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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큰 손’ 군인공제회 “24년 연속 흑자, 주식·부동산 찍고 중앙 아시아로!”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
군에서 조기 전역한 사람들, 그것도 보병이나 포병 같은 핵심 병과가 아니라 경리나 공병 같은 지원병과 출신이 모인 곳이 바로 군인공제회다. 이 군인공제회가 기적 같은 24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다. 군인공제회가 투자하는 사업은 대부분 성공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군인공제회가 투자하면 우리도 따라 하겠다는 ‘군인공제회 따라 하기’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다. 아마추어 집단이 프로 세계의 절대 강자로 등극한 비밀을 해부한다. |
지난 6월17일자 신문은 일제히 현역 육군 중위가 400여억원 상당의 금융사기 사건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박모 중위는 고수익 투자를 해주겠다며 기무와 헌병이 포함된 동료 군인과 민간인 등 750여 명으로부터 400억원을 건네받아 투자했으나, 상당액을 날리고 일부는 외제 차를 구입하거나 유흥비로 탕진했다고 한다. 박 중위는 서울 양재동에 무허가 금융회사를 차리고 전모 중위와 김모 중위를 중간 알선책으로 활용해 투자금을 모았는데, 한 대령 진급자는 이들에게 수억원을 맡겼다고 한다. 군 검찰에 따르면, 박 중위 등은 이렇게 모은 400여억 원 가운데 143억원을 초기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금으로 돌려주는 데 사용하고, 177억원은 인터넷 다단계 금융회사와 코스닥 상장기업에 투자했다가 날렸다. 45세 전후에 퇴직하는 직업군인 박 중위를 믿고 투자한 군인들의 저층 심리에 박혀 있는 진실은 ‘군인은 돈에 초연하지 않다. 재테크를 하고 싶다’이다. 현행법상 군인의 정년은 일반 공무원과 다르다. 일반 공무원은 60세 전후로 규정된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지만, 군인은 대장 진급자를 제외하면 60을 채우는 사람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교로 임관한 직업군인의 절대 다수는 한창 일할 때인 중령을 전후해 전역한다. 군 인사법이 정한 계급정년 때문에 일반 공무원보다 15년 정도 빠른 45세 전후에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고 노후를 대비해야 할 나이에 ‘실업자’가 되는 것은 공포 그 자체다. 적잖은 군인은 야전근무로 인해 재테크 기회가 아예 봉쇄되는 현실에 상실감을 느낀다. 군 전산망은 보안장치가 되어 있어 컴퓨터 앞에서 근무하는 군인도 주식거래를 하지 못한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본다. 군인들의 이러한 소외감을 풀어주기 위해 마련한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군인연금이다. 그러나 군인연금은 1973년 이래 기금이 고갈된 상태다. 군인연금은 회원인 직업군인이 낸 기여금을 운영해 생긴 이익을 쌓아놓았다가 이들이 전역하면 연금으로 돌려주는 강제 저축제도였다. 그러나 기금이 고갈되었기에 지금은 회원이 부담하는 기여금과 정부 예산을 받아 전역 군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다른 하나로는 1994년 국방부가 만든 한국군사문제연구원(이하 군문연)의 기금 운영사업을 꼽을 수 있다. 군인연금은 직업군인이라면 누구나 가입해야 하는 강제저축이지만, 군문연은 현역 대령과 장성 가운데 원하는 사람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운영 방식은 군인연금과 비슷해서 회원들이 낸 기여금을 투자해 얻은 이익금을 쌓아놓았다가 회원이 전역하면 5년간 이를 연금 형식으로 나눠준다. 그러나 군문연 역시 투자 실패를 거듭해 지난해 기금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군문연의 기금 운영 부문은 군인연금에 이어 사실상의 파산을 맞은 셈이다. 이처럼 군인들의 노후를 위해 만든 제도들이 운영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데 오직 하나만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다. 군인공제회가 바로 그것이다. 군인공제회는 1984년 창설 이래 단 한 번도 적자를 본 적이 없다. 한국 여자 양궁 단체팀이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24년간 6연패를 했듯이, 군인공제회도 24년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군인공제회는 군문연처럼 원하는 사람만 회원으로 참여한다. 그런데 실적이 좋다 보니 회원과 자산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 1984년 6만2433명의 회원과 85억원으로 시작해 현재 회원수 16만2698명, 자산 약 8조원(정확히는 7조8734억원)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군인공제회의 회원은 앞으로 더 늘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이유는 16만2698명이라는 숫자는 우리나라 직업군인 전체 숫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상비군 수를 줄이는 개혁을 한다고 했으므로 회원 수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회원은 줄어도 군인공제회의 자산은 늘어난다. 이유는 높은 수익률 때문에 회원들이 더 많은 목돈을 집어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 군인공제회의 회원수 증가는 주춤한 상태이지만 자산은 24년 만에 925배로 불어났다. 왜 군인공제회는 다른 기관들과 달리 연승을 거듭하는 것일까?
지렁이가 뱀을 잡아먹는다?
