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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유적 /성지(城址)와 봉수(烽燧)
1.성지(城址)
1)성곽(城郭)개요
(1)성곽의 정의
성곽이란 본래 내성(內城)과 외곽성(外郭城)이 결합된 말로 내성(內城)만을 의미하는 성(城)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성곽이란 사각형으로 쌓은 성(城)과 성(城)의 외곽을 두른 곽(郭)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성(城)과 성곽(城郭)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외곽성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성곽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지만 편의상 성(城) 또는 성곽(城郭)이라고 부른다.
성곽이란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적인 피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시설물을 말한다. 따라서 성(城)은 방어에 가장 유리한 지형에 축성되며, 성벽 뿐 아니라 방어에 필요한 부대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성곽의 축조는 많은 인력과 재정이 소요된다. 따라서 성곽의 출현은 고대국가의 출현을 전후하여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2)성곽(城郭)의 역사
인간이 성곽을 축조한 흔적은 오래되었다. 중국에서는 용산문화의 흑도시대(BC1700-1400)의 성자애(城子崖) 유적에서 토성벽을 두른 흔적이 밝혀진 것이 효시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에는 한(漢)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멸망할 때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성곽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한반도 전역에 성곽(城郭)이 축성되기 시작한 것은 초기국가의 성립시기인 것으로 추측되며, 삼국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고구려의 경우는 AD 3년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위나암성을 축조한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백제는 BC 11년 마수성(馬首城)을, 신라는 BC 37년 금성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군사적 항쟁과 방어를 목적으로 산성(山城)이 많이 축조되었다. 현재 밝혀진 성곽유적의 약 70%정도가 산성(山城)인 것이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시대적으로 산성이 많이 축조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항쟁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에 산성(山城)이 많이 축조되었다. 그러다가 삼국통일 이후에는 군현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읍성(邑城)을 많이 쌓았다. 고려시대에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축조되었다. 고려 초에는 북진정책의 영향으로 북방지역에 산성이 많이 축조되었으며, 현종 때에는 거란의 침입의 영향으로 수도 개경에 나성(羅城)을 축조하였고, 덕종 때부터는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몽고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遷都)한 뒤에는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으로 구성된 성곽을 축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도성(都城)축조를 한 것 외에도, 건국 초부터 부국강병을 위해 성곽 축성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고려말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석성(石城)으로 읍성(邑城)을 쌓았으며, 북방의 방비를 위하여 국경에는 행성(行城)을 쌓았고, 정연한 방어체계에 따라 산성(山城)을 정비하였다.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중요한 요로(要路)에 관문(關門)을 설치하였는데, 선조 때 축성된 조령관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화포와 전투기를 비롯한 전쟁무기의 발달로 성곽은 효용가치를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역사적 유물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3)성곽의 분류
가. 거주주체에 따른 분류
①도성(都城) ; 궁성과 행정관청을 아우르며, 수도에 축성된 성
②궁성(宮城) ; 도성 및 도성 이외의 장소에 궁궐과 관아를 짖고 성벽이나 담장으로 둘 러 싼 형태의 성곽
③행재성 : 왕이 평상시에는 상주하지 않으나 행정상 또는 군사상으로 중요한 지점에 축성한 왕의 임시거처
④읍성(邑城) : 도(道), 군(郡), 현(縣)의 행정적, 군사적 기능과 유사시 주민의 보호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
나.지형에 따른 분류
①산성(山城)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형태이다. 산성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요충지에 축조하였는데, 평상시 생활근거지에 가깝고 유사시에 입성하 여 농성하며 역습할 수 있는 지형에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산성에는 축성방식 에 따라 퇴뫼식 산성(산정식 산성), 포곡식 산성 등이 있다.
②평지성(平地城)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으나 읍성(邑城) 등이 평지에 많이 축성되었 다.
③평산성 : 구릉지역과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성으로 행정과 군사적 목적에 두루 용이 한 형태이다.
다. 축성재료에 따른 분류
①목책성 : 초기의 성곽은 목책에서 시작되었으며, 성곽건축양식의 발전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목책은 가장 손쉽고 빠른 시간에 축조할 수 있어서 후대에도 필요에 따라 설치하였다.
<목책성의 축조과정>
②토성(土城) :석성(石城)과 함께 우리나라 성곽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토성은 석재의 운반이 어려운 산악지형 뿐 아니라 도성이나 읍성에도 축조되었다. 토성의 주재료는 흙이었으나 석재, 와편(瓦片), 소석회, 소금물, 느릅나무껍질을 삶은 물, 숯 등이 함께 이용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축조는 쌓는 방법에 따라 판축(版築)법, 성토(盛土)법, 삭토(削土)법, 보축(補築)법 등이 있다.
<판축법> <성토법> <삭토법> <보축법>
③석성(石城) :화감암 석재가 풍부한 우리나라에서 많이 축조된 성곽의 형태이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기존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석성으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석성의 지반은 하중이 크게 작용하여 배수처리와 함께 기초보강을 튼튼히 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돌이 매 층마다 수평이 되게 하면서 위로 갈수록 성벽이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게 쌓았다.
석성의 축성 방법에는 편축(片築), 협축(夾築)이 있는데, 편축은 산성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협축은 평지나 성문 좌우에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석성은 대부분 편축인 경우가 많다.
<편축식> <협축식>
④토석혼축성(土石涽築城) :토석혼축성은 성벽축조 위치에 돌로 기초석을 돌린 후 흙으로 쌓는 경우와 안쪽을 돌로 쌓은 뒤 흙으로 덮는 방법, 흙과 돌을 적절히 섞어 토루를 축조한 경우, 석축과 토축구간이 병용된 경우, 성문주변에만 석축을 한 경우가 있다.
⑤전축성 :벽돌을 주재료로 쌓는 경우인데, 우리나라에는 여말선초에 들어왔다. 국경지대의 성곽에 많으며 남쪽에는 남한산성이나 수원성에 일부 사용되었다.
2)우리나라 성곽의 특징
(1)형태상의 특징
우리나라 성곽은 중국이나 서양처럼 일정한 형태를 갖기보다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평면이 복잡하다. 또한 축성재료도 일반적으로 부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산돌이나 삭토(削土)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방어전술이 대체로 적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전술을 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성이 부대시설 없이 적당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성(築城)된 것이 특징이다.
(2)축성기술상의 특징
중국의 성곽이 대체로 토성이 많은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성곽은 석성이 많다. 석성이라고 할지라도 대부분 내탁(內托)에 의한 석성(石城)이라고 할 수 있다 내탁(內托)에 의한 축성방법은 성벽의 바깥부분에는 평평한 할석을 맞대어 쌓고 안쪽에는 돌부스러기를 채운 뒤, 다시 안쪽에 흙과 잡석을 채워 다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서 축성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축성방법도 쉬워서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산성의 축성기술은 후대로 가면서 산악이 많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되 자연적인 경사면을 더욱 경사지게 하는 삭토법으로 발전하였다.
(3)위치선정 및 배치상의 특징
우리나라의 성(城)들은 평지의 경우 물을 이용하여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고, 산성(山城)의 경우는 넘겨다보는 산(규봉(窺峰))을 피하여 위로부터의 공격을 피하도록 위치선정을 하였다. 예컨대 평지성(平地城)의 경우 뒤에는 험준한 산을 두고 앞에는 강을 두어 인력을 적게 동원하여도 자연적인 방어가 이루어지게 하였으며, 산 위에는 산성(山城)을 함께 두어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평지성 배후의 산성들은 기각지세의 상호연계방어망을 구축하여 하나의 성(城)이 집중공격 당하는 것을 피하고적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4)구조적 특징
우리나라 성곽의 구조적 특징은 산의 자연적인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다는 점이다. 예컨대 부대시설의 설치에 있어서도 성의 수문(水門)과 성문(城門)을 계곡의 중앙과 좌우에 설치하여 통행에 편리함을 기하였으며, S자 형으로 굽이 드나들도록 하였다. 반대로 암문(暗門)은 산등성이로 통하는 능선부 바로 아래에 설치하였다. 치성(雉城)은 산성의 경우 산성이 곧게 뻗은 곳에서 산등성이 쪽에 배치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곡선을 이루게 하였다. 옹성은 평지일 경우 ㄱ자형으로 하였으며, 산성의 경우는 곡성으로 대체하였다. 성 안의 가장 낮은 부분에는 연못이나 샘을 두었으며, 원형이나 방형으로 깊게 파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였다.
3)평택지방의 성곽(城郭)유적
평택지방의 관방유적(關防遺蹟)은 안중면 용성리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지역과, 진위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지역 그리고 옛 폐현(廢縣)의 치소(治所)나 내륙의 수로(水路)와 관련된 성곽 등으로 나누어 분포되었다.
