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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의 칭찬
성경 : 누가복음 21:1-4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실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시대에 있었던 일만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고, 예수께서 분부하신 일이 사도들을 통해 지속된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이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이 모든 일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는데, 종교마다 고유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전들은 수준 높은 윤리와 도덕, 철학과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기록된 문장 하나하나가 대단히 고상하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야기부터 형이 아우를 죽이는 이야기, 아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흉보다가 저주받은 이야기,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이야기까지, 어찌 보면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은 타락한 인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저주받은 인간의 삶이 그와 같다는 것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범죄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구원하시려고 형벌의 날이 오기 전에 아들을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한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눈먼 자를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절대 필요한 구주로 오셔서 온갖 착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늙어 죽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잔인한 십자가 형벌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육체뿐 아니라 명예까지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요즘에는 살인자라도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것은 그 위에 달린 사람이 왜 죽어 마땅한가를 천하에 공개하는 형벌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뿌리째 말라버리게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왜 권능을 사용하지 않고 무력하게 죽으셨을까요? 그가 만일 자기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권능으로 물리치셨다면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 없으신 이가 묵묵히 형벌을 받으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흘 후에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는 부활한 자기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백 여 성도가 일시에 그를 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은 단지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의 혀가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가장 길들이기 힘든 것이 혀라고 했습니다(약 3:8).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천하 각국에서 예루살렘에 와있던 유대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저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어떻게 우리가 각각 우리의 방언으로 듣고 있는가?’ 하고 의아해했습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을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시던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삼 년간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서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한 번도 예수를 본 적이 없는 바울에게서도 같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다.’(고후 12:11~12)라고 말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말씀한 대로 지금도 성도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할 때 주님이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친히 증거해주십니다(막 16:20). 저도 지난 오십 년 동안 거의 매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했던 앉은뱅이 육십 명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수양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인간의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음식물을 먹고 마셔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이는 오직 성령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타내시는 능력입니다. 만일 성령이 제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시거나 도움을 거두신다면 제가 아무리 손을 얹어도 병자가 낫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를 찾으면 그는 만나주시고 우리가 그의 도움을 구하면 그는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에게 재물을 갖다 바치고, 우상 앞에 엎드려 수없이 절을 하고, 우상을 바라보며 소원을 빕니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우상은 사람의 간구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응답이 있건 없건 스스로 위로를 받기 위해서 정성을 다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음란한 짓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한 만큼 인정해주시고, 충성한 만큼 보답해주시고, 그의 뜻을 성취한 만큼 상을 주십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견한 비밀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무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평생 주의 종으로 일하면서 갖는 감사와 기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나아가 엎으려 기도한 만큼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한 것만큼 하나님은 역사하시며, 제가 영원하고 신령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지만 그중에 무가치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수고해도 능히 얻을 수 있는 것을 놓고 달라고 구합니다. 아무리 힘이 없는 갓난아이라도 엄마 젖을 힘껏 빨아야 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모두 준비하고 있어도 젖을 빠는 것은 아이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17). 아이가 만일 “나는 갓난 아이니까 젖을 빠는 일은 하지 않겠소! 당신이 다 해주시오!” 하고 버티며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몫은 해야 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주여, 내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다리는 것은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다고 그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앉아서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산 줄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금은패물을 충분히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라고 약속하신 대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금은패물을 가지고 필요한 양식과 물건들을 이웃나라들로부터 구입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칼과 창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전쟁을 할 때는 칼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 칼은 어디서 생겼을까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금은패물을 가지고 이웃나라들로부터 구입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다면, 사십 년 후 이스라엘은 일할 줄도 모르고 싸울 줄도 모르는, 철저히 무능력한 사람들이 되어 결국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십 년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를 초월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나안 땅으로 옮길 때 만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셨다면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들을 사용하신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광야로 옮겨놓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발로 걷게 하셨고 피를 흘려 적들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할 일을 하다가 더 이상 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도와주십니다. 그는 여호수아가 힘을 다해 싸울 때 해를 중천에 세워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만났을 때 바람을 보내 길을 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돕는 분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까지도 모두 떠맡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심으로써 우리의 수고에 보답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이며, 상(賞)입니다.
제가 평생 목회를 하는 동안 이루어 놓은 일들은 당시에는 언제나 가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전국에 백 개가 넘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과정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심정은 인간적으로는 항상 물 위로 걸어가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제게 충분한 돈과 자신감이 있다면 기도하지 않고도 능히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일이 이루어진 후에 감사기도만 드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는 대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고도 일을 해낼 수 있는 조건이 풍족하다면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저는 오직 “나를 도우소서! 나를 도우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매우 긴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매 년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니까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참으로 긴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정을 교인들에게 일일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제가 모든 사정을 다 말한다면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 왜 두려워하느냐?’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해결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목회를 하면서 언제나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님 앞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저는 수양하느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할 여유가 없습니다. 모든 시간이 제게 있어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걸어가면서도 기도하고, 차 안에서도 기도하고, 집에 있으면서도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제 기도는 수양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하고 하나님을 졸라대는 기도입니다. 제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지난 오십 년간 제가 일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환자가 저를 찾아 옵니다. 하지만 제게 무슨 의학기술이 있습니까? 무슨 초능력이 있습니까? 하지만 제 앞에 온 환자가 깨끗하게 나아야 사람들이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래야 제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병을 고치는 능력이 만일 저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도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병은 떠나가라!” 하고 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제 앞에 왔으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과 제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시옵소서!”
저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면 그가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부활하여 하늘에 가서도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 영혼아, 상을 받자!
내 영혼아, 상을 받자!
내 영혼아, 상을 받자!
내 영혼아, 응답 받자!
내 영혼아, 응답 받자!
내 영혼아, 응답 받자!
예수께서 어느 날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부자도 헌금을 했고, 가난한 과부도 헌금을 했습니다. 부자는 많은 헌금을 연보궤에 넣었지만 집에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얼마 남지 않은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이 때문에 저녁에 아이들이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내일부터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과부는 불가능한 일을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것도 좋지만 당장 자기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하나님을 섬기지, 자기 자식들은 쫄쫄 굶고 있는데 무슨 하나님을 섬긴다고 난리야!” 하고 생각합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자기는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부자는 자기 힘으로 충분히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렸지만, 과부는 불가능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의 행실에 대해서도 인정은 하시지만 특별히 과부가 한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물론 가정까지도 주님의 칭찬을 받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면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헌신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항상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기도도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헌신도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내 영혼아, 하나님의 관심을 끌자!
내 영혼아, 하나님의 관심을 끌자!
내 영혼아, 하나님의 관심을 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