지금 군인공제회는 투자시장에서 ‘미다스의 손’이다. 군인공제회가 투자한 사업은 대부분 결과가 좋았기에 군인공제회가 투자했다는 소문이 있으면 너도나도 그 사업에 투자하려고 한다. 현재 군인공제회가 투자한 자금은 5조6000여억원인데, 이 가운데 부실투자로 판정된 것은 6% 정도인 3000여억원이다. 민간기업이 벌이는 투자사업에서도 10~20%는 부실에 빠지는데, 군인공제회의 부실투자 비율은 그보다 훨씬 낮다.
군인공제회가 투자하면 성공한다는 말을 입증한 예로 성동조선해양이 있다. 성동조선해양은 경남 통영시에 있는 조선소로 2005년까지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 같은 대형 조선소로부터 선박 부품인 블록을 주문받아 제작해주던 협력업체였다. 그런데 그해 군인공제회가 500억원을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총 1550억원을 투입해 36.1%의 지분을 가지면서, 현대중공업처럼 직접 배를 짓는 ‘신조(新造)’회사로 탈바꿈했다.
성동조선해양은 지난 3월 말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삼호중공업에 이어 국내에서 네 번째로 초대형 원유운반선을 수주하는 쾌거를 올리면서 일약 세계적인 조선소로 부상했다. 국내 조선업계에 STX조선에 이은 또 하나의 기린아가 등장한 것이다. 지금 성동조선해양은 수주잔량 기준으로 세계 8위, 국내 5위다.
요즘 재계의 관심은 세계 3위의 조선업체인 대우조선해양을 어느 기업에서 인수할 것인지에 쏠리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한때 증권가에서는 성동조선해양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렁이가 뱀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데, 성동조선해양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이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본다. 성동해양조선의 배경에 있는 군인공제회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에 대우조선해양 매입의향서를 제출한 회사는 포스코와 현대중공업, GS, 한화 4개사였다. 군인공제회는 물론이고 성동조선해양도 의향서를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동조선해양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불씨’다. 의향서를 제출한 네 기업이 파트너를 찾아 컨소시엄을 만드는 제2라운드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보다 강하고 많은 원군(援軍)을 구한 기업이 거머쥐게 될 것이므로 진짜 경쟁은 제2라운드부터다.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의 키
네 기업이 짝짓기 경쟁에 들어가면, 성동조선해양은 그중 어느 한 기업을 골라 전략적 파트너가 된다. 이때 군인공제회는 팔짱을 끼고 성동조선해양의 행동을 지켜볼 수도 있고, 자신이 성동조선해양과 함께 그 기업의 파트너로 참여할 수도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과거 장보고급 잠수함을 건조했고, 현재는 한국형 이지스급 구축함을 건조하는 방산업체다. 이러한 세계적인 조선소가 전적으로 민간기업에 인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군도 이 조선소에 대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으므로 군인공제회의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높다.
문제는 군인공제회가 성동조선해양을 앞세워 간접적으로 참여하느냐, 아니면 성동조선해양과 함께 직접 참여하느냐다. 과거 사례로 볼 때 의향서를 제출한 4개 기업은 군인공제회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 분명하다. 군인공제회가 어느 컨소시엄에 가담하느냐가 대우조선해양의 인수를 결정짓는 방향타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성동조선해양이 대우조선해양 주주가 된다면 지렁이가 뱀을 잡아먹는 기적은 현실이 된다.
군인공제회의 성동조선해양 투자가 빛나는 이유는 비슷한 시기에 골드만삭스가 한 투자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군인공제회가 성동조선해양에 500억원을 투자할 때 골드만삭스는 성동조선해양보다 형편이 나은 S조선에 500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지금 성동조선해양의 실적은 S조선을 월등 앞서고 있다.
군인공제회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전기차 제작업체인 CT&T에 대한 투자다. 군인공제회는 CreaTion and Technology의 이니셜을 딴 이 회사 지분의 25%를 갖고 있다. 전기차라고 하면 대단한 기술을 필요로 할 것 같지만, 실제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전기차는 아주 평범한 형태로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전기차는 차량 내부에 탑재한 전지(電池)에서 나오는 전기로 운행한다. 운행이 끝나면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아 방전된 전지를 충전해준다. 따라서 전기차에서는 전지가 핵심이다.
이러한 전기차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골프장이다. 골퍼들이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는 골프카, 즉 골프 카트가 바로 전기차다. 2005년까지 국내 골프장을 지배하던 골프카는 산요, 야마하, 히타치 상표를 붙인 일제(日製) 일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C-zone이라는 상표를 붙인 CT&T 전기차가 70%를 장악하고 있다.
CT&T의 골프카가 국내 골프장을 석권한 첫째 이유는 싼 가격 때문. CT&T의 골프카 가격은 일제 골프카의 65%를 밑돌았다. CT&T가 이처럼 낮은 가격에 골프카를 공급할 수 있었던 이유는 CT&T 임원진의 능력에 있다. CT&T 이영기 대표는 ‘포니정(鄭)’으로 불리던 고(故) 정세영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이끌던 시절 수출본부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 회사의 기술고문인 이충구씨는 현대자동차의 기술부문 사장을 역임했다. 이들은 전기차 시대가 올 것을 예측했고, 그 시대를 어떻게 열어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골프카에서 저속·일반 전기차로
현재 지식경제부는 업계에 휘발유차 수준의 속도로 달리는 전기차 제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CT&T의 경영진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휘발유차 수준의 전기차 개발은 뒤로 미루고, 손쉬운 골프카부터 제작한 것이다. 골프카 제작의 핵심은 좋은 전지의 확보다.