먼저 서부지역의 관방유적은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거성현(車城縣)이 존재하였을 때 그리고 고려의 용성현(龍城縣)시기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축성되었다. 특히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삼국의 경쟁지역이었던 한강 남쪽인데다, 백제와 고구려의 북상통로 또는 남하통로였고, 남양만의 당항성으로 대표되는 대 중국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전반 고이왕 때로 판단된다. 이 시기 백제의 한강유역 진출로는 천안방면에서 육로로 지금의 직산인 사산성(蛇山城)을 거쳐 평택, 양성, 용인이나, 평택, 진위 수원을 거치는 교통로와, 천안에서 평택, 안중을 지나 남양만에서 배로 화성군 쪽으로 건너가 발안방면으로 가는 교통로가 있었다. 또 해양으로는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안중을 거쳐 발안방면으로 나가는 통로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백제는 성(城)을 축조하고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용성리 부근의 자미산성, 무성산성 그리고 안성천과 진위천변의 기산리 산성, 백봉리산성, 지제동 태미산성 등이 그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에 의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5세기 말을 거쳐 6세기 전반에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이었던 용성리 주변지역은 경덕왕 때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성현(車城縣)으로 불리며 화성군에 있던 당은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대의 행정구역은 군사적 행정구역이어서 치소(治所)는 대부분 산성(山城)과 함께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미산성(慈美山城)은 이 시기 거성현(車城縣)의 치소(治所)로 추정되고 있다. 거성현(車城縣)과 자미산성(慈美山城) 그리고 무성산성 등 고대 서부지역의 산성(山城)의 역할은, 통일 이전에는 해안통로를 이용하여 신라의 대당 교류의 요지였던 당항성으로 북상하는 백제군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고, 통일 후에는 대 백제 방어라는 군사적 역할은 줄어든 대신 대당(大唐) 교통로였던 당항성으로 가는 해안통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거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평택 서부지역은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의 영토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고려시대로 들어와 용성현으로 개칭되었다. 용성현으로 개칭되면서 치소(治所)가 기존의 자미산성(慈美山城)에서 비파산성(琵琶山城)으로 옮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비파산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치소(治所)의 동쪽 입구에 해당되는 곳에 용성리성과 강길마을성을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지역은 해안과 가까워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이와 같은 해양방어기지로서의 기능의 필요성은 본래 토성으로 축조되었던 자미산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과도 관련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와 같은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세운송과 국가 방위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한강유역의 입구에 해당되는 지역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성곽의 수리와 관리가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북부지역의 산성(山城)은 옛 진위현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진위현은 삼국시대에 백제지역에 속할 때에는 연달 또는 송촌활달로 불렸다가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지배하면서 부산(釜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위(辰威)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진위(辰威)지역도 용성(龍城)지역과 마찬가지로 삼국의 경쟁이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배로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된 시기는 475년 직후라고 판단되며, 웅진으로 천도했던 백제가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고 옛 영토 회복에 나선 시기는 5세기말에서 성왕 때인 551년경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진흥왕에 의해 한강 하류지역을 상실하면서 진위지역도 신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기 진흥왕은 한강 하류의 6군을 얻었는데, 진위는 이 6개 군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주변의 수원, 화성, 죽산 지역이 여기에 포함되고, 남양만의 당항성이 신라의 대당 교류창구였으며, 한강유역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진천을 거쳐, 직산, 진위, 수원이었기 때문에 군사, 행정적 목적으로 볼 때 거점지역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 진위현의 치소(治所)는 진위면 견산리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견산리를 감싸고 축조된 견산리 부성은 읍성(邑城)의 성격을 가졌으리라고 판단된다. 또 같은 시기의 산성(山城)인 무봉산성과 봉남리성도 진위현 읍치(邑治) 및 교통로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곡마을 산성(山城)은 규모가 180m로 소규모인 점과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성(城)들은 옛 폐현(廢縣)과 관련되어 축성되었거나, 조운(漕運)로의 확보를 위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덕목리 성(城)은 동, 서로 2개의 성(城)이 마주보고 축조되었는데, 덕목리가 고려 초 수주부의 영현(領縣)이었던 광덕현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판단할 때 광덕현 읍성(邑城)으로 판단된다. 이 성(城)이 읍성(邑城)일 경우 지리적으로 성(城)의 동남쪽 고등산과 마안산에도 산성(山城)이 축조되어야 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아직까지 조사보고된 적이 없다. 두리봉 성(城)과 지제동 울성마을의 태미산성은 고려 현종 때 수주부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신현의 치소(治所)와 관련된 성(城)으로 태뫼식의 작은 성(城)이지만, 축성(築城)시기는 고려 초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큰 역할을 하였던 산성(山城)으로 판단된다. 동령마을 성(城)은 아직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고려시대 이 곳에 송장부곡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송장부곡의 치소(治所)였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안정리 농성(農城)은 축성(築城) 시기에 대한 여러 가지 설(說)이 있지만, 나말여초 당나라에서 팽성읍 안정리로 건너와 평택 임씨의 시조가 된 임팔급이라는 지방호족이 재물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승면 원정리 목장(牧場)토성과 석정리, 성해리 장성(長成)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포승면 홍원리와 원정리에 설치된 목장(牧場)의 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토성은 본래 홍원리 부근에 쌓았으나 필요에 의해서 석정리 감기마을에서 성해리까지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홍원리 부근에는 낡은 성(城), 성문 앞 같은 지명들이 옛 성터의 흔적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살펴본 평택지방의 성곽들은 대부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진위천 상류인 동북부지역과, 안성천 하류 및 진위천 중 하류지역인 서부지역 그리고 옛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축성된 읍성류와 산성(山城)들로 구분되었다. 이 지역은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점이지대로 군사적으로 중요했을 뿐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에는 수도(首都)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전략적으로 뿐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산성(山城)의 주 방어방향을 보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내륙 교통로상에 위치한 북쪽을 주 방어선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서부지역과 조운로(漕運路) 주변을 주 방어선으로 하고 있다.
(1)안정리 농성
*소재지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 41-2
*지정 : 경기도 기념물 74호
팽성읍 안정리 서정자 마을 부근에 있는 토성(土城)이다. 농성은 팽성읍 사무소로부터 서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으며, 안정리에서는 북쪽으로 약 300미터 지점이다.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西面 西亭子, 農城 國有林, 平澤驛의 約1里 丘陵狀을 이룬 平地에..”라고 농성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 소개한 위치와 일치한다.
농성주변의 지형은 북쪽으로 안성천을 두고 있으며, 주변은 대부분 평지이고 해발 30m 내외의 구릉이 군데군데 있다. 강우량은 1년 평균 600-900m 정도로 우리나라의 연 평균 강우량에 못 미친다. 농성 옆에는 본래 마을이 없었으나 한국전쟁 후 이주민이 나타나면서 약 10여 호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농성의 모양은 타원형으로 동(東), 서(西)로 성문지(城門地)가 있다. 총 면적은 14,900㎡이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4미터 내외이고, 둘레의 길이는 약 300미터, 성 내부의 남북의 길이가 101.9m, 동서의 길이가 73.2m이다. 성안에는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에는 냉수가 나오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하며,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농성의 내부는 북쪽이 약 2m 가량 높고 동서 중앙의 단면이 높아 전체적으로 볼록렌즈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농성의 토양은 붉은 황토 진흙으로 모래가 약간 섞여서 밭농사에 적합하다.
농성의 축성(築城)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說)이 있다. 첫째, 삼국시대 축성설(築城說)이다. 이 시기의 축성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주장이 있는데, 도적이 심하여 양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 신선(神仙) 도승(道僧)이 지맥을 가라앉히기 위해 쌓았다는 설,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백랑부곡민의 집단 거주지였다는 설이 있다.
둘째, 고려시대 축성설(築城說)이다. 고려시대 축성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성(城)은 조선시대에 비하여 토성(土城)이 많고, 규모도 작으며, 용인의 처인성처럼 낮은 구릉지대에 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고려 후기 왜구의 잦은 출몰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주장과, 이 지역 일대가 고려시대 주요 교통로였기 때문에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성(倉庫城)으로 쌓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셋째, 조선시대 축성설(築城說)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지역에서 농사지은 양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축성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농성(조선시대에는 성산(城山)이라고도 불렸음) 안에는 관(官)의 시설물이었던 성황사가 설치되었고, 이 산을 평택현의 진산(眞山)이라고 하였는데, 성황사의 설치시기가 조선 초였음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때 축성(築城)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제기된 주장 외에도 나말여초 평택(平澤) 임(林)씨의 시조(始祖)인 임팔급(林八及)이 쌓았다는 설(說)이 있다. 예컨대 당(唐)나라 말기 한림학사였던 임팔급이 설인경 등 동료학사 7인과 함께 800년에서 830년경에 이곳으로 망명하여 농성을 축조하고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說)이다. 신라 말 고려 초 치안(治安)이 부재한 상황에서 팽성지역의 호족(豪族)으로 자리잡은 임팔급이나 그의 후손들이 도적이나 왜적의 약탈에 대비하기 위하여 농민들을 동원하여 성(城)을 쌓았을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1998년 평택시와 수원대학교박물관이 공동으로 실시한 농성유적 지표조사에서 수집된 토기편이나 자기편에서도 연대를 단정할 만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의 지표조사보고에서 밝혔듯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축성되었거나, 나말 여초 이 지역의 호족으로 성장한 평택(平澤) 임(林)씨들에 의해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안정리 농성은 우리나라 토성(土城)들 가운데 보존상태가 좋은 성(城)이었다. 더욱이 1999년 평택시의 정비사업으로 성벽에 대한 성토(盛土)작업과 주변정비를 하여 성(城)의 내 외부가 깨끗하게 복원되었다.
(2)견산리 산성(山城)
*소재지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견산리 산 6-1(볼미 마을)
진위면 견산리 3-4리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토성(土城)이다. 일명 부성(釜城) 또는 성산성지(城山城址)라고도 불린다.
견산리는 옛 진위현 읍치(邑治)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며, 견산리 산성(山城)은 볼미 마을 뒷편에 있는 부산(釜山)의 북서쪽 자락에 있다.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釜山)이 현(縣) 동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眞山)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16세기까지는 현(縣)의 치소(治所)가 견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견산리 북쪽에 위치한 가곡리, 청호리 방면을 성북(城北=뒷성지)이라고 하였고, 견산리 남쪽을 성남(城南=아래성지)이라고 한 것도 견산리 산성(山城)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하에서 편찬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도 “고려시대 부산현의 읍성지(邑城址)라 하며 토축(土築) 주위약이백오십간(周圍約二百五十間)이고 남문지(南門址)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대부분 붕괴되었고, 성내(城內)에 견산리 부락이 있다”고 하여 견산리 산성이 옛 부산현의 읍성지(邑城址)였으며, 견산리 마을이 산성 내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근거를 토대로 할 때 견산리는 17세기 이전까지 진위현의 치소(治所)였음이 분명하며, 견산리 산성(山城)은 진위현의 읍성(邑城)이었다고 판단된다.
