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유연성이 부족한 천재
순욱(163~212)은 위나라의 모사로 자는 문약(文若)이고 영천 땅의 영음 사람입니다. 순유와는 사촌간이며 26세(189) 때 효렴에 천거되었지만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귀향하게 됩니다. 그 후 원소의 휘하에 있었으나 원소의 사람됨을 보고 당시에 분무장군으로 있던 조조에게로 가게 됩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장량(장자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듬해 조조는 연주목, 진동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사마(삼공 등이 설치한 속관)의 직위로 조조를 수행하였습니다. 순욱은 조조에게 이호상식지계(二虎相食之計)로 여포와 유비가 싸워서 자멸하게 하고,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로 원술을 움직여 여포, 유비를 공격하게 하는 전략으로 원술까지 약화시키는 등 평생 조조를 도운 사람이었습니다. 조조는 사실 순욱의 도움을 받아 천하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욱은 조조가 위공이 된 후에 구석의 품을 천자께 아뢸 때 반대하게 됩니다. 그 후 조조는 순욱을 죽이기 위하여 집요한 공작을 펼치게 되고 조조는 순욱에게 비어있는 음식 합을 내리게 됩니다. 순욱은 그릇을 열어 비어있는 것을 조조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이제 내가 그대에게 내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죽어라)를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50이었습니다.
조조와 순욱이 함께 일해 오기 30여년의 세월이었으나 끝내 서로 마음속에 품었던 뜻이 다름을 몰랐던 순욱이 끝내는 서글픈 종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런 순욱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시가 있습니다.(히히 시는 있긴한데 책을 봐야겠군요 죄송)
이때, 강남을 향해 진군을 하던 조조가 그의 죽음을 듣고 성대히 치루도록 지시했으며 순욱에게 경후(敬侯)라는 시호를 내려 그가 세운 공을 기리도록 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사촌인 순유도 구석으로 인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나중에 죽음을 맞으니 이로써 순욱, 순유 모두가 조조의 방자함과 구석의 품(品)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나중엔 최염도 역시 죽음을 맞게 되지요 그러고 보니 많이 죽었군요.
구석이 뭘까요?
구석(九錫):아홉개의 주석이란 뜻으로 천자께서 공이 큰 제후에게 내리는 아홉가지 특혜를 말합니다.
1. 첫째로 궁궐을 드나들 때 절도가 있도록 타고 다니는 수레와 말에 다른 벼슬아치들과는 차이를 두어 그 위엄을 한껏 과시하게 합니다.
수레는 크고 작은 길을 다닐 때를 다르게 하는데, 큰길을 나아갈 대는 항금빛이 나는 큰 수레를 타게 하고, 싸울 때 타는 수레는 검은 소 여덟마리 혹은 누럭색의 여덟마리 말이 끌게 합니다.
2. 둘째로는 의복에 내리는 특전인데 그 말(言)이 곧 문장이요, 행동이 법이니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며 붉은 신발을 내려 신게 합니다.
이는 곧 왕자의 복장을 갖출 수 있게 하여 그 덕을 드러내었습니다.
3. 셋째는 악현(樂縣)으로서 그 공경할 점이 남의 본보기가 되고 어진 풍도를 베풀게 하고자 가무와 음곡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합니다.
그 규모나 기준은 또한 천자나 제후의 예에 따른 것입니다.
4. 넷째는 집에 대한 특전이었습니다.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 등에 각각 다홍빛과 붉은 빛을 칠하여 다른 신하들의 집과 구별하게 했습니다.
5. 다섯째는 궁궐안에서 천자가 밟는 계단인 납폐를 밟고 전각에 오를 수 있었으며 칼을 차고도 전상에 나아갈 수 있는 특전이었습니다.
6. 여섯째는 호분(虎賁)이라 하여 집을 호위하는 군사 3백을 사사로이 둘 수 있습니다.
그 용맹스러움을 드러내고 의를 지킴에 굳세라는 뜻으로 내리는 특전이었습니다.
7. 일곱째는 부월로 천자의 의장에 쓰는 금도끼, 은도끼를 내려 나라를 거스르는 역적 및 죄인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게 했습니다.
8. 여덟째는 궁시로서 붉은 활(동궁) 한 벌, 붉은 살 백 대, 검은 활 열 벌과 검은 화살 천 개를 내려 역적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게 했습니다.
9.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낼 때의 특전으로 거창, 규찬이라 하였습니다.