로케트 밧데리 제작사로 유명한 세방전지는 국내 최대의 전지 메이커다. 이영기 대표와 이충구 고문은 세방전지 경영진을 만나 골프카를 제작하겠으니 이에 맞는 전지를 개발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업가에게는 미래 시장도 중요하지만 눈앞의 블루오션이 더 중요하다. ‘포니정’ 사람들이 당장 시장 형성이 가능한 골프카를 개발하겠다고 하자 세방전지 측은 바로 동의했다.
세방전지가 전지 개발에 착수하자 CT&T는 골프카 설계를 시작했다. 골프카는 일반 차와 달리 플라스틱으로 제작한다. 일반 차에 비해 속도가 현저히 느리니 일반 차 수준의 안전장치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포니정’ 사람들에게 이런 차를 설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나 한두 가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추가했다. 한국의 골프장은 늦가을부터 쌀쌀해진다. 이런 점을 고려해 시트에 열선(熱線)을 넣은 게 그런 예다.
이 열선 덕분에 C-zone은 골퍼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일제에 비하면 거의 반값인데 골퍼들마저 좋아하니 골프장마다 앞다퉈 C-zone을 구매해 순식간에 CT&T는 국내 골프카 시장의 70%를 장악했다.
CT&T 경영진은 일반 차 메이커들은 높은 임금 때문에 골프카시장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대자동차 처지에서 골프카는 장난감 자동차 수준인지라 연봉 7000만원이 넘는 직원을 투입해 개발하거나 제작할 이유가 없다. 일반 차 제조업체는 들어오지 않고 한국에는 400여 개의 골프장이 있으니 CT&T로서는 당분간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블루오션을 접수한 셈이다. 이제 C-zone은 골프장을 넘어 리조트용 차량으로, 공해에 민감한 곳에서는 작업차량으로 쓰이고 있다.
국내를 석권한 CT&T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골프장이 있지만 골프카는 가장 ‘후진’ 미국을 뚫고 있다. 그리고 잠재력 면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시장이 열릴 것에 대비해 한국보다 더 큰 공장을 중국에 지었다.
CT&T는 골프카를 생산한 데 이어 시속 50km 내외의 속도로 50~100km를 달릴 수 있는 근거리 이동용 전기차 e-zone을 제작하고 있다. NEV(neighborhood Electric Vehicle)로 분류되는 이 전기차는 쇼핑몰에 가거나 아이를 통학시키는 데 적합하다. 미국의 34개 주에서는 이런 전기차를 ‘네 발 달린 오토바이’로 보고, 운전면허증이 없어도 운행할 수 있게 했으므로 NEV의 시장은 날로 커지고 있다.
NEV는 저녁에 6시간 정도 전기를 연결시켜주면 충전되므로 중소도시나 시골의 주부나 노인들이 이용하는 ‘세컨드 카’나 ‘서드 카’로도 제격이다. CT&T는 여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하려고 한다. 태양열전지를 개발하는 기관과 협력해 NEV 지붕에 태양열 발전장치를 올리려는 것이다. 이 장치를 올리면 NEV는 운행 중이거나 주차 중일 때 소량이긴 하지만 자가 충전을 할 수 있다. NEV가 소비하는 전력은 월 1만원 정도인데 이 장치를 올리면 NEV의 운영비는 더욱 적어지니 CT&T의 e-zone은 그만큼 더 많이 팔릴 것이다.
한국에는 아직 NEV에 대한 법이 없다. 그럼에도 국내 보험사들은 NEV가 오토바이보다 위험이 적다고 보고 NEV 보험을 받아주기로 했다. 이러니 NEV 시장은 한국에서도 빠르게 열릴 수밖에 없다. CT&T는 우선 국내에서 NEV 시장을 형성한 후 일반 차 수준의 능력을 가진 전기차 개발에 도전하고자 한다.
군인공제회에는 자동차 전문가가 없다. 그런데도 ‘세계 최초’라는 명분을 좇지 않고 시장성 있는 제품부터 개발하려고 한 ‘포니정’ 사람들의 혜안을 꿰뚫어 보고 일찌감치 선(先)투자에 나섰다. 투자는 복잡한 방정식이 아니라 상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을 보는 눈과 시장을 보는 안목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군인공제회는 사람을 보는 안목도 있지만, 빠른 결정을 내렸기에 이 회사를 잡을 수 있었다.
군인공제회의 이런 능력이 저절로 갖춰진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고 이 수준에 올랐다. 수업료에는 투자 실패뿐만 아니라 ‘관계기관으로부터의 태클’도 포함된다. 간섭하기 좋아하는 관계기관의 태클은 생각보다 그 위력이 막강하다. 이러한 태클을 ‘우아하게’ 피해갔기에 군인공제회의 오늘이 열렸다.
금호그룹 구한 ‘백기사’
얼마 전 재계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데, 금호의 유동성 위기를 바라보는 군인공제회 측의 소감은 남달랐다. 2002년 유동성 위기에 놓인 금호그룹을 구해준 ‘백기사’가 바로 군인공제회였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국내 기업이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풍랑이 거세지는데 모두 쪽배에 매달리면 다 죽는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후대에 유전자를 전하려면 누군가는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누가 ‘죽음이 예정된’ 바다로 뛰어들 것인가.