견산리 산성은 하북리에서 봉남리 방향으로 가다가 견산리 청도아파트를 지나자마자 좌회전하여 마을 뒷편 능선에 오르면 게이트볼연습장이 있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동, 서로 뻗어 있다. 성벽의 서벽은 게이트볼 연습장 공사로 일부가 깍여지고 지형이 변하여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북벽과 동벽의 상당 구간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북벽에 올라 앞쪽을 내려다보면 진위천(옛 장호천)과 견산리 뜰이 내려다보이며 불악산과 마산리, 은산리까지 조망된다. 성벽은 견산리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비포장 도로로 인하여 약 6미터정도 끊어져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는 약 20미터, 동쪽으로는 150미터쯤 진행되다가 남쪽방향으로 꺾여진다. 서벽은 청도아파트와 서원아파트 건설로 30미터쯤 진행하다가 끊어져 있으며, 동벽은 남쪽 방향의 하북유치원 소파어린이집 부근까지 이어지다가 경작지에 편입되어 사라지는데, 이 곳에서 암벽으로 회절(回折)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벽이 시작되는 회절부(回折部)와 공동묘지 사이에는 6m에서 12.5m 간격을 유지하며 2열의 토루가 진행되는데, 이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된 것은 부산(釜山)의 해발이 낮고 동벽이 능선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문루(門樓)는 북벽 절개된 지역 도로에서 북벽으로 오르는 곳에 너비 9m 높이 1.5-2.2m의 개구부가 보이는데, 이곳이 북문지(北門址)로 여겨지며 남문지와 서, 동문지는 찾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사실을 토대로 살펴볼 때 견산리 산성은 볼미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장방형(長方形)의 토성(土城)이라고 판단된다. 병자호란 이전(17세기 전)까지 견산리 볼미마을에 진위현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성(城)은 진위현의 읍성(邑城)이었다고 판단된다.
(3)동삭동 두리봉 성터
*경기도 평택시 동삭동 원동삭(작은말 옆)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신고성(永新古城)이라고 되어있으며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라고 하였다. 영신(永新)은 평택시 동삭동의 영신을 말한다. 평택시문화원에서 1991년에 간행한 『향토사료집』제1권에는 두리봉에 토성(土城)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토성(土城)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영신고성(永新古城)으로 생각된다. 두리봉은 동삭동 영신마을(작은말=원동삭=동촌) 동편에 있는 해발 43미터의 야트막한 구릉이다. 그러나 두리봉에 오르면 30미터 내외의 주변 구릉들이 한눈에 보이며, 영신마을 뿐 아니라 영신골, 영신들, 배기다리들도 잘 조망된다. 두리봉 정상에는 영신마을의 대성(大姓)인 교하 노(盧)씨 묘지가 있으며, 성터의 흔적은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의 형세(形勢)로 볼 때 토성(土城)의 형태는 퇴뫼식 산성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 초 태종 때 폐지된 옛 영신현의 방비를 목적으로 축성(築城)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4)지제동 태미산성
*위치 : 경기도 평택시 지제동 울성마을
태미산은 지제동 울성(蔚城)마을(작은말=작은 울성) 북동쪽에 자리한 산이다. 울성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행정구역이 지제동에 편입되었지만, 그 전에는 규모가 큰 독립된 마을이었다. 성터유적은 국방상 중요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지명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 유적들도 예외는 아니다. 울성(蔚城)이란 이름은 성(城) 안쪽에 생겨난 마을이란 뜻이다. 또 울성마을 옆 동네인 방축1리(방죽안말)에도 토성이 있었다고 하며, 가까운 곳에 있는 여염1리(城頭=성머리)라는 지명도 성터유적과 관련된 지명인 점으로 미루어 이 곳에 성터유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산성(山城)은 태미산 동쪽 정상부를 따라 축성되다가 마을이 있는 서, 남쪽 방향으로 완만하게 내려앉은 모양이다. 성벽의 흔적은 거의 없고 성벽으로 추정되는 동, 남쪽 방향에는 참호가 있다. 좀 더 자세한 조사가 있어야 되겠지만 성문지도 확인할 수 없다.
태미산 정상부는 산성(山城)을 축성(築城)하기에 더없이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山) 정상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북쪽으로는 송탄과 송탄공단이 선명하게 조망되며, 동쪽으로는 평택시와 평택공단이 선명하게 조망된다. 남쪽과 서쪽방향으로도 진위천과 안성천 그리고 성환부근까지 조망된다. 또 산밑으로는 안성천의 지류인 동고천(東古川)이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도일천(道日川)이 동고천과 만난다.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 있기 전만 하여도 안성천을 통하여 동고천에는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태미산 산성은 안성천과 진위천, 동고천을 통하여 들어오는 왜적을 방비하는데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이 산성(山城)의 축성(築城)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음의 두 가지 사실로 추론할 수 있다. 하나는 태미산 동쪽에는 조선 태종 때 폐현(廢縣)된 영신현의 치소(治所)가 있었으므로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을 가능성이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축성(築城)되었을 가능성이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승병(僧兵)을 이끌었던 사명당이 1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고덕면 방축리 서천사 주변에 머물렀을 때 울성(蔚城)마을과 성두(城頭)마을에 토성(土城)을 쌓고 왜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이 근거가 된다.
(5) 방축리 성터
*평택시 고덕면 방축2리 원방축(방죽안) 마을
원 방축마을 뒷산에 있는 토성(土城)이라고 전해온다. 이 토성은 본래 여염1리(城頭)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방죽 안 마을 뒤로는 해발 53미터의 산이 있는데, 이 산의 산맥이 성두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송탄시사(松炭市史)에는 이 산성(山城)의 축성(築城) 배경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약 400여 년 전에 경주 김씨(경순왕의 29세손)가 성두(城頭=성머리)마을에 입향(入鄕)하였을 때 마을에는 도적떼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토족(土族)이었던 공(孔)씨, 봉(奉)씨 문중과 의형제를 맺은 후 방축리 뒷산에 토성(土城)을 쌓고 도적을 방비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태미산 산성(山城)처럼 임진왜란 때 승병 1500명을 이끌고 서천사 부근에 머물렀던 사명당이 왜적의 방비를 위하여 쌓았다는 설(說)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추론할 때 방축리 산성의 축성 시기는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을 전 후라고 볼 수 있으며, 저간의 내용을 볼 때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방축리 뒷산 정상부는 부근의 태미산과 함께 주변에서 가장 높다. 그래서 남쪽으로는 진위천과 궁논들이 선명하게 조망되고 서쪽으로는 말바랭이들과 좌교천이 잘 조망된다. 또한 동쪽과 동남방향으로는 평택시와 안성천이 조망되어서 아산만과 안성천, 진위천, 좌교천을 통하여 들어오는 왜적을 방비하기에 적합한 위치이다. 현재 산 정상부 부근에는 목장이 있고, 주변 능선에도 목장이 있으며, 지제동 당현(당고개) 마을 뒤로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성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6)덕목리 성터
*위치 :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원덕목 마을
현덕면 덕목리 원덕목 마을은 통일신라시대 수성군(水城郡)의 4영현 가운데 하나였던 광덕현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16세기 전반에 간행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광덕폐현이 수원부(水原府)에서 60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현종9년에 수원부에 이속(移屬)되었다고 되어있다. 또 대동지지에도 고려 현종 9년에 수주(水州)에서 90리 떨어져있으며 신라 경덕왕 때 광덕(廣德)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생겼다고 되어있다. 덕목리 성지(城地)는 고려 초기의 광덕현의 읍성(邑城)으로 추측되는 성터이다. 덕목리 성터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으로 나눠져 있는 평지(平地) 토축성이다. 마을사람들은 (東城)을 중심으로 성 안쪽 마을을 “성안(城內)”, 성 바깥쪽을 “성밖(城外)”라고 불렀다. 또 성터주변 지역의 자연지명들도 관터, 사창, 나라땅이라고 불리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곳이 광덕현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이 높다.
덕목리 성터의 주변 지형은 동남향으로 고등산(高等山, 해발 140m)이 인접해 있고 남향으로 마안산(馬安山, 112.8m)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서쪽으로는 밭과 논으로 형성된 송산들이 있으며, 건너편에는 기산리 산성(山城)이 있는 옥녀봉(玉女峰, 해발 83m)이 건너다 보인다. 고등산과 마안산 너머로는 안성천 하류가 흐르고, 서남쪽 대안리의 작은박골, 구진나루까지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조수(潮水)가 드나들었다.
