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9. 능성구씨 무태 입향조 계암 구회신과 모선당·창포재·송계당·화수정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에는 예로부터 ‘일파이무(一巴二無)’란 말이 있다. 대구에서 사람 살기 가장 좋은 곳은 파동이요, 두 번째가 무태란 뜻이다. 하지만 무태 쪽에서는 무태가 첫째란 뜻으로 ‘일무이파(一無二巴)’라 한다. 2006년 달서구 월성동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무태에서 나왔으니 빈말은 아닌 것 같다.
무태에는 예로부터 ‘은(殷)·전(全)·구(具)·리(李)’란 말이 있다. 무태에 터를 잡은 성씨 순서가 은씨·전씨·구씨·이씨 순이란 듯. 하지만 네 성씨 중 현재 무태에 자신들의 문중 유산을 남겨 놓은 성씨는 인천이씨와 능성구씨뿐이다. 이번에는 무태 능성구씨 문중 유산인 ‘모선당·창포재·송계당·화수정’에 대한 이야기다.
능성구씨(綾城具氏)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능성구씨는 본관을 ‘능성’ 또는 ‘능주’로 하는 성씨다. 능성은 지금의 전남 화순지역인데 본래 능성으로 불리다가 조선 인조 때 능주(綾州)로 승격됐다. 능성이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구사맹의 딸] 구씨의 관향이었기 때문이다.
능성구씨 시조는 고려 벽상삼한삼중대광 검교상장군 구존유(具存裕)다. 그런데 구존유의 부인이 매우 특별하다. 주자학 창시자인 주자의 현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안주씨(新安朱氏) 시조는 남송에서 고려로 망명한 주자의 증손 청계(淸溪) 주잠(朱潛)이다. 그는 망명 후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으로 바꾸고 능성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했는데, 그의 딸이 바로 구존유의 부인이다.
능성구씨는 7세에 이르러 11개 파로 분파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 중 고려 삼중대광 문하좌정승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홍(具鴻)을 파조로 하는 계파가 좌정승공파다. 구홍은 시호가 문절(文節), 호는 송은(松隱)이다.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좌정승 벼슬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두문동 송산(松山)에 은거해 이른바 ‘두문동 72현’에 올랐다. 그에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구홍은 임종 시 유명(遺命)으로 ‘조선왕조 관직명을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자손들은 조선 조정의 명을 거역하기 어려워 명정에다 조선조 관직인 ‘좌정승’을 적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세찬 회오리바람이 일어 명정이 세 갈래로 찢어졌다. 자손들은 다시 명정을 준비해 이번에는 ‘고려좌시중’이라 적었더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구홍의 묘는 개성에 있으며, 개성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됐다.
무태(無怠) 입향조, 계암(溪巖) 구회신(具懷愼)
계암 구회신(1564-1634)은 능성구씨 대구 무태 입향조다. 그는 의성 순호리에서 태어났는데 2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투필종군(投筆從軍)’ 나라가 위급하니 붓을 놓고 칼을 든 그는 팔공산 일대 대구·경산 등지에서 의병 활동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의 군관으로 활약했는데, 그 활약상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구회신은 32세 때인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훈련원 첨정을 거쳐 임진·정유 양란의 공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어모장군에 제수됐다. 무태 입향은 임진왜란 당시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했던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1634년(인조 12)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고 창포산[망일봉] 남쪽에 묻혔다. 현재 무태를 연고로 하는 능성구씨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좌정승공파 랜드마크, 모선당과 창포재
무태성당 옆 망일봉 골짜기 안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를 대표하는 문중 유산이 있다. 모선당(慕先堂)과 창포재(菖蒲齋)다. 1981년 창건된 모선당은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파조인 구홍과 그의 부(父)인 문정공(文貞公), 조부(祖父)인 전리판서공(典理判書公) 3대를 기리기 위한 재실이자 좌정승공파 종당이다. 모선당 곁에 있는 창포재는 능성구씨 무태 입향조인 계암 구회신을 기리기 위해 1639년(인조 17) 건립한 재실로, 1944년, 2000년 두 번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모선당과 창포재는 근래에 창건 및 중건을 한 까닭에 건물을 통해서는 오랜 역사를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이 공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대변해주는 것이 있다. 창포재 앞 수령 약 400년 모과나무가 그것이다. 참고로 이곳에는 모선당·창포재 외에도 추모비 3기, 모선당 건립 기념비 1기, 연못, 광장 등이 조성되어있어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랜드마크라 할 만하다.
송은의 ‘송’, 계암의 ‘계’, ‘송계당’이라!
망일봉 동쪽 자락에 위치한 송계당(松溪堂)은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파조인 송은 구홍과 그의 8세손이자 무태 입향조인 계암 구회신을 기리기 위해 1659년(효종 10) 건립한 재실이다. 당호(堂號) 송계당은 송은, 계암 두 인물의 호에서 한 자씩 취했다. 송계당 초입에는 수령 100년 정도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뒤로 옛 모습을 간직한 흙돌담길이 20m 정도 남아 있다. 흙돌담길 왼쪽 담장 너머에 물소재(勿小齋), 오른쪽 너머에 능성세가(綾城世家)가 있으며, 길 끝에 송계당이 있다.
송계당은 2개 영역으로 나뉜다. 앞쪽에 송계당이 있고, 뒤쪽에 별도 담장을 두른 제단(祭壇)이 있다. 이 제단은 8세 구종절, 9세 구익령 제단으로 각각 구홍의 아들과 손자다.
좌정승공파 동변 문중 재실, 화수정
무태 동변동 갈봉산[가남봉·학봉] 자락에도 능성구씨 문중 유산이 있다. 좌정승공파 동변 문중 재실인 화수정(花樹亭)이다. 1828년(순조 28) 1차 중건이 있었고, 2000년 중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래는 화수정이 아닌 포금정(抱琴亭)이었는데, 연재 송병선이 화수정이라 고치고 심석재 송병순이 글씨를 썼다. 이곳에는 조선말 선비들의 시판과 기문, 그리고 많은 고서가 있었는데, 1990년 초 대부분 도난을 당했다. 화수정 뒤편에는 사우(祠宇) 표절사(表節祠)가 있다.
에필로그
무태 지역에서는 ‘8문장이 난 무태구씨’란 말이 있다. 그만큼 무태를 연고로 하는 능성구씨 문중에서 인물이 많이 났다는 뜻이다. 또한 무태 능성구씨 문중에서는 팔공산, 금호강, 망일봉, 창포재, 송계당, 정려각 등 과거 무태의 빼어난 자연환경과 자신들의 선조를 시로 읊은 ‘무태오곡(無怠五曲)’도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