부실업체를 사려는 곳은 없으니 살려면 알짜를 팔아야 한다. 위기를 맞은 기업들이 알토란처럼 아끼던 부동산과 기업을 내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냥꾼’이 몰려들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M&A에 서툴렀고, 경기도 불투명했으므로 선뜻 M&A에 뛰어드는 기업이 없었다. 덕분에 외국 업체가 이 시장을 주도하게 됐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외국에서 자본이 들어와야 하므로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장려했다. 그리하여 삼성자동차가 프랑스 르노에 넘어가 르노삼성 자동차가 됐고, 대우중공업은 여러 개로 쪼개져 그중 중장비 부문은 스웨덴의 볼보가 주인이 됐다. 대우자동차는 GM이 인수해 GM대우가 됐다.
한때 한국의 자존심이기도 했던 대우차 매각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국내 기업의 해외 매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먹튀(먹고 튀기)’를 하는 외국 투자자 때문이었다.
당시 대우차 매각 후 시장에 나온 큰 기업이 금호타이어였다. 유동성 위기에 당면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타이어 업계 세계 랭킹 11위권인 금호타이어를 팔려고 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타이어의 덩치가 너무 커서 국내에서는 매수할 회사가 없다고 보고 해외 업체를 두들겼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사모 투자회사인 C그룹과 접촉해 1년간 협상을 거듭했다.
C그룹 한국지사는 국내 한 은행을 매입해 워크아웃한 다음 미국계 은행에 매각해 큰 재미를 본 적이 있었다. 경험이 있는 만큼 C그룹은 금호그룹을 능란하게 다루었다. C그룹 한국지사의 대표는 정·재계에서 이름을 날린 원로의 사위로 파워가 막강했다. 그로 인해 금호그룹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때 금호타이어의 가치를 평가한 기관 가운데 하나가 S회계법인이었다.
S회계법인의 모 상무는 금호타이어를 외국계 투자회사에 매각하는 것이 아까워 군인공제회 이청남 이사장에게 관심을 가져보라고 제의했다. 성공하는 사람은 바람결처럼 전해오는 정보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 이사장 역시 이 제의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실무자인 J씨로 하여금 금호그룹의 전략기획본부장인 O씨를 만나게 했다. 그러나 O본부장은 군인공제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인사만 하고 J씨를 돌려보냈다.
“경영권은 당신네가 가지시오”
한번 물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군인공제회는 작전을 바꿨다. 금호그룹 채권단 중엔 군인공제회와 가까운 조흥은행이 있었는데, 군인공제회는 조흥은행 간부를 통해 ‘군인공제회가 금호타이어에 투자할 생각이 있으니 제대로 대화해보라’는 이야기를 O본부장에게 전하게 했다. 군인공제회의 현금 동원력을 알고 있는 조흥은행은 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
그리하여 O본부장을 다시 만난 J씨는 군인공제회의 투자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조흥은행의 측면 지원은 위력이 있었다. 군인공제회의 뜻을 확인한 O본부장은 J씨에게 “C그룹에는 이를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금호그룹은 10월말 C그룹과 협상을 마무리하기로 했기에 이러한 부탁을 한 것이었다. O본부장과 J씨가 만난 게 9월이었으니, 금호그룹으로서는 C그룹에 대해 군인공제회가 치고 들어온 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 후 금호그룹은 군인공제회에 긍정적인 사인을 보냈다. 곧바로 금호타이어에 대해 실사를 하게 된 군인공제회는 S회계법인의 권유가 허언(虛言)이 아님을 확인하고 획기적인 제의를 했다.
“우리는 경영을 모른다. 우리는 투자만 할 테니 경영은 금호그룹이 계속하라. 우리는 2500억원을 투자해 금호타이어 지분의 ‘50% 플러스(+) 1주’를 갖고, 금호그룹은 현물로 50%를 투자한 것으로 하자. 금호그룹은 경영권을 가져가는 대신 우리에게 수익을 보장하라. 금호타이어가 충분한 수익을 보장하면 우리는 그러한 수익이 확보될 때 주식을 팔고 빠져나가겠다.…”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주는 것은 장교에게 부대를 주는 것과 같다. 유·무능을 떠나서 경영인은 회사가 있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장교는 지휘할 부대가 있어야 전투와 훈련을 할 수 있다. 금호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C그룹이 당황했다. C그룹 대표는 군인공제회를 찾아와 “우리도 금호타이어 투자에 끼워달라”고 부탁했으나 군인공제회는 거절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C그룹은 적절한 선에서 압박을 멈추고 금호타이어를 인수했다면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도를 넘어서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일단락되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후폭풍이 몰려온 것이다.
당시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고 금호그룹의 오너는 호남 출신이었으므로 “호남 정권이 군인공제회를 동원해 호남기업에 특혜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몇몇 국회의원이 ‘군인공제회가 금호타이어에 투자한 것은 금호그룹에 특혜를 준 것’이라며 따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금호타이어가 정상화되지 못하면 군인공제회는 원금을 까먹을 수 있다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았다.