덕목리 성터는 성안마을 방향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약 60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있다. 서성(西城)은 동벽과 서벽일부 남벽 전체가 80년대에 이루어진 경지정리 사업으로 파괴, 유실된 상태이지만, 북벽과 동벽의 일부 그리고 서벽의 일부 모두 127m가 남아있어 이전의 성(城)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동성(東城)의 경우는 마을(성안말)이 들어서 있어서 성벽의 일부 상태 외에는 형태나 규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조사자료에는 “현덕면 덕목리, 土壘高一間乃至三間 폭이 넓은 곳은 5間정도, 周圍約180間 名稱不明”라고 되어있는데,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일제시대에 측정한 성벽의 둘레가 약 320m였음을 말해준다. 또 문화유적총람에는 동성(東城)의 면적이 남벽 78m, 동벽, 32m, 북벽75m, 서벽28m라고 소개되었으며, 평택시와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행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서성(西城) 북벽의 길이를 97m로 소개하고 있어서, 두 자료를 종합하여 볼 때 전체 성벽의 둘레는 약 250m - 300m 정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城)의 형태는 동서로 길고 남북이 좁은 장방형이었다. 또 성(城)의 모양은 평지성이며, 축성(築城)방식은 삭토를 한 후 다져쌓기(판축)를 하였다. 흙의 재질은 황토흙으로 토층(土層)에서 몇 편의 토기편과 숯이 발견되었다 성문지(城門址)는 서성(西城)의 북벽에서 확인되며 현재는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외벽이 8-10m, 내벽은 2-3m, 하단 너비 5-7m 상단 너비 1-1.3m 가량 된다 인근의 대안리 소외(작은박골)에 사는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서성(西城)은 30, 40년 전만 해도 어른 턱 높이의 성벽과 네모 반듯한 성(城)이 남아있었다고 하였다. 축성 시기는 출토된 토기류나 기와류, 자기류 등을 토대로 백제 말기 설(說), 신라 하대 설(說), 고려시대 설(說) 등으로 다양하게 제기되는데, 대체로 삼국시대에서 고려전기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역은 신라 때의 대당(大唐) 교통로가 위치하였고, 고려 때의 하양창, 조선시대의 공진창이 위치한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던 지역이어서 산성(山城)이 많이 축성된 지역이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군사적인 용도로 축성했을 경우에는 남쪽의 마안산이나 고등산에 축성하는 것이 옳으며, 성(城)의 규모가 작고 평지성(平地城)인 점 그리고 옛 광덕현의 치소(治所)로 추정되는 원덕목 마을에 위치한 점을 고려할 때 읍성(邑城)으로 축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7)석정리 장성(長城)
*위치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성해리, 석정리
38번 국도를 따라 안중에서 포승면 만호리 방면으로 2km 진행하면 우측으로 홍원리로 들어가는 321번 지방도가 나오는데, 이 곳에서 우회전하면 우측으로 성해2리 해조마을이 나오고, 좌측으로는 성외(성밖)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321법 지방도를 경계로 길 왼쪽을 따라 소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뒤섞인 토루(성벽)가 밭을 가로질러 북서쪽 석정1리 감기마을 방향으로 뻗어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곳이 석정리 장성(長城)이다.
현재 석정리 장성(長城)의 성벽은 성해 2리 마을회관 못미처에서 시작하여 석정1리 감기마을에 이르는 약 3.5km가 남아있다. 본래 이 장성(長城)은 포승면 원정리의 말목장 토성(土城)과 연결되었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일제에 의해 작성된 1 : 25000지도에 나타난 지형(地形)적 특징과, 조선후기에 작성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홍원리와 원정리에 목장(牧場)이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볼 때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컨대 성해리 용소마을에서 인터뷰한 노인(71세)에 의하면 성해리 해조마을 앞에는 일제 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석정1리 감기마을에도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홍원리에는 마장(馬場)이라는 마을이 현재에도 있어서 고려, 조선시대에 마장(馬場)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과 근거를 토대로 할 때 홍원리에는 말목장이 있었으며, 장성(長成)은 홍원리 마장(馬場)의 말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홍원리 반도의 초입을 가로질러 축성(築城)한 것이지, 원정리 목장(牧場)까지 보호하기 위하여 홍원리와 원정리 반도를 연결하여 축성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다시 이야기 하면 원정리 목장토성과 석정리 장성(長成)은 서로 관련이 없는 두 개의 토성이라는 것이다.
장성(長城)의 위치는 조선시대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할 때 바닷가와 인접한 감기마을에서 시작하여 바닷물이 들어왔던 해조마을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성(城)의 형태도 길게 나온 홍원리 반도 입구를 가로질러 말들이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횡으로 길게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축성시기는 출토 유물로는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으나, 홍원리 마장(馬場)의 설치가 고려 중엽쯤이라고 짐작할 때, 이 시기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축성(築城) 주체는 마장(馬場) 주변의 백성들은 목부(牧夫)로 부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고려시대 포승면에는 포내미 부곡이라는 특수행정구역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벽은 성해2리 해조마을 마을회관 부근에서 시작하여 서쪽 방향으로 500m 가량 진행하다가 경작지로 개간되어 끊어졌다가 석정 3리 부근 경작지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 구간은 토사 채취로 성벽이 군데군데 훼손되었으며, 고장말(석정 3리)에서 감기(석정1리)마을까지 구간은 마을 진입로와 경작지에 의해 중간 중간 끊어진 상태이다.
성벽은 성해 2리(해조) 마을회관 앞에서는 내벽이 1m, 외벽이 약 2-3m, 상단 넓이가 1m 내외이다. 성해 1리 성해가든 부근에서는 내벽 높이가 2.5-3m, 외벽 높이 3-4m로 높아졌으며, 이 곳에 2 곳의 절개부가 있다. 석정 3리 부근부터는 내벽은 2-3m로 형태가 남아있지만 외벽은 훼손되어 측정이 어렵다. 성벽 위의 구조물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망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조사에 있어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8)기산리 산성
*위치 :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기산2리(수산마을 뒤)
안중에서 안산만 방조제 방향으로 가는 39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권관리 못미쳐 기산리 가사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 좌회전하면, 가사초등학교와 가사마을이 있다. 가사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비탈진 길로 직진하면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기산2리 수산마을(물미)이 있는데, 기산리 산성(山城)은 수산마을 뒤 옥녀봉(玉女峰, 해발 83m) 정상부 8부 능선 부근에 있다.
옥녀봉(玉女峰)은 안성천 하류지역인 권관리와 기산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산 정상부에 오르면 아산만과 평택호가 잘 조망되며, 산 동쪽의 송산들과 도대천 그리고 대안리, 신왕리, 덕목리의 마안산과 고등산도 잘 보인다. 주변의 경계가 확연히 드러나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평택지방에서 가장 먼저 전개된 기산리 횃불시위가 옥녀봉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지역의 간척이 이뤄지지 않았던 조선시대만 해도 송산들과 도대천 중, 상류지역까지 조수(潮水)가 유입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산만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山城)의 입지조건으로는 더없이 좋은 위치에 해당된다.
기산리 산성(山城)은 산 정상부 8부 능선에 흙으로 쌓은 태뫼식 산성이다. 형태는 둥근 타원형이며, 전체 둘레는 약 250미터이다. 성벽은 판축(版築)식으로 너비는 2-3m, 높이는 4-5m가량이다. 토루(土壘)는 비교적 선명하게 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드러나 있으며, 성문지(城門址)는 확인하기 어렵다. 정상부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져 있으며, 산불초소 주위에는 지름 약 20m의 평탄지대가 조성되어있다. 산 주변에서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무늬없는 토기 유물산포지가 발견되었으며, 산성부근에서도 회색과 갈색의 연질토기편이 발견되었다.
기산리 산성(山城)의 축성(築城)시기는, 성(城)의 규모나 우리나라에서 태뫼식 산성이 많이 축성되었던 시기, 그리고 판축식 형태의 축성방식, 수습된 토기의 재질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에 축성된 백제산성(百濟山城)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주변이 잘 조망되는 지리적 이점과, 아산만이라는 지리적 중요성으로 볼 때 이 산성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계속 보수하여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원정리 목장(牧場) 토성
*위치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곡교, 당두마을)
평택에서 포승면 만호리로 가는 38번 국도를 따라 안중을 지나 10분쯤 달리면 포승면 면소재지가 나오고, 이 곳에서 우측으로 서해안 고속도로 I.C 방향과 남양만 방조제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면 포승면 내기리인데, 이 곳에서 왕복 6차선으로 확장된 345번 지방도를 따라 곧장 달리다가 도로 폭이 2차선으로 줄어드는 지점에서 해군 제2사령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여 진입하면 원정1리에 해당하는 원 원정마을이다. 원 원정마을에서 직진하면 해군 제2사령부 정문 부근에 번제 마을이 일부 남아있고, 좌측으로는 포승국가공단이 조성되었다. 포승국가공단 지역은 본래 조선 후기까지는 바닷가였고, 공단조성 이전까지는 내기들이 있었던 곳으로, 내기들 주변으로 만호리 이촌, 신대, 고잔, 내기리 안터, 도곡리 거산, 원정리 곡교, 여술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마을들은 포승국가공단 조성지역에 수용되어 전부 또는 일부가 집단 이주하였다.
포승면 원정리 전 지역은 모두 7개(1리에서 7리까지) 마을로 형성되었다. 북쪽으로는 평택시와 화성군의 경계가 되는 남양만 하구에 해당되며, 남서쪽으로는 서해바다를 끼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조선 말기까지 양성현 지역이었으며, 서해안을 따라 서울(한양) 목멱산(남산)까지 이어지던 괴태길곶 봉수(烽燧)가 현 원정 7리(호암) 뒤편 봉화재에 있었다.
원정리 원 원정마을 북쪽 일대에는 고려시대부터 인근의 홍원리와 함께 마장(馬場-말목장)이 설치되었다. 이 곳의 마장(馬場)은 제주도에서 사육한 말을 배로 실어와 일정기간동안 사육한 뒤 다시 개경이나 한양으로 실어 가는 역할을 담당했다. 말(馬)은 고려, 조선시대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국가는 마장(馬場)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감목관(監牧官)을 파견하였고, 마장(馬場) 주위의 백성들에게 부역(賦役)을 대신하여 목부(牧夫)로 종사시켰을 뿐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면 엄히 다스리는 마장(馬場) 관리정책을 시행하였다. 원정리의 마장(馬場)은 “괘태장”이라고 해서 괘태곶 봉수(봉화재) 남쪽 지금의 원정 5리(쌍용)에서 원정1리(원 원정) 마을 사이에 있었는데, 홍원(洪源) 마장(馬場)의 감목관이 함께 관할하였다.
