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수필|신윤옥
한 봉지 10만 원
신윤옥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노인이 석연찮은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내 인사에 겨우 답하며 오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투를 슬그머니 숨기며 힐끔거린다. 나도 자꾸만 그의 손에 들린 봉투에 신경 쓰여 기웃댄다. 살포시 옆구리 터진 봉지 사이로 쓰레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노인은 나를 피하듯 총총거리며 비상구로 나간다. 웃음이 난다. 노인의 행동에서 2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오전 9시쯤이면 집을 나서 오후 5시쯤 돌아오셨다. 출근 도장을 찍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나가는 시간은 일정했다. 노인정에서 친구들과 바둑을 두고 어울려 식사하면 입맛도 좋고, 재미있다고 했다. 집에 있으면 갑갑하고, 며느리와 있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아버님 방 쓰레기통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몰래 지켜보다 현장을 잡았다. 아버님은 그 이후 인사 없이 조용한 외출을 했다.
조용한 외출이 이어질 때쯤, 아버님이 나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설거지 중이라 고무장갑을 낀 채 전화를 받았다. 구청에서 온 전화였다. 아버님의 성함을 대며 관계를 물었다. 쓰레기 불법 투기로 그곳에 잡혀 있다고 했다. 당장 오지 않으면 구속이나 벌금 100만 원이 부과된다며 퉁명스럽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던 설거지를 내팽개치고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지만, 택시를 타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전화 속의 그를 찾았다. 당장 오라고 엄포를 놓던 사람은 오히려 벌써 왔냐며 의아하게 쳐다봤다.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아버님을 찾았다. 아버님이 구속될 수도 있다는 말에 놀라 택시를 타고 왔다고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날 지켜보던 그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정하라며 물을 건넸다.
과태료 10만 원을 냈다. 비로소 그 직원은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경각심을 주지 않으면 이런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이해를 구했다.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교무실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아버님은 날 보더니 반가웠는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아버님, 오늘 며느님이 많이 놀랐나 봅니다.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직원의 말에 아버님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하고 구청을 나섰다.
“우예 내 이름을 알았는고? 우리 집 전화번호는 또 우째 알았고. 참 신기하제? 그라고 젊은이들 말 무시하면 안 된다고 구청 직원들에게 욕 마이 들어 무따. 니도 놀랐제? 이제 안 그럴 끼다. 너거 볼 낯이 없다.”
“약봉지에 적힌 이름으로 추적했더니 금정구에 아버님과 같은 성함 세 분이 나오더랍니다. 일일이 전화해서 확인했나 봐요.”
뒷짐 지고 천천히 걷는 아버님 뒤를 아무 말 없이 따라 걸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아버님이 날 보며 넋두리를 한참 동안 했다.
“에미야, 솔직하게 말해서 쓰레기를 돈 주고 버리는 것이 아깝고, 이해가 안 가는 기라. 그라고 노인정 노인들도 다 그렇게 버린다하고, 난 오늘 처음이다.”
후두암 수술로 목에 뚫어 둔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쇳소리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처음이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오늘 점심이나 사 주이소. 아이고, 생전 택시 안 타는 데 오늘 아버님 덕분에 택시도 탔네요. 원래 잘하다가 한 번 잘못하면 걸리는 거라예.”
따지고 보면 나도 공범인 셈이었다. 청소를 할 때 빈 쓰레기통을 보고도 넘어갔으니 할 말이 없었다. 시골에선 아무렇지 않게 태우던 쓰레기를 돈 주고 버린다는 것이 아깝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등바등 사는 자식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님의 도시생활 적응기를 한 봉지 10만원으로 시작했다.
“에미야, 애비한테는 말하지 말거라. 또 난리 난다. 그 성격에 가만있겠나? 내 다시는 안 그럴끼다.”
세상 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이 아들은 겁나는 모양이었다. 그 후 아버님은 내가 하면 안 된다는 말을 조금은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버님과 난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노인들이 뒷짐을 지고 봉투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본 내가 웃으며 그 날일을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데 남편이 알고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나한테 미안했던 일이 있었다며 말했단다. 쓰레기 한 봉지 10만 원 대가는 그 이상이었다.
옛일이 생각나 길을 가다 뒤돌아보게 한 날이다. 멀리 노인이 검은 봉지를 움켜고 기웃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잠시 눈을 피해 비상구로 몸을 숨겼을 그 순간 노인은 어떤 마음으로 내가 사라지기를 기다렸을까? 20여 년 전 아버님은 나를 기다리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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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옥|2018년 《한국산문》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이 있다.