50% 넘긴 수익률
민간 기업이나 개인이 금호타이어에 투자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겠지만, 군인공제회는 국방부 산하기관이므로 국회가 요구하면 설명을 해야 한다. 군인공제회를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정치인들 때문에 군인공제회는 이들과 기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국회는 군인공제회에 대해 국정감사까지 했다.
정치인들의 이러한 기우(杞憂)를 불식시켜준 것은 ‘시간’이었다. 생각 밖으로 시간은 빨리 찾아왔다. 2003년부터 한국 경제는 놀라운 탄력성을 보이며 급성장했는데, 금호타이어도 그 탄력을 받았다. ‘펀더멘털’이 좋은 금호타이어는 서울 증시와 까다롭기로 소문난 런던 증시에 동시에 상장했다. 금호타이어 주가가 급등하자, 군인공제회는 미련 없이 주식을 매각하고 철수했다.
부동산 개발투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을 보는 눈’이다. 법적으로 개발이 불가능한 땅, 개발은 가능하지만 사방이 꽉 막힌 맹지(盲地)를 고른다면 이 사업은 분양도 못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군인공제회 직원 중에는 공병 출신 예비역이 많다. 공병이 하는 일은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땅을 보러 다니는 것이다. 부대가 기동할 때 숙영지를 찾거나, 아니면 부대의 시설공사를 하는 것이 공병의 주 임무다. 이렇다 보니 이들은 땅을 볼 줄 안다. 물론 부대가 머물 곳과 값이 오를 땅의 조건은 다르다. 하지만 땅을 보는 데 안목이 트인 사람은 방정식을 바꿔도 그 방정식을 쉽게 풀 줄 안다.
현대슈퍼빌 신화
현대슈퍼빌은 진로그룹이 도매센터를 지으려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바로 옆에 남부터미널 지하철역과 남부순환도로가 있고, 가까운 곳에 경부고속도로가 있어 교통조건이 좋았다. 그리고 길만 건너면 울창한 우면산도 있다. 이러한 조건을 눈여겨본 군인공제회는 막강한 자금력을 등에 업고 진로도매센터 부지를 매입했다.
군인공제회는 자산의 20%가량을 이 부지 매입에 투자했다. 비유해서 말하면 ‘목숨을 건’ 것이다. 그리고 주상복합건물을 지을 수 있는 인허가 절차를 밟고 현대건설에 설계와 시공을 맡겼다. 그러나 워낙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분양에 나섰기에 처음에는 실적이 좋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인공제회는 회원인 장성들에게 현대슈퍼빌의 입지조건이 좋으니 분양을 받아보라고 권유해 분양을 완료했다.
현대슈퍼빌은 완공 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매력은 ‘큰 공원’인 우면산이었다. 우면산 덕분에 현대슈퍼빌은 한순간에 고급 주택 타운으로 부각됐다. 자산의 20%가량을 투입한 이 사업에서 군인공제회는 20% 내외의 수익을 올리고 철수했다. ‘땅을 볼 줄 아는 눈’ 덕분에 얼어붙은 부동산 개발시장에서 신화를 만든 것이다.
부동산 개발은 시행사 중심으로 이뤄진다. 시행사는 개발할 부동산을 매입한 다음 인허가를 받아내는 기관이다. 현대슈퍼빌은 군인공제회가 시행사로 참여해 성공을 거둔 경우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시행사가 벌이는 사업에 투자 사업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냥 투자하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하는 투자가가 된다.
부동산 개발 시행자 처지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허가를 받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인허가가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자금력이 약한 시행사는 이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은행은 ‘안전제일’ 주의를 추구하므로 인허가를 받지 못한 시행자에게는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될 만한 땅인데 시행사가 자금이 부족해 헐떡이면, 군인공제회는 시행사가 인허가를 받을 때까지 돈을 빌려주는 역할도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이러니 부동산 개발 시행자 처지에서 군인공제회와 손잡는 것은 성공을 보장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군인공제회가 투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투자자들도 덩달아 투자하고, 개발이 완료된 다음에는 분양도 잘되는 것이다.
군인공제회의 대출 금리는 은행보다 높다. 따라서 인허가 절차가 마무리되면 시행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군인공제회에서 빌린 돈을 먼저 갚는다. 군인공제회는 이 돈을 새로운 시행자에게 빌려준다. 군인공제회로서는 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군인공제회에는 사업의뢰서가 하루 서너 건씩 접수되므로 새로운 투자처를 만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는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군인공제회는 ‘실무투자심의위원회’라는 독특한 기구를 운영한다. 이 위원회는 임의로 차출한 직원들로 구성되는데, 실무부서가 작성하고 관련부서가 검토한 자료를 이사회에 올리기 전 마지막으로 검토한다. 위원으로 선발된 직원들은 ‘쟁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올라온 사업에 대해 꼬치꼬치 따진다. 따라서 이 위원회를 통과한 사업은 실패하는 경우가 드물다. ‘쟁이’들의 자부심이 군인공제회 성공을 보증하는 또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다.