원정리 목장토성은 본래 곡교(굽은다리)마을에서 시작하여 동북쪽 구릉의 능선을 따라 올라가 당두(堂頭)마을까지 이어졌던 토성(土城)이었다. 본래 곡교마을은 바다가 인접하여 조수(潮水)가 들어왔으며, 당두(당머리-堂頭) 마을 동북쪽도 남양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조수(潮水)가 들어왔다. 이 토성(土城)은 원 원정마을에서 시작하는 마장(馬場)의 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서, 바다가 인접한 남서쪽 옛 곡교 마을에서 동북쪽 당두마을까지 길게 쌓은 형태였다.
현재 목장토성은 포승국가공단 건설로 곡교마을 주변에 남아있던 토성들이 거의 완전하게 유실되었으며, 곡교마을 앞 구릉지역의 밭쪽에 남아있던 약 34m 가량의 토성(土城)만이 공단(工團) 내 놀이터에 이전 복원하였으나 형식만 그럴 듯 할 뿐 원형과는 거리가 멀다. 능선을 따라 당두마을까지 이어졌던 토성(土城)도 공단건설 이전부터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상당부분 유실되었는데, 공단건설 후 도로확장 및 주변 정리사업 과정에서 거의 사라졌다.
경기도 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를 토대로 토성(土城)이 유실되기 전 상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정리 목장토성은 본래 옛 곡교마을 앞 구릉지역에서 시작하여 동북쪽 구릉을 타고 당두마을까지 이어졌다가, ㄱ자 형으로 꺾여져 남양호 쪽 바다와 인접되게 연결되었다. 옛 곡교 마을 앞 밭 지역에 있던 토성은 성벽 내 외부가 모두 1.8m였으며, 곡교마을 동북쪽 능선을 따라 이어졌던 토성(土城)은 내부가 1.8m, 외부가 4m였다. 특히 외부는 능선 남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성(築城)되어서 실제 높이보다 크고 높다랗게 보이도록 한 점이 특징이었다. 옛 곡교마을 동북쪽 논을 지나 시작되는 구릉지역에는 약 110m 가량의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었으나 이것도 최근에 거의 유실되었다.
(9)무봉산성
*위치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 1리
1번 국도를 따라 송탄에서 오산방향으로 가다가 하북 삼거리 육교 밑으로 우회전하면 진위면 봉남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달리면 진위면 소재지가 있는 봉남리가 나오고 좀 더 가면 진위향교와 만기사 입구가 나온다. 만기사와 평택시 청소년 수련장 입구를 지나면 막다른 좌회전 길이 2개가 나오는데, 첫 번째 길에서 좌회전하여 곧장 들어가면 좌측에 무봉산을 끼고 자리잡은 동천 1리가 나온다. 동천 1리 마을 좌측의 동천제(東泉濟)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능선을 따라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무봉산 정상부(해발 208.6m)이다.
무봉산은 조선 전기 만의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어서 정상부에 오르면 서남쪽으로 양성의 천덕산이 조망되고, 서쪽으로는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지났던 1번 국도가 보인다. 무봉산 자락 남쪽 끝 지점에는 진위현의 치소(治所)였던 봉남리가 있고 봉남리 앞으로는 조선시대 장호천(長好川)이라고 불렀던 진위천이 흐른다. 동쪽은 용인시의 경계이며, 북쪽으로 오산시의 경계여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이다..
산성(山城)은 무봉산의 9부 능선에 동서로 긴 타원형이며, 성벽의 둘레는 약 320m이다. 성벽의 재질은 석성(石城)이며, 축성(築城)방식은 태뫼식이다. 성벽은 남벽과 서벽이 유실되어 성벽의 어깨선만 남아있다. 북벽과 남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며 뒷채움석이 노출되어 토루의 내부는 돌로 쌓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동벽은 외벽이 3m-4.5m이며 내벽은 2m 내외이다. 또 안쪽으로는 높이 2m, 너비 3-4m의 회곽도를 설치하였다.
성벽에 시설된 구조물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으며, 정상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이 장대지가 아닌가 추정된다. 샘의 흔적도 보이지 않아, 음료는 계곡이나 서사면의 암반부근의 물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으로의 진입로는 동천리와 구 가곡(가야실)에서 서벽을 따라 오르는 길이 있고, 동벽과 북벽 쪽에는 능선 따라 오르는 길이 있다. 추정건물지는 동벽내부와 서벽 능선의 평탄지대로 추정된다. 음료수구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무봉산성과 같은 작은산성(山城)은 장기 농성을 위한 것이 아니어서 필요에 따라 성밖의 샘과, 주변 계곡 물을 이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 안으로 통하는 진입로는 동천1리와 구가곡 마을에서 서벽과 동벽, 북벽에 연결된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판단할 때 무봉산성은 진위현의 주산으로서 유사시에 병력을 확보하여 단기적인 농성(籠城)을 하였던 산성(山城)이라고 할 수 있다.
(10)봉남리 산성(山城)
*위치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견산리, 동천리
송탄에서 오산방향으로 진행하다가 1번 국도 하북 삼거리 육교 밑에서 우회전 한 뒤 직진하다가, 한국야쿠르트 공장 앞에서 좌회전해서 나들이 화장품 공장 옆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어 약 1백 미터쯤 진행하면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이 곳에서 좌측으로 난 비교적 넓은 산길로 접어들어 우측으로 산을 깊숙이 깎아 터를 닦은 나들이화장품 연구소 부지를 바라보며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산 정상부 능선의 등산로 옆에 작은 밭이 보인다. 이 곳에서 동남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 아래쪽에 컨테이너를 이어 붙인 진위사라는 절이 나오고, 능선을 따라 직진하면 봉남리산성이 나온다.
봉남리 산성은 각종 건설공사로 훼손이 심하여 산성(山城)의 전체 모습이나 시설물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현재 확인 가능한 구간은 진위사 뒷 봉우리(해발 81m)의 북벽 1치성(雉城)을 중심으로 동서방향으로 진행하는 350-400m의 토루(土壘)이다. 이 토루(土壘)는 봉남리 아곡마을에서 가야실(가곡리)로 넘어가는 소로길에 의해 끊어져 있는데, 이 곳이 북문지(北門址)로 추정된다. 북문지 서쪽 벽은 개구부 형태를 띄고 있으며, 동쪽 벽은 역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북문지가 있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토루(土壘)는 두 번째 봉우리(해발 128.8m)의 북벽 2치성(雉城)과 연결된다. 이 구간의 토루(土壘)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토루 위에는 교통호와 참호가 있다. 북벽 2치성에서 동서방향으로 약 800m 가량 토루가 진행되며, 북사면 쪽으로는 밤나무단지와 민묘가 있다. 토루는 봉우리에 민묘가 잇는 세 번째 봉우리(해발 127.9m) 부근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북벽 2치성(雉城)에서 남쪽으로 진행하던 토루(土壘)는 아곡마을 산성과 연결된 후 사라진다.
성벽(城壁)은 북벽 1치성(雉城) 부근이 외벽 높이 5-7m이며, 북문지가 있는 지점에서는 토루(土壘) 너비 3-3.5m, 외벽높이 6-7m, 내벽 높이 1-2.5m이다. 북벽 2치성에서 동서방향으로 진행하는토루의 높이는 5-8m미터로 편차가 있다. 건물지는 확실하게 조사도지는 않았지만 성(城)의 구조로 볼 때 능선의 평탄지대나 성벽 안쪽의 평탄지대에 있엇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 지점에서 토기나 기와편이 다수 출토된다. 봉남리 산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북벽의 잔존상태만 양호할 뿐 동벽, 서벽, 남벽은 형태가 희미하게나 파괴되어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며, 축성시기도 모호하지만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1)봉남리 아곡마을 산성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봉남리 아곡마을 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성(築城)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山城)이다. 평택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수원, 오산방면으로 진행하다 하북 3거리에서 봉남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진위면 면(面) 소재지가 나온다. 이 곳에서 진위면사무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좌회전하여 동부마을(옥거리)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마을 뒷산 입구에 이르면 원각사라는 작은 절이 나온다. 이 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봉남3리 아곡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나오고, 고개마루에서 좌측으로 난 산길로 올라서면 마을 뒷쪽의 산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 이 봉우리 5부능선 쯤에는 갈래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무봉산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봉남리 당집으로 가는 길이다. 이 곳에서 당집방향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 아곡마을 산성(山城)이 나온다.
산성(山城)의 모양은 타원형으로 산 정상부를 둘러서 축성(築城)한 퇴뫼식 산성이다. 성벽(城壁)의 둘레는 약 180m이며, 외벽의 높이는 약 1.5-2.2m이다. 잔체적으로 성벽은 석재 반출과 민묘조성 등으로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를 측정하기 어렵다. 아곡마을 성(城) 주변에서 수습되는 토기류나 기와, 자기편이 조선시대의 것이고 석성(石城)이어서 조선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하지만, 성(城)의 규모가 작고 형태가 퇴뫼식 산성(山城)인 점으로 미루어 속단하기는 어렵다.
(12)무성산성(武城山城)
*위치 :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옥길리, 후사리 산48번지 일대
평택에서 포승면 만호리 방향으로 향하는 38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안중오거리를 지나자마자 첫 번째 작은 신호등 앞에서 우회전하면 덕우리와 옥길리 방향으로 가는 길 두 개가 나온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길을 따라(두 번째 길로 진입해도 상관없음) 자동차로 5분쯤 올라가면 덕우리 원덕우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옥길리 방향으로 작은 능선을 넘어 직진하면 옥길리 신기(새터)마을이 나오고, 여기에서 녹장원 청소년수련원과 오금마을로 넘어가는 산 능선에 올라서면, 서북쪽으로 이동통신 기지국 송신탑이 세워진 산 정상부가 보이는데, 이 산이 무성산(武城山, 해발 104.7m)이다. 산성(山城)의 형태는 토축(土築)의 퇴뫼식 산성으로, 이동통신기지국을 건설할 때 만들어놓은 폭 2m 정도의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이동통신기지국 주변 9부 능선에 있다.
