 방갈로르(Banglore)의 힌두교 가정에서 성장한 유태인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상황 하에서 그녀의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독일, 미국 그리고 종국에는 이스라엘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1995년, 나는 힌두교 인들과 무슬림에게 특권이 주어진 가운데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고리팔야(Goripalya)지역을 통과했다. 나는 무슬림 공동묘지 옆 구석에서 ‘유태인 매장지역’이라고 적혀있는 작은 비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히브리어’로 써진 묘비명과 함께 수북이 자란 잔디에 덮여 매장되어 있는 수많은 무덤을 발견했다. 그들 중의 몇몇은 100년이나 된 것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방갈로르(Banglore)에 유태인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데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갈로르(Banglore)에는 유대교가 없었고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방갈로르(Banglore)에도, 영국 점령 하에서 한때 번성했었던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었으나 1948년 인도 독립과 함께 그들이 이주해나갔다.’ 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나는 명망 있는 인도 과학기술원 출신의 물리학 노벨수상자인 라만(Sir. C. V. Raman)박사가 히틀러의 핍박에서 탈출한 과학자들 중 일부를 방갈로르(Banglore)의 인도 과학기술원으로 이주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간 나는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소설의 모티브가 바로 이것이다.’고 생각했다. 8년 이상 나는 소설의 소재를 찾아 헤맸다. 때문에 나는 먼저 수 백 년 동안 존재했던 유대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전역을 답사했고, 다음으로는 독일,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까지 답사를 확대해갔다.
나는 내 소설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을 가기로 결심하고 다카우(Dachau) 나치수용소를 선택했다. 나는 1997년이 되어서야 독일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는 베를린 뮌헨(Berlinrhk Munic)을 여행한 후, 32,000여 명의 유태인의 생명을 앗아간 다카우(Dachau) 나치수용소를 방문했다. 그 후로 2,001년에 워싱턴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로스엔젤리스에 있는 톨레랑스 박물관을 둘러봤다.
그리고 2002년, 나는 이스라엘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대기 중에서조차 갈등이 불러오는 전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텔아비브에 머무르던 기간에 단(Dan)버스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나는 숙소였던 단 파노라마(Dan Panorama) 호텔 발코니에서 서서, 디스코텍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인해 많은 10대들의 생명을 앗아간 것을 추념하기 위해 해변에서 수많은 어른들이 등불을 들고 헌화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또한 같은 기간에 13명의 사망자를 남긴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 공습을 목도했다. 이스라엘인들은 분노와 슬픔과 보복에 대한 맹세를 팔레스타인 공습으로 표출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주거지를 탱크와 헬리콥터 미사일로 공격했고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나는 세계 3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서있었다. 고대도시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은 유태인들의 3대 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그 리고 이슬람의 성지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나는 역사적인 ‘통곡의 벽’앞에서 기도중인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너머에는 예언자 모하메드가 하늘로 갔다는 곳으로 알려진 이슬람 사원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기독교의 성지 중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했다는 성스러운 무덤이 놓여있다. 이 부분은 내 소설의 절정 부분이 되었다.
나의 소설은 1940년 방갈로르(Banglore)에서 유태인 과학자와 그녀의 딸 한나 모세(Hanna Moses)가 인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이곳 인도는 수백만의 신과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이며 그 어떤 우상숭배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권에서 온 소녀가 이곳 인도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녀의 과거가 그녀의 성장기간 내내 그녀를 힘들게 함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본질을 흡수하며 성장해야 한다는 그녀의 현실은 소설 전반부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는 한나(Hanna)가 독일에 남겨진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어린 남동생을 찾아 떠나는 내용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들은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았을까? 한나는 그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녀는 가족을 찾아 유럽, 미국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까지 여행을 떠난다.
한나는 장기간의 험난한 여정 후에 비로소 ‘약속의 땅’에 도착하게 된다. 그녀는 수십 년간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의 조국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과연 ‘조국이 주는 편안함’을 갖게 되었을까?
