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흥안씨의 근세 인물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
독립 운동가 안병찬
독립 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안중근
항일투사 안명근
독립군사령부를 창설한 안무
백산회의 안희제 선생
독립 운동가 안재홍
여류독립 운동가 안경신
민족 개화의 선구자
심전 안중식
비행사 안창남
음악 지휘자 안익태
□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
안병찬
대한청년단 연합회(大韓靑年團 聯合會)를 조직한 총재로서 독립단원을 훈련시킨 독립운동가 안병찬 청년은 국민의 중심(中心)이요, 국가의 기초(基礎)다. 이번 우리 대한광복사업의 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의 흥망(興亡)과 우리 민족의 자유(自由)되고 노예(奴隸)됨은 우리 청년의 활동여부에 달려 있다.
이 말은 이병찬선생이 만주에서 대한청년연합회를 조직할 때의 취지문의 일부이다.
선생은 185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치규 호는 규당(規堂)이시다. 1894년(고종 31년) 홍주교임으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켰다가체포되었다. 그 후 흥능주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안창호
민족운동의 대선구자(大先驅者)이며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
거짓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며 진실과 실질을 사랑한다. (무실-務實) 빈 말보다 실천에 힘쓰며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노력한다. (역행-力行)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온 정신을 다 하여 대인관계에 믿음을 지킨다. (충의-忠義) 모든 일에 굳은 이지로 적극적이고 진취적(進取的)이며, 개척자적인 창의력을 발휘한다. (용감-勇敢)
이상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흥사단의 4대 정신이다.
공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셨으며 시조공(安子美)의 26세이시다. 족보에는 창호(昌鎬)이고, 창호는 관명이며 호는 도산이다. 공은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5년 상경하여 1897년 구세학당을 졸업하고 조교로 있으면서 예수교에 입교하는 한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11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룡섬(대동강 하류)에서 참의공파 25세인 안교진(일명:흥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도산은 호(號)이고, 관명은 昌浩, 족보에는 昌鎬이다. (경신보7권1117쪽)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한 후 민중을 계몽함은 물론 21세의 약관나이에 저 유명한 쾌재정(快哉亭) 연설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5세때 임오군란, 7세때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등 우리 나라가 어려운 때에 60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국민 계몽에 일생을 바친 애국자, 혁명가였으며 또 교육자이기도 했다.
선생은 7세때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슬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23세때 강서에 점진학교를 설립(남여 공학, 도덕과지식, 애국심이 교육목표) 1902년 전주이씨 혜련(惠鍊)여사와 결혼한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재미교포들의 권익보호와 공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1907년 귀국해서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안중근
한국침략의 원흉을 쓰러뜨리고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쓴 의사 안중근(安重根)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이 글은 독립기념관 광장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의 어록비에 새겨진 글이다.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이글은 1910년 2월 15일 안병찬 변호사가 안의사를 면회하였을 때 남긴 유언이다
의사(義士)는 시조공의 30세로서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응칠이다. 의사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고 승마, 궁슬도 익혀 문무를 겸전했다 1989년 천주교에 입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남포에 돈의학교를 세운 후에 만주를 거쳐 블로디보스독으로 망명했다. 1908년(융희 2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의 직책을 맡아 의 병군을 이끌고 경흥까지 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안명근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려 했던 항일투사 안명근(安明根)
공은 시조공의 30세로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공은 안중근의사의 종제로서 그는 어랬을 때 부터 종형 중근의 감화를 받고 항일운동에 투신, 한일합병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남만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힉하던중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다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10년만에 출옥했으며 그 후 다시 만주에 망명,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그 곳에서 병사했다.
안무
3.1운동후 독립군사령부(獨立軍司令部)를 창설한 안무(安武)
공의 본명은 병호이며 함경북도 종성 출신이다. 공은 1899년 구 한국군 진위대에 입대 경성교련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진위대의 고련관이 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퇴직 한일합병이 되자 만주 간도로 망명 대한국민회 부회장이 되었다.
3.1 운동후 독립군 사령부를 창설,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군비를 확충했다.