무성산성에 관한 기록은 1942년 일제가 편찬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 나타난다. 1977년에 편찬한 문화유적 총람에는 "이 일대는 자미산, 피라산이 남쪽으로 연결되는데 위치하고 있으며 속칭 퇴미산이라 부르는 산정(山頂)에 있다. 높이 약 4m, 폭 3m, 주위 800m의 이 성지(城址)는 조선 초기 임경업 장군이 자미산성 쌓기 내기를 한 전설과 연관된 성(城)으로 전해질 뿐 확실한 연혁이나 사적은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무성산성은 축성 연대나, 축성 목적 등이 분명하지 않으며, 임경업 장군 전설 등으로만 존재가 전해지던 산성(山城)이었다.
무성산은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여서 남쪽 덕우리 원덕우 마을 뒤의 쿵쿵재산과 자미산, 비파산으로 이어진다. 성(城)의 모양은 남북이 길쭉한 장타원형이며, 서쪽은 돌출되어 “ㅓ"자 형태를 띄고 있다. 성벽(城壁)의 동, 남, 북벽은 산 정상부를 감싸며 축조된 퇴뫼식이지만, 서벽(西壁)은 계곡을 가로질러 축성되어 포곡식과 퇴뫼식이 혼용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경기도 박물관의 발굴조사(1999) 결과 성내의 총 면적은 5,650㎡이고 둘레는 547m임이 밝혀졌다. 또 남북의 길이는 157m이고 동서의 길이는 77m이었다. 성내의 시설물은 문지(門址) 2개소, 치성(雉城) 2개소, 장대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추정, 건물지 6개소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의 축성(築城) 목적은 해양과 인접한 지형 때문에,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간척사업이 있기 전만 해도 무성산 서남쪽 옥길리 신기마을 앞 해망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무성산 남쪽방면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중면 학현리에도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이와 같은 지형 조건 때문에 해양에서 내륙으로 상륙하는 왜적의 방비를 위해서는 이 위치에 산성을 축조해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무성산 동쪽 용성현은 고려 초까지만 해도 독립된 현(縣)으로서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어서 군사적 방비가 크게 요구되던 지역이었다.
산성(山城)은 무성산 외에도 인접지역으로서 산맥으로 연결된 덕우리의 자미산과 비파산 그리고 용성리 방면인 설창마을과 강길마을에도 축조되었는데, 이들 산성을 연결하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서쪽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왜적들을 방비하기에 좋은 방어망이 구축됨을 판단할 수 있다.
무성산성의 성벽(城壁)은 동,남,북벽이 능선을 따라 경사면을 이용하였고 서벽은 계곡을 가로질러 축조된 형태이다. 축성양식은 협축식(夾築式)으로 동벽의 내벽 중간부에 유단시설이 남아있다. 현재는 예비군 참호와 교통호가 곳곳에 조성되어 성벽 곳곳이 파괴되었고, 이동통신 기지국과 철탑 등으로 약 45m 가량이 파괴되었다. 남벽의 동편은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형태와 주변 지형으로 보아서 출입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에 이동통신 기지국이 있다.
남서 회절부 옥길리 신기마을로 내려가는 소로를 돌면 계곡을 가로질러 서벽(西壁)이 나온다. 서벽은 서벽의 남쪽에는 서문지가 있으며, 이 지역의 해발고도가 가장 낳다 서문지에는 페탕이어를 이용하여 참호를 쌓아서 원래의 형태가 크게 변형되어 있다. 북벽은 전체적인 모양이 북쪽으로 돌출된 ∩자 형인데, 이 곳도 토루의 중앙부에 페타이어를 이용한 교통호가 조성되었다. 무성산 정상부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동벽은 중앙부근에서 계곡부가 성밖으로 빠지고 있다. 북동 회절부에서 남동쪽으로 뻗던 산성이 무성산 동쪽 계곡과 만나는 지점에서 동문지가 조성되었는데, 이 곳도 폐타이어를 이용하여 참호를 조성하여 원형이 크게 파괴되었다. 시설(施設)지는 문지(門址)와 치성(雉城) 등 시설지가 있었지만 교통호와 참호조성으로 크게 파괴되어 정확한 확인이 어렵고, 건물지나 유구 등도 위치는 대략적으로 확인되지만 민묘조성으로 정확한 조사가 불가능하다.
성벽의 너비는 상단이 남벽은 1.5-2m, 서벽은 1-1.5m, 북벽은 1.5-2.5m, 동벽은 1.5-2m로서 전체적으로 2m내외이다. 외벽 높이는 남벽 7-9m, 서벽 6-7m, 북벽 4-6m, 동벽 5-7m이다. 내벽 높이는 대체로 1.5-3m 내외이며 회곽도가 개설되어 있다. 성벽의 해발 고도는 전체적으로 평균 100m내 외를 유지하고 있다.
13)자미산성(慈美山城)
자미산성은 행정구역으로 평택시 안중면 덕우리 산 77번지 일대에 있는 산성(山城)으로 삼국시대에 최초로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보수되어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는 성(城)이다. 이 산성은 자미산(재미산, 해발 110.8m) 정상부 주위를 토축(土築)한 내성(內城)과 7-8부능선을 따라 석축(石築)한 외성(外城) 등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내(內), 외성(外城)의 관계는, 본래 안쪽에 토성을 먼저 축성하였으나 후대에 필요에 의해서 석축(石築)으로 외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충남 한산의 건지산성처럼 삼국시대에 군사적 목적과 축성기술의 한계로 인하여 퇴뫼식으로 토성(土城)을 쌓았다가, 후대에 축성기술이 발달하고 군사적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포곡식 형태로 석성(石城)을 축성한 경우들이 그것이다.
자미산성은 일제가 작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처음 나타난다. 이 자료에는 “토루(土壘) 주위 약 300간이 붕괴되어 명확하지 않으나 산의 사면을 삭토하여 이곳에 토벽을 붙인 듯하며 자미산성지(慈美山城址)라고 한다”고 되었으며, 1977년에 편찬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성(城)의 존재를 밝히면서 원형으로 둘레가 약 150m라고 하였다.
자미산성의 지리적 위치는 북쪽으로 퉁퉁재산과 무성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파산이 위치하고 있다. 또 동쪽으로는 용성리 강길마을이 있고, 남동쪽으로는 용성리 설창마을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덕우리 원덕우 마을이 있다. 자미산성 주위에는 북쪽의 무성산성, 동쪽의 강길마을성과 남동쪽의 용성리성(설창마을성), 남쪽의 비파산성 등 산성(山城)들이 밀집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자미산성으로가는 길은 크게 두 길이 있는데, 하나는 안중오거리에서 포승방면으로 가는 38번 국도로 접어들어 약 200m쯤 진행하면 덕우리와 옥길리 방면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이 나온다. 그 중에서 첫 번째 길로 접어들어 직진하면 원덕우 마을에 닿게된다. 원덕우 마을을 지나면 옥길리 신기마을로 직진하는 길과 용성리 오뚜기식품 방면으로 우회전하는 길이 나오는데, 이 곳에서 우회전하여 200m쯤 가면 서낭고개라는 야트막한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 정상부에서 좌측에 있는 산이 자미산이고 우측에 있는 산이 비파산이다. 또 다른 길은 발안에서 안중으로 내려오는 39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다가 청북면과 안중면의 경계를 지나면 용성리 오뚜기식물 공장이 나오는데, 이 공장의 북쪽방향에 있는 길로 우회전하여 포장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면 덕우리로 넘어가는 서낭고개가 나온다. 서낭고개는 일명 비파고개라고도 불리는데, 서낭고개 정상부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자미산성 남동회절부를 지나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자미산성의 실측 길이는 남북이 125m, 동서가 167m, 성벽의 둘레가 582m이다. 또 각 구간별로는 남벽 136m, 서벽 153m, 북벽 157m, 동벽 136m, 이다. 성 내부에는 문지(門址, 추정) 2개소, 치성(雉城) 3개소, 건물지 9개소, 수구지(水口址, 추정) 1개소가 있다.
성벽(城壁)은 정상부 7-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남벽은 자미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2개의 계곡부를 가로질러 해발 85-94m 지점에 축성(築城)되었는데, 남동회절부 안쪽으로 민묘가 조성된데다 대부분 훼손이 심해서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서벽(西壁)은 해발 92-100m 지점에 축성(築城)되었는데, 성벽은 남아있지 않으나 서쪽 계곡을 막아 쌓은 중간지점에는 면석과 뒷채움석이 무너진 체로 상당량 남아있다. 서벽은 전체적으로 남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오르게 되어있으며, 이 지점이 바다를 앞에 두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북벽은 쿵쿵재산을 거쳐 무성산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에서 동서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북서회절부에는 치성(雉城)이 설치되었고 북동쪽으로 진행하면서 점점 낮아지고 있다. 동벽은 해발고도가 82-85m로 가장 낮은 편에 속하며 중앙의 움푹 낮은 지형을 지나 활모양으로 남쪽방향으로 휘어져있다. 이 구간에는 민묘가 여러 기 있으며, 지형조건으로 볼 때 이 곳에 출입통로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지(門址)는 남벽과 동벽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나 주변 성벽의 훼손이 많아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치성(雉城)은 서벽, 북벽, 동벽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는 성안에 9개소의 평탄지가 발견되었고, 이 곳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층이 발견되었다.