베를린에서 그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다. 여기 웨스트뱅크(West Bank)로부터 동 예루살렘을 분리하는 콘크리트장벽이 있다. 갈등과 테러는 사라질 수 있을까? 그녀는 가족에 관한 진실과 함께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다. ‘20세기에 히틀러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오늘날 그는 비폭력을 공언한 미국, 이스라엘, 심지어 인도 그 어느 곳에서나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히틀러를 없애지 않은 채, 우리가 과연 ‘결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철의 장벽’은 우리를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을까? 왜 역사는 이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을 반복하는 것일까? 인간의 힘, 돈 그리고 무기가 전쟁을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수백 번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교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가는 것을, 쇼핑몰에 가는 것을, 버스에 오르는 것을 왜 여전히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수백 번의 전쟁에서의 승리 너머로 수백 번 이상의 전쟁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평화로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그것은 정치적인 난관을 뚫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평화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이 지구상의 생물이 생존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나는 피를 빨아들이는 성스러운 땅을 감도는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을 발견하다. 나는 우연히 유태인 공동묘지에서 올해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었다. 인도를 방문한 캐나다 계 유태인 여성은 내 소설을 읽은 뒤, 나를 만나기 위해 방갈로르(Banglore)를 방문했다. 나는 그녀에게 유태인 공동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무슬림 가족을 소개했다. 그녀는 굉장히 감동받은 듯했다. 무덤가는 어두웠고 이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그러나 평화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며 우리의 운명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더 많은 테러를 초래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군사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갈등은 탁자 위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 전장에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전쟁은 전쟁을,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9.11테러의 5주년 기념식일 있던 올 9월, 비단 미국 언론뿐 아니라 인도와 아시아 전역의 전 세계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9.11을 전했다. 우리가 9.11에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스러운 비폭력 시위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간디는 사탸그라하(Satyagraha)에 항거하기 위해 비폭력 시위를 행했으나 그 어떤 언론도 그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오늘날 고도의 기술발전은 우리에게 극히 미세한 사실까지 확인시켜준다. 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이에 우리는 문학을 통해 진정한 진실을 전해야만 한다.
우리는 전쟁에 대해 너무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이제는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된다. 과거의 혼령들은 우리를 평화로운 미래로 향하는 길로 안내할 수 있을까?
나는 자랑스러운 인도경찰 키란 베디(Kiran Bedi)의 말을 믿는다. 그는 ‘티하르(Tihar) 교도소’를 ‘티하르(Tihar) 요람’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그것은 항상 가능하다’라고 했다. 나는 믿는다. ‘그것은 항상 가능하다’라고. 범죄가 저질러진 후에 벌을 주는 것은 우리가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종교나 다른 부분에서 잘못 인도된 청소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들을 교육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무모한 테러를 감행시키는 가난과 문맹을 퇴치시킨다면 어떨까? 이스라엘에서는 남녀모두의 군사훈련과 병역이 의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나의 급진적인 친구는 ‘그것은 인도에서도 필요한 의무다.’라고 말했다. 오, 신이시여!,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 평화 그리고 관용을 의무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전쟁의 대가와 평화의 필요성을 그들이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기 전에 전해줄 수 있을까?
나는 테러시대에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개인의 힘을, 문학의 힘을 믿는다. 어둠을 저주하기 보다는 작은 등불이라도 켜보자. 그것은 작지만 우리 마음속의 어둠을 제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우리 철로의 어두움까지도 제거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세상의 어둠을 알 것인가?
인도에서 유명한 여류작가 인디라 고스와미(Indira Goswami)는 동북지역의 평화를 위해 반역자와 협상을 하고 있다. 물론 즉시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 오지는 못했지만 이는 우리에게 평화로의 기회를 제공한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때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목소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나는 나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 발제를 마더 테레사의 글로 마치고자 한다. ‘우리가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모두의 정체성을 인지할 때만 인위적으로 그려놓은 국경과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저 장벽들을 넘어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상호연대를 통해 테러와 전쟁과 맞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친구 ‘아찰라(Achala)' 와 '호사투(Hosatu)'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특히 내가 작가로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고 그의 생각과 아이디어의 많은 부분을 전해주신 라마크리슈나 박사님(Dr. G. Ramakrishna)께 감사드린다. ‘아찰라(Achala)’는 여성문제를 주로 다루는 비상업적 월간지로써, 지난 21 년 동안 발행되고 있다.
‘호사투(Hosatu)'는 평화로운 우리의 미래와 일반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사안을 다루는 잡지다. 다시 한번 광주민족문화작가회의(WANL) 여러분께 감사 드린다. (번역: 최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