군인공제회가 수익을 올린 부동산 개발사업으로는 서울 광화문 한복판의 ‘경희궁의 아침’, 여의도의 ‘리첸시아’, 마포의 ‘오벨리스크’ 등이 있다. 이러한 성공이 이어지자 회원인 군인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위한 아파트 분양도 해달라’는 요구가 튀어나왔다. 군인들은 관사 생활을 하기에 부동산 투자에 매우 서툴다. 그러면서도 조기 전역의 부담감 때문에 내 집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하다.
이에 따라 군인공제회는 시행사를 움직여, 그들이 짓는 아파트의 20% 정도를 군인공제회 회원만을 위한 분양 물량으로 돌려놓거나, 아니면 군인공제회 회원만을 위한 아파트 공사에 나섰다. 서울 상계동의 보람아파트는 군인공제회가 회원을 위해 지은 첫 번째 아파트인데, 요새처럼 단단하게 지었다고 해 화제가 됐었다.
군인공제회를 통해 분양받은 아파트로 돈을 벌었다는 군인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회원 아파트 분양에 대한 압력이 폭증했다. 역시 ‘인심은 곳간(庫間)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금에 여유가 있는 군인공제회는 땅을 볼 줄 아는 직원을 동원해 부지를 물색하고 회원을 위한 아파트 공사에 착수했다. 일종의 조합 아파트를 만든 것이다. 분양이 뭔지, 재개발, 재건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군인들은 군인공제회의 아파트 분양에 적극 참여했다. 용인 신봉, 용인 성복, 용인 동복 등이 이런 배경으로 건설된 아파트인데, 군인공제회는 인근 지역의 일반 아파트 분양가보다 10% 싼 가격에 회원들에게 분양했다. 지방에 아파트를 지을 때 가장 염려되는 것은 미분양이다. 그러나 아파트를 갖고자 하는 군인들의 열망은 매우 강했기에 군인공제회는 전량 분양할 수 있었다. 이로써 군인들은 ‘내 집’을 갖게 됐고, 군인공제회는 ‘미분양 제로’ 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실패해도 성공한 구룡마을 사업
잘되는 집에는 행운뿐 아니라 부담도 많다. 시어머니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태클은 공격적인 사업을 할 때 더 강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투자 건이다. 구룡마을은 자연녹지로 묶여 있는 철거민 집단 이주지로 오랫동안 개발 시비가 그치지 않은 곳이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투자인데 현대슈퍼빌 성공으로 주목을 받은 군인공제회는 2004년 500억원을 투자해 토지 매입을 시도했다.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추진한 것이다.
군인공제회는 이곳에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몇몇 언론이 특혜 시비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자연녹지인 구룡마을의 개발이 허가되면 제2의 수서사건이 된다는 것이 시비의 요지였다. 자연녹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깔고 있지만, 이 주장에는 허구가 있었다.
구룡마을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곳이 자연녹지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곳은 ‘누구나 먹고 싶어하는’ 뜨거운 감자였다. 너무 뜨거워서 먹지 못할 뿐 모두 군침을 흘리는 대상인 것이다. 구룡마을 구성원들은 각각의 투자 희망자들과 연결돼 있었으므로, 내부 갈등도 극심했다. 이런 사정으로 군침만 흘리고 선뜻 뛰어드는 사람이 없을 때 군인공제회는 뱃심 좋게 구룡마을 땅을 매입해 들어간 것.
그러자 구룡마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들은 군인공제회가 자연녹지인 이곳을 개발하기 위해 땅을 사들이고 있다면서 곳곳에 투서를 했다. 말 많고 탈 많은 구룡마을은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됐다. 그러자 감사원을 필두로 여러 기관에서 군인공제회에 구룡마을 토지 매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귀가 얇은’ 기관들이 뒤탈을 걱정해 사업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에 국방부도 편승했다.
그리하여 군인공제회는 철수했다. 그러나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투자비에 프로젝트 파이낸싱 비용을 더해 총 667억원을 투입했으나 빠져나올 때는 이를 매각해 903억원을 받았다. 236억원을 벌고 철수한 셈인데, 이는 ‘미다스의 손’이 투자했다는 것만으로 이곳의 땅값이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쟁자들은 정부 압력으로 빠져나오는 군인공제회가 내놓은 땅을 매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해외자원 개발에 진출
지금은 부동산시장이 죽어 있기 때문에 군인공제회도 이 부문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있다. 대신 해외투자와 건강사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세계적으로 유전개발 붐이 일었다. 과거에는 SOC가 부족해 개발할 생각도 하지 않던 유전지대가 속속 개발되면서 덩달아 땅값도 올라갔다. 이러한 곳은 중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한국 기업들은 새로운 프런티어인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이 돈을 군인공제회가 채워주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의 처지에서 본다면 군인공제회는 차관을 주는 기관인 것이다.
지난 9월3일 군인공제회 조영호 이사장은 영국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했다. 로이터는 2004년 금호타이어 주식의 런던증시 상장을 특종 보도한 적이 있어 주가가 크게 떨어진 현 시점에 군인공제회가 어디에 투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 이사장을 만난 것이다. 군인공제회는 영국에도 투자했기에 로이터는 군인공제회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군인공제회는 호주의 맥쿼리가 조성한 간접자본 분산투자에 3000억원을 투자했는데, 맥쿼리의 간접자본 분산투자자 펀드는 ‘대(大)런던’으로 통칭하는 런던과 그 주변 도시에 대한 상하수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템즈워터 사에 14조5000여억원을 투자했다. 군인공제회는 이 펀드에 6.88%를 투자한 것이다.