성안에는 건물지가 상당히 양호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내성(內城)의 흔적들도 건물지와 중첩되어 외성(外城) 성벽을 따라 전개되고 있다. 경기도 박물관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외성(外城)의 석재(石材)들은 1970년대 제방공사를 위하여 반출하여 거의 없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덕우리 원덕우 마을 주민과 옥길리 신기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옥길리나 덕우리, 용성리 등 자미산 주변 지역의 산에서는 석재를 구할 수 있는 산이 없어서 가옥(家屋)의 건축이나 방구들을 놓을 때 자미산성이 석재들을 이용하였는데, 그 때문에 석재들이 대부분 없어졌다고 하였다. 특히 원덕우 마을 김태성 씨(72세)의 증언에 의하면 젊은 시절 자미산에서 나무도 하고 석재도 구해왔다고 하는데, 그 때만 해도 성벽이 어른 키보다도 높게 남아있었으며, 동북쪽 부근에는 성문이 남아있었고, 성문자리 위에는 큰 대못이 박혀있어서 어른들이 성문을 달았던 자리라고 일러주었다고 하였다. 또 같은 마을 **** 씨( 세)는 자미산에 대한 전설을 증언하였다. 이 분에 의하면 자미산 정상부에는 백제시대 왕릉이 있었으며, 성(城)은 이 왕릉을 지키기 위하여 쌓았다고 하였다. 또 병사들이 말을 타고 자미산성을 지켰는데, 그 위용이 무서워서 일반인들은 접근을 못했었다고 전하였다.
자미산성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축성(築城) 재료가 주변지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석재(石材)라는 점이다. 석재(石材)로 성(城)을 축성하려면 먼 거리에서 석재를 운반해야 하므로 많은 노역(勞役)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 자미산성의 축성에 대한 전설로 임경업 장군 전설이 전해 온다던가, 백제 왕릉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 등은 이 성(城)의 축성이 대단한 사건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평택관방유적 187쪽 자미산성 현황도 스캔받을 것
14)비파산성(琵琶山城)
비파산성은 안중면 용성리 설창마을과 덕우리 원덕우마을 사이의 비파산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축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토축(土築) 산성(山城)이다. 이 산성(山城)에 대하여 가장 먼저 소개한 문헌은 일제가 작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인데, 이 자료에 의하면 “토루(土壘) 주위는 약 700간(間)으로 토루(土壘)가 확실한 곳은 약 300간(間)이며 높이는 약 9척(尺)으로 용성현(龍城縣)지라 한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1977년에 편찬된 문화유적총람에도 “비파산성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용성리 성지(城址) 조(條)에 들어가 있는데 ... 높이 8m, 폭 3m, 길이 90m의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으나 1962년 마을에서 제방공사를 하였다”라고 만 쓰여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8-1999년 경기도박물관 조사팀에 의해 조사 확인되었다.
비파산성은 평택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안중방면으로 가다가, 안중오거리에서 청북면과 발안방면으로 향하는 39번 국도를 따라 우회전한다. 그러다가 용성리 청룡마을을 지나 강길마을과 오뚜기식품 공장 못미처에서 길 아래로 내려가 굴다리를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설창마을 입구라는 팻말이 있다. 팻말을 보고 길을 따라 들어가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용성3리 설창마을이 나오는데, 마을로 들어가기 전 고갯마루에서 우측으로 비스듬히 직진하는 비포장 길을 따라 올라가면 비파산성의 동남벽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 산성의 지형적인 위치는 동쪽으로 차령산맥이 지나가고 맑은 날은 평택시와 오산시가 조망되며, 남쪽으로는 충남 아산시와 천안시 주변지역이, 서쪽으로는 충남 당진군과 서해바다가 조망되고, 북쪽으로는 화성군 일대가 조망된다. 또한 20세기 들어 간척사업이 있기 전만 해도 안중면 학현리, 성해리, 옥길리 신기마을 앞까지 해수(海水)가 유입되어, 평화시기에는 어업이 발달하였으나 고려말과 같은 혼란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고려 공민왕 때는 대규모 왜구들이 3차례나 용성현(용성리)에 출몰하여 이 지역을 황폐화시키므로 인하여 군사적 중요성이 크게 대두하였다. 비파산성은 이와 같은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나, 고려말에 크게 중수되어 주변지역의 무성산성, 자미산성, 용성리성, 강길마을 성(城)과 함께 군사적 방어체제를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산성은 비파산 정상부(해발 102.2m)와 여기에서 남쪽으로 뻗은 봉우리를 지나 남동쪽으로 설창마을이 있는 용성리 뒷골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비파산 정상부로 올라가는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城壁)은 남북의 길이가 375m, 동서의 길이가 499m이며, 각 성벽 구간별 길이는 남벽 339m, 서벽 430m, 북벽 520m, 동벽 333m이고, 전체 길이는 1622m이다. 시설물로는 문지(門址) 5개소, 치성(雉城) 4개소, 건물지 14개소, 음료(飮料)유구 5개소 등이다.
이 가운데 서벽(西壁)은 비파산 정상부의 주능선을 따라 축성(築城)되다가 설창마을의 계곡부를 향해 비스듬하게 내려가 해발고도의 급격한 차이(약 44m)를 보인다. 이 구간에서는 남벽(南壁)의 서편에서 유실된 성벽이 남북방향으로 뻗은 주능선 말단부에 해당하는 임경업 장군 바위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곳에는 성벽을 삭토하여조성한 민묘가 있다. 서벽의 성벽은 대부분 편축식으로 축성(築城)되었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협축식도 나타난다. 단면으로 성벽을 살펴보면 중간부에 회곽도를 두고 이중단이 형성된 모습을 하고 잇다. 이 것은 성벽 안쪽으로 회곽도와 저수시설을 시설하였다는 흔적이다. 그래서 떨어져서 보면 셩벽과 회곽도가 이중구조를 갖고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남벽은 용성리 뒷골 남동회절부에서 시작되어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며 비파산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축성방식은 협축식이며, 내벽의 높이는 0.2m-3.4m로 편차가 심하다. 나벽 중간지점에는 설창마을 당집이 잇으며 조금 더 오르면 절앞골로 내려가는 남문지(南門址)가 있다. 남문지를 지나면 민묘개설과 소로개설로 169m의 성벽이 유실되었다.
북벽(北壁)은 비파산 정상부에서 동서방향의 능선을 따라 비파산 하단부까지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가고 있다. 외벽의 높이는 2.8m-10.9이며, 치성이 2개가 설치되었다. 첫 번째 치성 안쪽의 북벽 동편부에는 북문지(北門址)가 있다. 이 북문지는 치성 2개가 양쪽에서 보호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두번째 축성된 북치성 밖 3m 아래에 반월형 유단시설이 있으며 하단부에는 북문지(北門址)가 하나 더 있다. 하단부로 올 수 록 성벽은 약 10m를 유지하며 높게 보존되었다.
동벽(東壁)은 비파산 동쪽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가 설창마을 뒷골 계곡을 막아 축성(築城)하였다. 동벽이 축성된 곳은 비파산성에서 가장 낮은 지형에 속한다. 축성방식은 판축법인데, 판축토 내부 적갈색 점질토층에서는 고려시대 토기가 수습되었다. 또한 이 곳에서 남서쪽으로 5m 거리에는 98년에 수해로 무너진 제방이 있는데 이 곳에서 “건덕삼년(乾德三年)이라고 적힌 기와가 수습되었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이 산성의 축성시기와 보축시기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동문지(東門址)는 북동회절부를 돌아 나온 성벽이 남쪽을 향해 진행되는 지점에있는데, 문지(門址)가 있는 자리는 성안에서 용성리 쇠주골로 나가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동벽은 전체 333m 중 92m가 제방공사로 파괴되었다. 장대지와 음료 유구의 위치는 서벽과 북벽의 서쪽편 안과 밖에 3개가 있다. 음료유구는 회곽도 안쪽으로 수로(水路)를 만들고 길이 1m, 너비 1.5-2m, 깊이 1-1.5m로 만들었는데, 지대가 가장 높은 서벽부에 위치하였다. 건물지는 모두 14개소가 발견되었다.
* 361쪽 현황도 스캔할 것
15.용성리성(龍城里城)
용성리성은 평택시 안중면 용성3리 468번지에 있다. 문헌상으로 이 성이 소개된 것은 1942년 일제가 작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이다. 이 자료에는 “토루(土壘) 주위 약 260간(間)이고 높이는 1간(間)에서 2간(間)이며 폭이 넓은 곳은 5간(間)인데, 용성현시대의 향교지라고 전한다”고 기록되었다. 이후 이 성(城)은 “용성리 향교지 토성”이라고 불렸으나 1998-9년 경기도박물관의 조사가 있기까지 정확한 확인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용성리성은 동쪽으로 약 3백미터 지점에 39번 국도가 지나가고 그 앞으로 용성리 강길마을성이 있다. 또 성(城)의 동편으로는 용성3리 설창마을이 위치해 있으며, 설창마을 서쪽과 서북쪽으로는 비파산성과 자미산성이 있고, 자미산성 북쪽에는 무성산성이 있다. 이 지역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많았던 지역이고 바다와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다.
용성리성으로 가는 길은 평택에서 안중으로 38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안중 오거리에서 청북면과 발안으로 가는 39번 국도로 우회전하여 3km정도 직진하면 용성1리 청룡마을이 나온다. 청룡마을을 지나면 강길마을 못미처 큰 길 아래로 내려가는 교차로가 나오고, 길 아래 작은 굴다리에서 좌회전하면 용성3리 설창마을 입구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안가서 옥길정수장이 나오고, 정수장을 지나면 설창마을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마루가 나온다. 용성리성은 고개마루 좌측의 작은 구릉지대에 있다.
