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과 전쟁중인 월남공화국을 돕기 위하여 행하여진 우리 나라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1954년 7월 21일 제네바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남부의 월남공화국에서는 계속되는 군부쿠데타로 정국이 불안하게 되었고, ‘남부월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과 일부 민족세력 및 불평분자들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으며, 북부의 월맹은 본격적인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다. 한편, 미국은 군사원조, 군사고문단의 파견에 뒤이어 미군사원조사령부를 설치함으로써 월남전에 개입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중 1964년 5월 2일 사이공 항에 정박하여 있던 미국수송선이 베트콩에 의하여 격침되고, 이어 8월 2일과 4일 제1 · 2차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다음날 2척의 항공모함을 급파하여 반격과 함께 월맹의 유류저장소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월남전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은 1965년 3월부터 지상군을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존슨 미국대통령은 우리 나라를 포함한 자유우방국가들에게 월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 정부는 ‘비전투부대 파월 계획안’을 수립하고 파월(派越)에 따르는 제반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던 중 구엔 칸 월남수상으로부터 한국군의 지원을 호소하는 공한이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130명) 및 태권도 교관단(10명)이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해서 9월 22일 월남의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 주한미국대사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방문하여 월남사태에 대한 처지를 밝히고, 한국군을 증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국방부장관에게 병력 증파 계획안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고, 국방부는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어 1965년 1월 2일에는 월남정부가 제2차 추가지원을 요청하는 공한을 보내왔다.
이에 따라 육군준장 조문환이 지휘하는 1개 공병대대, 1개 경비대대, 1개 수송중대 및 1개 해병, 공병중대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떠나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 다얀으로 이동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정부는 1965년 6월 14일 월남공화국의 수상으로부터 한국군 1개 전투사단 지원 요청서를 접수하고, 1965년 6월 23일 한국군 1개 전투사단 파월에 관한 대미 합의 각서를 수교하였다.
이에 따라 1965년 8월 29일 맹호부대가 파월부대로 결정되었으며, 소장 채명신을 지휘관으로 파월부대 편성에 착수하여 4주간의 국내 훈련이 실시되었다. 한편, 1965년 9월 1일에는 맹호부대 예하의 육군준장 이범준을 지휘관으로 하는 군수지원사령부인 십자성부대가 창설되었다.
1965년 10월 12일 당시 여의도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들과 한
미 고위장성들, 외교 사절 및 20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맹호부대 환송식이 거행되었으며, 또한 1965년 9월 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초대 사령관에는 당시 맹호부대 지휘관이던 채명신이 겸임하게 되었다. 1965년 10월 16일 맹호부대 본대는 부산항에서 출국하여 그 해 10월 22일 퀴논 항에 도착한 다음, 11월 3일 미제1공수사단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11월 6일에는 퀴논 공설운동장에서 월남국민의 환영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어 1966년 6월 1일 월남 증파 전투사단으로서 백마부대가 구성되었으며, 육군소장 이소동을 지휘관으로 부대 증편 및 파월을 위한 4주간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백마부대 지휘부는 1966년 9월 22일 여의도공항에서 나트랑으로 공수되어 9월 23일 지휘소를 개소하고 작전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주월한국군이 담당한 작전지역은 월남 중부 동해안지역으로서 정치, 군사, 경제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해안선을 따라 너비 50km에 최남단 백마부대 담당 지역으로부터 맹호부대 담당의 북단에 이르는 길이 372km에 달하는 광범위 지역이었다.
이 넓은 지역에서 불과 4만 8000여명의 병력으로 전선 없는 전장에서 공산게릴라의 침투를 막아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해군은 백구부대와 청룡부대를 파월하였으며, 개선하여 귀국할 때까지 백구부대는 월남의 1,000여마일에 달하는 해안선에 있는 대소 항구와 부산에서 월남까지 총 462회의 수송작전을 전개하여 모두 56만2000t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청룡부대는 여단급 작전 55회, 대대급 작전 106회, 소부대급 작전 14만 4173회 등 수많은 대, 소 작전을 통하여 대전과를 올렸다. 청룡부대의 유명한 작전으로는 ‘짜빈동 작전, 테로이 매복 작전’등이 있다. 그러나 1968년 5월 13일 월남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휴전협상이 미국과 월맹 사이에 시작되고 월남전의 월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가들의 군대는 1971년부터 철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군의 경우 1971년 여름까지 지상전의 작전 임무를 월남군에 인계하고 1971년 7월말에는 모두 철수하였다. 한국군은 1971년 12월부터 1972년 3월까지의 기간 동안에 해병 제2여단이 철수하고 이어 1973년 2월 3일부터 3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주월한국군의 주력부대인 주월한국군사령부, 맹호부대, 백마부대, 십자성부대 및 기타 부대가 철수하였다. 주월한국군사령부의 마지막 후발대는 같은 해 3월 23일에 철수하였다.월남 파병은 국가 정책적인 측면에서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월남 파병은 무엇보다도 경제 개방, 안보 강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파병에 따르는 국내경제계획에 대한 지원 확약이 미국으로부터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병은 그 당시 한국 안보에 중추적인 소임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과 군사적인 관계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월남전이 지니는 의의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아시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안전보장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나라는 6 · 25때 자유우방 16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만큼 우방이 공산침략의 희생이 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둘째,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월남 참전 8년간 총 31만 2853명의 병력이 파견되어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으며, 또 한국군의 뛰어남을 세계에 과시하였다는 점이다. 한국군은 대대급 이상의 작전 1,00회를 비롯하여 소부대작전 57만여 회를 통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대민 지원 봉사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3,500여 채의 건물, 1,700km의 도로를 신설하였으며, 600만 주민들에게 친교를 베풀기도 하였다.
셋째, 경제적인 측면으로서 1970년대 한국의 고도 경제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1965년 3월 월남파병과 관련하여 미국으로부터 전해진 이른바 ‘브라운각서’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국군 현대화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약속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바이아 메리칸정책’의 완화와 한국 상품의 월남 수출량을 연간 6000만 달러로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한국군이 월남에 주둔하는 한 군원 이관은 계속 중지한다는 것 등 6개 항목의 합의 외에도 증파하기로 한 추가 병력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그리고 예산 부담, 월남 내 각종 사업에의 참여 등 다른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밖에도 기술자들의 월남 파견으로 인한 기술 발달 및 외화 획득도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