안희제
임시정부의 자금책(資金責)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안희제(安熙濟)선생
선생은 시조공의 24세이시며 1885년 경남의령에서 출생했다. 자는 태약(泰若)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다 21세에 상경 부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양정의숙으로 옮겨 학업을 마쳤다.
1907년 창남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08년 의령에 의신학교를, 또 다음 해에는 동래에 구명학교를,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우는데 진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11년 러시아에 망명 독립순보를 발간했고, 한편 민족계도를 위하여 대종교에 입교했다.
안재홍
미군정청(美軍政廳) 민정장관(民政長官)을 지낸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선생
선생은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민세(民世)이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 이회녕, 신채호등이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중앙고보 교감, 기독교 교육부 간사를 역임했다.
안경신
3.1운동 여류독립운동가(女流獨立運動家) 안경신(安敬信)
안경신 여사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3. 1운동 때에 평양 서문동에서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0여일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해 11월 동지들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김행일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 민족개화의 선구자
심전 안중식(安中植)
민족서화가(民族書畵家)의 개척자로서 원숙한 화풍을 이룬 대가(大家) 심전(心田)
공은 186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초명을 종식, 욱상 자는 공립 호는 심전, 자당, 심전, 경부 등 많은 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12세때 양친을 잃었고 1881년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중국 청진에 가서 1년동안 있으면서 견문을 넓혔다. 1902년 그는 어진도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이게 되었다.
그 후 경묵당에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11년 이 왕가의 후원으로 서화 미술원이 설립되자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섰다.
안창남
떳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이는 우리 나라 개화기에 하늘에서 안창남 비행사, 땅에는 엄복동 자전거 선수가 있다고 하는 유행어로서 개화기의 청년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준 유행어이다.
공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나라 최조의 비행사이며 조국 광복을 돕기 위하여 중국에서 교관을 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안익태
애국가를 작곡한 세계적인 음악지휘자 안익태(安益泰)선생
1905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학교를 수료하였고 일본 국립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1930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 뒤이어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전공했다.
□ 성세
우리 나라의 274개의 성씨중에서 순흥안씨는 18번째가 된다. 274개성 중에서 417, 591명. (1985년)
□ 순흥안씨의 파
시조 자미의 세 아들 영유(永儒:一派), 영린(永麟:二派), 영화(永和:三派)를 파조로 하는 3파로 대별된다.
안씨의 역사상 대표적 인물이며 주자학(朱子學)의 태두인 향(珦)은 1파인 영유의 손자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역임했는데 중국에서 쓰는 서적을 도입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등 유학(儒學)의 진흥에 힘썼다.
그의 아들이 찬성(贊成) 우기(于器), 손자가 정당문학(政堂文學) 목(牧)이며, 증손대에서 원숭(元崇), 원형(元衡), 원린(元璘)의 3형제가 있는데 맏이 원숭은 순흥안씨로 이어지고, 둘째 원형은 신죽산으로 갈렸으며, 셋째 원린은 탐진안씨로 분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헌에는 탐진안씨의 시조가 고려 공민왕 때 무장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우(祐)로 되어 있고, 전공총랑(典工摠郞)인 덕린(德麟)을 파조로 하는 또 다른 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향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조선의 주요인물로는 침(琛), 당( )과위(瑋), 현(玹), 상( )의 3형제가 있다.
침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전라도관찰사,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는데, 그의 5형제는 모두가 현달하였다.
당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 중종 때 형조, 공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이 되었는데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아들 처겸(處謙)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군략가로 이름났다.
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상은 음악의 대가로서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발간하였다.
3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축(軸), 보(輔), 즙(輯)의 3형제가 유명하다.
축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 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보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 즙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그의 아들 종원(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종원의 아들 경공(景恭)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경공의 아들 순(純)과 손자 숭선(崇善), 숭효(崇孝)도 모두 명신으로 유명하며, 숭선의 현손으로 자유(自裕), 명세(名世) 등이 뛰어난 인물들이다.
근세인물로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의사 안중근(安重根), 선천(宣川)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안명근(安明根:중근의 종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안창호(安昌浩) 등이 있다.
□ 순흥이란 곳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 순흥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순흥김씨(金), 순흥박씨(朴), 순흥안씨(安) (글.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