템즈워터 사의 대런던 상하수도 사업 투자는 군인공제회가 참여한 최초의 해외 인프라 투자 사업이다. 맥쿼리 펀드는 대런던의 상하수도 시설을 개선하고 템즈워터 사가 받는 상하수도 요금의 일부를 수익금으로 받아 투자자들에게 돌려준다.
그외 군인공제회는 국내의 해양 심층수 개발과 중국 쪽 백두산에서 광천수를 개발하는 건강사업에도 투자하고 있다. 라오스의 코라오그룹은 바이오 디젤을 추출할 수 있는 피마자 비슷한 ‘자트로파’를 재배한다. 군인공제회는 유가가 높아지면 바이오 디젤 사업의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보고 코라오그룹의 자트로파 재배사업에도 투자했다. 군인공제회의 투자 영역은 국경선을 넘어 다종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트리플 A’ 평가
군인공제회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와 비슷한 미국의 신용평가사인 D&B가 한국신용평가와 합작해 설립한 평가회사 나이스 D&B는 공공입찰용 평가를 하면서 군인공제회에 ‘트리플 A’를 주었다. 이러한 평가는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입찰 사업에 군인공제회가 참여할 때 가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또 한국신용평가가 한 기업어음 발행을 위한 신용평가에서는 ‘더블 A 플러스’를 받았다. 이 평가에서 트리플 A를 받은 곳은 일반 은행뿐이다. 더블 A 플러스는 현대자동차에 부여된 등급인데, 군인공제회는 현대자동차 수준의 신용을 인정받은 것이다.
과거 군인공제회는 마지막까지 군복을 입지 못하게 된, 어찌 보면 군 생활에서 실패한 예비역들의 집합소였다. 군인공제회에 모여든 이들은 계속 군복을 입고 있으면서 어깨에 별을 올린 동기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계급정년으로 언제 어떻게 물러날지 모르는 현역들이 오히려 일취월장하는 군인공제회에 근무하는 동기를 부러워한다. 군인공제회는 이제 전역 군인은 물론이고 일반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와 투자 전문가들도 가고 싶어하는 직장이 됐다.
아마추어 집단인 군인공제회는 프로의 영역인 투자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떠올랐지만, 이들에게도 나름의 고민은 있다. 첫째는 국방부의 통제다. 국방부는 산하기관인 군인공제회에 대해 봉급체계에서부터 많은 부분을 간섭한다. 그러나 군인공제회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하지 왜 군인공제회가 국방부와 임금체계를 맞춰야 하느냐는 불만을 토로한다. 더 큰 성과를 올리려면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방부의 규제 때문에 유능한 투자전문가를 영입하지 못하는 것도 불만이다. 국방부는 전문가를 영입하더라도 국방부 수준으로 할 것을 암암리에 요구한다. 군인공제회는 국경을 넘어 프로만 생존할 수 있는 정글로 뛰어들었는데, 국방부는 아마추어 정신을 유지하라고 강요하니 군인공제회는 답답하다.
美 칼퍼스가 롤 모델
군인공제회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퇴직 공무원 공제회인 칼퍼스(CALPERS ·California Public Employee Retire Service)를 모델로 삼고 있다. 칼퍼스는 공격적으로 자금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칼퍼스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다소 시비가 이는 투자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러한 칼퍼스의 투자에 대해 언론과 의회는 위법 사실이 없는 한 시비를 걸지 않는다. 칼퍼스를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 금융회사로 보기 때문이다.
군인공제회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다루다 보면 내부적으로 ‘사고’가 나게 마련이다. 물론 부실투자를 한 곳도 발생한다. 이러한 사고는 유독 크게 보고된다. 기무까지 찾아와 군인공제회의 투자 실패에 대한 정보 보고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에 대해 군인공제회가 자체적으로 내리는 조치는 혹독하다. 군인공제회의 투자는 대체로 성공 일색이기에 실패한 투자를 결정한 사람은 발을 붙이기 어렵다.
군인공제회는 내부 경쟁력 활성화를 통해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나가려고 한다. 군인공제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개처럼 번다고 해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겠다는 뜻은 아니다. 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 테두리 안에서 열심히 벌어 이를 회원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의미다.
돈을 벌고 싶다는 군인들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하면 박 중위 사건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 군인연금과 한국군사문제연구원의 기금운영사업이 실패한 지금 군인공제회의 성공은 재평가받을 만하다. 국방부의 간섭을 줄여 자발성을 유지케 하는 것이 군인공제회도 살리고, 전역 군인들의 노후도 보장하는 방법이다.
군인공제회는 금호타이어 지분을 1년 반 정도 갖고 있었는데 지분 매각을 통해 올린 수익이 1600억원에 달했다. 1년 반 사이에 50%가 넘는 수익을 올린 것이다. 군인공제회가 투자한 2500억원은 당시 군인공제회 자산의 25%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결과적으로 금호그룹은 알짜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지키면서 그룹을 정상화했고, 군인공제회는 큰돈을 버는 윈-윈 게임을 한 것이다. 군인공제회가 정권의 압력을 받아 투자했다는 정치 논리는 힘을 잃었다.
