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깨복쟁이
최원현/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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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이상스레 옛 일들이 더 그리워지곤 한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서일까. 사람이 지치면 마음부터 약해진다는데 그 징조가 옛 것에 대한 그리움, 아니 지나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살아나는 것일까.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다고 통보가 왔다. 나이가 들더니 어릴 적 친구가 그리워지는 것은 다 같은가 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10년은 넘었고 20년은 채 안되었고, 초등학교 서울지구 동참들이 모였으니 모임의 연륜도 깊어졌는데 오래 전의 그 첫 모임이 아마 30년만의 만남들이었을 게다. 세월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친구도 있었지만 아무리 서로 자기 설명을 해도 기억이 안 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만남의 십여 년 동안에도 나는 몇 번 나가질 못했다. 이상하게 다른 행사들과 겹쳐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일 모인다. 그런데 또 못나가게 되었다. 나만 너무 못 나가는 게 하도 미안하여 달포 전엔 내 작은 수필집을 한 권씩 가정으로 우송해 주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제발 얼굴 좀 보자고 더 성화란다.
저 아랫녘에선 발가벗는다는 말을 깨 벗는다고 한다. 고추 덜렁대며 천둥벌거숭이로 스스럼없이 노닐던 어릴 적 죽마고우는 ‘깨복쟁이 친구’라 부른다. 그런데 그 ‘깨복쟁이’란 말이 나는 참 좋다. 시간과 공간의 벽을 순식간에 헐어버리는 말이 되어 너무나도 정감 넘치게 다가온다. 깨복쟁이 시절이란 산 들 내와 더불어 살던 자연과 하나 된 시간들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 자란 초등학교 때도 여름이면 물만 보면 훌렁훌렁 옷들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그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여자애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도 어느 누군가 시작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이내 깨를 벗고 물로 뛰어들어 여자애들을 혼비백산 도망가게도 했다.
비가 오는 여름날 밤엔 알몸으로 소나무 숲을 누비며 비를 즐기기도 했었다. 그게 깨복쟁이들의 놀이법이요 우정법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땐 어찌 그리도 살기가 어려웠던지 철모르는 깨복쟁이들도 그 어려움은 모를 수가 없었다. 하루 세 끼를 고구마나 감자로 때우는가 하면 무만 잔뜩 썰어 넣은 무밥, 풀죽같은 멀건 밀가루 죽으로 배를 채우고, 그것도 안 되면 하루 두 끼, 하루 한 끼로 끼니를 줄이고 그나마 거르기도 하던 때였다. 전쟁후의 어려움이 어찌 먹는 것 만이었겠는가. 배곯음 외에도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가져볼 수 없는 때였다.
그런데 왜 그토록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그렇게 고생스럽기만 했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가난이나 어려움은 불행이 아녔던가. 오히려 모든 게 넉넉하다는 지금에 그 때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지금보다 그 때가 더 행복했던 시절이란 말인가.
추억이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까지도 미화 시켜 버리는 힘이 있는가 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자연과 하나일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놀이기구가 있었나, 보고 싶은 책이 있었나, 결국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놀아야 했으며 그러니 자연과 더불어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었다. 멱 감기, 자치기, 땅따먹기, 호박 꼰, 찐 돌이, 썰매타기, 제기차기, 딱지치기 등은 자연과 더불어 노는 것이었다. 그런 놀이는 결국 사람과 사람의 놀이였다. 자연과 더불어 노는 사람끼리의 놀이, 그렇기에 싸우고 토라지고 돌아서기도 수없이 하지만 이내 풀어져 돌아와 다시 합세할 수밖에 없던 정의 자리였다. 어찌 컴퓨터 앞에서 혼자서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요즘 아이들과 비교가 될 일인가.
초등학교 시절은 깨복쟁이 친구들의 황금기였다. 아마도 인간적 교분이 가장 깊고 두텁게 쌓여갔던 시절일 것이다. 그러니 눈만 깜박여도 마음이 통하고, 누구랄 것 없이 먼저 뛰기만 해도 그냥 뜻이 전달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먹을거리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한참 자랄 나이 그러나 제대로 먹을 만한 게 어디 있으며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던가. 자연 주전부리 감으로 눈길이 돌려지기 마련이었는데 그 또한 자연에게서였으며 그것은 또 놀이이기도 했다. 하교 길에선 그 먹을거리를 찾아 참 바빴다. 저건 누구네 밭이고 저건 누구네 밭이지? 하고 확인이 되면 서슴없이 그를 앞세워 밭으로 들어가 고구마며 무를 캐내왔다. 훔쳐 먹는(?) 맛이 더 기막힌 것 같았다. 거기다 철 따라 밤이며 감, 파리똥(보리수 열매), 진달래꽃, 아카시아 꽃, 칡, 논둑에 나던 삐비까지 사실 널려있는 게 우리의 간식거리였다. 우린 그런 먹이사냥을 쉬지 않았다. 그건 중학교 때까지도 이어졌다.
그뿐인가. 모내기 봉사라도 나가면 큰 대야에다 차가운 우물물을 길어내 설탕의 500배가 넘는 당도라는 사카린을 타서 주었다. 그런데 그냥 사카린 물일뿐인데 그 단맛을 잊을 수 없다. 학교에 다녀오면 내 몫으로 대소쿠리에 담겨 있던 개떡, 된장에 고추 하나로 냉수에 말아먹던 보리밥맛도 지금은 아무리 느껴보려 해도 되지 않을 일들이다.
어느새 하나 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깨복쟁이 모습을 손주에게서 보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세월무상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에게선 그런 정감이 우러나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게 또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좋은 일로만 생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어린 날 어려움들이 이렇게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편하고 넉넉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런 것은 먼 날엔 추억으로 살아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생하고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오랜 기억으로 남지 않던가. 깨복쟁이의 그리움, 나도 모르게 어닐 날의 고향 길을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이것도 나이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