용성리 성(城)은 해발 30-42m의 낮은 구릉지대에 축성된 토축(土築)된 평지성이다. 성의 모양은 남북이 길고 동서길이가 짧은 사다리꼴 모양이다. 남북의 길이는 128m이고, 동서의 길이는 87m이며, 성벽(城壁)의 길이는 서벽 102m, 남벽 107m, 북벽 96m, 동벽 144m이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남벽(南壁)은 남북과 동서방향으로 뻗어 가는 능선을 가로막아 축성하였으며, 성안 평탄지대에 조성된 경작지로 인하여 일부구간이 파괴되었다. 파괴된 지점은 남벽에서 가장 낮은 지형인데, 이 곳에 수구지(水口址)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벽의 상단너비는 1-2.5m이며, 외벽 높이는 2.5-6m, 내벽 높이는 0.5-4m정도이다. 서벽(西壁)은 중간에 민묘조성으로 파괴되었으나 민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고 있어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구간에는 치(雉)나 적대(敵臺)와 같은 시설물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며,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잇는 소로가 개설되었다. 서벽(西壁)의 상단 너비는 1-2m이며, 외벽 높이는 3.5-6m, 내벽은 0.5-1.5m이다. 북벽(北壁)은 치성(雉城) 1개소와 문지(門址) 1개소가 시설되어있다. 북치성과 접한 동쪽에는 북문지가 있으며, 위쪽에는 예비군 참호가 있다. 북벽의 상단 너비는 1-2m이며, 외벽은 4-7m, 내벽은 1-2m이다. 성벽 밖으로는 너비 5-7m, 깊이 1-1.5m의 외황이 시설되었다. 동벽(東壁)은 가장 높은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으며 보존상태도 가장 좋은 편이다. 그러나 경작지 조성 등으로 성벽의 북측편의 토루(土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토루 곳곳이 함몰되어있다. 동문지는 옥길정수장 뒤쪽에 있으며, 치성(雉城)은 동쪽으로 약간 돌출된 지점에 설치하였다. 동벽의 상단너비는 1-1.5m이며, 외벽 3.5-5m, 내벽 0.5-2m정도이다. 성벽 밖으로는 외황이 설치되었다.
성안은 비스듬히 낮은 평탄지대여서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성안의 건물지는 5곳이 확인되며, 치성(雉城)도 5개가 설치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남벽 앞쪽을 성머리, 뒤쪽을 성안이라고 불렀으며, 설창마을 주변에는 그와 같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어, 이 지역에서 성(城)의 축조가 많았음을 전해준다.
(15) 용성리 강길마을 성터(城址)
*위치 : 안중면 용성2리 강길마을
평택에서 만호리로 가는 38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안중 오거리에서 청북, 발안방면으로 가는 39번 국도로 우회전한 뒤 3.6km 북진하면 오뚜기식품 공장 못미처 길 우측에 강길마을이 있다.
성벽(城壁)은 마을 서북방향에서 북쪽의 산 능선으로 오르는 농경로와 평행하게 진행되는 토축(土築)의 성(城)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90m가 잔존한다고 하는데, 현재는 북서쪽의 경사면이 평평하게 깎여서 농경지화 하였고 나머지 토루(土壘)들도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 성벽(城壁)의 흔적을 거의 식별하기 어렵다. 특히 길을 건너 남서쪽으로 진행하던 약 30m 가량의 토루(土壘)는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토루(土壘) 외벽의 높이는 1.5-2m이며, 내벽은 1-2m, 상단너비는 1m, 하단너비는 3-4m 가량이다. 성벽 내부의 경사지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북쪽이 경작지에서는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전체적인 성벽의 진행방향을 볼 때 강길마을 성터는 강길마을을 타원형으로 감싸는 형태였으리라 판단된다.
강길마을 성터(城址) 주변지역은 통일신라의 거성현(車城縣), 고려의 용성현(龍城縣) 지역으로 남서쪽 설창마을의 용성리성을 비롯하여 서쪽방향에 무성산성, 비파산성, 자미산성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지점에 위치하였고, 용성현의 치소였다고 추정되는 설창마을 부근의 북동쪽 방향을 방어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이 성터는 주변의 성(城)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해양을 통하여 내륙으로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되었다고 판단되며, 특히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로 용성현 지역이 크게 피해를 입었던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큰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생각된다.
(16)방축리 성터(城址)
*위치 ; 고덕면 방축2리(원방축) 방죽안 마을
방축리는 평택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안중방면으로 가다가 동고리 원고마을 부근에서 방축리로 들어가는 길로 우회전하여 3, 4분 정도 직진하면 있다. 방축리 성터는 평택군지(平澤郡誌)에 “원방축 마을 뒤쪽에 마을을 둘러 축성된 토성(土城)이었으나 택지개발과 소나무를 심어서 지금은 흔적을 알아볼 수 없다“고 소개되었으나 정확한 위치와 형태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었던 사명당이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방축2리의 서천사 부근에 승병을 주둔하고, 방축리 부근 지제동 울성마을의 태미산성과 방축리 산성을 쌓았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어서 성(城)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또 방축리 뒷산너머 여염1리를 성두(城頭-성머리)라고 부르는 점도 이 부근에 성(城)이 존재했음을 확신시키는 근거가 된다.
(17)동령마을 성터(城址)
*위치 ;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
동령마을 성터는 『송탄시사』에만 소개되는 성터이다. 동령마을이 있는 이충동 지역은 삼국시대에 송장부곡, 고려 초에는 송장현, 조선 세종(1424년) 때부터는 송장면이 되어 진위현에 속하게 된 지역이다. 동령마을은 주변의 지형으로 볼 때 치소(治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성(城)이 있었다면 치소(治所)와 관련된 읍성(邑城)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적으로 성(城)과 같은 관방유적의 경우 향촌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국가시설이어서, 성(城)과 성터는 유실되어도 지명(地名)이나 전설로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동령마을에는 마을 입구를 “성물백이”라고 부르고 송탄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성현(城峴)”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성물백이라는 말은 “성문 밖”이라는 뜻이고, 성현(城峴)은 우리말로 “성 고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地名)으로 볼 때 동령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城)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18)백봉리 산성(山城)
*위치 : 평택시 청북면 백봉 1리 원백봉 마을 뒷산
*시기 : 삼국시대 백제산성
백봉리 산성은 청북면 백봉 1리에 위치한 백제시대 산성(山城)이다. 백봉리 산성으로 가는 길은 다음과 같다. 평택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안중방면으로 향하다가 오성면 숙성리 못미처에서 숙성리 외곽으로 진행하는 4차선 도로와 숙성리로 들어가는 구 도로 그리고 청북으로 향하는 2차선 지방도가 갈라지는 4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청북방향으로 길을 잡아 곧장 달리면 양교리 원양교 마을 못미처에 원 백봉마을로 들어가는 마을 진입로가 나온다. 약 100미터쯤 진행하면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청북에서 오성면 간 4차선 지방도 밑을 지나는 굴다리를 지나 백봉교를 건너면 원백봉 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성은 원 백봉마을 뒷산(해발 66m)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백봉리 산성의 위치는 지리적으로 군사적 요충에 속한다. 1970년대 초 아산만 방조제 건설과 근대 이후 간척사업이 있기 전만 하여도 백봉리는 율북리, 어연리, 백봉리로 이어진 돌출지형이었으며, 동쪽으로는 진위천, 서쪽으로는 관리천이 흘렀다. 진위천은 아산만에서 올라온 바닷물이 마산리 부근까지 역류하여 백봉리 주변에는 넓은 습지를 형성하였다. 또한 진위천을 이용한 조운(漕運)이 발달하여 동북쪽으로 약 1.5km 위쪽에는 동청나루가 발달하였고, 진위면 마산리 부근까지 상선(商船)과 어선(漁船)이 드나들었다. 이와 같은 자연지리적 조건은 백봉산성의 주변에 습지와 함께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는 요인이 되었다. 또 백봉산성은 양교리에 있는 오봉산을 제외하고는 사방 1km 안에는 높은 산이 없어서 주변이 가장 잘 조망되는 위치이다. 백봉산성 정상에 서서 바라보면 남쪽으로는 오성들을 건너 안성천이 뚜렷하게 바라다 보이고, 동쪽으로는 해창리와 좌교천 너머까지 잘 보인다. 또 서쪽으로는 용성리와 덕우리, 옥길리의 무성산성, 비파산성, 자미산성, 용성리성, 강길마을 성 등이 군사적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백봉산성의 위치는 평택의 서쪽지방에서 동쪽 내륙지방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되며, 해안에서 진위현으로 들어오는 수로(水路)를 방어하는데 필요한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산성의 축조(築造)는 용성리 지역의 산성들과 연계한 해안방어의 목적과 내륙 수로(水路)의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山城)은 원 백봉마을 뒷 쪽에서 올라야 한다. 원 백봉 마을을 지나 마을 뒤쪽으로 가면 민묘 2기가 있는데, 민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약 5분 정도 산을 오르면 정상부에 산성(山城)이 있다. 산성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테뫼식으로 축성한 토성(土城)이다. 모양은 동서 방향으로 약간 긴 장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둘레는 220m의 작은 규모이다. 성벽(城壁)의 축조방식은 편축식이며 높이는 평균 3-5m이고, 동청나루 방향으로 열려있다. 어연리와 율북리 방향으로 능선이 연결되어 있는 북벽과, 관리천이 내려다보이고 개활지가 형성된 서벽(西壁)이 다른 방향보다 높게 축성되었다. 유단시설은 동북쪽 모서리 방향에만 설치되었다. 이 위치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성벽이 교차되는 지점이어서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동벽(東壁) 아래는 진위천과 닿아 있어서 급경사를 이룬다. 남벽은 남동쪽으로 치우쳐 축성되었는데, 이와 같이 축성된 것은 군사적으로 진위천이 흐르는 동쪽이 군사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상부 서쪽은 고목 2그루와 바위가 노출되었는데 치석(雉石)한 흔적이 보인다. 정상부 평탄지대에는 민묘가 조성되어있고 인위적으로 변형된 곳이 많아 건물지는 찾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