거창은 검은 수수와 향초를 넣어 빚은 신에게 올리는 향기로운 술로 부모의 제사를 지낼 때 쓰게 합니다. 규찬은 옥으로 만든 종묘의 제례 때 쓰는 제기인데 제사 때 그 제기를 쓸수 있게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구석은 왕이라야만 누릴 수 있는 특전이니 신하된 자로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특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특전을 누려야 한다는 동소의 교언영색(아첨하는 말)을 대하고도 조조는 머뭇거림이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조조에게는 천자께 구석을 상신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의미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선양(제위의 양도를 말함)에 대한 포석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조조가 흡족한 얼굴로 여러 문무관원을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시중 순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건 옳지 않으십니다. 승상께서는 원래 의로써 군사를 이끌어 한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마땅히 처음과 다름없는 충성스러움과 곧은 뜻을 그대로 지키며 겸양하게 물러서는 절도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군자는 덕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는 법이니 구석 같은 특전은 온당치 않습니다." 조조는 그의 가장 측근 모사 중의 한사람인 순욱이 그렇게 말하자 문득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순욱은 원래 어디까지나 천자, 즉 한실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가 조조에게 바쳤던 충성은 실로 조조로 하여금 한실을 부흥시키라는 뜻에서였습니다만 조조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차츰 변해가고 있는 것을 곁에서 냉정히 지켜보고 있던 순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조를 위해 구석의 품을 내리려하자 순욱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출신배경-이력
순욱이 태어난 영천 지역은 허창 바로 옆에 있는 곳으로 낙양에 매우 가까운 곳입니다. 그리고 순욱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그의 조부인 순숙은 순제와 환제 때 이름을 떨친 인물입니다. 순숙의 자식은 8명이었는데 순욱의 아버진인 순곤은 제남의 상(相)이었고 숙부인 순상은 사공이었습니다. 따라서 순욱은 대표적인 청류 가문에 속하며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순욱이 어렸을 때 남양의 하웅이 그를 특별히 여겨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후 효렴에 천거되었고(189) 동탁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천은 낙양과 가까운 곳이라 외부의 침입이 잦으므로 순욱은 원소에게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원소의 인물됨을 헤아려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191).
조조는 이듬해 연주목의 관직을 받았고 후에 진동장군이 되었으나 순욱은 항상 사마의 직위로 조조를 수행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조조가 여포를 정벌할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워 조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조조가 낙양으로 가서 헌제를 받들고 허현을 수도로 삼은 것도 순욱의 강력한 권고 때문이었습니다. 천자는 조조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순욱을 한의 시중으로 승진시켜 상서령을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순욱은 항상 마음에 치우침이 없이 바르고 엄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의 대군을 맞아서 고전하고 있을 때 순욱은 가후와 더불어 조조가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하는 데 최대의 공헌을 하였습니다. 조조는 딸을 순욱의 장남 순운에게 시집보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동소 등이 조조의 작위를 국공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의 예물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순욱은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 잡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임을 강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가 순욱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알아차린 순욱은 근심 속에 죽었습니다. 정사의 주석에는 조조가 순욱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두껑을 열어보니 빈그릇이어서 순욱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인물평
순욱에 대해서 간략히 평하자면 뛰어난 자질을 갖춘 최고의 전략가이자 모사이나 유연성이 다소 부족하고 스스로 이데올리기적인 혼란으로 결국 그 주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욱의 활약에 대해서는 삼국지에 워낙 자세히 나와있기 때문에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쟁점이 되는 것은 순욱이 조조가 위공이 되어 구석을 누리는 것을 반대하여 조조의 미움을 사서 결국 음독 자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조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조조가 제나라의 환공과 같은 패자가 되기를 바랐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순욱은 분명히 세상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순욱이 조조가 관도대전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그 전쟁이 단순히 한나라의 신하로서 천하의 패자 정도가 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순욱의 잘못입니다. 조조에 대해 충성을 다한 순욱의 행동은 장량의 견마지로와 다를 바가 없는데 유방은 천하의 주인이 되고 왜 조조는 한나라의 신하 정도로 머물러야만 하는지에 대해 순욱은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순욱의 죽음은 그 누구에게서도 동정을 살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순욱같은 천재적인 사람이 조조의 의도를 몰랐을리가 없는데 그는 마지막에 조조가 천자가 되려는 야심을 비치자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하의 행동입니다. 사람은 한 가지를 선택하고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빨리 빠져나와야 하는데 끝까지 가고 난 뒤에 그 동안의 모든 일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만약 순욱이 조조를 그와 같이 부정하려 했다면 애초에 동승이나 유비처럼 행동하거나 혹은 천자를 옹위함으로써 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을 것입니다. 순욱은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 조조가 주공(周公) 단(旦)이 아닌 줄은 이미 알았을 텐데, 나중에 황제에 준하는 의례를 가지려는 조조의 행위를 반대한 것은 의미도 없고, 천하의 동정을 얻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이점에서 순욱은 차라리 위나라의 건국에 더욱 헌신했어야 했습니다. (그의 사촌인 순유도 그와 유사한 이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순유는 서량의 마등을 불러들여서 죽여 후환을 없애고, 실전에 투입되어 기발한 계략으로 수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순욱은 조조에게 자신이 없을 때는 순유를 쓰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순유는 조조를 수행하여 손권을 정벌하는 가는 도중 죽었는데 조조는 순유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순유와 주유한 지 20여년이 되었지만 서로 털끝만큼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