정치인들이 군인공제회가 금호타이어에 투자할 때 까다롭게 시비를 걸었으면, 투자가 대성공을 거두었을 땐 박수도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판에서그런 일은 절대 없다. 그래서 기업이 2류라면 정치는 4류, 5류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이다.
지난 이야기지만 IMF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연·기금들은 군인공제회처럼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했어야 했다. IMF 외환위기로 알짜 국내기업들이 매물로 나왔을 때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연·기금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다면, 연·기금은 수익을 올리고 기업은 기사회생하고 한국은 토종 기업을 방어해내는 트리플 성과를 거뒀을 것이다.
군인공제회가 금호타이어 주식의 50%+1주를 가졌다면, 금호타이어의 주인은 군인공제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식회사에선 30% 지분만 갖고 있어도 경영권을 행사하는 최대 주주가 될 수 있다. 군인공제회는 성동조선해양과 CT&T, 금호타이어를 묶어 군인공제회 그룹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인공제회는 재벌을 추구하지 않는다. 경영은 그 회사를 만든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투자만 생각한다. 그러니 투자한 기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기대 수익을 채웠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철수하는 것이다. 경영권을 가지려 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기업을 찾아 투자만 하는 사람이나 기관을 가리켜 ‘에인절(angel·천사)’이라고 한다. 금호타이어와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대해 군인공제회는 한때 ‘천사’이자 ‘백기사’였다.
양대 지주, 경리와 공병 출신
군인공제회에는 군 살림을 전담하던 경리병과 출신이 많이 포진해 있다. 회계 전문가인 이들은 복잡한 투자사업의 맥을 짚어준다. 실탄(자금)을 든 군인공제회가 돌격(투자)해야 할 때와 새로운 투자처로 이동(철수)해야 할 때를 제대로 잡아주는 것이다. 군에서 경리병과는 각광을 받지 못하지만, 군인공제회에서는 핵심으로 인정받고 있다.
요즘 맥주시장에서 잘나가는 회사가 하이트다. 오랫동안 국내 소주시장에서 1위는 진로였다. 이 진로가 IMF 경제위기가 터진 1997년 부도가 났다. 그러자 한국 술 시장 진출을 노리던 일본의 아사히 맥주가 진로에 대해 ‘입질’을 했다. 아사히 맥주는 기린맥주를 제치고 일본 맥주시장을 리드해온 절대 강자다. 아사히가 진로를 인수한다면 한국인들은 일본 자금으로 만든 소주를 마시고 기분을 내야 할 처지였다.
이러한 때 OB맥주의 아성을 깨는 신화를 쓴 하이트맥주가 군인공제회에 도움을 청했다. 함께 진로를 인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군인공제회가 하이트맥주의 진로 인수에 참여하겠다고 하자 새마을금고를 비롯한 몇몇 금융회사가 따라서 투자에 참여했다. 결과는 하이트의 승리. 이때부터 재계에는 군인공제회와 손잡으면 다른 투자자들도 몰려든다는 속설이 생겼다. 군인공제회는 투자의 성패를 결정짓는 바로미터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잘되는 집은 늘 잘된다. 뒤를 받쳐주는 세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후 군인공제회는 두산인프라코어와 해태제과 등에 투자해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투자에는 기업체 주식을 사들이는 직접 투자도 있지만, 큰 사업을 위해 조성한 펀드를 사는, 간접 투자도 있다. 군인공제회의 행운은 간접투자 분야에도 이어졌다.
군인공제회는 미래에셋이 주도한 간접 지분투자 펀드인 PEF(Private Equity Fund)에 투자해 연 20%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집중한 것이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다. 이 부문에 대한 투자자로는 호주 회사인 맥쿼리가 유명하다. 맥쿼리는 도로 항만 등 장기간 지속되는 대형 간접자본에 주로 투자한다. 맥쿼리는 한국에서도 적잖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군인공제회는 맥쿼리 펀드가 주도한 한국도로인프라 펀드에 2000여억원을 투자해 괜찮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땅 볼 줄 아는’ 공병 출신
이러한 투자와 쌍벽을 이루며 대박을 터뜨린 것이 개발사업이다. 상가나 아파트를 지을 만한 땅을 매입한 다음 건설회사가 건물을 짓게 해 판매하는 것이 전형적인 개발사업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현대슈퍼빌은 신흥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문직으로 명예와 부를 쌓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
현대슈퍼빌에는 퇴역 장성도 적잖게 살고 있다. 장성의 봉급 수준을 고려한다면 본래부터 부자가 아닌 한 이들은 현대슈퍼빌에 집을 장만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 수 있었던 것은 군인공제회 덕분이다.
‘잘되는 집’은 빠져나가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다. 군인공제회에는 매월 ‘회원급여저축’ 등으로 900억원 내외의 돈이 들어온다. 그리고 목돈을 찾아가는 회원들에 의해 월 800억원 정도가 빠져나가므로 매달 100억원 정도가 축적된다. 1년이면 1200억원 내외의 현금이 쌓이는 것이다. 이듬해에 이것 이상의 돈이 들어올 것이니 시간이 흐를수록 군인공제회의 현금 동원력은 막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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